#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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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7일 토요일
근 한 달 가까이를 휴일도 없이 잠을 설쳐가며, 양수리 세트장에서 촬영에 매달린 수빈은 오래간만에 휴식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깔끔하게 꾸며진 아파트 거실에서, 거하게 차려진 상 앞에 앉은 수빈이 부엌 쪽을 향해 소리 질렀다.
"형수님. 더 안 들고 오셔도 되겠는데요? 이러다 상다리가 부러지겠어요."
수빈의 말에 앞치마를 걸친 백성철 와이프가 부엌 밖으로 쪼르르 달려 나와 대답했다.
"아니에요.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백숙이 다 되어가요. 제가 금방 들고 갈게요."
백성철 와이프가 다시 부엌 쪽으로 쏙 들어가자, 건너편에 앉아 있던 백성철이 말했다.
"그냥 놔둬. 너 요즘 고생한다고 백숙을 꼭 먹여야 한다면서, 와이프가 어젯밤부터 난리도 아니었다."
"그래요? 잔뜩 먹고 가야 되겠군요. 근데.. 무슨 집들이를 저만 부릅니까? 자고로 집들이를 하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북적북적하는 맛이 있어야죠."
"이사를 멀리 간 게 아니잖아. 전에 살던 집에서 바로 옆 동으로 이사를 갔는데, 집들이한답시고 사람들을 어떻게 초대하냐? 장인, 장모랑 부모님 모시고 한번 하고, 너 불러서 한번 하는 걸로 결정했다."
"형수 힘들게 뭘 두 번씩이나 합니까? 전 굳이 안 부르셔도 되는데.. 근데 아파트 평수가 좀 넓어진 거 같은데요?"
"애도 있고 해서 24평에서 32평으로 옮겼어. 이게 다 수빈이 너 덕분이지. 그래서 인천이 엄마가 널 꼭 불러서 대접하고 싶다고 계속 노래를 불렀어. 다행히 촬영도 거의 다 끝나가고 오늘 하루 쉰다고 하니까 내가 초청을 한 거지. 근데.. 괜찮겠냐?"
"응? 뭐가요?"
"며칠 전 수요일에 열렸던 태종상 말이다. 지금 인터넷상에서 아주 난리야. 베니스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이 태종상 수상을 못했다고 발칵 뒤집혔더라."
"제가 그딴 걸 왜 신경 씁니까? 제가 상을 안 받겠다고 거부한 것도 아니잖아요."
"네가 참석을 안 한다고 하는 바람에 수상자 명단에서 완전히 빼버린 거잖아. 어지간하면 참석을 좀 하지 그랬냐?"
"사람이 바쁘다 보면 참석을 못 할 수도 있는 거죠. 그리고 형님도 아시다시피 수요일이면 정말 바쁠 때였잖아요? 세트촬영이 막바지라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고요. 그리고 제가 참석이 여의치 않으면 대리 수상을 하면 되는 건데.. 제가 직접 안 온다고 괘씸죄로 수상 목록에서 빼는 그쪽 작태가 더 웃기죠.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태종상이 예전부터 좀 권위적이었잖아. 원로들 입김이 워낙 강해서.."
"형님.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질 겁니다. 그리고.. 영화계에서 보면 제가 갑자기 굴러온 돌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 텃세가 있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겁니다."
그때 백성철 와이프가 압력솥을 통째로 들고 오고 있었다.
잠시 후 세 사람은 때마침 TV에서 방영하는 여왕들의 게임을 보며 백숙을 맛있게 뜯어 먹고 있었다.
"오늘 나오는 CF는 수빈이 네가 찍은 게 아니라며?"
"네. 지원팀장이랑 조명팀장이 찍은 작품이에요."
"두 사람이 연출하는 스타일이 차이가 많이 나나?"
"사람이 다른데 당연히 차이가 나죠. 지원팀장은 감각이 젊고 세련된 느낌이 나고, 조명팀장은 무난한 스타일이지만 디테일에 강하죠. 조명 쓰는 건 예술이고요. 보시면 차이를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때 백성철 와이프가 불쑥 물었다.
"도련님은 둘 중에 누가 더 좋아요?"
"글쎄요. 둘 다 자신만의 개성이 강해서.. 딱히 어느 작품이 좋다고 단정 지어서 말하기가 조심스럽네요."
"아이. 그거 말고요. 남은 여자가 두 명 있잖아요. 하이유와 김샛별 중에서 어떤 쪽이 더 좋으냐고요. 시청자 투표 때 도련님이 좋아하는 쪽을 찍으려고요."
수빈이 고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형수님. 제 애인을 뽑는 게 아닙니다. 최종적으로 저랑 같이 CF를 찍을 여주인공을 뽑는 거예요. 아무나 뽑으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굳이 뽑으면요?"
"굳이 뽑자면 전... "
수빈의 대답에 백성철 와이프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역시.. 도련님도 남자라 예쁜 여자를 좋아하시는구나."
"형수님. 둘 다 예뻐요."
"그래요? 제가 보기에는 도련님이 말한 분이 더 예쁜 거 같은데요?"
수빈이 못 들은 척 백숙을 열심히 뜯기 시작했다.
10월 28일 일요일
휴일인 일요일을 맞아 하루 종일 편집실에 처박힌 수빈은, 한 달 가까이 세트촬영장에서 촬영한 영상들을 차분하게 훑어보고 있었다. 일종의 러시 필름이라고 할수 있는 영상들을 모조리 다 살펴본 수빈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해. 추가 촬영은 필요 없겠군.'
머릿속으로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듯, 수빈이 빠르게 손을 놀리며 편집 작업을 시작했다.
10월 29일 월요일
근 한 달여 만에 개최되는 간부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상석에 앉은 수빈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식적으로 발표하겠습니다. 이번 신작 영화의 촬영 일정은 오늘부로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후반부 작업에 들어갈 겁니다."
촬영이 끝났다는 반가운 소식에, 기쁜 표정의 간부들이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치하하고 있었다. 수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동안 다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후반부 작업과 무관한 분들은 이제부터 단편 영화 제작 준비에 모든 힘을 쏟아주시길 바랍니다. 네 분의 감독 후보들께서는 자신과 함께 작업할 스태프들을 선정하셔서, 열흘 이내에 제게 리스트를 제출해 주세요. 미리 준비를 착실히 해 오신 걸로 아니까, 시간은 충분할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 잘 알겠습니다. 대표님.
"좋습니다. 11월 12일 월요일부터는 단편 영화 제작을 시작했으면 합니다. 제작 기간은 한 달을 드리겠습니다. 30분짜리 단편 영화를 캐스팅부터 시작해서 촬영, 편집, 후 작업까지.. 그 모든 걸 한 달 만에 다 끝내려면 정신없을 겁니다. 다들 정신 바짝 차리셔서, 남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완성해 주시길 바랍니다. 평가는 철저하게 작품을 감상한 관객들 손에 맡길 겁니다. 그 말인즉슨, 지나치게 대중성이 떨어지는 작품은 아무래도 불리하겠죠? 실험 정신이 투철하거나 독립 영화처럼 사회를 고발하는 내용의 작품들도 좋지만, 제가 원하는 건 어디까지나 흥행을 염두에 둔 작품들입니다. 아무쪼록 절충을 잘 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다들 알아들으셨죠?"
- 네. 이해했습니다. 대표님.
"오늘 회의는 간단하게 이걸로 끝마치겠습니다. 다들 그동안 힘드셨을 텐데.. 12일까지 휴식을 취하시면서 단편 영화 준비에 만전을 기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회의실을 나선 수빈은 백성철이 모는 밴을 타고 YK로 이동하였다.
오래간만에 YK에 들린 수빈은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사장실로 직행했다.
"촬영이 다 끝나서 이제 좀 한가하다며?"
박사장의 질문에 수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누가 그럽디까? 촬영 일정이 끝났다고 제가 한가할 리가 있겠습니까? 당장 이번 주에는 뮤지컬 음원 발표를 위한 녹음 작업을 끝마쳐야 합니다. 영화 편집 작업도 해야죠. CG 작업하는 거 감독해야죠. 단편 영화 제작하는 거 도와줘야죠. 제가 할 일이 태산입니다."
"그런가? 그럼 곤란한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갑자기 보자고 한 것도 수상하고.. 회사에 무슨 일 있습니까?"
"한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기획사에 무슨 일이 있겠나? 강이사 때문에 그러지."
"저요?"
"그래. 태종상 때문에 난리 난건 알고 있겠지? 그 문제 때문에 청와대 홈페이지에 국민 청원까지 올라가 있는 상태야. 태종상 폐지부터 시작해서 감사를 실시해라 심사위원들을 조사해라 등등.. 난리도 아니라고."
"뭐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쓰십니까? 솔직히 말해.. 관심 없습니다."
"강이사야 그렇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행여나 강이사가 이번 일로 국내 영화계에 환멸을 느낄까 봐 걱정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고. 사실.. 태종상은 영화계 원로랍시고 나이 먹은 꼰대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수상자를 선정하는 걸로 유명하지. 애니깽 사태라고 들어봤나?"
"어렴풋이는 알고 있습니다. 워낙 유명한 사태라서요."
"개봉조차 안 하고 편집도 덜된 영화에 최우수 작품상과 감독상을 주었지. 편집을 안 해서 영상 속에 붐 마이크가 그대로 보이는 작품이 최우수 작품상이라니.. 개가 웃을 일이지. 그리고.. 원래 태종상은 유료 상영을 한 작품들을 가지고 심사를 하는 걸세. 개봉도 안한 작품에 상을 준다는 건 한 마디로 룰을 어긴 거야. 말도 안 되는 거지. 더 가관이 뭔 줄 아나? 그때 시상식에 나온 영화계 원로들이 신진 감독과 배우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지. 우리가 있기에 너희들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거라고.. 전형적인 꼰대 발언이지. 그 바람에 난리가 났었네. 하도 비난이 심해지니까 요 근래 좀 잠잠하나 싶었는데.. 며칠 전 강이사 건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 또 터진 거지.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만.. 사설이 너무 기신데요?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뭔가요?"
"청룡 영화제."
"청룡 영화제요?"
"그래. 지금 태종상 뿐만 아니라 지나간 백상 예술대상까지 사람들이 비난을 하고 있네. 젊은 천재 감독을 시기해서 짓밟으려는 영화계의 계획적인 음모라고 말이야."
"뭐 올해 열린 백상에서 제가 상을 못 탄 게 사실이기는 하지만.. 시기상으로 제가 상을 받기가 좀 힘들지 않았습니까? 영화제 수상작이 며칠 만에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요. 빠르면 한 달 늦으면 석 달 전에 심사 작을 선정하는데.. 라이프 개봉 시기가 좀 애매하잖아요? 올해 열린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제가 상을 못 받은 것과 같은 거죠."
"대중들이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쓸 거 같은가? 백상과 태종상에서 강이사가 상을 못 탔다. 그 사실만으로 영화계 전체를 비난하고 있어. 태종상 사태 이후로, 시간이 지날수록 비난의 강도가 수그러들기는커녕 점점 더 강해지고 있네. 지금은 영화인 전체를 싸잡아서 욕하고 있는 실정일세."
"그래서 청룡 영화제입니까?"
"맞네. 영화계 관계자들이 하도 부탁을 해와서 말이야. 결국 내가 총대를 메게 되었지. 며칠 있으면 청룡 영화제 후보작 상영제가 시작되네. 11월 12일이라고 하더군. 그때 핸드프린팅 행사도 같이 열려. 본상 시상식은 11월 24일 토요일에 열린다고 하더군."
"그러니까.. 지금 저보고 상영제, 핸드프린팅 행사 그리고 본상 시상식까지 다 참석을 해달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맞아. 시상식이 끝나고 축하 리셉션까지.. 대중들에게 한국 영화계가 강이사를 왕따시키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는 거지. 태종상이야 뭐 어쩔 수 없더라도.. 청룡에는 부디 참석했으면 한다네. 자네가 바쁜건 알지 만, 어떻게 좀 안되겠나?"
의외로 별다른 고민도 없이, 수빈이 덤덤한 얼굴로 즉답했다.
"그러죠. 청룡 영화제 관련 행사는 제가 빠지지 않고 다 참석을 하겠습니다."
"응? 많이 바쁘다면서?"
"아무리 바빠도 제 목숨은 제가 챙겨야죠."
"그게 뭔 소린가?"
수빈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청룡 영화제 MC가 누군지 잊으셨습니까? 청룡의 여인이라고 불리는 김해수 누님입니다. 제가 빠진다고 하면.. 당장 쫓아와서 절 산 채로 잡아먹으려고 들 겁니다. 저도 살고는 봐야죠."
박사장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이런. 나나 다름 사람들이나.. 괜한 걱정을 하고 있었군."
"맞습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신 거죠.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맛있는 점심이나 사주세요."
"재벌 못지않게 돈이 많은 자네가 사야 하는거 아닌가?"
"사장이 이사에게 삥을 뜯으시게요?"
그 순간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