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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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을 구석진 곳으로 데려간 성강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강감독. 내가 강감독하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좀 나눴으면 하는데 말이야."
수빈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대충 짐작은 됩니다. 제가 대학을 어디로 갈 건가에 관련된 이야기죠?"
"맞아. 어떻게 알았나?"
"며칠 전에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어서요."
"응? 누구에게?"
"해수 선배님요."
"해수가? 설마.. 동극대로 가기로 벌써 약속이 다 된 거야?"
"아뇨. 그런 약속 따위는 하지 않았습니다만.."
말을 하던 수빈이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다들 제 진학 문제에 대해서 지나치게 관심이 많으시군요. 이런 일이 발생할까 봐 대학 진학한다는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었는데 말입니다."
"유명세를 치르는 건데 별수 있나? 그래도 이 정도면 조용한 편이야. 강감독 눈치 보느라 다들 물밑에서 조용조용 진행을 시켜서 덜 시끄러운 거라고. 아무 때나 연락해서 이런 말을 꺼내기에는 강감독의 위상이 너무 높지. 그나마 오늘은 강감독이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라 가능한 거고. 아무튼.. 수능이 이제 50일도 채 안 남았는데, 슬슬 결정을 해야 할거 아니야?"
"그렇긴 하죠. 근데.. 강호 형님은 어느 분에게 압력을 받고 오신 겁니까?"
"내 모교의 총장 그리고 박찬옥 감독이랑 봉순호에게서 부탁을 받았지."
"많이도 받으셨네요."
"그것도 나에게 부탁해온 사람들 중에 어중간한 것들은 다 빼고 말한 거야. 사람들이 강감독하고 가장 친한 사람이라고 하면 다들 나를 떠올리나 봐. 박감독과 봉감독도 다들 자기 학교 총장이나 선배들로부터 부탁을 받았을 거야."
"저 때문에 다들 고생이 많으시네요. 죄송합니다."
"에이.. 고생은 무슨.. 술 사주겠다고 얼굴 좀 보자는 사람들이 어찌 그리 많은지 원. 원님 덕에 나발 분다고, 내가 지금 딱 그짝이다. 강감독 덕분에 공술을 원 없이 먹고 있으니까 그런 소리는 안 해도 돼."
"그럼 다행이고요. 박감독님이랑 봉감독님이 어디 대학을 나오셨죠?"
"박감독 그 양반이 서경대 철학과를 나왔지. 봉순호는 연제대 사회학과 출신이고. 난 부산에 있는 경선대를 나왔고.. 강감독. 부산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기는 어렵겠지?"
"부산 쪽은 아무래도 지리상 좀 힘들지 않겠습니까?"
성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총장이 하도 부탁을 하길래 말한 거뿐이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야."
"혹시.. 다음에 인터뷰할 기회가 있으면, 간단히 언급 정도는 하겠습니다. 선배의 소개로 경선대도 고려를 했었는데, 교통 문제로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나야 그럼 고맙지. 체면을 세울 수 있으니.. 그럼 지금 특별히 정한 대학은 없는 거지?"
"네. 당장은 없습니다. 일단 수능 점수가 얼마 정도 나오는지 지켜본 다음에, 그때 신중하게 생각해볼까 합니다. 제가 내신등급이 높은 편이 아니라서, 대학을 가려면 수능 점수를 잘 받아야 합니다."
"수능 점수? 그까짓 게 뭐가 중요해? 강감독이 입학하고 싶다 그러면 어디라도 다 쌍수를 들고 환영할걸. 대학마다 특별 전형 같은 거 있지 않나? 그런 걸로 들어가면 되지."
"형님. 그랬다가는 사람들한테 욕먹습니다."
"에이. 국위선양에 앞장서고 있는 강감독을 누가 욕한다고.. 알았어. 나중에 결정할 때, 내가 말한 대학들도 염두에 좀 둬달라고."
"알겠습니다. 형님."
잠시 후 성강호와 이야기를 끝낸 수빈은 다시 손님맞이에 나섰다. 저 멀리서 친숙한 얼굴의 남자가, 익히 알고는 있지만 초면인 두 명의 남자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저 양반이 왜 저분들과 같이 오는 거지? 설마?'
"수빈아!"
선홍빛 잇몸을 내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는 유희결을 보며 수빈이 대답했다.
"어서 오세요. 형님. 오래간만입니다. 바쁘실 텐데 용케 시간이 나셨네요."
"내가 바쁠게 뭐 있어. 수빈이가 초대장을 보냈는데 내가 당연히 와봐야지. 지금 시간 되냐? 잠깐 이야기 좀 했으면 하는데.."
성강호와 똑같은 패턴에 수빈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지금은 좀 여유가 있습니다. 일행분이 있으신 거 같은데.. 간단하게 차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그럼 좋지. 다 같이 인사도 나눌 겸 해서.."
잠시 후 한적한 한 회의실에서, 네 사람은 찻잔을 앞에 두고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사람들 중 가장 연장자인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강감독이 연출한 작품들 감명 깊게 잘 봤습니다. 오늘 이렇게 인사를 나누게 돼서 영광입니다. 혹시.. 제가 누군지 아십니까?"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영화 '왕의 남자'에서 광해군으로 열연을 펼치신 정진형 배우님을 제가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제 어머님이 예전부터 '그것이 알고 싶다' 열혈 애청자이셨습니다. 그리고.. 선배님. 말씀 낮추시죠. 제가 아직 나이가 많이 어립니다."
"아무런 친분도 없는데 나이가 어리다고 어떻게 말을 놓겠습니까? 제가 그럴 만큼 낯짝이 두껍지 않습니다. 아무튼.. 강감독이 절 알고 있다니 다행입니다. 여기 옆에 앉아 있는 이 친구는.."
수빈이 먼저 아는 척을 하였다.
"그분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부산행'에서 악역으로 명품 연기를 보여주신 김의석 배우님 아닙니까? 요즘 시사 프로에서도 맹활약 중이시고요. 이렇게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반갑습니다. 강감독. 강감독이 찍은 영화들을 보고 강감독의 열성팬이 된 김의석이라고 합니다."
"제 작품을 좋아하신다니.. 말씀만으로 감사드립니다."
간단하게 통성명을 나눈 후, 수빈이 앉아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제가 희결이 형이랑은 잘 아는 사이라서, 형이 S대 작곡과를 나왔다는 건 예전부터 잘 알고 있습니다. 외람되지만.. 혹시 두 분께서도 같은 대학을 나오셨습니까?"
수빈의 물음에 정진형이 대표로 대답을 하였다.
"맞습니다. 셋 다 같은 학교를 나온 동문이죠. 제가 희결이와 같은 대학의 국문학과 83학번이고, 의석이는 경영학과 84학번입니다."
이해했다는 듯 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마도 제 대학 입학 문제 때문에 오신 거 같군요."
"짐작한 게 맞습니다. 원로 배우이신 이순제 선생님 아시죠? 그분이 우리 대학 철학과 54학번이십니다. 오늘 여기에 온건, 강감독을 직접 만나서 우리 학교에 입학하는 걸 한번 권유해 보라는 그분의 특명을 받아서입니다. 희결이가 강감독과 아주 잘 아는 사이고, 오늘 초대를 받아서 만날 계획이 있다는 말을 들어서.. 그래서 이렇게 꼽사리 껴서 불쑥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정진형이 잠시 사이를 두고 말을 이었다.
"아시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S대에는 연극영화과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순제 선생님께서 강감독을 언급하실 때 제가 그렇게 말씀드렸죠. 아무래도 연극영화과가 있는 다른 대학으로 가지 않겠습니까? 선생님. 그랬더니 선생님께서 타박을 하시더군요."
"뭐라고 타박을 하시던가요?
"저보고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바보랍니다. 배우는 자신이 연기한 작품으로 말하는 법이고, 감독은 자신이 연출한 작품으로 말하는 법이라며.. 강감독이 연출한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는 걸 전 모르고 있답니다. 강감독은 이미 자신만의 일가를 이뤘다며, 대가의 반열에 오른 훌륭한 감독이라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더군요. 현역으로 뛰고 있는 축구 국가대표가 동네 조기축구회에 가입 신청서 내는 거 봤냐며.. 틀림없이 관심이 있는 타 학과에 지원할 거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이왕이면 그런 훌륭한 인재가 우리 대학으로 오면 좋지 않겠냐고, 우리 보고 직접 찾아가서 권유를 해보라고 말씀하셨죠. 그래서 이렇게 찾아오게 된 겁니다."
정진형의 말을 들으며 수빈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강호 속담에 늙은 생각이 맵다더니.. 통찰력이 뛰어나시군, 날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어.'
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친절한 권유에 감사드리며, 제가 깊이 생각해보겠다고 선생님께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죠. 그리고 이왕 찾아온 김에 총장님 말씀도 전해드리고 가겠습니다. 입학을 하면 전액 장학금을 당연히 지급할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득이하게 영화 촬영으로 인해 수업 일수가 부족하게 되면, 학부나 학과에 상관없이 작품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당신께서 직접 조치를 취해주겠다는 약속도 하셨습니다."
"총장님의 사려 깊으신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사실.. 돈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만, 작품으로 수업 일수를 대체할 수 있다는 조건이 끌리긴 하네요. 제가 깊이 고민해 보겠습니다."
"그럼 같은 동문이 되기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사람들을 다 돌려보낸 후 수빈은 다시 손님맞이에 나섰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뮤지컬 상연 시간이 다가오자, 수빈은 대극장 안으로 들어가 성강호의 옆자리에 착석했다. 성강호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강감독이 왜 여기에 앉아? 가서 연출해야 하는 거 아냐?"
"연출은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전에 하는 거죠. 이미 다 끝난 걸 굳이 제가 옆에서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필요가 없죠. 그냥 톱니바퀴처럼 미리 정해진 대로 착착 진행만 하면 됩니다. 그 정도 능력자는 우리 영화사에 넘쳐나요. 제가 할 일은 관객들의 생생한 현장 반응을 확인하는 것과 무대에 올린 작품의 부족한 점을 찾아내는 겁니다. 그러려면 관객석에서 보는 게 최고죠. 그리고.."
수빈이 귀에 꼽고 있는 리시버를 가리키며 말했다.
"문제가 생기면 제게 바로 연락이 올 겁니다. 그러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형님."
"그래? 나야 같이 보면 좋지. 보다가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연출한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봐도 되고.."
"물어볼게 없을걸요. 뮤지컬 각본을 쓸 때부터 아이들도 같이 볼 수 있게 하려고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대사가 어린이들에게 좀 낯설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노래 가사나 내용들은 굉장히 쉽게 만들었어요."
"그래? 그럼 좀 편하게 볼 수 있겠군."
수빈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과연 그럴지 두고 보죠."
잠시 후 경쾌한 시그널과 함께 뮤지컬 공연의 막이 올랐다. 뿌옇게 깔린 안갯속에 정체불명의 한 남자가 등장하여 대사를 날리기 시작했다.
[어스름한 새벽녘 짙은 연무 속에..]
이윽고 웅장한 음악 소리와 함께 본격적인 뮤지컬이 시작되었다. 특색 있는 음색의 가수들이 등장할 때마다, 각 가수들에게 안성맞춤 격인 화려하고 기교가 넘치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다양한 장르의 세련된 음악과 사람들의 허를 찌르는 장면 장면들이 보는 사람들의 귀와 눈을 사로잡았다.
객석에 앉아 사람들의 반응과 무대 상태를 지켜보던 수빈이 중얼거렸다.
'관객들의 반응 자체는 나쁘지 않아. 무대 연출도 이 정도면 잘 빠졌고.. 문제는 두 가지로군. 소품의 퀄리티가 너무 떨어지는 것과 몇몇 가수들을 자르던지 혼을 내야 한다는 점. 내일 일반 관객분들을 모시기 전에 빨리 손을 좀 봐야겠어.'
뮤지컬이 끝나갈 즈음, 벌겋게 충혈된 눈의 성강호가 수빈에게 따졌다.
"이봐. 강감독. 해피엔딩이나 열린 결말 같은 건 태생적으로 싫어하는 거야? 왜 강감독 작품은 매번 주인공이 슬프게 뒤지냐고.. 이게 무슨 어린이들이 볼만한 뮤지컬이야?"
"카타르시스와 생명의 고귀함. 이 두 개가 이번 뮤지컬의 메인 테마입니다. 진정한 카타르시스는 비극에서만 느낄 수 있는 법이죠. 그리고 어린이들도 생명이 뭔지 알아요. 본능적으로 타고나기 때문에 아주 잘 알죠. 단지 표현력이 모자라 설명을 못할 뿐. 제가 만든 뮤지컬은 그 본능을 살짝 건드려서, 생명의 고귀함을 일깨워줄 뿐이죠. 요 근래 반려동물들을 학대하거나 존속을 폭행하는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잖아요? 어릴 때 이런 뮤지컬을 보다 보면, 나중에 그런 나쁜 사람이 될 확률이 줄어들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만든 겁니다. 뮤지컬 제작 목적 치고는 너무 거창하죠?"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암튼 너무 슬프다고.."
"그럼 된 거죠. 형님. 전 이만 무대 쪽으로 가봐야 하겠습니다. 해야 할 일이 생겨서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수빈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