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
67 - 3
- 5분 전입니다.
스태프의 외침이 들려왔다. 코디들이 무대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빈과 최아림이 옷매무새를 만져줬다.
"줄줄이 사탕처럼 아이돌 팀만 등장하네."
무대 쪽을 바라보고 있던 아림의 투정 어린 목소리에, 수빈이 웃음기 띤 목소리로 말했다.
"이보시게. 그런 소리 마시게나. 나도 아이돌이라네. 따지고 들면 우리도 아이돌 팀이라고."
아림이 콧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흐응. 그런가요? 소녀가 미처 몰랐었네요. 암행어사님."
수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암행어사? 갑자기 콘셉트를 이몽룡과 성춘향으로 바꾼 거냐?"
"그런건 아니고.."
아림이 수빈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오빠가 꼭 암행어사 같아서.. 원래 암행어사가 마패를 들고 출두하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되잖아? 내가 하고 싶었던 퍼포먼스를 하려면, 시간도 모자라고 제작진들이 싫어할 거 같아서 걱정이 많았었는데.. 오빠 말 한 마디에 다 해결이 돼버렸잖아? 방송국 제작진들이 오빠 앞에서는 그냥 설설 기던데.."
"그분들이 기긴 뭘 기냐. 라이브로 방송하는 게 아니다 보니, 출연자들을 위해 조금 편의를 봐준 걸 가지고 오버하기는.. 그건 그렇고.. 너 요즘 영화나 만화를 자주 보냐?"
"갑자기 그건 왜 물어봐?"
"네가 원하는 퍼포먼스가 아무리 봐도 영화나 만화의 한 장면을 따라 하는 거 같아서 말이야."
"무슨 소리야? 이런 비슷한 형태의 퍼포먼스는 예전부터 종종 있어 왔어. 음악 하는 소녀들이 어릴 때부터 꿈꾸던 일종의 로망 같은 거라고. 그럴 기회가 없어서 다들 못한 것뿐이지. 정식 연주회에서 이런 짓을 했다가는,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한국 클래식계에서 바로 찍힌단 말이야."
"로망은 무슨.. 아무리 봐도 순정만화의 한 장면을 가지고 온 것 같구먼. 근데, 클래식계에서 찍힌다면서 해도 괜찮은 거냐?"
"오빠가 있잖아. 오빠가 하라고 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면 되지. 세계적인 영화감독의 연출 지시에 따른건 데 설마 날 욕하겠어?"
"그럼 난?"
"누가 오빠한테 욕을 하겠어? 잘나고 잘나신 분인데.. 그리고 오빤 욕 좀 먹어도 돼. 내 마음을 아프게 했으니까.."
수빈이 고소를 지으며 손을 들었다. 그리고 아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래. 오빠가 많이 미안하다. 네 말대로 욕은 내가 먹어도 되니까, 오늘 둘이서 함께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보자."
그때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30초 전!
무대 한편에 서있는 열린 음악회 MC인 임현주가 소개 멘트를 시작했다. 관객으로 앉아 있는 다문화 가정의 사람들을 배려해서인지, 아나운서 특유의 정확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설명을 하였다.
- 다들 재미있게 보셨습니까? 요즘 한창 인기를 얻고 있는 아이돌 그룹 나인틴의 활기찬 무대였습니다. 그럼 다음 무대를 소개하겠습니다. 이번 순서는 클래식 연주가 되겠습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최아림양과 세계적인 영화감독인 강수빈군의 피아노와 바이올린 합주가 있겠습니다. 큰 박수로 맞이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와 함께 관객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도 같이 들려왔다.
- 갑자기 클래식 연주라고? 잘 나가다가 왜?
- 오픈된 음악회라잖아. 그래서 그런가 보지.
- 난 클래식 연주 별론데. 들으면 지루하잖아.
- 조용히 해. 강수빈이면 엄청 잘생긴 남자라고.
- 맞아. 한국에서 제일 멋진 남자가 등장한다고.
아림을 바라본 수빈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먼저 나가 있을게."
아림이 고개를 끄덕이자, 수빈이 몸을 돌려 무대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잘생긴 얼굴에, 무스를 발라 깔끔하게 앞머리를 넘기고, 훤칠한 키에 어울리는 핏이 딱 떨어지는 검은색 연미복을 멋지게 차려입고서, 긴 다리로 성큼성큼 무대 쪽으로 당당하게 걸어가는 수빈을 보며 아림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안녕.. 내 사랑.."
무대에 등장한 수빈이 관객석을 향해 정중이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들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가방 안에서 바이올린과 활을 꺼내었다. 그런 다음 연주를 위해 바이올린을 가볍게 손보기 시작했다.
- 정말 잘생겼다. 근데.. 왜 혼자지?
- 둘이서 한다고 하지 않았나?
- 혼자면 뭐 어때. 잘생겼으면 됐지.
피아노 앞에서 자세를 잡은 수빈이 준비가 끝났다는 듯 심호흡을 하였다. 긴장된 얼굴로 천천히 피아노 쪽을 돌아보았다. 비어있는 피아노 의자를 발견하고, 흠칫하며 놀라는 수빈의 얼굴이 관객석 곳곳에 위치한 모니터 가득 떠올랐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수빈이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허둥대는 수빈의 모습에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 재밌다. 쇼를 하나 봐. 남자가 연기를 잘하는데.
- 강수빈 감독 몰라? 남우주연상까지 받은 배우라고.
- 웃겨. 근데.. 피아노 연주자는 언제 나오는 거야?
그때 어깨 부위가 풍성하고 허리가 잘록한 핑크색 원피스를 입고서, 산책이라도 나온 듯 가볍게 부채를 흔들며, 아름다운 자태의 아림이 무대 쪽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 와아아아.
- 짝짝짝짝.
기다리던 피아노 연주자가 등장하자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보내주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수빈이, 뒤늦게 등장한 아림을 혼내기라도 하는 양 활을 들고 이리저리 흔들며 입을 벙긋벙긋 거렸다. 그러자 기분이 안 좋다는 듯 샐쭉한 표정을 지은 아림이, 갑자기 획하고 뒤돌아서서 되돌아가는 시늉을 하였다. 화들짝 놀란 수빈이 황급히 뛰어가 아림을 달랬다.
관객들의 웃음소리 속에, 허리를 굽신거리며 피아노까지 힘겹게 아림을 모셔온 수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활을 들어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한순간 바이올린 활이 하늘을 뚫을듯한 기세로 위로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과르네리 특유의 비장하면서도 강렬한 음색에 실려, 마치 생살을 잡아 찢는듯한 처절한 바이올린 선율이, 무방비 상태로 앉아있던 사람들의 가슴속을 단숨에 찌르고 들어왔다.
몇 번의 활질에 소란스러웠던 관객석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찌고이네르바이젠 초반 도입부의 외롭고 처절한 바이올린 선율이 몇 마디 흘러나온 뒤, 너도 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듯 수빈이 활을 들어 아림을 가리켰다. 자신만만한 얼굴의 아림이 한 손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더니 재빠르게 건반을 두들겼다.
귀를 기울여 듣고 있던 수빈이 가볍게 박수를 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자신의 차례라는 둣 아림이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수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림이 양손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빠르게 건반을 두들겼다. 연주를 끝낸 아림이 수빈을 바라보자, 잠시 고민을 하던 수빈이 항복 표시로 양손을 높이 치켜들고 무릎을 살짝 꿇었다,
사람들의 폭소 속에, 두 사람이 화해의 악수를 하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진중한 표정으로 심호흡을 하며 무서울 정도로 집중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관객들도 덩달아 숨을 죽이며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림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건반을 두들겼다.
- 둥. 당.
마치 전쟁의 포화속에 울려 퍼지는 교회 종소리처럼 묵직하고 웅장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 삐리리리~ 삐리리~
고뇌에 찬 무거운 피아노 소리를 달래고 어루만지듯, 부드럽고 가냘픈 바이올린 선율이 뒤를 이었다. 마침내 천재 뮤지션이 심혈을 기울여 편곡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2중주로 연주되기 시작하였다.
두 대의 전혀 다른 음색의 악기가 마치 한 어미의 몸에서 태어난 쌍둥이처럼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연신 심장을 두들기는 듯한 격정적인 피아노 소리와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바이올린의 애처로운 음색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관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귀를 기울여 두 사람의 연주를 듣고 있었다.
어느덧 3분 정도의 연주가 끝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었다. 피아노의 경쾌하고 빠른 타건 소리가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끝없이 달려가고 있었고, 날카로운 바이올린 소리가 뒤처지지 않고 화음을 이루며 덩달아 내처 달리고 있었다.
- 따다다다땅.
- 삐리리리삑.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가 마치 한 사람이 연주하는 것처럼 동시에 끝이 났다. 연주를 끝낸 두 사람이 눈을 맞췄다. 수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림이 의자에서 일어나 수빈의 옆으로 다가왔다. 손을 잡은 두 사람이 관객석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짝짝짝짝.
침묵 속에 빠져있던 관객석 곳곳에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때야 제정신을 차린 사람들의 환호성을 내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관객들의 함성 소리가 KBC 공개홀을 뒤흔들었다.
- 우와아아아!
- 브라보! 브라보!
- 둘 다 너무 멋져요.
- 최고다. 최고.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무대 옆쪽으로 퇴장을 하고 있을때, 아림이 수빈에게 물었다.
"오빠. 내 연주가 어땠어요?"
"내가 들어본 라흐마니노프 연주 중에 최고였어."
"돈을 주고 들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돈을 내고서라도 듣고 싶은 훌륭한 연주였지. 잘했다."
수빈의 칭찬에 아림이 물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마워요. 오빠. 이렇게 멋진 추억을 만들어 줘서.. 평생 잊지 못할 거 같아."
수빈이 아림의 어깨들 부드럽게 다독여 주었다.
그날 밤. 최아림은 또다시 세계 투어를 시작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독일로 날아갔다.
9월 27일 목요일.
추석 연휴가 끝이 났다. 이틀 뒤로 다가온 뮤지컬 초연을 위해, 수빈이 사람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저녁으로 주문한 도시락을 먹으며, 수빈과 영화사 제작부 직원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 가장 큰 문제가 뭐죠?"
수빈의 질문에 이성호 소품팀장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방송국에서 제작해 왔다는 세트가.. 한 마디로 개판입니다. 보고 있으면 열이 뻗쳐서.."
"파일럿 무대니 넘어걸건 적당히 넘어갑시다. 이틀밖에는 시간이 없어요. 이팀장이 조금 손을 보는 정도로 수정을 해주세요. 나중에 브로드웨이에 올릴 때, 그때 제대로 된 이팀장의 솜씨를 기대하겠습니다. 의상 쪽은 어때요?"
"의상 쪽은 별문제 없어 보입니다. 다들 유명 가수들이다 보니.. 자신들의 전속 코디가 있어서, 비교적 제대로 갖춰 입고 무대에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음향 쪽은 어떻습니까? 뮤지컬이다 보니 음향에 문제가 있으면 절대 안 됩니다."
머리가 희끗한 박형석 음향팀장이 자신 있는 얼굴로 대답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장비나 시설도 문제없고, 저희 쪽 직원들뿐만 아니라 YK A&R 팀에서도 지원을 나와서 인력도 충분합니다."
"좋습니다. 조명은 어때요?"
최진후 조명팀장이 즉답했다.
"염려 놓으시죠. 일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세계 제일은 몰라도 아시아 최고 수준의 조명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럼 남은 건.. 주연 배우들과 엑스트라 출연 문제만 의논하면 되겠군요. 박상민 팀장?"
"네. 박상민입니다. 현재 주연 배우들 중 스케줄이 안된다는 배우는 한 명도 없습니다. 그리고 엑스트라들은 YK 소속의 연습생들 중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채워 넣은 상태입니다. 지금도 열심히 연습 중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다만, 다들 신인들이라 경험이 일천하다 보니 실전에서 실수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거야 어쩔 수 없는 거죠. 베테랑도 실수하는 게 라이브 무대니까요. 연습할 시간도 짧았고요. 그건 떠안고 가야겠죠."
수빈이 시간을 슬쩍 확인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일주일간 다들 푹 쉬었으니, 며칠만 고생을 좀 합시다. 다 끝나고 나면 제가 한턱 제대로 내겠습니다. 식사가 끝나면 저도 퇴근을 안 하고 무대 쪽에서 연출을 점검하고 있을 겁니다. 문제가 생기면 바로바로 달려와서 보고를 해주세요. 아시겠습니까?"
-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촉박한 시간 속에, 엔넷 '더 콜'에서 콜라보로 만들어지는 창작 뮤지컬 초연 무대가 착착 준비되고 있었다.
9월 29일 토요일.
주말을 맞아 차가 밀리는 저녁 5시경. 저녁 7시에 열리는 뮤지컬 공연에 맞춰서, 초대를 받은 손님들과 관계자들이 하나둘씩 대학로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초대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대극장 입구 쪽에 서있던 수빈은, 비교적 이른 시간에 도착한 반가운 얼굴의 손님을 발견하였다.
"일찍 오셨습니다. 형님."
성강호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오우. 사서 고생을 하고 있는 강감독. 반가워. 내가 보낸 화환이 도착했나 모르겠네."
"걱정 마세요. 형님. 이미 도착해서 제가 제일 앞에 세워놓으라고 지시해 놨습니다."
"그래? 잘 됐네. 강감독. 지금 시간 좀 되지?"
"네. 아직은 좀 여유가 있습니다."
"그럼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