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220화 (220/236)

#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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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이 탄 밴이 SN 기획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밴에서 내린 수빈이 입구에서 출입증을 교부받고 있자, SN 소속의 사람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소란이 일어났다. 출입증을 패용한 수빈이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웅성거리는 사람들 맨 앞에 서서 기분이 안 좋은지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김해수를 발견했다.

수빈이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김해수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김해수 선배님."

김해수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머. 강감독님. 오랜만이라니요. 기억을 못 하시나? 얼마 전 미국 촬영 때 봤었잖아요. 섭섭하다.. 내일 있을 공연 때문에 아림이를 만나러 온 거죠? 제가 안내를 해드릴게요."

"굳이 안 하셔도 됩니다만.."

"그럼 안 되죠. 한국 영화계의 거목이 왕림하셨는데 제가 당연히 해드려야죠. 그러려고 잘 나오지도 않는 기획사에 출근까지 해서 기다리고 있었던걸요. 그러니 얌전히 따라오세요."

김해수의 동행에 마치 가시밭길 같은 느낌의 복도를 걸어가다, 수빈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카메오 촬영을 위해 미국으로 오셨을 때, 제가 알기로는 잘 지내다 귀국하신 걸로 아는데.. 무슨 일로 기분이 안 좋으신 겁니까?"

새침한 표정의 김해수가 대꾸했다.

"요 근래 강감독님과 관련해서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 제가 좀 화가 나네요."

수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문요? 어떤 소문 말입니까?"

"내년에 대학을 진학하신다면서요?"

"네. 그러려고 생각중입니다만.."

"그래서 전 강감독님이 조만간 제 후배님이 될 거라 기대를 잔뜩 하고 있었는데.. 제가 나온 대학 말고 다른 대학도 고려하고 있으시다는 불쾌한 유언비어가 돌아다니더라고요."

"...."

"설마.. 제가 어디 대학 출신인지 모르시는 건 아니겠죠?"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한국 연극 영화의 산실인 동극대를 나오셨지 않습니까."

"잘 아시네요. 그런 훌륭한 대학을 놔두고 다른 곳을 선택하지는 않을 거라 믿어요. 학교에서 4년 내내 장학금도 줄 건데 말이죠."

"제가 신중하게 고려해 보겠습니다."

잠시 후 안에 피아노가 놓여 있는 한 연습실 앞에서 김해수가 입을 열었다.

"이 방이에요. 좀 전까지 아림이가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잠시 화장실이라도 갔나 봐요. 안에서 기다리시면 금방 올 거예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럼 우리 대학으로 진학할 거라고 믿어도 되는 거죠?"

"...생각해 보겠습니다."

"흐응. 제가 대학 선배님들한테 전화를 좀 돌려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우리 학교에 오기 싫어한다고, 개인적으로 강감독님을 찾아뵙고 무릎 꿇고 읍소라도 해주십사 제가 부탁을 드려야 하겠어요."

"제발 그러시지는 말아주세요."

잠시 후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자 최아림이 연습실 안으로 들어왔다.

"오빠. 오셨어요? 근데.. 얼굴이 왜 그래요?"

"무서운 누님에게 협박을 좀 받아서.. 내일 연주할 곡은 선정한 거야?"

최아림이 피아노 앞에 앉더니 가볍게 건반을 몇 번 두들겼다.

- 둥. 당.

"오빠. 이게 무슨 곡인지 알죠?"

수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그걸로 고른 거야?"

"응. 근데.. 생각보다 반응이 별로다? 오빠가 제일 좋아하는 거라고 해서 고른 건데."

"내가? 내가 그걸 제일 좋아한다고?"

"응. 로빈 오빠에게 물어보니까 그러던데."

"아. 낚시용으로 로빈에게 잠깐 언급한 적은 있었지. 하지만 내가 그 곡을 제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낚시용? 뭔 소리야?"

"그런 게 있어. 암튼.. 그 곡으로 골랐다는 거지? 그럼 열린 음악회에 오케스트라가 출연하겠구나."

"아니. 출연 안 해. 나랑 오빠만 나갈 거야."

"응? 무슨 소리야? 독주곡도 아니고 소품도 아니고.. 대작인 협주곡을 고르고선 달랑 바이올린 한대로 맞추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러려면 편곡을 해서 다 뜯어고쳐야 한다고."

"당연히 오빠가 편곡을 해줘야지."

"내일이 열린 음악회 녹화날인데 지금 나보고 편곡을 하라고?"

"맞아."

"흠.. 나에게 복수하고 싶은 거야? 아니면 날 골탕 먹이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둘 다 아냐. 오빠의 능력을 믿는 거지."

말없이 최아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수빈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 알았다. 내가 누굴 원망하겠냐. 요즘 아주 일복이 넘쳐나는구나. 그럼 한번 쳐봐. 시간 관계상 어차피 전 악장을 다 연주할 건 아니잖아? 네가 연주하고 싶은 파트가 있을 거 아냐. 들어보자."

잠시 후 연습실에서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다. 눈을 감고 듣고 있던 수빈이 피아노 연주가 끝나자 입을 뗐다.

"최선을 다한 거야?"

"응. 나름은.."

"그래? 연주 시간이 3분 32초네."

"대단하다. 오빠. 시간을 정확하게 맞추네? 그쪽에서 시간 관계상 그 정도에서 잘라달라고 요구를 하더라고."

"알았어. 일단 편곡 작업부터 해야겠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앙상블 형태로 어울릴 수 있게.."

"오빠. 그전에 할 말 없어?"

"무슨 말?"

"감상이나 소감 같은 거 말이야. 연주들 들었으면 평가를 해줘야지."

"잘치네."

수빈의 무성의한 대답에 최아림이 이마를 찌푸리며 투정을 하였다.

"아이. 오빠. 그렇게 성의 없이 말하지 말고. 지금 편곡 작업 시켰다고 나에게 복수하는 거야?"

"난 평가가 좀 야박한 편이라.. 내일이 녹화날인데 서로 의가 상해서 좋을 건 없잖아?"

"오빠. 내가 명색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다. 그런 걱정 말고.. 동생의 앞날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평가를 좀 해줘봐. 천재 아티스트에게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싶단 말이야. 좀 전에 내가 얼마나 열심히 쳤는데.."

최아림의 재촉에 수빈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들으면서 새삼 느꼈다. 네가 왜 세계 각국에서 연주를 해달라고 초청을 받고 있는지. 너만의 확실한 장점이 있어. 연주를 할 때 실수를 거의 하지 않아. 그만큼 성실히 연습을 많이 하는 타입이겠지. 당연히 머리도 좋고 집중력도 뛰어난 편일 테고.. 그리고 터치가 힘이 있으면서도 부드러워. 들으면 여리고 하늘하늘한 느낌을 받을 수 있어서, 듣는 사람도 마음이 편안해져."

"다 좋은 소리잖아?"

"맞아. 너의 장점이니까."

"그럼 단점은?"

"내가 말한 장점이 전부다라는 게 단점이지."

"그게 무슨 말이야?"

"너의 연주에는 내가 언급한 장점 말고는 들을만한 다른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다르게 표현하면.. 연주회에 가서 직접 듣는 게 좀 더 좋긴 하겠지만, 바쁘면 CD로 들어도 별 상관없는 연주라는 소리지. 그게 너의 단점이다."

"...."

"설명이 좀 어렵나? 내가 아직 피아노에 많이 익숙하지 않아서.. 내가 친숙한 현악기의 일종인 바이올린을 예로 들어볼게. 내가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얼마 전 처음으로 접했을 때.."

최아림이 수빈의 말을 잘랐다.

"잠깐만. 오빠. 바이올린을 얼마 전에야 처음으로 접했다고? 그게 말이 되나?"

"중요하지 않은 건 넘어가자고.. 암튼 그때 내가 친한 형에게 물어봤지. 바이올린 하면 떠오르는 곡이 뭐가 있냐고. 그 형은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 형이 뭐라고 대답을 했을 것 같냐?"

"일반인이라면.. '찌고이네르바이젠'이 아닐까?"

"맞아. 그 곡이 떠오른다고 하더라고. 워낙 유명한 곡이잖아. 그래서.. 그 곡을 연주한 음원을 찾아서 처음으로 들어봤지."

수빈이 최아림을 바라보며 물었다.

"넌 찌고이네르바이젠이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드냐?"

"사라사테. 애잔하고 비장한 선율. 초절정기교. 초반 도입부의 아찔한 느낌. 띠리리리~ 띠리리~ 리띠디. 그 부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걸."

동의한다는 듯 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지. 근데 말이야. 문득 연주를 듣고 있다 보니.. 다른 느낌도 동시에 받게 되더라. 한없는 자유, 구속으로부터의 해방, 탐험을 떠나기 직전의 호기심 등등.. 그런 이율배반적인 감정들이 나를 묘하게 들뜨게 만드는 거야. 이상하지 않아? 비장한 바이올린 선율을 들으면서 그런 느낌을 받는다는 게?"

"이상해."

"그래서 찾아봤지. 도대체 누가 연주를 하고 있는 건지. '이작 펄만'이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를 했다고 되어 있더라고."

그 순간 최아림이 신음성을 흘렸다.

"아.."

"어떤 연주자인지 너도 알고 있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이니까. 아카데미에서 최우수 음악상을 수상한 '쉰들러 리스트' 영화음악에도 참여했던 연주자이기도 하고.."

"알아.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심하게 앓아서 다리가 불편한 연주자. 지금도 연주회 때면 의자에 앉아서 바이올린을 켜는 걸로 유명한.."

"아마 그 사람에게는 바이올린이 자신의 불편한 다리를 대신하는 소중한 친구였을 거야. 어쩌면 좁은 방안을 벗어나 세상을 구경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날개와도 같았겠지. 그때야 알았지. 내가 그 사람의 연주를 들으면서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를 말이야. 하지만 말이야. 내가 좀 전에 너의 연주를 들으면서 뭘 느꼈는지 알아?"

"뭐죠?"

"연습벌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좁은 골방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열심히 피아노를 치고 있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 떠올라. 난 그런 시답잖은 느낌을 받기 위해, 비싼 돈을 주고 연주회를 갈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다고.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런.."

수빈은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 있는 최아림에게 다가가 위로를 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이 된 최아림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수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

"오빠. 그럼 전 어떻게 해야 하죠?"

"상상을 해야지. 자신이 연주할 곡에 맞춰 아니면 자신의 감정에 맞춰서 말이야. 오른손은 뭘 치고, 왼손을 뭘 눌러야지. 오른쪽에 있는 서스테인 페달은 지금 밟고, 가운데 소스테누토 페달은 두 마디 뒤에 밟으면 되니까 미리 준비를 해야해. 그딴 재미도 없고 청중들이 알고 싶지도 않은 생각 말고.. 너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청중들에게 보여줘야지."

자신의 말을 집중해서 듣고 있는 최아림을 보며 수빈이 말을 이었다.

"가령 예를 들어.. 좀 전에 네가 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의 느낌이 외롭고 처절하다고 느낀다면.. 그러면 무인도에 표류했다고 상상을 해보는 거야. 먹을 것도 없고 지나가는 배도 없어. 오로지 같이 떠내려온 피아노만 덜렁 있는 거지. 석양은 지고 무서운 짐승들의 소리는 들려오고.. 이제 곧 죽을 것만 같아. 그것도 아무도 없는 섬에서 쓸쓸하게.. 그런 상상 속에서 피아노를 쳐야 하는 거야. 연습은 연주회 때 따로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하는 거지. 열심히 연습한 걸 연주회 때 자랑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고. 그건 이제 피아노를 갓 배운 애들이나 하는 짓이지."

수빈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최아림이, 아무런 말도 없이 갑자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 둥. 당.

이윽고 수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고 연주를 듣고 있었다. 잠시 후 연주가 끝나자 수빈이 가볍게 박수를 쳤다.

- 짝짝짝.

"좋다. 아직은 가끔씩 몰입도가 떨어지고, 구석구석 어설픈 면도 있긴 하지만.. 적어도 돈을 주고 들을만한 가치가 충분한 연주라고 생각한다. 역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야. 습득력이 굉장한걸. 그럼 이제 편곡 작업을 해볼까?"

최아림이 수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 제가 부탁이 있어요."

"부탁? 어떤 부탁?"

9월 26일 수요일

KBC 신관 공개홀에서 열린 음악회 녹화가 있는 날이다. 점심 무렵 간단하게 식사를 한 수빈은 밴을 타고 여의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열린 음악회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 합주라. 상당히 특이하다? 테너나 소프라노 같은 성악가분들이 나와서 공연하는 건 몇 번 봤어도.. 연주만 하는 건 난 첨 보는 거 같은데?"

"아무래도 다문화 가정이 청중이라서 그런 거 같아요. 한국어 가사를 못 알아듣는 사람들도 좀 있을 테니까요. 클래식이 국적에 상관없이 즐기기에도 편하고요."

"그래도 요즘은 아이돌이나 걸그룹들이 대세라 아마 무더기로 나올 건데..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가 사람들에게 먹히려나 걱정이다. 다들 지루해할 거 같은데.."

"안 먹힘 또 어때요? 그냥 즐기면서 하는 거죠."

"그래. 이따 내릴 때 내가 연미복을 챙길 테니까, 악기는 수빈이 네가 직접 챙겨라. 행여 내가 들고 있다 부셔먹기라도 하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엄청 비싼 거라며?"

"가격이 좀 나가긴 하죠. '과르네리'라고 하는 건데.. 남성적이고 볼륨감 있는 소리를 내서 제 맘에 들더라고요. 돈을 많이 버니 이런 건 좋네요. 부담 없이 지를 수 있어서.."

잠시 후 밴은 여의도에 있는 KBC 신관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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