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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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7일 금요일
영화사 편집실로 가는 밴 안에서, 수빈은 전날 방송된 KBC 9시 뉴스의 동영상 클립 중 하나를 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성과 박수를 받으며, 검은색 턱시도를 입고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색 보타이를 단정하게 맨 수빈이 화려한 단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윽고 몬트리올 국제 영화제 조직 위원장으로부터 그랑프리를 수상을 한 수빈이 한국어로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었다.
"얼마 전 어머니에게 안부 전화를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께 여쭤봤죠. 제가 어렸을 때 말썽도 많이 피고, 속도 엄청 많이 썩혀드렸는데.. 이제는 아들이 영화감독이랍시고 나름 잘나가고 있으니까, 뭔가 바라는 게 있으면 말씀하시라고 말입니다. 전 명품 백이나 하나 사달라고 하실 줄 알았는데.. 바라는 게 무려 4가지나 되시더군요."
동시통역이 되고 있는지 관객석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좋은 여자를 만나 빨리 결혼을 했음 좋겠다. 조만간 대학을 간다고 하니 이왕이면 좋은 대학에 진학했으면 좋겠다. 내년에 군대 간다고 들었는데, 부디 몸 건강히 제대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 듣고 나서 생각해 보니.. 당장 들어 드릴만 한 게 하나도 없더군요. 결혼은 아직 너무 먼 이야기죠. 대학 진학은 내년이 돼야 가능하고, 몸 건강히 군대에서 제대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려면 삼 년 이 더 지나야 합니다. 그래서.. 몬트리올 국제 영화제에 참가하면서, 상을 받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했습니다. 오스카상 보다 더 간절히 말입니다."
수빈이 잠시 호흡을 고른 다음 말을 이었다.
"제 어머니께서는 지금 캐나다에 거주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캐나다에서 열리는 명망 높은 몬트리올 국제 영화제에서, 자식인 제가 당당히 수상하는 모습을 보여드린다면 어머니의 부탁 중 한 가지는 들어드릴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말썽꾸러기였던 아들이 지금은 어디 내놔도 남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때 카메라가 객석에서 펑펑 울고 있는 한 동양인 여성을 잡아주었다.
"네. 맞습니다. 저분이 절 낳아주신 어머니이십니다. 눈물이 많은 분이시죠. 자식 걱정도 많고요."
관객석에서 뜨거운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화면이 다시 수빈을 잡았다. 울컥했는지 눈시울이 벌게진 수빈이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입을 열었다.
"이런 소중한 상을 주시고 어머니에게 자랑까지 할 수 있게 해주신 몬트리올 국제 영화제 관계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어머니 사랑합니다."
수빈이 상을 공중으로 높이 치켜들었다. 사람들의 함성과 박수 속에 영상이 끝이 났다.
수빈이 영상에서 눈을 떼자. 백성철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어머니가 엄청 좋아하시겠지?"
"그럼요.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 다 고향이 대구시잖아요. 굉장히 보수적인 동네죠. 그리고 나이 많은 분들에게 자랑하려면, KBC에 출연하는 게 최곱니다. 거기에 9시 뉴스에까지 나왔으면 말 다했죠. 지금쯤 캐나다에서 아는 지인분들에게 전화 엄청 받고 계실 겁니다."
"어머니가 엄청 우시더라.."
"맘 고생이 많으셨죠. 한국에서 그것도 대구처럼 보수적인 동네에서, 이혼해서 혼자 자식을 키우는 여자를 보는 시각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형은 잘 모르겠지만.. 제 마음속에는 어머니에게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게 좀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한을 좀 푸실 수 있도록 작심하고 잡은 영화제였는데..."
수빈이 말꼬리를 흐리더니 말을 돌렸다.
"형. 오늘 몇 시에 촬영 가죠?"
"일산에 5시까지 가야 된다."
"그럼 여기서 4시에는 나가야 되겠군요?"
"그래. 편집실에서 편집하고 있으면 내가 알아서 데리러 갈게."
"알았어요,"
잠시 후 밴이 영화사 편집실이 있는 건물에 도착했다. 수빈이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여왕들의 게임 제작진들이 수빈의 일상생활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수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작진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수빈은 곧바로 편집실에 처박혔다.
- 따다닥. 틱. 틱. 따다다다.
편집 작업하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리는 편집실에서, 김작가가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서용수 조연출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서피디님. 왜 그래요?"
"편집 속도가 너무 빨라. 나도 편집을 좀 해봤지만, 저건 인간이 낼 수 있는 속도가 아니라고. 화면이 휙휙 지나가는데.. 제대로 편집을 하고 있는 건지 판단을 못하겠다. 저런 속도로 정말 편집을 하고 있는 거라면.. 괴물이라고."
"그래요? 내가 좀 물어볼까요?"
"작업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촬영하는 건데.. 괜찮을까?"
"때려죽이기야 하겠어요."
멀찍이 뒤에서 구경하고 있던 김작가가 성큼성큼 수빈에게 다가갔다.
"강감독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편집에 몰두하던 수빈이 고개를 돌리며 선선히 대답을 하였다.
"네. 물어보세요."
"지금 무슨 장면을 편집하고 계시는 건가요?"
"아. 지금 편집하는 건 신작 영화의 34번 신인데.. 캐나다에서 촬영한 겁니다. 간단하게 내용을 말씀드리면.."
수빈이 여러 영상을 동시에 플레이 시켰다. 그중 하나의 영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캐나다 클럽에서의 격투 신인데.. 마동식씨가 저를 붙잡으려고 하는 신이죠. 제가 촬영하는 스타일이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 카메라 여러 대를 동시에 돌리는 걸 선호합니다. 여기 보시면 마배우가 제 정체를 의심해서 다른 곳으로 걸어가려는 제 어깨를 붙잡죠? 이건 1번과 2번 카메라로 찍은 걸 교차 편집한 겁니다. 거기에 지미집 영상까지 들어가죠."
수빈이 다른 영상 화면들을 일일이 가리키며 말했다.
"마배우가 제 어깨를 붙잡자, 제가 뿌리치고 걸어갑니다. 이건 3번 카메라로 찍은 거죠. 그러면서 제가 입고 있는 티셔츠 왼쪽 팔 부분이 찢어지는 게 보이시죠? 그때 제 팔에 있는 장미 문신이 화면 가득 클로즈업 됩니다. 이건 따로 클로즈업을 하고 있는 4번 카메라로 찍은 거죠. 그런 다음.. 정체가 탄로 난 제가 마배우랑 싸움을 하게 되는 거죠. 이런 식으로 하나의 신을 여러 대의 카메라로 한 번에 몰아서 찍는 걸 즐겨 합니다. 그런 다음 편집을 하는 거죠."
"근데.. 조연출 말로는 편집하는 게 너무 빠르다고.."
"아. 그건 제가 숫자에 강하고 암기력이 좋은 편이라서 가능한 겁니다. 여러 카메라로 찍은 영상을 한꺼번에 다 띄워 놓고서는.. 제가 원하는 장면의 시간들을 일일이 다 머릿속으로 기억하죠. 그런 다음 시간 순서대로 엮어서 하나로 묶는 겁니다. 숫자에 약하신 분들이 이런 식으로 편집하기에는 무리죠."
김작가가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단하시네요.. 지금 말씀하신 걸 방송으로 내보내도 상관없겠죠?"
수빈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대로 내보내면 안 되죠. 그러면 영화 내용을 스포일러 하는 거잖아요? 영화 개봉도 안 했는데 그러시면 곤란하죠."
김작가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자, 수빈이 말을 이었다.
"영화 내용 부분을 빼신다면 상관없어요. 제가 하는 편집 방식에 대해서 좀 더 설명을 드릴까요?"
"네.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좋습니다. 그럼 여기를 보시면...."
한편 그 시각. 일산에 위치한 BJ 일산제작센터는 폭탄이 터지기라도 한 듯 북새통이 되어 있었다.
"적당히 좀 하라고 그래! 지금 장난쳐? 촬영까지 몇 시간 남지도 않았다는 걸 몰라?"
'슈퍼스타 K'와 '너의 목소리가 보여'를 연출한 경력이 있는 이신영 피디가, 머리가 산발이 된 채 소프라노처럼 하이톤으로 바락바락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런 이신영 피디 앞에 핸드폰을 든 이장규 조연출이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성을 내다 그 모습을 본 이피디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안해요. 이피디. 내가 지금 하도 정신이 없어서.. 이번에는 또 누구한테서 온 전화예요?"
"이성철씨입니다."
"이성철씨 본인 아니면 매니저?"
"본인이라서..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성철씨 본인이 전화를 한 거면 할 수 없죠. 핸드폰 이리 줘요."
잠시 후 통화를 끝마친 이신영 피디가 무거운 톤으로 입을 열었다.
"어제 오후 기사가 나간 이후로 '더 콜'에 출연하고 싶다고 연락 온 가수가 몇 명이나 되죠?"
이장규 조연출 대신, 스튜디오 한쪽에 놓인 책상에 앉아 열심히 자막 작업을 하고 있던 오대한 조연출이 대답했다.
"이성희, 이성철, 박정연 등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쟁쟁한 가수들만 꼽아도 열 명이 훌쩍 넘습니다. 지명도 낮은 가수들은 아예 처음부터 차단을 했는데도 그 정도예요. 거기에 좀 전에는 소프라노 조소미씨 매니저에게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촬영 일정을 절대 미룰 수 없다고 하니까, 그때야 포기를 하더군요."
이신영 피디가 골이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강수빈 감독의 이름값이 워낙 높아서 내심 걱정을 좀 하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 일 줄은 몰랐는데.."
오대한 조연출이 말을 받았다.
"더 콜에서 출연자를 소개할 때 키워드를 제시하는 화면이 있잖습니까? 그 작업 때문에 제가 조사를 좀 해봤는데 말입니다. 유명 가수들이 왜 눈에 불을 키는 덤비는지 그 이유를 충분히 알겠더군요. 여태껏 강수빈 감독이 전 세계적으로 팔아치운 앨범이.. 7천만 장 가까이 됩니다."
이장규 조연출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정말? 7천만 장 가까이 된다고? 그게 달성 가능한 숫자기나 한 거야?"
"그게 산술적으로 계산하니 그렇게 되더라고. 강감독이 국제적으로 노는 거물이다 보니까.. '다크 탬블러' 앨범이 전 세계적으로 1,700만 장 팔린 걸로 나와. 얼마 전 발매한 '라이프' 앨범은 현재까지 2,200만 장이 팔려나갔다고 하더라고. 거기에 강감독이 작사 작곡을 하고 직접 프로듀싱까지 한 뮤란이, 지금까지 일본 시장에서 팔아치운 앨범이 1,600만 장이 훌쩍 넘어. 하이유가 부른 '달과 나의 이야기' 앨범과 그동안 BBG로 활동하면서 판 앨범 수까지 다 합치니까.. 그 정도 나오더라고. 나도 깜짝 놀랐어."
"그런 엄청난 사실이.. 여태껏 뉴스로는 왜 한 번도 보도가 안 되었던 거지?"
이장규 조연출의 질문에 이신영 피디가 대답했다.
"강수빈 감독이 좁은 국내 시장에는 별 관심이 없으니까 그런 거겠죠.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에요.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지가 관건이죠. 출연하겠다는 유명 가수가 열 명이 넘는다고요. 어떤 기준으로, 어떤 방식으로, 최대한 공정하게 출연자를 선별할 수 있을지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해요. 까딱 잘못했다가는.. 우리 제작진이 욕을 바가지로 먹기에 딱 좋은 상황이라고요."
오대한 조연출이 입을 열었다.
"차라리 강수빈 감독 보고 선택하라고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음에 안 드는지 이신영 피디의 눈이 매섭게 치켜올라갔다.
"출연자를 강감독이 직접 고르라고요? 지금 제 앞에서 책임을 강감독에게 떠넘기자는 소리를 하는 건가요?"
오대한 조연출이 황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뇨. 비슷하게 들리지만 뜻이 전혀 다릅니다. 청하 아시죠?"
"청하?"
"네. IOI 출신의 청하 말입니다. 히든 카드로 나왔던.."
"아. 히든 카드!"
"네. 바로 그겁니다. 출연 요청한 가수들 전원을 차라리 히든 카드로 출연시키는 게 어떻겠습니까? 청하처럼 말입니다. 그런 다음 강감독 보고 선택을 하라고 하죠. 누구는 출연시키고 누구는 출연을 안 시키는 건.. 후폭풍이 너무 거셀 겁니다. 다들 출연을 시켜서, 공정하게 기회를 주는 게 최선일 것 같습니다."
"다들 자존심이 엄청 센 가수들인데.. 그렇게 하려고 들까요?"
"짜증을 낼지언정 적어도 욕은 안 할 겁니다. 자신들이 요청한 출연이니까요.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고, 양해를 구하는 게 최선일 것 같습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이신영 피디가 입을 열었다.
"그 방법으로 가죠. 두 분은 지금 바로 전화를 돌려서, 출연 요청한 가수들에게 솔직하게 말하세요. 그래도 출연하겠다는 가수분들만 출연시키는 걸로 해요. 얼마나 걸릴 거 같아요?"
이장규 조연출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 정리하는데 30분이면 충분합니다."
"좋습니다. 지금 바로 시작하세요. 전 무대 준비에 집중할 테니까요."
- 알겠습니다. 피디님.
-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한편 수빈은 편집실에서 나와서 밴을 타고 일산으로 가고 있었다. 이윽고 BJ 일산제작센터에 도착해서, 주차장 쪽으로 밴을 몰고 가던 백성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내가 잘못 봤나.."
"형. 뭘 잘못 봤다는 거예요?"
"아니다. 왠지 눈에 익은 밴들이 좀 보여서.. 그 차들이 지금 여기 있을 리가 없지. 다 왔다."
"네. 형. 운전하느라 수고하셨어요."
밴에서 내려 일산제작센터 안으로 들어간 수빈은, 스태프의 인도를 받아 대기실로 가고 있었다. 한참을 걸어가던 수빈이 스태프에게 물었다.
"지금 절 어디 유배라도 보내시는 겁니까? 대기실이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은데요."
사전에 지시라도 받았는지 스태프가 침착한 목소리로 응대했다.
"깜짝 출연이다 보니.. 다른 출연자분들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그런 겁니다. 이제 다 왔습니다."
"제가 출연한다는 게 뉴스로 다 나갔는데.. 깜짝 출연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 않나요?"
스태프가 대기실 방문을 활짝 열며 환하게 웃었다.
"여깁니다. 안에 계시면 코디 분과 메이크업해주실 분들이 곧 오실 겁니다. 준비가 다 되면, 그때 제가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할 일을 무사히 잘 마쳤다는 듯 후다닥 도망가는 스태프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 수빈은 백성철과 함께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수빈의 분장이 다 끝나자 아까의 스태프가 다시 들어왔다.
"촬영 십분 전입니다. 이제 스튜디오로 이동하시겠습니다."
마치 007 첩보 작전처럼 진행하는 스태프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끼며, 수빈은 스튜디오 쪽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