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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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5일 수요일
한국 시간으로 오후 4시경.
미국과 캐나다에서의 해외 로케를 무사히 마친 수빈이 인천 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며칠 후면 이탈리아로 다시 떠나야 하는 관계로, 수빈은 부지런을 떨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백성철이 모는 밴을 타고 영화사 편집실로 달려갔다.
"갑자기 그 여자는 왜 만나겠다는 거야? 네가 약속을 잡아놔 달라고 해서 잡아 놓기는 했는데.."
밴 안에서 백성철이 물어오자 수빈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요 근래 좀 서먹서먹해지긴 했지만, 걔랑 저는 원래부터 친구 사이였잖아요. 업무적으로 전략적 제휴를 맺을 수 있는 관계이기도 하고요. 이쯤에서 빨리 관계 정리를 할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저 때문에 안 해도 되는 고생을 해서 미안한 마음도 좀 있고요"
"그래? 알았다.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잠시 후 밴이 예전 벨 스튜디오 건물 앞에 도착했다. 스튜디오의 문을 열고 들어선 수빈은 입구 왼편의 휴게실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김성희를 발견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휴게실에서 단둘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깜짝 놀랐어요. 수빈씨가 먼저 연락을 해서 날 보자고 할 거라고는 상상을 못했었거든요. 여왕들의 게임에서 첫 번째 탈락자로 선정이 된 다음, 땅콩 하우스에서 짐을 싸고 나오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어요. 수빈씨랑 이제는 평생을 못 볼 수도 있겠구나..라고 말이죠."
수빈이 씁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제가 그렇게 차가운 놈으로 보입니까? 김성희씨랑 저랑은 제법 오래된 친한 친구 사이잖아요. 전 아무나 친구로 삼을 만큼 가벼운 성격이 아닙니다."
김성희가 수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여자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거죠? 이번에 땅콩 하우스에서 수빈씨랑 같이 지내면서 절실히 느꼈어요. 아. 이 사람은 나 같이 괄괄한 스타일의 여자보다는, 좀 더 부드러운 타입의 여성이 이상형이구나. 그래서 친구보다 더 깊은 관계를 원하는 나를 많이 부담스러워하는구나..라는 걸 말이죠. 슬프지만 너무나도 잘 알게 되었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제가 김성희씨를 싫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외모도 출중하고 능력도 뛰어나고 성격도 똑 부러지고.."
김성희가 수빈의 말을 잘랐다.
"저도 제가 나름 괜찮은 여자라는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재력이 든든하다는 장점이 있다는 것도 잘 알죠. 하지만.. 수빈씨는 여자가 가진 재력 따위에는 눈곱만치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제가 가진 장점이 아무런 소용이..."
말을 하던 김성희가 갑자기 긴 한숨을 쉬었다.
"후우.. 말을 하면 할수록 제가 더 구차해지는 것 같네요. 그런 이야기는 그만두죠. 갑자기 왜 보자고 하신 건가요? 신작 때문에 정신없이 바쁘다고 들었는데.."
"별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친한 친구가 괜히 나 때문에 방송 출연까지 하면서 힘든 일을 겪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된 대화도 못했고, 위로도 못해줘서 연락드린 겁니다."
김성희가 수빈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툭 던졌다.
"수빈아. 예전에 우리 둘이 술 마시면서 말 놓기로 한거 기억나지? 내가 이제는 마음을 어느 정도 정리했으니까.. 편하게 다시 말을 놓을게. 우리는 계속 친구인 거지?"
수빈이 고개를 크게 아래위로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아까도 얘기했잖아. 난 아무나 친구로 삼지 않는다고. 한번 친구면 영원히 친구인 게지."
김성희가 뭔가를 다 털어버린 듯 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차라리 이게 낫다. 깔끔하게 정리되니까 마음이 편하네. 그럼.. 친구인 날 위로해 주려고 오늘 만나자고 한 거야?"
"그렇지. 그리고.. 성희 너 직장을 옮겼다며?"
"응. 얼마 전에 옮겼어. 영화 쪽은 이태우 회장이 취임한 이후로, 이씨 집안에서 전적으로 관리하기로 내부적으로 결정이 나서.. 난 방송 쪽으로 자리를 옮겼어. 주식도 이미 그쪽으로 정리해서 받았고. 현재는 방송국 부장으로 발령 난 상태야. 몇 년 지나면 아마도 이사로 진급을 하겠지. 내가 가진 주식이 적지 않으니까.."
"그렇구나. 새로 옮겨서 정신없고 힘들 텐데.. 자리 잡도록 내가 좀 도와줄까?"
그 순간 김성희의 눈이 반짝거렸다.
"수빈이 네가 도와준다고? 나야 그럼 좋지. 안 그래도 어린 나이에 부장으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사람들이 수군거리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실적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야. 대가는? 내가 뭘 주면 되는 거지?"
수빈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친구 사이잖아. 대가 따위는 필요 없어. 난 믿을 수 있는 친구가 잘 되길 바라는 것뿐이야. 나중에 서로가 잘 돼서 상부상조하면 좋잖아. 안 그래?"
"친구 겸 믿을 수 있는 사업 파트너를 원한다는 거지? 좋아. 세계적인 영화감독이랑 손을 잡아서 나쁠게 하나 없지. 어떻게 도와줄 거야? 계획은 세워져 있는 거야?"
"당연하지. 일단 소소한 것부터 시작해 보자고."
9월 6일 목요일
전날 밤 김성희를 위로하느라 둘이서 통음(痛飮)을 한 수빈은, 아침 일찍 일어나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눈을 뜬 수빈이 중얼거렸다.
"대주천이 정말로 얼마 안 남았군. 올 연말이나 내년 초쯤이면 달성할 거 같은데.. 대주천만 완성되면 무서울게 없을 건데 말이야."
약간은 들뜬 마음으로 수빈은 샤워실로 향했다.
잠시 후 영화사 편집실로 가는 밴 안에서 수빈이 백성철에게 물었다.
"연락은 잘 됐나요?"
"그래. 어제 너 술 마시는 동안에 내가 전화해서 약속을 잡아놨다. 좀 전에 연락이 왔는데, 촬영 준비하느라 이미 도착해 있다고 하더라. 근데..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갑자기 방송 쪽에 왜 이렇게 신경을 쓰는 거야?"
"갑자기가 아니죠. 정해진 계획대로 착착 진행을 하는 것뿐이에요. 대한민국에서 엔터테인먼트 시장이라고 하면 크게 3가지에요. 영화 시장, TV 방송 시장 그리고 음악 시장. 영화는 이미 제가 주도권을 잡고 있죠. 이번에 찍는 영화만 개봉하고 나면, 우리 영화사가 국내에서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탑으로 올라설 거예요. 음악 시장도 마찬가지죠. 기획사로는 국내 탑을 찍고 있는 YK가 제 수중에 있으니까요. 문제는 TV 방송 쪽인데.."
수빈이 잠시 생각을 정리한 다음 말을 이었다.
"TV 방송 쪽을 단시간 내에 석권하는 건 아무리 저라도 불가능해요. 기본적인 시설투자부터 시작해서 법적인 허가 문제까지.. 시간도 오래 걸리고, 저 혼자 할 수 있는 성격의 일도 아니죠. 여러 개의 방송국을 일개 개인인 제가 소유하도록 정부에서 가만히 놔둘 리도 없을 테고요. 거기에다 공중파 같은 경우에는 국가 권력과도 관계가 있기 때문에, 제 입맛대로 마음대로 조정하기가 힘들죠. 그래서 일종의 컨소시움 같은 끈끈한 협력 관계가 필요한 거예요. 그리고 그런 관계를 맺으려면 방송국 내부의 협력자가 필수적이죠."
수빈이 의자 팔걸이를 톡톡 두들겼다.
"미국 로케를 갔을 때, 유학 중인 마빈을 만나서 의논을 좀 했어요. 제가 군대 제대할 때쯤 돌아오기로 입을 맞췄죠. 마빈이 귀국하면 종편 채널 하나와 홈쇼핑 채널 하나를 물려받기로 되어있는데, 종편 채널을 드라마 위주로 바꾸기로 이야기가 되었어요. 물론 성공할 수 있도록 제가 적극적으로 도와줘야 하겠죠. 음악 방송 쪽은 김성희의 엔넷, 드라마 방송 쪽으로는 마빈의 종편 마지막으로 공중파로는 공영 방송인 KBC를 잡을 생각입니다. 그 정도 네트워크라면 TV 방송 시장을 장악하기에 충분해요. 아니 넘칠 정도죠."
"그런 계획이 있었구나.. 그러고 나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수신(修身)은 이미 충분합니다. TV 방송까지 장악해서 국내 엔터테인먼트 시장을 완전히 제 손아귀에 집어넣게 되면, 제가(齊家)도 완성되었다고 봐야겠죠. 그럼 남은 건 하나뿐이죠. 세계 시장을 석권하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것. 그걸 위해 여태껏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달려온 거니까요. 하지만..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겁니다.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잖아요? 이 넓은 세상에는 저 못지않게 똑똑한 사람들이 부지기숩니다. 재력가도 많고 힘 있는 권력자도 넘쳐흐르죠. 험난한 싸움이 될 거예요."
수빈의 원대한 포부에 흥분했는지, 백성철이 잔뜩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험난해도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난 수빈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봐."
백성철의 격려에 수빈이 환하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형이 믿어주니 힘이 더 나는데요. 뭐 죽기 전까지 열심히 노력해 봐야죠. 이번 생의 목표는 그걸로 정한지 오래니까요."
"나도 죽기 전까지 옆에서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 테니.. 뭐든지 말만 해."
"그래요. 형. 옆에서 많이 도와주세요,"
잠시 후 밴은 영화사 편집실이 있는 건물에 도착했다. 수빈이 안으로 들어서니 박피디를 비롯한 KBC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수빈을 발견한 박피디가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와 입을 열었다.
"강감독님.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부셨어요? 일상생활까지 촬영 허가를 내주시다니.. 어제 전화를 받고 깜짝 놀라서, 새벽부터 부랴부랴 준비해서 한달음에 달려왔어요."
수빈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지금 촬영을 하고 있는 중입니까?"
"어머. 그럴 리가요. 주인의 허락도 없이 찍을 만큼 개념 없는 여자가 아니라고요. 그리고.. 수빈씨가 그런 무례한 짓을 싫어한다는 걸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아는걸요. 지금은 세팅만 해놓은 상태죠."
수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가 그래서 박피디님을 높게 평가하는 겁니다. 피디로서 기획력도 뛰어나고 구성력도 좋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적절한 선을 지킬 줄 안다는 겁니다.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고.. 협상 능력도 뛰어나죠. 지위가 올라갈수록 일신의 능력보다는 그런 게 더 중요한 덕목이 될 때도 있는 법이죠."
"칭찬 감사해요. 제가 어릴 때부터 눈치가 좀 빠른 편이었죠. 주제 파악을 잘 한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다고요. 그럼 어떻게.. 지금부터 찍어도 될까요?"
"그전에 저랑 잠시 이야기 좀 하시죠."
"그래요. 전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는 여자라고요."
수빈과 박피디는 북적이는 사람들을 피해서 회의실로 이동했다.
당일 오후 3시경. 새롭게 올라온 뉴스 하나로 인터넷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미친 섭외력의 '더 콜'. 강수빈을 섭외하며 정점을 찍다.]
- 최근 신성훈, 휘성, 에일리, 거미, 환희. 크러쉬 등 명성이 자자한 가수들을 연달아 섭외하여, 사람들로부터 미친 섭외력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더 콜' 제작진으로부터 금일 오후 충격적인 뉴스가 발표되었다. 이들 제작진은 세계적인 영화감독이자 천재 뮤지션으로 이름높은 강수빈 감독이 '더 콜'에 출연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미친 섭외력의 끝을 보여주었다.
- 현재 엔넷 방송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더 콜'은 화제성에 비해 시청률이 다소 아쉬운 프로로서, 같은 종편의 음악 예능인 '비긴 어게인'의 1/3 밖에 되지 않는 시청률을 보이고 있다. 제작진들은 강수빈 감독의 출연으로 화제성을 이어나가며, 시청률까지 거머쥐겠다는 포부를 당당하게 밝혔다.
- 강수빈 감독 측근의 말에 따르면 '더 콜' 출연 결정은 강수빈 감독과 친한 친구의 부탁으로 인해 전격적으로 이뤄진 걸로 전해지고 있다. 강수빈 감독의 촬영분은 내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BJ 일산제작센터에서 녹화가 진행될 예정이며, 다음 주에 방송될 예정이다.
사람들의 관심과 폭발적인 댓글로 인터넷이 뜨거워지고 있을 때, 박피디는 KBC 방송국 신사옥에서 면담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 KBC 보도본부장으로 임명된 조진호 본부장이 박피디를 보며 말했다.
"박피디. 요즘 잘 나간다면서? 얼마 있으면 CP로 진급한다고 들었네. 진급을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근데.. 갑자기 날 왜 보자고 한 건가? 예능 관련 일이면 제작본부장을 만나야지. 예능국에서 잘 나가는 박피디가 이쪽으로 옮길 것도 아닐 테고.."
"제가 본부장님께 특종을 하나 드릴까 해서요."
"특종?"
"네. 특종. 그것도 단독이죠. 자료 영상까지 깔끔하게 준비돼 있어요"
"이거 점점 더 궁금해지는데.. 어떤 특종인가? 말해 보게나."
박피디가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