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214화 (214/236)

# 214

65 - 3

수빈은 살짝 피곤함이 서려있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성호 팀장. 준비한 걸 보고해 보세요."

수빈의 말에 이팀장이 입을 열었다.

"네. 알겠습니다. 먼저 스크린을 봐주시길 바랍니다."

벽 쪽에 있는 스크린에 징그러운 곤충 사진이 한 장 떠올랐다.

"이번 영화에 사용되는 중요한 이미지 중 하나인 곤충 사진입니다. 헤이즈 시나리오에 따르면, 극중 주인공인 킬러의 코드명은 센티피드(centipede)입니다. 한국명으로 하자면 지네죠. 주인공이 살인청부업에 몸을 담은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즉 초짜 시절에 제거를 의뢰받은 타깃으로부터 부상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이팀장이 자신의 오른팔로 왼쪽 상박을 두드렸다.

"바로 여기! 칼로 왼쪽 상박 부위를 난자(亂刺) 당했죠. 시나리오에 따르면 후각이 예민한 주인공은 병원에 가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걸로 나와 있습니다. 소독 약 냄새와 죽음의 냄새가 코를 찌른다고 말이죠. 그래서 상처를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서, 흉터가 심하게 난 걸로 되어 있습니다. 중개업자로부터 거기에 난 흉터가 마치 지네와 같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죠. 그래서 코드명이 센티피드가 된 겁니다."

이팀장이 소품팀 스태프에게 눈짓을 했다. 스태프가 수빈 앞으로 흉터용으로 제작된 소품을 내밀었다. 수빈이 소품을 보며 감탄성을 터뜨렸다.

"호오. 멋지네요. 흉터가 정말 지네처럼 보이는군요. 근데.. 제가 드라마나 영화 촬영장에서 봐왔던 소품들보다는 두께가 상당히 얇아 보이는데요?"

"네. 두께가 아주 얇습니다. 두께가 두꺼우면 화면으로 볼 때 관객들이 이질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와 같이 최대한 얇게 특수 제작했습니다."

"다른 소품팀들은 왜 이런 식으로 얇게 만들지 않는 거죠?"

"제작 비용 때문입니다. 지금 보시는 소품처럼 두께가 지나치게 얇을 경우, 수작업으로 제작을 하게 되면 퀄리티가 너무 떨어지게 됩니다. 작업 도중 부서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죠. 그래서 소품 두께를 어느 정도 키우는 겁니다. 하지만 저희 소품팀에서는 컴퓨터를 이용해서 정밀한 모델링을 먼저 했습니다. 그리고 그 데이터를 집어넣어 3D 프린트로 특수 제작을 했습니다. 그런 작업 하나하나가 다 돈입니다."

"결국은 돈이로군요.."

"그렇습니다. 참고로.. 흉터 하나 제작하는데 4천만 원이 넘게 들어갔습니다. 어지간한 독립 영화 한편을 찍을 수 있는 금액이죠. 화면에서 잠시 스쳐 지나가는 소품 하나에, 그 정도 돈을 투자하는 영화사는 한국에서 우리뿐입니다."

자부심이 느껴지는 김팀장의 말에, 수빈이 고소를 지으면서 대꾸했다.

"뛰어난 소품 제작을 위해 불타오르는 김팀장을 말릴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적절한 선은 지켜주세요. 흉터는 아주 마음에 듭니다. 다음으로 넘어가죠."

"네. 알겠습니다. 극중 주인공은 자신이 센티피드라고 불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네처럼 보이는 흉터를 문신으로 가리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장미 문신을 하게 됩니다. 지네 몸통처럼 보이는 꾸불꾸불하고 굵은 흉터는 장미 줄기로, 지네 발처럼 보이는 옆으로 삐쭉삐쭉 삐쳐 나온 흉터들은 장미 가시로 바꾼 거죠. 문신 쪽은 저도 전문분야가 아니라서, 이 자리에 와 계신 문신 전문가 분과 함께 협업을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종류의 다양한 문양을 검토해봤습니다."

스크린에 수십 장의 장미 문양이 떠올랐다.

"일차적으로 고른 문양을 가지고, 소품팀 자체적으로 회의를 거쳤습니다. 그 결과 최종적으로 5장의 문양을 골랐습니다."

스태프가 수빈 앞으로 출력된 5장의 장미 문양을 내밀었다.

"심미안(審美眼) 측면에서 대표님 만한 분이 또 있겠습니까? 대표님께서 직접 하나를 골라주시면, 저희가 바로 작업에 들어갈 생각입니다."

"작업 시간은 얼마나 걸립니까? 며칠 뒤면 다 같이 미국으로 출국해야 된다는 건 알고 계시죠?"

"네. 알고 있습니다. 장미 문신용 스티커도 3D 프린터로 작업을 할 예정이기 때문에, 넉넉잡고 이틀이면 충분합니다."

문양을 살펴보던 수빈이 질문을 툭 던졌다.

"이팀장. 장미 꽃잎 수가 몇 개인 줄 혹시 아시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모릅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도 다 모를 겁니다. 같은 장미라도 기온과 토양에 따라서 꽃잎 개수가 바뀐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장미에 가시가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알죠."

수빈이 하나의 문양을 집어 들었다.

"전 이 문양이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이 장미 문양에서 가시 부분을 좀 더 강조했으면 좋겠습니다. 붉은 피가 묻어 있다든지 아니면 핏방울이 맺혀있다든지 해서요. 누가 보더라도 한눈에 장미란 걸 알아볼 수 있게 말입니다. 수정하는데 오래 걸리나요?"

이팀장 대신 문신 전문가가 답했다.

"그 정도 수정이라면 두세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좋습니다. 그럼 오늘 오후까지 저에게 수정된 문양을 보내세요. 제가 수정된 문양을 보고 확답을 드릴 테니, 그런 다음 작업에 들어가시길 바랍니다."

수빈의 말에 이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다른 안건이 없으면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출국 전까지 처리해야 될 일이 산더미라서요."

회의장을 나온 수빈은 다른 팀과의 미팅을 위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8월 21일 화요일

출국 전까지 수빈은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냈다. 예정보다 크랭크인이 열흘 늦어진 걸 만회하기 위해서, 출국 전까지 밤잠을 설쳐가며 작업에 매달렸다. 세트촬영과 편집 그리고 영화음악 제작 등에 매진하던 수빈은,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대표님. 대표님.."

수빈은 자신의 몸을 흔들며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백성철 대신 미국에서 비서 역할을 겸하기로 되어 있는 박상민 지원팀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도착했습니까?"

"네. 조금 있으면 뉴욕 공항에 착륙한다고 안내방송이 나왔습니다. 많이 피곤하셨나 봅니다? 한 번을 안 깨시고 주무시던데요."

"요 근래 좀 무리를 하긴 했죠."

"그러다 쓰러지시기라도 하면.. 영화사 문 닫아야 됩니다. 아시잖습니까? 다들 대표님만 믿고 있다는 걸 말입니다. 건강을 챙기셔야죠."

수빈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1년에 영화를 2편씩 찍는다는 게 무리 없이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많은 부분들을 간부들이나 직원들에게 넘겼지만.. 아직까지도 제가 직접 챙겨야 하는 일들이 수두룩합니다. 당분간은 어쩔 수 없어요."

수빈이 목을 주무르며 말을 이었다.

"박팀장이 당장 해야 하는건 제 건강 걱정이 아닙니다. 어서 빨리 성장을 하셔야죠. 그래야 제가 해야 할 일들을 믿고 맡길 거 아닙니까? 그게 제 건강을 지켜주는 겁니다."

입술을 살짝 깨물은 박팀장이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듯 대답했다.

"저 뿐만 아니라 모든 직원들이 대표님의 말 한마디,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대표님을 롤모델로 삼고, 다들 성장을 위해서 열심히 발버둥 치고 있습니다. 조금만 지나면.. 결실을 보실 수 있을 거라 여겨집니다."

"알고 있습니다. 다들 열심히 노력 중이라는걸.. 이번에 신작을 찍으면서 국제적인 촬영 경험까지 가지게 되면, 내년에는 제가 한결 편해질 거라고 봅니다. 연말에 단편 영화 심사를 통해 감독을 뽑고 나면, 지금처럼 제가 밤을 새가며 1년에 두 편씩 무리하게 찍을 필요도 없어지겠죠. 영화사에서 내놓을 물량 자체가 충분해질 테니까요. 세계 유수의 영화사와 경쟁하려면 기본적인 물량이 반드시 받쳐줘야만 해요. 그걸 위해서 새로운 직원들도 대거 채용을 했고요. 올 한 해만 제가 버티면 됩니다. 그리고 전 아직 젊어요. 그러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연말에 있을 단편 영화 심사 때, 박팀장이 어떤 작품을 보여줄지 개인적으로 기대가 아주 큽니다. 믿고 있겠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대표님."

수빈은 박팀장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잠시 후 미국 동부 시간으로 오후 3시를 막 넘어갈 무렵, 공항에 도착한 수빈은 짐을 찾은 다음 영화사 직원들과 함께 입국 심사대를 프리 패스로 통과하고 있었다. 옆에서 걸어가던 박팀장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표님의 명성이 이제 미국에서도 통하나 봅니다. 입국심사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미국에서, 별다른 검문검색도 없이 그냥 다 통과를 시켜주는데요. 앞에서 공항 직원이 가이드까지 해주고요."

수빈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요. 아무리 제가 이름값이 생겼다고 하지만, 세계 제일이라고 자부하는 미국에서 일개 영화감독에게 이런 특별 대접을 해줄 거 같습니까? 거기다 우리들은 동양인입니다. 인종차별이 극심한 나라가 미국이에요."

"그럼 왜.."

"뱀의 길은 뱀에게.. 제가 세계 여러 나라를 재미로 출장 다닌 건 아니죠. 나 혼자 잘났다고, 나 혼자 다 먹겠다고 독불장군식으로 행사하면 절대로 세계와 경쟁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극심한 견제만 받게 되죠. 적절한 타협과 수익 배분이 그래서 필요한 겁니다. 아마도 조만간 연락이 올 거예요."

잠시 후 미국에서의 첫 번째 촬영지인 뉴욕 시내의 브루클린으로 이동하는 밴 안에서, 수빈은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비행은 편안했는가?]

"네. 편안히 잘 왔습니다. 그리고 손을 써주신 덕분에 입국 심사대도 편하게 잘 통과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떻게 알았나?]

"뻔하지 않습니까? 머나먼 이국땅인 미국에서, 뱅상 회장님 말고 누가 또 그런 친절을 베풀어 주겠습니까?

[이것 참.. 그걸로 생색을 좀 내보려고 했더니 망해버렸군. 할 수 없지. 딴 걸로 생색을 내야겠는걸. 블라시오랑 쿠오모에게 내가 단단히 부탁을 해놨네. 강감독이 촬영하는데 있어서 그 어떤 불편함도 생기지 않도록 해달라고 말이야.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지체하지 말고 바로 나에게 전화를 주게나.]

"블라시오라면.. 빌 드 블라시오 뉴욕 시장을 말하는 거로군요. 근데.. 쿠오모가 누굽니까?"

[앤드류 쿠오모. 현직 뉴욕주 주지사라네. 그 두사람이 협조를 하는 이상, 촬영하는데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을 걸세.]

"배려에 감사드려야겠군요."

[좋아. 그럼 이제 물어봐도 되겠지?]

"뭘 말입니까?"

[시치미 떼기는.. 알면서 왜 그러나? 그런 쪽으로는 자네가 전문가 아닌가.]

"흠. 지금 제작하는 영화의 흥행 여부를 묻는 거라면.. 제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라이프보다 더 잘 될 거로 생각된다고 말하고 싶군요."

[정말이지?]

"네. 저도 기대가 큽니다."

[좋았어! 예전처럼 배급은 우리 쪽에 넘겨줄 거지?]

"조건만 맞는다면 못할 이유도 없지요."

[이런.. 왜 또 심술인가. 뭐가 더 필요한가? 제작비? 아니면 배우? 내가 뭘 도와주길 바라는지 말해보게나.]

수빈이 잠시 침묵을 지킨 다음 입을 열었다.

"공정한 경쟁과 명예를 바랍니다."

전화기 너머 뱅상 볼로레 회장이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대답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는 거지?]

"맞을 겁니다."

[좋아. 공정은 내가 장담하지. 결과는 보장 못하겠지만..]

"결과까지 책임져 주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건 제 능력이죠. 그리고.. 그럴만한 힘도 없잖습니까?"

[뭐 그렇긴 하지. 아무튼.. 이제 넘겨주는 거지?]

"네. 그러도록 하죠."

[알겠네. 언제쯤 개봉할 수 있을 거 같은가?]

"빠르면 12월 초, 늦으면 12월 중순으로 보고 있습니다."

수화기 너머 뱅상의 목소리가 놀라움에 가득 찼다.

[12월이라니.. 빨라서 좋군. 영화 찍기 시작한 지 이제 겨우 한 달이 넘어가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제가 가진 장점이죠. 그 정도 능력은 있어야 먹고살지 않겠습니까?"

[돈이라면 넘치도록 있으면서 엄살은.. 아무튼 강감독이 빈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내가 잘 알지. 그럼 이쪽에서도 12월에 맞춰 미리 준비를 해두겠네. 다시 또 통화함세.]

"네. 그러시죠."

잠시 후 수빈 일행은 브루클린 촬영지에 도착했다. 미국 경찰차 3대가 벌써부터 현장을 통제하고 있는 중이었다.

"우와. 미국 경찰까지 우리를 도와주는군요."

놀란 얼굴로 말하는 박팀장을 보며 수빈이 대꾸했다.

"제가 거래하는 양반이 그 정도 힘은 가지고 있으니까요. 안 그러면 수익을 분배하는 의미가 없죠. 이번에 라이프 배급을 하면서, 그쪽에서도 몇 천억은 족히 벌었을 겁니다. 이 정도 협조는 당연한 거죠. 전 죽 쒀서 개 주는 일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수빈이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뉴욕은 서울보다 북쪽에 위치한 도십니다. 밤이 빨리 오죠. 서둘러야겠는데요."

"네. 알겠습니다."

박팀장이 앞으로 뛰어나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 다들 빨리 준비합시다. 곧 밤이 찾아옵니다.

잠시 후 그라피티가 잔뜩 그려진 브루클린의 건물 벽 앞에서, 미국에서의 첫 촬영이 시작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