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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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수요일
영상 속에서 굵직한 남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다음은 영화계 관련 소식입니다. 한국 영화계에 또 하나의 경사가 생겼죠?"
김구라의 질문에 미모의 여성 리포터가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한국 영화계가 세계에 자랑하는 신진 영화감독이죠. 강수빈 영화감독이 얼마 전 스위스에서 열렸던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라이프'로 황금 표범상을 수상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황금 표범상 그러니까 영어로는 골든 레오파드(Golden Leopard)가 되겠죠. 그 상이 그랑프리 인걸로 알고 있는데요?"
"맞습니다. 대상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한국인들에게는 조금 낯선 영화제인데, MC이신 김구라씨는 잘 알고 계시는군요?"
"배용균 감독이라고 계세요. 원래 미술 쪽을 전공하신 분인데.. 그분이 연출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예전에 그 영화가 황금 표범상을 받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제가 그 영화를 본 게 대학생 때였으니까, 한 30년은 된 거 같은데요."
"정확합니다. 배용균 감독 이후로 29년 만에 강수빈 감독이 황금 표범상을 수상했습니다."
"반가운 소식이군요. 수상 영상이나 강수빈 감독의 인터뷰 같은 게 있나요?"
"안타깝게도 없습니다. 강수빈 감독이 신작 영화 작업으로 너무 바빠서, 아쉽게도 인터뷰 영상을 담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영화제가 열렸던 스위스의 영화 전문매체인 필름 익스포즈(Film Exposure)에 실린 기사를 읽어드리는 걸로 대체하려고 합니다."
"그래요? 아쉽지만 뭐 상관없을 거 같긴 합니다. 제 생각에 올 한 해는 라이프와 강수빈 감독의 해가 될 거라서, 조만간 또 다른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했다는 소식들이 줄줄이 들어올 거라 예상합니다. 그럼 한번 읽어봐주시죠."
"네. 알겠습니다. 다음은 필름 익스포즈에 실린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조직 위원장인 마르코 솔라리(Marco Solari)의 인터뷰 전문입니다."
화면에는 자막이 흐르고, 리포터의 음성도 같이 들려왔다.
- 올해 황금 표범상을 수상한 '라이프'가 감동적이고 훌륭한 영화라는 걸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블록버스터 영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역대 전 세계 영화 흥행 랭킹 20위 안으로 진입한 걸로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 이번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깜짝 놀란 사실들이 몇 가지 있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 그리고 인생에 대한 혜안과 철학을 간직한 이 영화가 불과 20대 초반의 젊은 감독에 의해서 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거짓말같이 들리겠지만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 심오한 영화가 재밌기까지 한다는 건 더더욱 경이롭다. 믿기지 않는 연기력을 보여준 남자 주인공이 영화감독 자신이라는 건 마치 크리마스 선물처럼 심사위원들을 흥분시켰다. 마지막으로 나를 포함한 심사위원들은 이런 뛰어난 영화가 아직 상을 단 하나도 수상하지 않았다는 기적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 우리 로카르노 국제영화제가 라이프와 라이프를 제작한 강수빈 감독에게 첫 번째로 상을 안겨주는 영광을 가지게 되어서,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의 조직 위원장으로서 더없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어제 SBS에서 방송되었던 '본격연예 한밤'인가 보네요?"
KBC 방송국 회의실에서 박지영 피디를 기다리고 있던 수빈은, 핸드폰으로 보고 있던 영상을 정지시키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제가 어제는 바빠서 보지를 못했거든요."
박지영 피디가 수빈과 마주 보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강감독님께 감사드려요. KBC에 출연 중이어서 SBC 쪽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셨다고 들었어요."
수빈이 고개를 저었다.
"박피디님이 잘못 알고 계시는군요. 정말로 바빠서 못한 겁니다. 근데.. 오늘 갑자기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뭡니까?"
"한참 바쁘실 텐테 시간을 뺏어서 죄송해요. 여왕들의 게임 시청률은 알고 계시죠?"
"첫방이 18프로, 그다음 화가 24프로였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그 뒤로는 제가 바빠서.."
"며칠 전 방영된 3화가 28프로를 기록했어요. 1차 탈락자를 가릴 CF 영상이 나가는 화는 30프로가 넘을 걸로 예측되고 있어요."
수빈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걸 아시는 분이 절 여기까지 오라고 하신 겁니까? 신작 영화 찍는 와중에 CF까지 찍고, 거기에 편집까지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제가 지금 편집실에서 CF 영상을 편집하다 왔다는 건 알고 계시겠죠?"
"여왕들의 게임 담당 촬영기사들과 작가들이 그쪽 편집실에서 사흘째 죽치고 있는데.. 담당 피디인 제가 어떻게 그걸 모르겠어요? 하지만 전 월급쟁이에 불과하잖아요. 위에서 까라고 말하면 까야 된다고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여왕들의 게임 방송 회차를 어떡하든 늘이라는 사장님의 강력한 지시사항이 하달되었어요."
듣자마자 수빈이 즉답했다.
"못합니다."
"위에서는 그러더군요. 출연료를 따불로 지불하더라도, 회수를 반드시 더 늘이라고.."
수빈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가 돈 따위에 넘어갈 걸로 보이십니까?"
"아뇨. 들리는 이야기로는 KBC 방송국을 인수할 만큼 부자시라고 하던데, 출연료 몇 푼에 넘어갈 리가 있겠어요?"
"그건 좀 과장된 것 같은데요. 아무리 저라도 공영방송인 KBC를 인수하기에는 무리죠. 종편 정도면 몰라도.. 근데.. 그걸 아시는 분이 왜 보자고 하신 겁니까?"
박피디가 수빈을 지그시 응시하며 말했다.
"예전에 제가 강감독님을 철저히 조사했다고 말한 적이 있었죠? 제 조사에 따르면 강감독님이 관심 있는 건 딱 두 가지예요. 자신이 찍는 영화 그리고 영화사. 이 두 가지뿐이죠."
"그래서요? 그 정도는 제 주변에 계시는 분들이라면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멍청한 윗대가리들은 돈이면 다 되는 줄 알지만.. 전 아니에요. 강감독님 같은 분은 돈만으로는 절대로 설득할 수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죠. 그래서.. 특별한 걸 준비했어요."
박피디가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어 내밀었다. 수빈이 의문 어린 표정으로 서류 봉투를 집으며 물었다.
"이게 뭡니까?"
"새로운 방송 프로그램 제안서죠. 제 예측으로는.. 강감독님 스스로도 이런 프로그램을 찍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번 정도는 반드시 해보셨을 거라고 봐요. 하지만 도저히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서 포기했겠죠. 그걸 바쁜 강감독님 대신 제가.. 이 박지영이 책임지고 제작해드리겠어요."
"말씀은 거창하신데.. 지금 찍는 프로도 시간상 하고 싶지 않은 게 접니다. 박피디님과의 약속이 없었다면, 애초에 시작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런 제가 굳이 새로운 프로를 들어갈 이유가 없죠."
"일단 한번 읽어나 보시죠."
박피디의 성화에 수빈은 마지못해 봉투에서 제안서를 꺼내어 읽어보았다. 첫 장을 읽은 수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더니, 입에서는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으음.."
"제 말이 맞죠? 강감독님이 하시고 싶은 프로그램 아닌가요?"
수빈이 서류를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이 바닥에는 비밀이란 게 존재하기는 하는지 의문이군요."
"당연한 말씀을.."
"박피디님이 제 마음을 제대로 읽으신 건 맞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영리하고 감각이 날카로우신 것 같은데요."
박피디가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칭찬 감사드려요."
"저도 이런 프로그램을 생각 안 해본 건 아닙니다. 하지만 몇 가지 문제점이 있어요. 비슷한 포맷의 방송을 종편에서 이미 방송한 적이 있다는 점. 그리고 시청률이 바닥이었다는 점. 아마 시청률이 0.8프로에서 0.9프로 사이를 왔다 갔다 했을 겁니다. 한마디로 폭망했죠. 마지막으로 제작비가 지나치게 많이 들어간다는 점입니다."
수빈의 지적에 박피디가 하나씩 또박또박 반박을 하고 나섰다.
"여왕들의 게임 때도 말씀드렸지만, 방송 프로그램의 포맷이란 건 내용을 살짝 비틀면 얼마든지 제작 가능해요. 그리고 종편 나부랭이 하고 국영방송을 비교하는 건 KBC에 대한 모독이죠. 시청률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마지막으로 제작비 문제는.. 강감독님이 출연하시겠다는 한마디만 해주시면, 제가 책임지고 해결할 수 있어요. 강감독님 이름 석자가 도깨비방망이보다 더 위력적이라는 걸 잘 모르시는 모양이에요?"
"흠.."
수빈이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정리를 끝낸 수빈이 도리질을 했다.
"그래도 무립니다. 지금 스케줄상 여왕들의 게임을 연장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당장 다음 주면 제가 미국으로 현지 로케를 떠나야 해요. 미국과 캐나다를 거쳐서 이탈리아까지.. 한 달 가까이 한국을 비워야 합니다. 그 일정들은 제가 조정하고 싶다고 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아쉽지만.. 저로서는 힘들 것 같습니다."
수빈의 거절 발언에도 불구하고, 박피디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반대로 제안하죠. 강감독님은 원래 정해진 일정대로 본인의 일을 진행하세요. 여왕들의 게임도 애초에 정해진 날짜에, 정해진 일정까지만 출연을 해주시면 됩니다. 그 대신 계약서에 못 박아 놓은 16회차까지만 방영한다는 문구를 수정해 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박피디의 말에 뭔가를 깨달은 듯, 수빈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보니.. 그 부탁을 하고 싶어서 절 여기까지 오라고 한 거였군요?"
"사실은.. 그래요. 회차를 늘이는 방법은 강감독님이 도와주시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능해요. 하이라이트를 꾸려도 되고, 탈락자 특별 편을 편성해도 되고, 여성 출연자를 스튜디오에 모셔서 인터뷰를 진행해도 되죠. 회차를 늘이는 방법 따위는 제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그놈의 망할 영화사 법무팀이 작성한 계약서 때문에, 손만 빨고 아무것도 진행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요."
수빈이 박피디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마디 툭 던졌다.
"연봉이 얼마 정도 됩니까?"
박피디가 흠칫하며 되물었다.
"연봉? 제 연봉요? 갑자기 왜.."
"박피디님을 영화사로 스카우트를 할까 해서요. 이직(移職)을 한번 생각해 보시죠? 지금 받는 연봉의 최소 3배 이상을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당연히 억대 연봉이겠죠. 보너스도 섭섭지 않게 드리겠습니다. 제가 운영하는 수박 프로덕션 보너스가 대박이라는 건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계시겠죠?"
이번에는 반대로 박피디가 신음성을 흘렸다.
"흐응.."
"제가 인재 욕심이 좀 있습니다. 오늘 보니 박피디님이 욕심나네요. 영화계 쪽에서 본인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해 보시는 건 어떨까 합니다. 상당히 잘 하실 거로 보이는데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당장 대답을 안 하셔도 됩니다. 시간을 두시고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수빈이 서류 봉투를 천천히 집어 든 다음 말을 이었다.
"법무팀에게는 제가 따로 이야기를 해두겠습니다. 20화 정도까지는 박피디님이 알아서 연장을 하셔도 좋습니다. 제가 더 출연을 안 해도 된다는 점과 새로운 제안서가 맘에 들어서 허락해 드리는 겁니다."
"감사 드려요."
"새로운 제안서는 제가 천천히 검토를 해보겠습니다."
수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박피디도 덩달아 일어났다.
"오늘 한 스카우트 제안은 1년 정도는 유효합니다. 생각해 보시길.. 그럼 전 바빠서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까보다 한층 더 공손해진 박피디가 인사를 했다.
"네. 강감독님.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그리고 제안 감사합니다."
시간이 흘러 영화사 편집실로 돌아간 수빈은, 날을 꼬박 새우며 CF 영상 편집 작업을 마쳤다. 영상을 방송 촬영팀에게 넘긴 수빈은 곧바로 본사 건물로 이동했다.
8월 16일 목요일
잠 한숨 못 잔 수빈은 아침부터 예정되어 있던 회의에 참석했다.
수빈은 이성호 소품팀장과 소품팀 스태프들 그리고 타투(Tattoo) 전문가과 함께 하는 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