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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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3일 월요일
남양주 종합촬영소 한쪽에 마련된 사무실.
고사상이 차려지길 기다리며 수빈과 성강호 그리고 마동식이 같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마동식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목이 여왕들의 게임이던가요? 그저께 방영된 강감독님이 출연하신 새로 나온 주말 예능 말입니다. 아주 재밌게 잘 봤습니다."
수빈이 쓰게 웃으며 대꾸했다.
"바쁘실 텐데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미있었다고 하시니 그나마 다행이네요."
"사람들 관심이 장난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본방을 챙겨 봤습니다. 프로그램 초반에 여왕들이라며 여성 출연자분들을 소개하는 영상을 보고서는, 강감독님이 미녀들에게 둘러싸여서 아주 행복하게 찍으시겠구나 했는데.. 방송하는 내내 얼굴이 아주 그냥.."
"썩었죠? 저도 본방을 봤는데.. 제가 봐도 좀 심하게 썩었더군요. 초반에는 좀 그렇게 보일 겁니다. 나중에는 좀 나아질 거니까, 시간 나시면 봐주세요."
"당연히 본방사수를 해야죠. 근데.. 괜찮겠습니까? 이번 영화는 해외 로케가 굉장히 많은 걸로 아는데, 영화 촬영하면서 예능까지 병행하시려면 많이 힘드시겠습니다."
"아. 괜찮습니다. 월드컵 때문에 원래 예정보다 방영 일자가 좀 늦어져서요. 미리 찍어놓은 영상이 있어서, 3주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들어와서 중간중간에 틈틈이 찍으면 충분할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마동식은, 아까부터 기분이 별로 안 좋은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성강호에게 물었다.
"성강호 형님은 강감독님이 출연한 예능을 안 보신 모양입니다?"
"나? 안 봤지. 그런 거 봐서 뭐 하게. 어차피 예능이잖아. 그것보다.. 마배우. 얼마 전 개봉한 '나는 챔피언이다' 영화 흥행이 아주 잘 됐다면서? 축하해."
마동식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형님. 그날 오디션 장에서 제가 대거리 좀 했다고 지금 저 놀리시는 거죠?"
성강호가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아냐. 내가 왜 마배우를 놀리나? 손익분기점 넘겼다는 뉴스를 봐서 하는 소리라고."
"손익분기점이 175만이었는데.. 112만 찍고 스크린에서 내렸습니다. 형님."
"그래? 내가 본 뉴스에서는 100만이 손익분기점이라고 하던데. 내가 잘못 본 모양이야. 제작사에서 손해가 컸겠는걸. 영화 제작이 이래서 도박이라니까.. 너무 실망하지 말라고. 다음번에는 틀림없이 잘 될 거야."
위로하는 척 마동식의 염장을 제대로 지른 성강호가, 고개를 슬쩍 돌려 타깃을 수빈으로 바꿨다.
"강감독. 며칠 뒤에 스위스로 촬영을 간다며?"
"네. 다음 주 목요일에 스위스 로잔으로 출발합니다. 잡힌 일정이 일주일 조금 넘는데.. 로잔에 도착하면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이틀간 촬영을 진행할 계획입니다. 그게 다 끝나면 IOC(국제올림픽위원회) 본부를 배경으로 액션 신을 좀 찍고요. 마지막으로는 로카르노에 들러서 시내 풍경을 좀 담고 올 생각입니다."
"노트르담, 로테르담, 노틀담.. 유럽 쪽 성당들은 뭔 놈의 이름들을 다들 그렇게 비슷하게 짓는지 원. 걔네들은 헷갈리지도 않나 봐?"
수빈이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성강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형님. 노트르담은 프랑스어로 귀부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 근데.. 그게 왜?"
"가톨릭에서 귀부인이란 성모 마리아를 뜻하는 겁니다. 노트르담 비슷한 이름의 성당들은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있거나 성모 마리아와 관련이 깊은 성당이라는 뜻이에요."
"오호라. 그런 뜻이 있었군."
성강호의 대답에 수빈이 피식 웃으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호라는 무슨.. 이 양반이 골이 잔뜩 났군. 뻔히 아는 걸 모르는척하다니. 이유야 뭐 뻔하겠지. 하여간 눈치도 빠르다니까..'
수빈이 성강호를 슬쩍 찔렀다.
"형님. 안 그래도 형님 만나면 제가 여쭤볼게 있었는데.."
"뭔데?"
"우리 제작진에서 형님을 해외 로케에 같이 모시고 싶어 했었는데 말이죠. 마배우는 시간이 된다고 해서 캐나다 촬영 일정을 잡아놨는데.. 형님은 도통 시간이 안 난다고 해서 안타까워하더라고요. 아니 영화배우가 뭐가 그렇게 바쁘셔서, 해외 촬영을 못 나가신다는 겁니까?"
성강호가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 바쁘긴 개뿔이 바빠. 난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절대 없다고. 내가 강감독처럼 예능에 출연하는 것도 아니고.. 바쁠 이유가 없잖아?"
수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래요? 아무래도 중간에 무슨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 이거 회사로 돌아가면 지원팀장을 좀 족쳐야겠군요. 형님. 뉴욕 어떻습니까?"
"뉴욕? 미국 뉴욕?"
"네. 당연히 미국에 있는 뉴욕이죠. 이번 영화에서 형님이 맡은 역할이 차이나타운에 있는 조직의 보스 아닙니까? 뉴욕에 있는 차이나타운에서 촬영 한번 하시죠."
"나야 좋지. 근데.. 세트촬영하기로 잡혀 있는 걸 이렇게 갑자기 바꿔도 되는 건가?"
"제가 감독이고 제작자입니다. 누가 뭐라 그럽니까? 그리고 어차피 차이나타운에 촬영 일정이 잡혀있어서 별문제 없습니다. 시간 괜찮겠습니까?"
"나야 당연히 괜찮지."
"좋습니다. 그럼 제가 지원팀장에게 말해서, 형님 매니저랑 이야기해서 정확한 스케줄을 잡으라고 하겠습니다. 오래간만에 뉴욕 구경이나 좀 하시죠."
얼굴이 환해진 성강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굳이 기다릴 필요 없잖아? 매니저 보고 당장 전화하라고 말을 해야겠어. 지원팀장이면.. 박상민 그 친구랑 통화하면 되는 거지?"
"네. 맞습니다. 형님. 그 친구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밖으로 후다닥 뛰쳐나가는 성강호를 보며 마동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형님이 해외 로케에 왜 저렇게까지 욕심을 내시죠? 숱하게 나가보셨던 양반이.. 이유를 모르겠네요. 강감독님은 혹시 아십니까?"
"제가 형님을 배려한 게 영 맘에 안 드나 봅니다."
"배려요?"
"네. 제 입장에서는 나름 배려를 해드린 거죠. 강호 형님이 뭐 외국 나갈 여유가 안되셔서 저러시겠습니까? 시나리오를 보셔서 알겠지만, 이번에 형님이 맡으신 역할이 조폭 두목이다 보니 거친 액션 신들이 좀 있습니다. 형님 나이가 어느덧 쉰이 훌쩍 넘었잖아요? 마음은 가는데 몸이 말을 안 듣기 시작하는 나이죠. 액션 연기하다가 부상당하기 십상입니다. 다치면 회복도 느리고요. 그래서 현지 로케를 빼고, 국내 세트촬영으로 밀어 넣었는데.."
그제야 이해를 했다는 듯 마동식이 탄성을 터뜨렸다.
"아하. 그래서.."
"똥개도 자기 집 앞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한국에서 찍으면 제작진에서 케어해드리기가 편하거든요. 급하면 대역을 구하기도 쉽고요. 하지만 해외로 나가면 여러 가지 불편한 점들이 많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시간도 부족하고, 장소에도 제약이 있고, 대역을 구하기도 어렵습니다. 괜히 일정에 쫓겨서 무리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죠."
"그러게 말입니다. 외국은 다쳤을 때 병원 가기도 불편하죠."
"그래서 세트촬영으로 정해놨는데.. 본인은 아직 정정하다고 생각하시는지 그런 배려가 맘에 안 드시는 모양입니다. 뭐 어쩌겠습니까. 배우가 원하면 들어드려야죠. 정도홍 감독님에게 말해서 출국하기 전까지 액션 스쿨에서 빡세게 굴리라고 말을 해놔야겠어요. 부상을 방지하려면 몸을 최대한 풀어놔야죠."
마동식이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미국 로케면 아직 한 달 가까이 남았는데.. 충분히 굴릴 수 있는 시간이겠군요."
수빈도 슬쩍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입에서 곡소리가 나도록 아주 제대로 굴려드려야죠. 정감독님께 정중하게 부탁을 드려야겠어요."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백성철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대표님. 고사상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수빈은 고사를 지내기 위해 마동식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7월 24일 화요일
크랭크인 다음날 수박 프로덕션에서는 영화사 덩치를 키우고 다작(多作) 제작을 위해서, 오상무의 지휘 아래 본격적인 신규 직원 채용에 나섰다. 엄청난 숫자의 지원자들로 인해, 영화사 직원들이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7월 25일 수요일
이틀 정도 제작진들과 손발을 맞추면서 장비 점검 및 신규 시스템 적응 기간을 거친 수빈은, 본격적인 영화 촬영에 돌입했다.
7월 31일 화요일
일주일가량을 팽석산과의 액션 신 위주로 촬영을 진행한 수빈은, 스위스로 출국 전 제작진 전원에게 하루 휴식을 주었다. 그런 다음 수빈은 편집실로 직행했다.
8월 2일 목요일
출국 전에 편집본을 넘기기 위해서 이틀간 편집실에서 먹고 자고 한 수빈은, 1차 완성본을 김종호 페스 관리팀장에게 넘겼다. 그리고 곧바로 스위스 로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8월 4일 토요일 스위스 로잔.
로잔 구시가지 언덕 위에 우뚝 솟은 노트르담 대성당. 스위스에서도 손 꼽히는 고딕건축물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성당 내부가, 난데없는 검은색 머리의 동양인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영화 촬영 준비로 한창인 스태프들을 바라보며 유아영이 입을 열었다.
"스위스에서도 알아주는 명소라고 하던데.. 용케도 촬영 허락을 받아냈네요?"
옆에 서있던 수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제가 나름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영화감독이잖습니까? 그리고 지금 스위스에서는 로카르노 국제 영화제가 한창 진행 중입니다. 제가 제작한 '라이프'가 저녁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스크린이라는 노천극장 피아차 그란데(Piazza Grande)에서 상영되고 있죠. 제 얼굴이 뉴스에도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스위스는 땅이 좁아요. 우리나라의 반도 안되죠. 여기 성당에 계시는 분들 중 몇 분들도 로카르노로 가셔서 라이프를 직접 보셨다고 하더군요. 제가 사인까지 해드렸습니다. 그래서 협조를 얻기가 더 쉬웠죠."
"설마.. 노린 건가요?"
"당연하죠. 제가 잡은 해외 로케 스케줄과 세계 유수의 영화제 기간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우리 영화사가 아직 지명도나 섭외력이 턱없이 부족해서요. 영화제에 출품한 라이프 핑계를 대야 그나마 촬영 협조를 얻어내기 쉬울 것 같아서, 일정을 힘겹게 끼워 맞춘 겁니다."
유아영이 묘한 눈빛으로 수빈을 바라보았다.
"머리를 아주 잘 썼네요. 그리고.. 정말 많이 변했네요. 예전에 나에게 껄떡대던 그 젊은이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질 않고, 젊고 총기 넘치는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제 앞에 서 있네요."
수빈이 고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젊었을 때의 치기로 봐주시길.. 어젯밤 숙소는 편하셨습니까?"
"네. 아주 좋았어요. 여름날의 스위스 공기는 깨끗하고 싱그럽더군요, 경치도 더없이 아름답고요."
"눈 덮인 스위스 겨울도 묘미가 있지만, 초록이 우거진 스위스 여름도 아주 좋다고 들었습니다. 부디 편하게 즐기시다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유아영이 사뭇 예의를 갖추면서 정중히 대답을 했다.
"강감독님 덕분에 2박 3일 잘 쉬다 갈 것 같아요. 감사드려요."
"별말씀을.. 연말에 있을 단편 영화 촬영 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것 때문에 물어볼게 있어요. 다섯 분 중에 누가 유력한가요? 그중에 몇 분은 탈락할 거라 들었어요. 이왕이면 가능성 높은 분 작품에 출연하고 싶어요."
"사내 비밀인데.. 잘도 알고 계시는군요."
"이 바닥 잘 아시잖아요? 요즘 영화계에서 가장 핫한 게 그쪽 영화사 관련 소식들인데.. 영화인이라면 모를 리가 없죠."
수빈이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현재로서는 저기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있는 박수종 영상팀장과 한국에서 직원들을 뽑고 있을 장진석 영화감독이 가장 유력합니다."
"장감독님이라면.. 강감독님과 달빛을 공동 연출하신 그분?"
"네. 맞습니다."
"그렇군요. 잘 알겠어요."
"좋은 연기 기대하겠습니다. 오늘도, 단편 때도 말입니다."
"열심히 할게요. 강감독님. 근데.. 왜 노트르담 성당에서 찍는 건가요?"
"장미(薔微)와 관련된 복선을 깔기 위해서죠."
"장미? 장미꽃 말하는 건가요?"
"네. 카메오다 보니 전체적인 시나리오를 못 보셔서 잘 모르시겠군요. 제가 연기를 하는 킬러가 극 중에서 후각이 아주 예민한 걸로 나옵니다. 그런 후각을 가지게 된 원인이 어릴 때 겪었던 트라우마 때문입니다."
"트라우마?"
"네. 어릴 때 감금을 당하고 학대를 당한 경험 때문이죠. 감금된 지하실로 학대를 하기 위해 가끔씩 찾아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지하실로 찾아올 때, 반드시 온몸에 장미 향수를 뿌리고 옵니다."
"무슨 뜻인지는 이해했어요. 근데.. 그거랑 성당이랑 무슨 상관인가요?"
"이런.. 아직 못 보신 모양이군요? 노트르담 성당에는 전 세계에서 알아주는 아름다운 장미가 한 송이 피어 있습니다. 장미의 창이라고, 스테인드글라스로 장미 문양이 그려져 있는 창이죠."
"아.."
"예로부터 스위스에서 전쟁이 나면 하나하나씩 떼어서 들고 도망갔다가, 전쟁이 끝나면 다시 들고 와서 붙였다는 창입니다. 그 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성당 벽에 비칠 때면, 경이롭기까지 하죠. 스위스인들의 자부심이 깃든 창입니다. 시나리오를 수정하면서 장미라는 소재를 떠올렸을 때, 반드시 여기에서 찍겠다고 결심을 했었습니다."
"그러셨구나.."
수빈이 고개를 슬쩍 돌려 빛이 들어오는 성당의 벽 쪽을 쳐다보았다.
"여름날이라 그런지 다행히 햇빛이 아주 좋네요. 좋은 영상을 찍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아영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예쁘게 잘 찍어주세요. 세계적인 영화감독님."
"아무렴요. 믿고 맡겨 주시죠."
잠시 후 페스 단말기를 든 수빈이 스테프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성당을 빌릴 수 있는 날이 오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1시간만 지나면 채광 각도가 틀어져서, 제가 원하는 그림이 안 나와요. 여러 번 다시 갈 여유가 없으니까, 다들 집중해 주시길 바랍니다. 각 팀별로 보고해 주세요."
- 영상팀. 이상 없습니다.
- 조명. 이상 무.
- 음향. 잘 들립니다.
- 진행팀. 준비 완료.
이윽고 메가폰을 든 수빈의 힘찬 목소리가 들려 다.
- 레디. 액션!
그렇게 헤이즈의 첫 번째 해외 촬영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