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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연예인이 되다-210화 (210/236)

#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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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덩이 같은 수빈의 표정을 바라보며, 김성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수빈씨. 그렇게까지 긴장 안 하셔도 돼요. 다들 집 안에서는 더 이상 싸우지 않기로 평화 협정을 맺었으니까요. 촬영하는 것도 힘든데, 분위기까지 안 좋으면 너무 스트레스받는다고 다들 동의를 했어요."

김성희의 말에 수빈이 샛별과 아림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 다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수빈은, 그제야 긴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풀었다.

"휴우.. 정말 잘하셨습니다. 이제 좀 숨통이 트이는 것 같군요."

"맞아요. 우리도 이제 좀 살 것 같더라고요. 근데.. 수빈 오빠. 갑자기 바이올린 연주는 왜 하는 건가요? 우리가 찍을 CF에 사용할 건가요?"

샛별의 질문에 수빈이 고개를 저었다.

"입주한지 이제 하루 지났다. CF는 아직 콘티가 안 나왔어. 아마 주말이나 돼야 완성본이 나올 거야. 이건 신작 영화에 들어갈 음악이지. 머릿속에 있는 영상이랑 맞춰서 변주(變奏)를 해보고 있는 중이었어."

신작 영화에 출연하기로 되어있는 샛별이 궁금한지 계속 질문을 했다.

"시나리오에서 어디쯤에 들어가는 거예요?"

"영화가 처음 시작할 때.. 두 남자가 격투하는 신 말이야."

"아. 뉴욕의 브루클린 다리 밑에서 싸우는 신?"

"맞아. 밤이 깊어갈 때, 두 남자가 칼을 들고 가로등도 없는 건물의 외벽 앞에서 대치하고 있는 신이지. 널찍한 외벽에는 갱들이 총을 들고 싸우는 모습이 그라피티(Graffiti)로 도배가 되어 있고.. 지나가는 자동차 불빛에 언뜻언뜻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는 거야."

수빈이 머릿속으로 영상을 상상하는 듯, 눈을 반쯤 감고 중얼거렸다.

"그때 건물 안에서 한 소녀가 자신의 엄마에게 물어보는 음성이 조그맣게 들려와. 엄마. 나 바이올린 연습해도 돼? 아마도 그 소녀는 조만간 학교에서 자신의 연주회가 잡혀 있을 거야. 소녀의 엄마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하지. 밤이 깊었으니 조용조용 연습을 하라고.. 잠시 후 소녀가 조심스럽게 연주를 시작하는 거야.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말이지.."

"그럼 그 왈츠 음악에 맞춰 두 사람이 결투를 하는 건가요?"

아림의 질문에 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결투를 하는 동안 배경음악으로 왈츠가 흘러나오는 거지."

"생각만 해도 재밌겠는데요. 근데.. 두 사람은 왜 칼을 들고 싸우는 거죠? 그라피티와 대비를 노리는 건 알겠지만.. 현대 사회에서 총을 놔두고 굳이 칼을 들 필요가 있나요?"

김성희의 질문에 수빈이 대답했다.

"아. 그건 주인공의 특성 때문이죠.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슈퍼맨이나 배트맨 같은 초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후각 하나만은 굉장히 예민한 캐릭터로 나오죠. 어린 나이에 겪었던 잔혹한 경험으로 인해서 생겨난 능력입니다. 그래서 미세한 화약 냄새나 총기에 사용되는 기름 냄새를 귀신같이 맡죠. 그래서 평상시에 총을 자주 사용하던 사람이나 총을 품에 소지한 사람은 주인공에게 접근하기가 힘듭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주인공을 적대시하는 조직에서 칼을 귀신같이 쓰는 암살자를 고용하죠. 그 암살자와... 잠깐만.."

수빈이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황급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런.. 아직 제작도 안 끝난 영화의 시나리오를 TV 방송에서 다 까발릴뻔했네요."

"알았어요. 그럼 바이올린 연주나 좀 들려줘요. 그건 가능하잖아요?"

김성희의 말에 아림이 벌떡 일어났다.

"오빠. 내가 피아노 반주를 해줄게. 같이 연주하자."

- 빰빠빠빠. 빰빠. 빰빠.

- 딴다라라. 딴다. 딴다.

잠시 후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앙상블로 울려 퍼지는 부드럽고 경쾌한 왈츠 음악과 함께, 땅콩주택에서 보내는 평화로운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7월 5일 목요일

아침 일찍 수빈은 헤이리에 있는 액션 스쿨에 나갔다. 수빈은 정감독의 사무실에서 팽석상과 단둘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호(五虎)와 단문(斷門)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습니까?"

수빈의 질문에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팽석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하루 종일 고민을 해봤습니다만.. 솔직히 말씀드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가볍게 혀를 찬 수빈이 다시 물었다.

"쯧.. 오호와 단문은 얼핏 들으면 둘인 걸로 생각되지만, 사실상 하나로 연결됩니다. 그래도 모르시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수빈이 살짝 인상을 쓰며 말했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다 떠먹여드려야 하는군요. 이따 대련 때 각오하시길 바랍니다."

"그건 각오하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하나씩 풀어가 봅시다. 단문(斷門)이 무슨 뜻입니까?"

"문을 다 자른다, 막는다, 없앤다의 뜻입니다."

"맞습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그런 뜻이죠. 하지만 오호단문도에서 단문의 속뜻은, 상대방이 빠져나갈 문 그러니까 도망갈 길이나 방위를 모조리 다 없애버린다는 뜻입니다. 살짝 비틀긴 했지만 비슷한 의미죠.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십니까?"

"네. 이해됩니다."

"그럼 발상을 역으로 해보죠. 팽석상씨가 칼을 휘둘렀을 때, 상대방이 칼을 피해 도망갈 수 있는 방위가 어떻게 되죠?"

"전후좌우(前後左右). 보통 사방(四方)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평범한 일반인들이라면 그렇겠죠. 만약 절정의 내공을 익힌 고수라면?"

"절정의 내가고수라면.. 위로 도약해서 피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겠죠. 땅을 파고 도망갈 수는 없을 테니까요. 사람이 두더지도 아니고.. 그럼 내가고수가 도망갈 수 있는 방위는 사방이 아니라 오방(五方)이 되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수빈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라고 끝나면 곤란하죠. 다 알려드렸잖습니까? 내가고수는 오방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고."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는 팽석상을 보며, 수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오호단문도는 최근에 창안된 절기가 아닙니다. 강호의 내가고수들이 검기와 도기를 자유롭게 쓰고,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던 때 창안된 거예요. 일반인들과의 어설픈 칼부림을 고려해서 창안된 게 아니란 말입니다."

자신의 설명에 묵묵부답인 팽석상을 바라보며 마음을 비운 듯, 수빈이 빠르게 설명을 이어갔다.

"단문. 말 그대로 내가고수가 도망갈 길을 모조리 다 틀어막겠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다섯 방위에 사나운 호랑이를 풀어 놓습니다. 전후좌우와 머리 위쪽에다가 말입니다. 여기서 호랑이는 팽가의 도(刀)가 되겠죠. 다섯 마리의 사나운 호랑이를 오방에 풀어놓아서, 상대방이 도망갈 길을 원천적으로 다 틀어막아 버리겠다. 그게 오호단문도의 진체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뭔가를 깨달은 표정의 팽석상을 쳐다보며 수빈이 말을 이었다.

"쥐를 쫓을 때도 도망갈 구멍을 주고 쫓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보통의 무공들은 오호단문도처럼 상대방을 극단적으로 몰아붙이지 않아요. 오호단문도의 경우에는 도망갈 곳이 없다 보니, 상대방도 죽기 살기로 덤벼들 수밖에 없습니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수법이죠. 그래서 팽가의 도를 패도라고 부르는 겁니다. 상궤(常軌)를 벗어난 도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래서는 같이 죽기 십상이지 않습니까?"

"거기서 팽가 비전의 내공이 빛을 발휘하는 겁니다. 팽가는 오대세가 중 신체가 가장 튼튼한 사람들입니다. 팽석상씨가 익히고 있는 혼원심공은 그런 몸을 더욱더 튼튼하게 만드는 공능이 있죠. 그리고 소주천을 완성한 후 익히는 팽가의 음양일기공(陰陽一氣功)은 강호의 호신기공(護身氣功) 중 거의 최상급에 해당하는 기공입니다. 어지간한 칼질로는 몸뚱어리에 칼날이 박히지도 않아요."

"아.. 이제야.. 이해가 좀 됩니다."

"어지간한 상대방의 공격은 튼튼한 몸과 호신기공으로 막아내고, 도망갈 곳도 없이 몰아붙이는 칼질로 상대방을 반드시 쳐죽여버리겠다. 그게 바로 팽가의 무도(武道)입니다. 예로부터 팽가의 무인들은 단순무식하다는 평가를 받아왔죠. 그런 소리가 괜히 나온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팽가의 무공이기 때문에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합니다. 워낙 극단적인 무공이다 보니 상대방이 자신보다 훨씬 고수이거나, 아직 음양일기공을 제대로 익히기 전이라면.."

"상대방에게 거꾸로 쉽게 당해버리겠군요."

"맞습니다. 그런 일을 방지하려면 뭘 입는 게 좋을까요?"

"갑옷..을 입는 게 좋습니다."

"그래서 팽가 무인들이 군문에 많이 투신을 했던 겁니다. 내가고수가 판치던 예전의 강호라고 해도, 소주천을 완성하고 음양일기공까지 제대로 익히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당연히 시간도 오래 걸렸을 테고요. 일정 수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차라리 갑옷을 입고 싸우는 게 낫다는 판단을 했겠죠."

"그럼 제가 제대로 된 오호단문도를 시전하려면.. 갑옷을 입어야 하겠군요?"

"방검복(防劍服)을 입고 싸우면 훨씬 더 좋겠죠. 하지만 그럴 바에는 총을 들고 싸우는 게 더 낫지 않겠어요? 굳이 힘들게 칼을 들고 싸울 필요가 있습니까?"

"....."

"아시다시피 칼밥을 먹고살던 세상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팽석상씨가 진정한 오호단문도를 재현하고 싶은 욕심이 있으시다면, 내공심법에 주력해서 음양일기공을 익혀내는 게 더 빠를 겁니다."

팽석상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무슨 뜻으로 말씀하시는지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가르침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만에 하나 제가 팽가의 가주로 등극하게 된다면, 베풀어주신 이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은혜를 모르면 금수와 같죠. 조만간 제가 팽석상씨에게 내공 진전에 도움이 되는 음료수를 드릴 겁니다. 매일 복용을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건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되는 비밀입니다. 팽가에도 알리면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깜짝 놀란 팽석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절대 그 누구에게도 비밀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만약 비밀이 새어나가면.. 제가 직접 칼을 들고 팽가로 찾아갈 생각이니, 각오하시길 바랍니다."

팽석상이 비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제 목을 걸겠습니다."

"좋습니다. 한번 믿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다음번에는 방검복을 구해서 입고 오세요. 그래야 그나마 제대로 된 오호단문도를 시전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일단 오늘은 그냥 하죠."

수빈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긴장한 얼굴의 팽석상이 뒤따라 쫓아갔다. 잠시 후 팽석상의 곡소리가 액션 스쿨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이고.."

"잠.. 잠시만.."

"제발.. 살살 좀.."

시간이 흘러 개운한 얼굴의 수빈이 영화사로 이동했다. 사장실에 도착한 수빈은 오상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대표님.]

"오상무. 오늘 오디션을 볼 여자 배우들 이력서가 있죠?"

[네. 제가 가지고 있어요. 보시게요?]

"네. 제가 좀 살펴볼까 합니다. 사장실로 좀 보내주세요."

잠시 후 오상무가 직접 들고 온 이력서를 살펴보던 수빈은, 눈에 띄는 몇 명의 이력서를 따로 빼버렸다. 따로 뺀 이력서를 오상무에게 건네주며 수빈이 신신당부를 했다.

"이분들에게는 지금 바로 연락을 해서, 다른 장소에 집결을 시키세요. 다른 오디션 참가자들과 부딪치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오디션이 끝나면 제가 직접 면접을 보겠다고 통보를 하세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오상무가 나가자 골이 아픈 듯 수빈이 이마를 짚었다.

"어떻게 설득을 해야 뒤탈이 없으려나.."

시간이 흘러 어제와 같은 장소에서 여자 조연 배우의 오디션이 열렸다.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던 오상무가 일어나서 간략하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볼 오디션은 여자 조연이에요. 극중 나이는 30대 초반으로, 주인공인 킬러에게 살인청부를 중개해 주는 중개인 역할을 하고 있고요. 외모가 아름답고 정체는 미스터리한 여성이에요. 나름 무술도 뛰어나고, 총기도 잘 사용해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전직 킬러가 아닐까 의심을 받게 되는 역할입니다."

설명을 끝낸 오상무가 입구에 있는 직원에게 눈짓을 하였다.

여자 조연 오디션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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