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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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조연 배우 오디션이 다 끝나고서, 영화사 사장실에서 세 남자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오디션에 참가하는 걸 전혀 몰랐던 눈친데? 열심히 작성해서 참가 서류까지 사전에 제출했는데 말이야."
성강호의 말에 수빈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잘 알고 계시잖아요? 사람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이 생기는 게 싫어서, 제가 이력서나 자기소개서 따위는 잘 안 본다는 걸 말입니다."
"알고는 있지. 강감독. 너무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말라고. 사람이 민망해지잖아."
"강호 형님. 형님이 왜 조연 오디션을 보러 옵니까? 하시고 싶은 배역이 있으시면, 제게 따로 귀띔을 해주시면 되죠. 깜짝 놀랐잖습니까.."
"바뀐 각본을 읽어봤지. 아주 재미있었어. 근데.. 등장인물들을 깡그리 뜯어고쳐서, 내가 할만한 배역이 눈을 씻고 봐도 없더라고. 근데 어떻게 배역을 달라고 그러나? 그나마 오디션으로 뽑는다는 조연 자리는 나랑 맞을 거 같아서 오디션을 보러 왔지. 그리고.."
성강호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난 그래도 양반이야. 다른 오디션 참가자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불편해할까 봐 걱정을 많이 했다고. 그래서 스태프에게 부탁을 하고, 난 다른 방에서 따로 대기하고 있었어. 근데 저 친구는 말이야. 다른 오디션 참가자들 하고 똑같이 섞여서 복도에 줄을 서있더라고. 낯짝도 뻔뻔하게 말이지. 내가 오디션 보려고 복도를 걸어가다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자신을 타박하는 소리에, 큼지막한 손으로 인해 간장종지같이 조그맣게 보이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마동식이 말했다.
"형님.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곤란하죠. 저야 원래 조연 전문 배우 아닙니까? 요 근래 한두 편 제가 주연 비스무리하게 찍었지만, 전 아직까지는 급이 조연 배우 급입니다. 조연 배우가 조연 오디션에 참가하는 게 뭐가 이상합니까? 그리고.. 그런 식으로 따지면 형님이 더 뻔뻔하시죠. 주연 전문 배우가 왜 조연 오디션을 보러 오십니까? 상도의(商道義)를 지키셔야죠."
"어허.. 이 후배님 좀 보시게. 길가는 사람을 붙들고 물어봐. 마동식이 조연 배우인지 주연 배우인지.. 열에 일곱 여덟은 주연이라 그럴 거다."
"형님. 길을 막고 물어보시죠. 성강호가 주연 배우인지 조연 배우인지.. 열에 열은 다 주연배우라고 대답할 겁니다. 그리고.. 이번 배역은 역할이 조폭 두목 아닙니까? 저랑 딱이죠. 형님은 임금님이나 변호사 같은 근사한 역할을 하셔야죠. 갑자기 웬 조폭 두목입니까? 품위 떨어집니다. 형님."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넘버 3에서 내가 깡패 역할로 나온 거 못 봤어? 원래 내 전공이 단순무식하고 천박한 캐릭터라고."
두 사람이 티격태격 거리며 옥신각신하는 걸 지켜보던 수빈은, 골이 아프다는 듯 양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강호 형님. 솔직히 말씀해 보시죠. 갑자기 왜 그러시는 겁니까?"
수빈의 질문에 성강호가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딴 이유가 있겠나? 이게 다 돈 때문이지."
수빈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돈 때문이라고요? 요 근래 많이 버신 걸로 아는데요. 라이프 때도 제가 섭섭지 않게 챙겨드렸고.. 달빛 때도 제법 많이 버셨잖습니까? 사기를 당해서 갑자기 돈을 다 날리기라도 한 겁니까?"
"그 반대야. 갑자기 돈을 너무 많이 벌었어. 짧은 시간 내에 말이지. 그래서.. 마누라가 돈맛을 알아 버렸다고. 원래 나정도 위치에 있는 배우들은 2년 정도에 걸쳐서 영화 1편을 찍고, 6개월이나 1년 정도 쉰 다음 차기 작품에 들어가는 게 일반적이야. 근데.. 강감독을 만나고 나서 1년에 영화를 2편이나 찍고 개봉까지 했지. 그리고 초초대박이 났고. 덕분에 돈도 수억 벌었지. 그 바람에.. 마누라가 돈독이 제대로 올랐어."
성강호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강감독이 신작 제작에 들어갔다는 소문은 다 났지. 근데 난 방구석에 앉아서 가만히 쉬고 있지. 그러니 마누라가 가만히 있겠나? 십분이 멀다 하고 날 달달 볶는 거야. 강감독 신작 찍는다는데 넌 왜 방구석에 처박혀 있냐? 강감독이랑 사이가 틀어진 거냐. 니가 감독보다 나이 좀 많다고 꼰대질 한거 아니냐. 나이 많은 게 벼슬이냐. 잘못한 게 있으면 가서 싹싹 빌어라. 좀 있음 애들 결혼도 시켜야 하는데 지금 뭐 하는 짓거리냐. 어떤 년은 30분 찍고 7억 벌었다더라. 누구는 영화 찍은 이후로 CF 제의가 쏟아진다더라.. 아주 사람을 볶다 못해 쥐잡듯이 잡는다고."
"30분 찍고 7억 벌었다는 년 아니 여자는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마동식의 질문에 성강호가 마동식을 째려보며 대답했다.
"누구긴 누구야. 라이프에서 간호사 역할로 나온 정도연이지. 말이 30분이지.. 슛 들어간 시간 따지면 10분도 채 안될 거다. 그걸로 7억 벌었다고, 분당 출연료가 5천이니 6천이니 하며 소문이 파다하게 다 났어. 그 바람에 마누라 허파에 바람이 들어서 내가 아주 죽을 지경이다. 입만 열면 억억거리는데.. 사람 환장하겠다."
"부럽긴 하네요. 저도 라이프에서 의사 역할로 출연해서 그 정도 시간은 찍었는데.. 전 강감독님에게 저녁 한 끼 얻어먹은 게 단데 말이죠."
수빈이 황급히 변명을 하였다.
"마배우님은 라이프에 카메오로 출연하셨잖습니까? 그리고.. 정도연 씨에게 분당 출연료를 몇 천씩 드린 게 절대 아닙니다. 정배우님 이름값에 맞춰서 적당히 인센티브 계약을 한 것뿐인데..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흥행이 되다 보니, 인센티브 액수가 예상치 못하게 많이 늘어난 거죠."
"괜찮습니다. 감독님. 어떻게 된 일인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카메오 말고.. 강감독님 작품에 정식으로 출연을 하기 위해서 오디션을 보러 왔습니다."
마동식이 갑자기 자세를 단정히 잡더니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강감독님. 뽑아만 주신다면, 몸 사리지 않고 열심히 연기하겠습니다."
성강호가 덩달아 옷매무새를 매만지더니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하네. 강감독. 마누라 등쌀에 내가 죽을 지경이야."
수빈이 골이 아프다는 듯, 손으로 이마를 짚어갔다.
잠시 후 저녁 회식을 취소하고 땅콩주택으로 가는 밴 안에서, 백성철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어떡할 거냐? 해결책은 있는 거야?"
수빈이 빠르게 대답했다.
"뭐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시나리오를 살짝 수정해서, 주인공 팔뚝에 문신 하나 새기면 끝나죠. 그럼 두 분을 다 영화에 출연시킬 수 있어요."
"다행이네. 그런데.. 아까부터 얼굴이 왜 그렇게 안 좋은 거야? 간단하게 해결된다며?"
수빈이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형. 생각을 해보세요. 오늘 같은 일이 내일은 안 일어날까요? 남자 조연 오디션만 이런 일이 생기고, 여자 조연 오디션은 이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여자 오디션이 더 심할지도 몰라요. 남자 보다 여자 조연 오디션 참가자 수가 훨씬 더 많다고 오상무에게 들었으니까요."
"아. 그렇겠구나. 그럼 우리가 알만한 여배우 중에.. 내일 누가 참가하는지 오상무에게 한번 물어볼까? 서류를 직접 심사했으니 오상무는 알고 있을 거 아냐."
수빈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 다음에는요? 누구를 탈락시킬까요? 저랑 친한 여배우는 오디션을 보러 오라 그러고, 안 친한 여배우는 오지 말라고 통보할까요? 말이 안 되잖아요. 안 그래도 요즘 강패밀리니 뭐니 하며 저랑 친한 배우들만 섭외한다고 말이 많은 판국에.. 뾰쪽한 해결책이 없어요."
"그렇구나. 그럼 어떡하지?"
"뭐 내일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봐야죠. 닥치는 대로 처리를 하는 방법밖에는 없을 거 같아요."
"영화감독도 참 힘든 직업인 거 같다."
"사실.. 배부른 소리긴 하죠. 영화감독이 하는 일중에 가장 힘든 게 제작비 구하는 거랑 배우 섭외하는 건데.. 다들 제가 찍는 영화에 나오고 싶어 한다니 감사하게 생각해야죠."
"말은 그래도.. 골치 아프고 짜증 나지?"
"...네. 형."
잠시 후 밴이 KBC 방송국에서 잡아 놓은 땅콩주택 앞에 도착했다.
"내일 아침에도 헤이리로 갈 거냐?"
"그래야죠. 오늘처럼 헤이리에서 먼저 볼일을 보고 영화사로 나갈 거예요. 스트레스도 좀 풀고.."
"알았다. 아침에 시간 맞춰서 데리러 오마."
"조심해서 운전하세요."
수빈은 밴에서 내려 땅콩주택을 바라보았다. 소뿔처럼 양쪽에 3층짜리 주택이 우뚝 솟아 있었고, 가운데에는 양쪽 주택을 연결하는 1층 높이의 공용 공간이 있었다.
"어제처럼 그러면 제대로 못 쉴 텐데.."
수빈은 어제 있었던 여자들 간의 치열한 신경전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조용히 방안에 처박혀서 일이나 해야겠다."
수빈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자신에게 배정된 오른쪽 주택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땅콩주택에서 공용으로 사용되는 1층의 널찍한 거실. 소파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던 김샛별과 최아림의 고개가 동시에 왼쪽 건물의 출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 삐리리리.
도어록이 열리는 전자음과 함께 김성희가 안으로 들어왔다. 김샛별이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성희 언니. 어서 오세요. 일찍 퇴근하셨네요?"
신발을 벗고 거실 쪽으로 걸어오며 김성희가 대답했다.
"오늘은 야근이 없어서.. 월급쟁이가 별일 없으면 이 시간에 퇴근하지. 근데.."
주위를 둘러보며 김성희가 말을 이었다.
"스태프 분들이 아무도 안 보이신다?"
"언니. 어제 출연자들이 이사 들어오는 장면이랑 각자 자신들을 소개하는 영상을 찍고서는 다들 돌아가셨잖아요. 제가 듣기로는 이틀 후 금요일에 다시 오셔서, 주말 내내 찍으실 계획이래요. 그래서 지금은 거치 카메라만 설치되어 있어요."
최아림의 친절한 설명에 김성희가 소파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그렇구나. 근데.. 다들 갑자기 너무 친절하게 대해 주니까 적응이 잘 안된다."
"기억 안 나세요? 어젯밤에 우리끼리 협약을 맺었잖아요. 작업은 밖에서.. 연애질도 밖에서.. 안에서는 다들 친하게 지내기로요. 한 달이 넘게 같이 지낼 건데, 어제처럼 피곤하게 살 수는 없잖아요."
김샛별의 말에 김성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어제 우리끼리 신경전을 벌일 때, 그때 수빈씨 얼굴이 볼만했었지. 누렇게 뜨다 못해 푸르죽죽해 가지고서는.."
"거의 도살장에 끌려온 소 같더라고요. 자칫 잘못해서 수빈 오빠에게 밉보였다가는.. 죽 쒀서 뭐 주는 수가 있다고요. 집에서는 평화 협정을 맺는 게 백번 잘한 거 같아요."
최아림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김성희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림이 말이 맞아. 이번 프로그램의 목적은 최종적으로 CF 모델을 뽑는 거라고. 수빈 씨 애인을 뽑는 게 아니잖아? 우리들이나 수빈 씨나 아직 다들 나이도 어리고.. 나중에 어떻게 되더라도 당분간은 친하게 지내자고. 수빈 씨나 하이유 언니는 아직 안 온 건가?"
"수빈 오빠는 조금 전에 퇴근해서 자기 방으로 올라갔어요. 하이유 언니는 오늘 행사가 있어서 좀 늦을 거래요."
- 빰. 빠라라. 라빰빰.
그때 갑자기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들의 시선이 오른쪽 건물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쪽으로 쏠렸다.
"이거 지금 수빈 씨가 연주하는 거지?"
김성희의 질문에 최아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수빈 오빠가 연주하는 거예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인데.. 갑자기 이걸 왜 연주하는 걸까요? CF 배경음악으로 쓸 생각인가?"
"연주하는 걸 직접 보면서 듣고 싶은데.. 다들 안 그래?"
김성희의 말에 샛별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가 데리고 올게요."
샛별이 오른쪽 계단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잠시 후 누가 봐도 긴장한 얼굴의 수빈이, 한 손에 바이올린을 들고서 계단을 통해 거실 쪽으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