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208화 (208/236)

# 208

64 - 1

7월 4일 수요일

"후우우.. 흐읍.. 후우우"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려는 듯, 상대방의 심호흡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호흡소리가 잦아들더니 상대방이 들고 있던 박도(朴刀)가 일순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위로 치켜 올라간 박도가, 수빈의 머리 위로 벼락같이 떨어졌다. 자신의 골통을 쪼개려는 듯 매서운 기세로 떨어지는 박도를 냉정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수빈은 들고 있던 검을 위로 힘차게 쳐올려갔다.

- 깡!

강렬한 쇳소리와 함께 튕겨나간 박도가, 물찬 제비처럼 빠르게 원을 그리며 수빈의 옆구리 쪽을 베어 왔다. 수빈은 한족장 앞으로 나가며, 검의 옆면을 손으로 받쳐 옆구리를 보호했다.

- 쨍!

옆구리 공격에 실패한 박도가 가파르게 하강하며 수빈의 왼 다리를 베어 왔다. 왼 다리를 가볍게 치겨들은 수빈은, 역으로 상대방의 튀어나온 오른 다리의 무릎을 짓밟기 위해 발을 뻗었다.

"칫.."

상대방이 오른 다리를 뒤로 빼자, 기다렸다는 듯 왼 다리로 바닥을 힘차게 밟은 수빈의 몸이 앞으로 빠르게 전진했다. 바닥을 밟은 탄력으로 검으로는 상대방의 어깨를 쏜살같이 찔러가며, 오른 다리로는 상대방의 하체를 노리며 가볍게 쓸어갔다.

"헉.."

박도로 어깨를 찔러오는 검을 간신히 막아낸 상대방의 몸이, 수빈의 오른 다리에 종아리를 얻어맞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서 일순 휘청거렸다. 그 순간 수빈의 검이 상대방의 왼쪽 어깨를 매섭게 베어갔다. 무방비로 노출된 어깨를 베어가던 검이 한순간 빙글 회전했다. 날이 없는 옆면으로 상대방의 어깨를 강하게 가격했다.

- 퍽.

"크윽.."

어깨를 가격 당한 상대방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를 때, 수빈의 오른발이 부드럽게 접히며 상대방의 명치를 향해 재빠르게 슬격(膝擊)을 날렸다.

- 퍼억.

"커어억.. 우엑.. 우에엑."

명치를 제대로 얻어맞은 팽석상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수빈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중얼거렸다.

"하아.. 한심하기 짝이 없군. 팽가의 도가 이렇게나 허접해지다니.."

고개를 몇 번 저은 수빈이 검극(劍極)으로 팽석상의 허벅지를 쿡쿡 찔렀다.

"일어나세요.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명색이 혼원심공을 익혔다는 팽가의 직계가, 명치 한방 얻어맞았다고 주저앉아서 헛구역질을 해요?"

팽석상이 입가로 침을 질질 흘리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

"내.. 내장이 뒤.. 뒤틀려서.."

"경(經)을 담아서 때려 박았으니 당연히 뒤틀리겠죠. 하지만 그래도 참아야죠. 생과 사가 오가는 결투나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서 그랬다간 벌써 목이 달아났을 겁니다."

이윽고 팽석상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자 다시 대련이 시작되었다. 수빈이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였다.

"커억.."

"케엑.."

"아악.."

옆에서 두 사람의 대련을 구경하고 있던 정도홍 감독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날을 제대로 잡았군. 아주 복날에 개잡듯이 잡는데.."

얼마 전 다른 영화의 촬영을 끝마치고 액션 스쿨로 다시 돌아온, 정감독의 제자 격인 송민지가 대꾸했다.

"강감독 기분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 검에 감정이 실려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일 있는 건가요?"

"글쎄다.. 난 특별히 들은 게 없다."

"그래요? 근데.. 강감독이 고수란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 보니 엄청나네요. 상대방을 완전히 가지고 놀아요."

"경지를 알 수 없는 고수지. 강감독 말로는 저기 두들겨 맞고 있는 팽석상이 나보다 고수라고 하더라. 근데도 저 지경으로 박살이 나고 있으니.."

잠시 후 네 사람은 정감독의 사무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수빈이 찻잔을 입에서 떼며 말했다.

"오호단문도의 진체를 배우고 싶다고 하셨죠?"

아직도 고통스러운지 자리에 앉아서 온몸을 비비꼬던 팽석상이 자세를 똑바로 잡았다.

"네. 그렇습니다. 알려주시면 온몸을 바쳐 배워보겠습니다."

"영화 촬영이 끝날 때까지 제가 틈나는 대로 대련을 계속하면서 지도를 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전에 간단하게 말로나마 진체에 관련해서 몇 마디 알려드릴까 합니다."

옆에서 차를 마시던 정감독이 급하게 끼어들었다.

"그런 비결을 나랑 민지가 있는 곳에서 말해도 되는 건가? 원한다면 자리를 비켜주겠네."

수빈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저도 팽가 전통의 내공법이나 비전절초 등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요. 단지.. 팽가가 지향하는 무도(武道)가 어떤 건지를 설명해주는 것뿐이라서요. 같이 들으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래? 이거.. 강감독 덕분에 안계를 넓힐 수 있겠군."

수빈이 팽석상을 바라보며 물었다.

"예로부터 팽가의 도를 뭐라 부르는지 아십니까?"

"패도(覇刀)라고 부른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럼 패도의 정의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팽석상이 잠시 고민을 하더니 대답했다.

"음. 타고난 힘이나 튼튼한 몸을 이용해서 강력하게 휘두르는 도.. 그걸 일컬어 말하는 게 아닐까요?"

수빈이 고개를 저었다.

"일견 맞기도 합니다만..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백 년이 지나도 진체를 얻지 못할 겁니다. 패도란 무정(無情)이고 비정(非情)인 겁니다. 세인의 상식을 훌쩍 뛰어넘기 때문에 패도라 불리는 거죠. 팽가가 예로부터 군문(軍門)에 많이들 진출한 건 알고 계시죠?"

"네. 팽가가 하북 북경에 위치해 있어서.. 자금성이 바로 옆이라 많이들 진출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팽석상의 대답이 맘에 안 든다는 듯, 수빈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물론 지리적인 이유도 있겠습니다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죠. 패도의 특성이 군문에 잘 어울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이들 투신을 했죠. 그럼 군문의 특징이 뭐라 생각하십니까?"

"군문이란 결국 군대를 말하는 건데.. 군대라고 하면 역시 전쟁터가 떠오릅니다. 전쟁터라고 하면 다수 대 다수의 싸움이나 적과 우군을 구별하기 힘든 혼전의 상황들이 많지 않겠습니까?"

수빈이 기가 차다는 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후우.. 정말 수박 겉핥기 식으로 알고 계시는군요. 그럼 군인과 무림인과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군인은 전쟁터에서 싸우고, 무림인은 강호에서 싸웁니다."

"이것 참..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다 떠먹여드려야 할 판이로군요."

"죄송합니다. 가문에서는 그런 식의 교육이나 가르침을 받은 적이 한번도 없어서요."

"뭐 이해는 합니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죠. 허구한 날 칼 들고 싸움박질했다간, 깡패니 조폭이니 하며 잡혀들어가기밖에 더하겠습니까? 팽석상씨. 잘 들으세요. 군인은 강호인과 달리 두꺼운 갑옷을 입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갑옷.. 네. 알겠습니다. 근데 그게 왜요?"

"갑옷을 갖춰 입었을 때, 팽가의 무공이 더욱더 빛을 발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팽가 사람들이 군문에 투신을 했던 겁니다. 그게 뭘 뜻하는 건지 아시겠습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정감독이 끼어들었다.

"얼핏 듣기로는 말이야. 팽가의 무공이 수비에 약하다는 뜻 같은데? 그래서 갑옷을 입으면 수비가 좀 약해도, 갑옷이 몸을 지켜주니까 팽가 무인이 더욱 강력해진다.. 뭐 그런 뜻 같은데. 맞나?"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팽가의 무공은 수비가 약한 게 아닙니다. 적의 공격을 도외시(度外視) 한다는 게 더 정확하죠. 팽가의 무도는 간결합니다. 수비는 몸으로 때우고, 강력한 공격으로 상대방을 쳐죽인다. 그게 진체입니다."

수빈의 발언에 놀란 좌중의 사람들이 침묵에 빠질 때, 송민지가 급히 되물었다.

"그게 무슨.. 그럼 팽가의 무공은 자살 공격이나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동귀어진(同歸於盡) 수법이란 말인가요?"

"아니죠. 그런 식의 어설픈 무공이었다면 애저녁에 팽가 씨가 말랐겠죠. 육참골단(肉斬骨斷). 나의 살을 내어주고 적의 뼈를 자른다. 그게 팽가 무공의 처음이자 끝이고, 알파이자 오메가인 겁니다. 팽가의 모든 무공들은 거기에 주안점을 두고 창안된 것들이에요."

의혹이 가득한 표정의 팽석상이 황급히 물어왔다.

"제가 나름 직계라 혼원심공, 음양일기공, 비전의 벽력신공 구결까지 다 외우고 있습니다만.. 팽가 무공 어디에도 그런 구결은 없습니다. 지금 하시는 말씀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보는 눈이 달라지면, 현상의 인식이 바뀌는 법입니다. 제가 하루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하루는 자신이 배운 무공을 꼼꼼히 되짚어 보시고, 앞으로 배울 무공을 찬찬히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내일 오전에 제가 다시 들릴 텐데, 그때까지 숙제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어떤 숙제입니까?"

"간단합니다. 오호단문도라는 절기명이 뭘 의미하는지 생각해 오시길 바랍니다. 잊으시면 안 됩니다. 모든 절기의 이름에는 그 절기가 추구하는 진의(眞意)가 담겨있다는 걸 말입니다. 오호단문도에서 오호(五虎)와 단문(斷門)이란 게 과연 무얼 의미하는지 알아오세요."

"오호.. 단문.."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팽석상을 보며 수빈이 엄포를 놓았다.

"내일 아침에 다시 만났을 때, 오호는 다섯 마리의 호랑이입니다라고 헛소리를 지껄였다가는.. 제 손에 박살이 날 거니까 각오하시고요."

수빈의 엄포에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팽석상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잠시 후 정감독이 수빈에게 넌지시 물었다.

"강감독은 어제 뭐 특별히 한 게 있나? 기분이 좀 안 좋아 보이던데.."

"어제요? 하루 종일 신작 영화 촬영 준비하고.. 저녁에는 '여왕들의 게임' 첫 촬영이 있어서 방송국에서 잡아준 집으로 이사를 했죠."

"아. 그거 예고편은 나도 봤어. 네 명 다 엄청난 미인들이던데.. 강감독은 좋겠어. 그런 미녀들과 한집에서 같이 지내다니.."

그때 송민지가 끼어들어 물었다.

"이사하고 나서 뭐 하셨어요?"

"출연자들과 인사를 나눴죠."

"그런 다음에는요?"

"출연자들과 같이 마트에 장을 보러 갔습니다. 한동안 그 집에서 먹고자고 해야 되니까.."

송민지가 피식 웃으며,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몇 시간 걸리던가요?"

"2시간이 좀 넘게 걸리더군요."

"죽을 맛이었죠?"

"...네."

잠시 후 영화사로 돌아가는 밴 안에서 백성철이 물었다.

"얼굴 표정이 뭔가 개운해 보인다. 뭐 좋은 일 있었어?"

"대련을 좀 했습니다. 그래서 좀 개운한가 봐요. 제대로 된 손맛도 좀 느꼈고.. 상대방이 패는 맛이 있더라고요. 그건 그렇고.. 아직 안 늦었죠?"

"그럼. 시간 충분해. 오후 2시부터 오디션이니까 넉넉하다. 가다 점심 먹고 영화사에 들어가면 될 거야."

시간이 흘러 영화사에 도착한 수빈은 오상무에게서 보고를 받고 있었다.

"오늘 볼 오디션은 남자 조연이에요. 나이는 40대 중반, 품성은 잔혹, LA 차이나타운에서 중국 흑사회 조직의 보스 역할로 나오는 배역입니다. 팽석상이 속한 조직의 두목 역할인 거죠."

"몇 명정도 지원을 했습니까?"

"아무래도 배역의 나이가 있다 보니, 100명이 채 안되는 남자 배우들이 지원을 했어요. 사전 조사와 서류 심사로 60명을 탈락시켰고요. 최종적으로 남은 40명이 오늘 오디션을 보게 될 거예요."

"그래요? 사람이 적어서 생각보다는 빨리 끝나겠군요."

"네. 5시 정도면 다 끝날 거로 보고 있어요. 그 대신 내일 여자 조연 오디션은 시간이 오래 걸릴 거 같아요. 300명이 넘게 지원을 해서.. 최종적으로 100명이 넘게 오디션을 보기도 되어 있어서요. 아무래도 여자 조연은 나이가 30대 초반이다 보니.. 많은 여자 배우들이 지원을 한 상태입니다."

"그렇군요. 슬슬 시작해 볼까요?"

"네. 대표님."

오상무가 회의실 입구에 있는 영화사 직원에게 눈짓을 하였다. 오디션이 시작되었다.

5시가 채 못되어, 수빈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이제야 알겠군요. 왜 똑같은 조연 배우가 여러 영화에 겹치기로 출연을 하는지 말입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박수종 영상팀장이 맞장구를 쳤다.

"중년의 조연 배우들은 생각보다 인력 풀이 넓지 않습니다. 젊었을 때는 꿈으로 버틴다지만.. 그 나이까지 조연으로 버티기에는 경제 사정이 녹록지 않죠. 다들 한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가장일 테니 말입니다."

"그렇긴 하죠. 연기력이 뛰어난 조연이란 게 이렇게나 드문 존재였군요. 1년에 10편이 넘게, 약방의 감초처럼, 여러 영화에 겹치기로 출연한다는 조연 배우들을 이해하겠네요. 그들을 쓸 수밖에 없는 감독이나 제작사의 입장도 이해가 되고요."

"그렇다고 한국 영화계가 조연 배우들에게 많은 개런티를 줄 수 있는 형편도 아니잖습니까? 그런 식으로 운영을 했다가는, 대다수의 영화사들은 금방 망하고 말 겁니다. 영화를 제작한다는 게 어떤 면에서는 도박에 가까우니까요."

수빈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의 흥행을 어느 정도 보장해줄 수 있는 주연 배우에게 집중되는 게 당연하겠죠."

"그러고도 흥행에 실패하는 영화가 태반이 넘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이네요. 그렇다고 제가 일조일석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결국은 한국 영화계의 파이를 할리우드처럼 세계적인 수준으로 키우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러긴 위해서는 대표님이 앞장서서 이끌어 주셔야죠."

수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갑자기 안 하던 아부를 하고 그러십니까? 아무튼 노력은 해봐야겠죠."

수빈이 오상무를 바라보며 물었다.

"몇 명 남았죠?"

"다섯 명 남았어요."

"그럼 다시 시작해보죠. 빨리 끝내고 다 같이 저녁이나 하러 갑시다. 제가 한턱 쏠 테니.."

"어머. 대표님? 집에 가셔서 드셔야죠. 네 명의 아리따운 여성분들이 집에서 대표님이 오시길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집에서 먹다간 얹힙니다. 그나마 낮에는 카메라가 안 따라와서 살만한데.. 집은.. 후우.."

"그럴 때 좋은 방법을 제가 아는데.."

수빈의 귀가 쫑긋 솟았다.

"어떤 방법인가요?"

"네 명 중에 한 명을 딱 선택하셔서 연애를 시작하시면 되죠. 그러면 자연적으로 나머지 여성들은 정리가 될 거예요."

수빈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입을 삐죽거리며 투덜댔다.

"군대도 안 갔다 온 놈이 무슨 연애를 합니까? 됐으니 빨리 진행이나 하시죠."

잠시 후 새로운 배우가 오디션을 보기 위해 오디션장 안으로 들어왔다.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수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형이 왜 거기에서 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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