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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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종 영상팀장이 이동식 스크린이 있는 벽 쪽으로 걸어갔다. 스크린 앞에 우뚝 선 박팀장이 발표를 하기 시작했다.
"날것 그대로의 액션 장면을 원테이크로 찍고 싶다. 특히 대표님과 팽석상이라는 배우와의 격렬한 격투 신은, 마치 영화를 관람하고 있는 관객 본인이 싸우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고 싶다. 전제조건으로는 할리우드 방식의 촬영 시스템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거였습니다. 방금 설명드린 게 일전에 대표님이 내어주신 과제 내용입니다."
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제가 그렇게 말씀드렸죠. 요즘 VR이 유행하고 있잖습니까? VR을 해보셨으면 아시겠지만 몰입도가 굉장합니다. 그런 몰입도를 영화에 나오는 액션 신에서 관객들이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할리우드 시스템을 좀 탈피해서, 우리만의 독창적인 시스템으로 찍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죠."
"처음 그 말을 듣고서는, 전 대표님이 국내 기술로 3D 입체 영화를 찍고 싶어 하시는구나라고 이해했었습니다."
"그건 아닙니다. 3D 입체영화는 영상을 찍을 때 그리고 후처리 작업에서 굉장히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박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제가 대표님께 다시 여쭤봤습니다. 3D 입체영화가 맞는지를 말입니다. 하지만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격투를 하고 있는 당사자, 그 당사자의 온전한 시점으로 액션 신을 찍고 싶다는 거였죠."
수빈의 대답을 들은 박팀장이 페스 관리팀장에게 눈짓을 하였다. 스크린에 액션 영상 하나가 띄워졌다.
"일반적인 액션 영상이라고 하면 많이들 떠올리는 장면입니다. 유명한 '올드 보이'의 장도리 액션 신이죠. 원테이크로 찍은 걸로 유명합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장면은 사이드 앵글에서 액션을 찍은 겁니다. 달리로 카메라를 이동시키면서 말이죠."
"이 영상에서는 관객들이 일종의 구경꾼이 되어 있는 거죠."
"맞습니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싸움을 멀리 떨어져서 구경하고 있는 셈이죠. 때로는 천장에서 찍기도 하고요. 하지만 대표님이 원하시는 건 이게 아니죠."
다시 스크린의 화면이 바뀌었다. 화면 속의 남자가 칼을 들고 자신의 전방을 향해 마구 찔러대고 있었다.
"대표님이 말씀하시는 액션 당사자의 온전한 시점이란 이런 거일 겁니다. 상대방이 영상을 보고 있는 나를 향해 칼을 찌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정확히 말하면 액션이 아닙니다."
화면의 앵글이 바뀌었다. 칼을 든 남자가 지지대에 고정되어 있는 카메라를 향해 칼을 찌르고 있었다.
"금방의 영상은 지금 보시는 방식으로 촬영을 한 겁니다. 고정되어 있는 카메라 또는 촬영 기사가 들고 있는 ENG 카메라를 향해 배우가 칼을 휘두르는 거죠."
"그건 액션을 찍은 게 아니라 단지 한 컷을 딴 거에 불과하죠. 그런 식으로 제가 원하는 영상을 찍으려면.. 수없이 많은 컷을 찍어서 편집을 해 야합니다. 불가능해요."
수빈의 대답에 박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서 개념을 완전히 바꿔봤습니다. 액션을 하는 두 사람이 자체적으로 카메라를 달고서 액션을 하는 걸로요. 지금 보시는 영상은 요즘 많이들 쓰고 있는 고프로로 찍은 영상입니다."
끈을 이용해 고프로를 이마에 묶은 두 남자의 모습이 스크린에 떴다. 두 남자가 액션을 시작했다. 스크린에 고프로로 찍은 영상이 나타났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나름 영상이 쓸만합니다. 실제로 미국 경찰들이 비슷한 장치를 어깨에 달고 있기도 하죠. 하지만..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렇게 고프로를 몸에 묶은 채 액션을 하게 되면, 다른 앵글의 화면은 전혀 쓸 수가 없어요. 결국은 각각의 앵글을 새로 다 찍어서 편집을 해야 한다는 소린데.. 그럼 리얼리티가 너무 떨어집니다. 제가 원하는 날것의 느낌이 나지 않을것 같은데요."
"정확하신 지적이십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는 한 번의 액션 연기를 다양한 각도에서 원테이크로 찍고, 그런 다음 CG 처리를 해서 고프로 카메라를 영상에서 완전히 지워야 하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무한 노가다의 영역이죠. 액션 신을 크로마키 앞에서 촬영을 할 것도 아니고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제작진에서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했었습니다. 고민 결과.. 고프로 보다 사이즈가 아주 작아서 CG 작업에 용이한 카메라를 찾자는 걸로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박팀장이 눈짓을 주자 다시 화면이 바뀌었다. 이마에 테이프로 아주 조그마한 장치를 부착한 두 남자가 나타났다.
"초소형 카메라입니다. 요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몰카 등에 사용되고 있는 카메라죠. 크기가 아주 작아서, 이 정도 사이즈라면 CG로 후처리 작업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초소형 카메라로 찍은 액션 장면이 나왔다. 지켜보고 있던 수빈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화질이 엉망이네요.."
"그렇습니다. 현재 국내에서 시판되고 있는 초소형 카메라 중 최고의 성능을 자랑한다는 초소형 카메라를 구입해서 찍어보았습니다만.. 보시는 대로 화질이 너무 구립니다. 시판되는 카메라 자체가 너무 조잡하기 때문이죠. 자동차에 다는 블랙박스 보다 못합니다. 이런 화질로는 영화 영상으로 도저히 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크기는 소형이지만, 화질이 선명한 고성능 카메라를 찾기 위해.. 모든 스태프들이 카메라라고 이름 붙은 모든 카메라들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내시경을 찾아내게 된 겁니다."
스크린에 펜싱 시합을 하는 선수들처럼 등 쪽에 줄이 길게 매달려 늘어져 있는 두 남자가 나타났다.
"내시경은 초소형 카메라와 비교할 수 없는 고가의 장비입니다. 거기에 걸맞은 고화질을 제공하죠. 심지어 앵글의 각도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고요. 그리고 보시다시피 크기가 작습니다. 사람들 뒤쪽으로 연결되어 있는 선은 피복을 벗기면 더 가늘어질 겁니다. 우리가 위 속으로 들어가서 찍을 일이 없기 때문이죠. 따로 조명이 있기 때문에 불빛을 비출 광원도 필요 없습니다. 피복을 벗겨서 그런 것들을 다 제거하고 나면, 화면 상에서 가느다란 실선 정도로 보일 겁니다. CG 작업으로 지우기에 전혀 무리가 없죠. 그럼 영상을 보시죠."
스크린에 액션 영상이 떠올랐다. 시청하는 사람을 향해 상대방이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끊임없이 칼질을 하고 있었다. 회의 석상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감탄사를 내뱉었다.
- 호오. 멋진데. 이정도면 볼만한걸.
- 리얼리티라는 게 이런 걸 의미하는군.
- 마치 내가 칼싸움을 하고 있는 거 같네.
- VR이랑 정말 비슷해 보이는데요.
박팀장이 수빈을 바라보며 물었다.
"나름 쓸만한 화질을 얻을 수 있었지만.. 명확한 문제점이 있습니다. 뭔지 아시겠습니까?"
수빈이 즉답했다.
"거리가 가까울 때는 상관없지만, 조금 멀어지면 화면이 휘어져 보입니다. 이 상태로 영상을 찍으려면 근접전만 찍어야 해요. 그럼 액션의 다양성에 제약을 받게 됩니다."
"역시..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이건 장비의 문제라기보다는 렌즈의 문제입니다. 내시경에 들어가는 렌즈는 광각렌즈를 씁니다. 일반 렌즈보다 초점거리가 훨씬 짧죠. 인간 몸속의 내부 장기(臟器)에 들어가서 촬영을 할 목적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시야가 넓고 상당한 피사계 심도를 제공하지만 거리가 떨어지면 화면에 왜곡이 생기는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럼 렌즈를 교체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건가요?"
"대표님의 생각처럼 저희 촬영팀도 문제 해결을 하기 위해 그런 방식으로 접근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내시경 스펙에 딱 들어맞으면서도, 사람의 눈과 가장 비슷한 이미지를 제공한다는 고성능 표준 렌즈를 어렵게 구해서 힘들게 교체 작업을 했습니다. 그 작업을 하는데 상당한 돈이 깨졌습니다. 하지만.. 말보다는 렌즈를 교체한 영상을 실제로 한번 보시죠."
스크린에 새로운 화면이 떠올랐다. 수빈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흐음. 비교적 좋아지긴 했는데.. 이것도 좀 문제가 있군요."
"그렇습니다. 렌즈의 사이즈가 적으면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광각이든 표준이든 어쩔 수 없이, 각 렌즈별 초점 거리에 따른 왜곡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거죠."
"그럼 불가능하다는 소립니까? 결국 수많은 커트를 찍어서 편집을 하거나, 3D로 촬영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걸 이야기해주시려고 여태껏 발표를 하신 건가요?"
박팀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들이 고민에 빠져 있을 때, 페스 팀장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해 줬습니다. 페스 팀장?"
박팀장이 김종호 페스 관리 팀장을 호출했다. 자리에 앉은 김팀장이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문제를 해결하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화면을 보정해주면 됩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왜곡된 비율의 화면을 정상적인 비율의 화면으로 바꿔주는 거죠. 이론 자체는 아주 심플합니다. 디지털 영상이란 결국 픽셀의 조합이기 때문에, X축과 Y축의 거리에 따른 비율을 정해서 화면을 수정하면 됩니다."
"그게 가능한가요?"
"네. 대표님. 액션 장면을 찍기 전에 똑같은 액션을 미리 한번 찍어둡니다. 그때 배우의 몸에 모션 캡처 장치를 몇 군데 달고 찍습니다. 그런 다음 실제의 액션을 찍고, 모션 캡처로 측정된 수치를 이용해서 컴퓨터로 보정을 하는 겁니다. 물론 현실과 100프로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영상을 다 처리하기에는 시간이 지나치게 오래 걸린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하지만 왜곡이 심한 부분들만 손을 좀 보게 되면, 빠르게 지나가는 영상 속에서 인간의 눈으로 이상한 점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관객들이 영화로 관람하기에 별 무리가 없을 걸로 판단됩니다."
김팀장이 내놓은 의견을 듣고서, 수빈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크기가 작아서 CG 작업에 용이하고, 고화질을 제공하는 내시경 시스템을 이용해서 촬영을 하자는 거죠? 내시경 시스템은 이미 개발이 완료되어 상용화된 시스템이니까요. 훌륭한 아이디어 같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모든 걸 다 제작하려면 당연히 힘들겠죠. 비용과 시간이 터무니없이 많이 들어갈 테니까.. 근접전은 광각 렌즈로 찍고, 거리가 조금 떨어지는 건 표준 렌즈로 찍고, 그런 다음 왜곡이 심한 부분들만 컴퓨터로 좀 보정을 하자. 그럼 영화 관람하기에 문제없는 영상이 나온다..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나쁘지 않아요."
정리를 끝낸 수빈이 김팀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필요한 게 뭡니까?"
김팀장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결국은.. 돈입니다. 정밀한 모션 캡처 장치가 국내에 몇 군데 있습니다만, 자체적으로 작업을 하려면 사야 될 겁니다. 그리고 보정 작업은 제가 할 수 있습니다만, 작업을 하려면 고성능 컴퓨터와 관련 프로그램이 필요합니다. 모션 캡처나 내시경 장비보다는, 컴퓨터와 관련 프로그램을 구비하는데 더 많은 돈이 들 걸로 예상됩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죠."
"100억이 넘습니까?"
김팀장이 급히 고개를 급히 저었다.
"그렇게까지는 안 듭니다. 제 예상으로 20억 정도면 충분할 걸로 보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제가 예산으로 50억을 내어드릴 테니까 추진을 하세요. 돈에 구애받지 말고, 최고의 시스템으로 한번 꾸며보세요. 한번 세팅하고 나면 두고두고 이용해먹을 수 있을 겁니다. 시스템을 완성하는데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릴 거 같습니까?"
"비행기로 공수하면.. 보름이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럼 보름 뒤에 시연회를 가져 봅시다. 박수종 팀장과 김종호 팀장이 책임지고 진행해 주세요."
- 알겠습니다.
- 네. 대표님.
"그럼 촬영 시스템은 그렇게 하고.. 제가 질문을 한번 드려보겠습니다. 박수종 팀장. 왜 배우들에게 선을 길게 달아야 하는 거죠? 나중에 CG로 다 지워야 하는 하등의 필요가 없는 선들을 말입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어차피 내시경 시스템을 이용하는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만.."
"제가 알기로는 캡슐형으로 되어서 삼키는 내시경이 나온 지 오래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내시경은 선이 필요 없죠. 자체적으로 안테나가 내장되어 있어서, 무선으로 조정이 가능하니까요. 그걸 사용하면 안 되는 겁니까?"
"아.."
"만약 가능하다면 그게 훨씬 더 좋지 않겠습니까? CG 작업에 걸리는 시간도 단축될 테니까요."
"당장 알아보겠습니다."
"그래요. 한번 알아보세요. 무선이야말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페스 시스템의 장점 아니겠습니까? 캡슐 내시경과 페스 시스템을 다이렉트로 연결해서 볼 수 있는지 한번 시도해 보시길 바랍니다. 안되면 그냥 유선으로 가야겠지만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럼 다음으로.. 이성호 팀장?"
자리에 앉아 있던 이성호 소품팀장이 황급히 대답했다.
"네. 대표님. 말씀하시죠."
"저 정도 크기라면 무기에 카메라를 장착하는 게 가능해 보입니다만.. 가능할까요?"
"무기에 말입니까?"
"네. 시나리오를 보셔서 알겠지만, 이번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저랑 팽석상이 붙는 액션 신입니다. 그때 팽석상이 사용하는 무기와 제가 사용할 무기에 카메라를 달게 되면.. 사람의 눈으로 보는 시점이 아니라 무기의 시점에서 보는 액션 장면을 찍을 수 있지 않을까요?"
"충분히 가능합니다. 대표님."
"좋습니다. 그럼 무기의 끝부분, 손잡이 등에 카메라를 장착할 수 있도록 소품을 제작해 보세요. 그럼 보다 다양한 각도에서, 보다 다채로운 영상을 찍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편집을 잘하면.. 아주 역동적이면서도 재미있는 영상을 만들 수 있을 거 같아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소품 제작에 보름이면 충분하겠죠?"
"충분합니다."
수빈이 고개를 끄덕인 후, 회의 석상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좋습니다. 그럼 보름 후에 다시 제작 회의를 열겠습니다. 그때 시연회를 한 다음 다시 의논을 해봅시다. 그때까지 다들 각자의 맡은 자리에서 차질 없이 준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시겠습니까?"
-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리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고, 짧은 기간 내에 실험까지 직접 한 제작진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태도가 아주 마음에 듭니다. 영화가 잘되면 보너스를 두둑하게 드릴 테니까.. 지금처럼 다들 능동적인 자세로 영화 제작에 임해주시길 바랍니다."
- 네. 대표님.
잠시 후 제작회의를 끝마친 수빈은, 팽석상과의 액션 연기를 연습하기 위해 헤이리 마셜 센터로 이동했다.
7월 3일 화요일
수빈은 간단하게 짐을 꾸려 KBC 제작진에서 잡아놓은 땅콩주택으로 거처를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