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205화 (205/236)

# 205

63 - 2

6월 20일 수요일

- 탁. 탁. 타다닥. 탁.

타자기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화면 아래로 자막이 천천히 흘러 지나갔다.

[참가번호 1번. 김샛별. 나이 20세. 영화배우 겸 CF 모델.]

얼굴은 보이지 않은 채, 박지영 피디의 목소리만 들려왔다.

- 김샛별씨가 이번에 출연하시기로 결정한 '여왕들의 게임'은 일종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잖아요. 그런 프로그램에 참가하시는 소감이나 각오 같은 걸 들어볼 수 있을까요?

그 순간 의자에 앉아 있는 여성의 등 뒤에서, 카메라가 클로즈업을 하며 부드럽게 웨이브 진 머릿결을 비추며 앞으로 넘어갔다. 어린 나이답게 윤기가 넘쳐흐르는 삼단 같은 머리가 조명을 받아 더욱 빛나고 있었고, 탄력 있고 생기 넘치는 얼굴이 자연스러운 화장과 함께 화사함을 더했다. 또렷한 이목구비에 자신감 넘치는 표정의 김샛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출연자들 중에서 나이가 제일 어리다고 들었어요. 막내라.. 언니들과 같이 지내면서 귀여움을 많이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이에요. 언니들과 함께 지내면 여러 가지 배울 점들이 많을 거라서,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이미 CF를 찍어본 경험도 있고, 여배우로서 얼마 전 천만 영화의 여주인공 역할도 해봤죠. 나이가 어리다 보니 경험이란 측면에서 부족한 게 많겠지만, 다른 분들에게 크게 밀리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탈락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  샛별씨는 데뷔를 한 다음, 주로 강수빈 감독과 작업을 많이 하셨잖아요?

"네. 그렇죠. BBG의 디스패치 뮤비에 출연했었고 같이 CF도 찍었죠. 얼마 전 개봉한 라이프 영화에도 캐스팅되어서 출연했었고요."

- 일각에서는 샛별씨가 강수빈 감독의 페르소나가 아니냐라는 의견이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도 주위 분들에게 그런 이야기들을 자주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언제 한번 강감독님에게 여쭤본 적이 있었어요."

- 어머. 그래요? 강수빈 감독이 뭐라고 하던가요?

살짝 실망한 표정의 샛별이 대답했다.

"절 뽑은 이유가 페르소나 같은 그런 거창한 게 아니래요. 여배우들은 다들 예쁜데, 그중에서 제 얼굴 상이 외국인들이 좀 더 좋아할 만한 상인 것 같다고.. 그래서 영화를 외국에서 개봉할 때, 흥행에 좀 도움이 될까 해서 뽑은 거라고 하더군요."

- 정말요? 외국인들이 좋아하던가요?

"전 잘 모르죠. 제가 아직 외국을 나가본 경험이 한 번도 없어서요. 그리고 이유가 하나 더 있었어요. 영화를 찍을 때 비용을 최대한 줄여야 하는데.. 제가 아무 옷이나 걸쳐도 옷 테가 잘나는 편이라 의상비가 적게 드간다고.. 경비 절감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뽑았다고 하더라고요."

- 그러시구나. 의외로 단순한 이유네요?

"네. 저도 듣고서는 좀 많이 실망했어요."

기다렸다는 듯 카메라가 무빙을 하며 그녀의 늘씬하고 볼륨감 있는 몸매를 빠르게 훑었다.

- 그럼 마지막으로, 앞으로 여왕들의 게임을 시청하실 시청자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려요.

카메라가 김샛별의 아름다운 얼굴을 화면 가득 클로즈업했다. 환한 미소를 지은 김샛별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청자 여러분. 영화배우 김샛별입니다. 제가 아직 나이도 어리고, 예능이 처음이라 부족한 게 많습니다. 하지만 시청자 여러분이 재미있게 보실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할 생각입니다. 따뜻한 시선으로 끝까지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박피디가 김샛별이 나이가 어리다는 걸 강조하고 싶은 모양인데.. 나랑 특별한 사이가 아니라는 암시도 살짝 깔은 것 같고.. 뭐 이 정도 내용이면 크게 문제 될 건 없겠군.'

박지영 피디가 보내준 티저 영상 중에서 김샛별 편을 보고 있던 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으로 하이유의 티저 영상을 보려고 할 때, 수빈의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Allez, c'est fini."

(그만 일어나요. 다 끝났어요.)

머리 손질을 해주던 코디의 다 끝났다는 말에, 수빈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Oui. Merci."

(네. 감사해요.)

수빈은 보고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고 자신의 소지품 가방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핸드폰을 가방에 집어넣은 수빈은,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는 무대 뒤쪽으로 걸어갔다. 많은 수의 남자 모델들과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2시간 후면 시작될 패션쇼를 위해 리허설 준비에 한창이었다.

정신없이 바쁜 스태프를 찾아간 수빈은 자신의 옷을 달라고 말했다.

"수빈캉? 오늘 세 벌을 입는 거 맞나요?"

"네. 맞습니다. 운동복, 평상복, 슈트. 이렇게 순서대로 입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잠시 후 아래위로 하얀색에 붉은색 줄이 들어간 운동복을 입은 수빈은, 가슴에 붉은색으로 수놓아져 있는 불꽃같은 문양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피구왕 통키냐.."

런웨이로 나갈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남자 모델들 쪽으로 걸어가던 수빈은, 모여 있는 잘빠진 남자 모델들을 훑어보며 속으로 뇌까렸다.

'오디션 때나 지금이나.. 동양인은 나 혼자뿐이군.'

한편 그 시각 한국.

KBC 신관 예능국 회의실에서 박지영 피디가 작가들과 회의를 하고 있었다.

"강감독에게 먼저 나온 티저 영상을 보내줬나요?"

박피디의 질문에 김작가가 대답했다.

"네. 피디님. 오늘 아침에 김샛별하고 하이유 티저 영상을 보냈어요."

"답변은요?"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남은 두 명의 티저 영상은 언제쯤 나온대요?"

"편집실에 물어봤는데, 오늘 중으로는 틀림없이 나올 거라고 합니다."

"나오는 대로 김작가가 확인해서, 별문제 없으면 바로 강감독에게 보내 주세요. 다들 그날 보셨죠? 영화사 법무팀이라고 사람들이 떼거지로 몰려와서 꼼꼼하게 다 체크하고 간 거..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강감독이 거물이란 걸 다들 충분히 아셨을 거예요. 강감독 동의 없이 영상이 새어 나가면, 법적으로 문제가 심각해지니까 다들 주의를 기울여 주세요."

- 네. 알겠습니다.

"최아림이랑 김성희씨 티저 영상 보낼 때, 강감독 보고 빨리 컨펌을 해달라고 김작가가 재촉도 좀 해주세요. 일요일부터는 광고를 때려야 하니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요."

"알겠습니다. 피디님."

"그럼.. 지금 가장 큰 문제가 촬영 장소죠?"

작가 중 가장 막내 작가인 서작가가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네. 피디님. 촬영 장소로 빌려놨던 집이랑 예비용으로 준비해 놨던 집. 그 두 군데 다 마음에 안 든다고 강감독이 비토를 놓았어요."

옆에서 듣고 있던 김작가가 짜증을 부리며 말했다.

"아니 제작진이 잡아놓은 집에서 그냥 찍으면 될걸.. 강감독이 왜 저러는 걸까요?"

"똑똑한 친구잖아요. 우리 속셈을 뻔히 아니까 튕긴 거죠. 딱 붙어있는 공간에서 같이 지내면서, 러브 라인이나 꽁냥꽁냥 하는 걸 찍어보겠다는 우리 의도가 맘에 안 든다는 거죠. 대책은 있나요?"

박피디의 질문에 서작가가 대답했다.

"강감독이 원하는 대로 하려면, 거주지는 따로 떨어져 있고 필요할 때만 만나는 주택을 구해야 하는데.. 그런 주택이라면 땅콩 주택을 빌리는 수밖에 없을 거 같아요."

"땅콩 주택이면.. 시부모랑 아들 부부랑 떨어져 사는 주택? 한 필지에 두 가구가 나란히 지어진 주택을 말하는 거죠? 입구가 두 군데인.."

"맞아요. 피디님. 두 집을 이어주는 연결 다리가 있거나, 아니면 벽이 붙어있고 정원을 공유하는 형태의 집을 말하는 거예요."

"밖으로 계속 들락날락하며 찍을 수는 없어요. 양쪽 가구 사이에 공유하는 공간이 있는 주택을 알아봐요. 생활은 떨어져 하고, 미션을 수행할 때는 가운데서 만나는 걸로 하면 되니까.."

"알겠습니다. 근데.. 이렇게 급하게 잡으려면 대여 비용이 많이 올라갈 텐데요?"

"상관없어요. 제작비는 넉넉하다 못해 넘쳐나니까.. 그림이 최대한 예쁘게 나오는 집으로 구하세요."

"네. 피디님."

"그럼 집 문제는 그렇게 처리하고.. 내레이션은 어떻게 됐어요?"

박피디의 질문에 김작가가 대답했다.

"배청수씨에게 부탁을 드렸는데. 하시겠다는 답변을 좀 전에 받았습니다."

"잘 됐네요. 그럼 남은 게 하트 시그널처럼 우리도 메기를 집어넣느냐 하는 건데.. 거기에 대해서 의논을 해보죠."

"알겠습니다."

한편 그 시각 파리.

패션쇼장에서 수빈은 마지막 의상인 3피스 슈트를 입은 채 리허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광택 나는 검은색 원단에 회색 스트라이프 무늬가 은은히 박혀있는 고급 양복이었다. 넓은 어깨선에 비해 좁은 허리라인의 디자인이 옷맵시를 특출나게 만들고 있었고, 특히 조끼의 V라인이 유달리 깊이 파여 있어서, 매고 있는 넥타이의 독특한 문양이 한눈에 잘 드러나보이는 의상이었다.

주위에서 남자 모델들이 수빈을 바라보며 수군대고 있었다.

- 저 의상이 이번 패션쇼의 메인 의상 아니었나?

- 맞아. 메인 의상을 누가 입나 했더니 동양인 모델이 입는군.

- 동양인 여성 모델은 간혹 봤지만 남자 모델은 첨 보는데.

- 무슨 수로 처음 보는 동양인 모델이 메인 의상을 입는 거지?

- 뭐 원숭이치고는 얼굴이 잘생겼잖아. 몸이라도 줬나 보지.

- 그런 발언은 인종차별이라고. 뭐 동양인들이 좀 음흉하긴 하지.

호기심과 악의가 잔뜩 담긴 수군거림을 들으면서도, 수빈은 아무 일 없는 듯 평온한 얼굴로 서있었다.

'인종차별하는 쓰레기 같은 놈이 하나 섞여있군. 맘 같아선 작살을 내고 싶지만.. 아서라. 괜히 피곤해져.. 어차피 오늘 하루만 지나면 두 번 다시 볼일 없는 인간이야.'

그때 패션쇼장의 한쪽에서 사람들의 놀란 비명소리가 들리며 시끌벅적해졌다. 사람들의 인사를 끊임없이 받으며, 비서와 경호원들에게 들러 싸인 델핀 아르노가 수빈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수빈에게 다가온 델핀이, 더없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수빈을 꼭 끌어안았다.

"강 피에르 주네.. 나의 패션쇼에 서줘서 고마워요."

수빈이 델핀을 마주 안으면서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헤이. 델핀. 어제부터 내가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어? 난 장 피에르 주네랑 영화에 대한 철학과 가치관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무슨 소리! 상상력이 뛰어나고 도전적이고 강인한 여성상을 그려내는 게 장 피에르 주네랑 꼭 닮았다고. 젊은 나이에 죽어가는 연인을 위해 두 명의 여성이 웨딩숍에서 연인의 마지막을 축복해주다.. 멋지잖아! 그때 영화 속의 여성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강인해 보였는지 알아? 프랑스 영화 평론가들도 다들 그렇게 말하고 있는걸."

"그거야 문화가 달라서 그런 거지.. 근데 여기까지 왜 온 거야? 오늘 바쁘다고 하지 않았나? 어제저녁에 같이 식사를 할 때, 내가 분명히 그렇게 들은 걸로 기억하는데."

"마지막으로 강감독에게 다시 한 번 더 부탁을 하려고 왔지."

말을 하며 델핀 아르노가 여비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비서에게서 백합 꽃다발을 건네받은 델핀이 수빈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마지막 스테이지에서는 이걸 들고 걸어줘. 그리고.. 다음 영화의 배급도 내가 책임질 테니.. 그러니 내가 한 부탁을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봐줘."

"알았어. 하지만 어려울 거야."

잠시 후 주절주절 한참을 떠들던 델핀 아르노가 돌아가자, 백합 꽃다발을 든 수빈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꽃다발 하나 덜렁 건네주고 그런 부탁을 하다니.."

그때 주변에 있던 남자 모델 중 한 명이 수빈에게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헤이. 동양인. 패션모델 겸 영화감독인 거야?"

"아니. 그냥 영화감독이지. 패션모델은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델핀이 하도 부탁을 해서 오늘 하루만 서는 거라고. 그러니 그렇게 날 경계할 필요 없어."

"그렇구나. 영화감독이라면.. 무슨 영화를 찍었지?"

"라이프."

"설마.. 얼마 전 개봉한.. 불치병으로 죽어가던 남자가 나오는 그 영화?"

"그래. 내가 제작한 영화지. 거기서 죽어가던 남자가 바로 나고.."

"오..마이..갓! 내가 그걸 보고 영화관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 두 번이나 봤다고."

"그래? 봐줘서 고맙군."

"나중에 런웨이가 끝나면.. 같이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사인도 좀 받고 싶어."

"얼마든지.."

멀뚱멀뚱 지켜만 보고 있던 남자 모델들이 우르르 다가왔다.

- 나도 라이프 봤어. 같이 좀 찍자고.

- 나도 영화 보면서 펑펑 울었어.

- 라이프를 제작한 감독을 직접 보다니.

- 영화감독 치고는 너무 잘생겼는걸.

맨 먼저 말을 걸었던 남자 모델이 수빈에게 말했다.

"보아하니 그 꽃다발이 무슨 의미인 줄 전혀 모르는 거 같은데.. 지금 우리가 서는 패션쇼 브랜드가 어딘지 알아?"

"알지. 디오르 패션쇼 아냐? 크리스찬 디오르.. 아무리 처음 서는 패션쇼라고 하지만, 그 정도는 나도 안다고,"

"그럼 크리스찬 디오르가 꽃을 좋아했다는 건 알아? 매번 자신의 패션쇼에서 꽃다발을 든 여성 모델을 꼭 등장시켰지. 디오르가 죽은 지 60년이 넘었지만.. 꽃다발 그것도 프랑스의 국화인 백합 꽃다발을 든 모델이 디오르 패션쇼에 선다는 건 큰 의미가 있는 거야. 디오르 측에서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거지. 자신들을 대표하는 메인 모델은 바로 이 사람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거랑 마찬가지라고."

수빈이 무심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래? 난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

수빈이 백합 꽃다발을 들어 올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백합에서 풍겨나는 신선하고 정결한 향내를 맡을 때, 경이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모델들 너머로 한 명의 남자가 보였다.

모델들과 동떨어져 똥 씹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푸른 눈동자에 금발의 잘생긴 백인 모델을 바라보던 수빈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까 인종 차별 발언을 하던 그 쓰레기로군..'

잠시 후 2018년 파리 패션 위크의 디오르 남성복 패션쇼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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