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
63 - 1
6월 16일 토요일
여느 아침처럼 운기조식을 끝마치고 눈을 뜬 수빈이 중얼거렸다.
"대주천까지 얼마 안 남았군. 영화 촬영 때문에 한동안 곡기(穀氣)를 끊은 게 나름 효과를 봤어. 거기에 얼마 전 제대로 된 실전을 겪은 것도 나름 영향을 미친것 같고.."
굳이 전방을 지원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수빈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샤워실로 걸어갔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선 수빈은 헤이리 마셜 아트 센터에 도착해서, 정도홍 무술 감독의 사무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강대표. 인수 가격을 너무 많이 쳐준 거 아닌가?"
정감독의 말에 수빈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정감독님이 피땀 흘려 열심히 키우신 거 아닙니까? 그럼 제대로 가격을 받으셔야죠. 그리고.. 몇 십억 정도에 흔들릴 만큼 가난하지도 않고요. 앞으로 미국 할리우드와 경쟁하려면 정감독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나야 고맙긴 한데.. 굳이 한국에 있는 훈련 센터를 인수할 필요가 있었나? 미국에 훨씬 뛰어난 훈련 센터가 많을 텐데.."
"미국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으로 영화를 찍으면, 그걸 진정한 한국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시스템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할리우드 정복을 시작할 수 있는 겁니다. 정감독님이 많이 좀 도와주세요."
"알겠네. 강대표 덕분에 평생 먹고 살 문제가 해결되었고, 골치 아픈 경영 문제에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으니.. 내가 전심전력을 다해서 인재 양성에 힘쓰겠네."
"바로 그겁니다. 그걸 위해 넉넉하게 쳐드렸으니까.. 제발 신경 좀 써주세요. 안 그럼 다시 토해내라고 할지도 몰라요."
수빈의 가벼운 농에 정감독이 웃으며 물었다.
"강대표가 스카우트했다는 그 친구는 언제쯤 오는 건가?"
"저랑 비슷한 시간에 출발했다고 들었으니까.. 조금 있으면 도착할 겁니다."
"도(刀)를 잘 쓰는 친구라고?"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귀신같이 쓸 겁니다. 권법도 잘 할 거고요."
"기대가 크군."
"설레시나 봅니다?"
"설레냐고? 오래간만에 피가 끓는 느낌이야."
수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조심하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괜히 한판 뜨겠다고 나섰다가는.. 다치실지도 몰라요."
살짝 놀란 표정의 정감독이 대꾸했다.
"그렇게 센가? 아직 젊은 친구라고 하지 않았나?"
"한국 나이로 32이니 아직 한창때긴 하죠. 하지만 잊으시면 곤란합니다. 비록 많이 유실되었다고 하지만, 중국 무술의 전통을 제대로 이어받은 친굽니다. 무서운 친구예요."
"강대표랑 비교하면?"
수빈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저에 비하면야 하수(下手)죠. 그것도 많이.. 잘 아시면서 물어보십니까?"
정감독이 수빈의 몸을 아래위로 천천히 훑어보더니 탄식조로 말했다.
"처음에 만났을 때는 나름 견적이 나왔었는데.. 지금은 강대표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아예 감조차 안 잡히는군. 발전이 빨라도 너무 빠른 거 아닌가?"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이야말로 젊은이의 특권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승률은 어느 정도로 보는가?"
"단기전이면 6 대 4. 장기전으로 돌입하면.. 정감독님의 필패(必敗)입니다. 그 무릎으로는 절대 못 버텨요."
정감독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세월이 참으로 야속하군."
"어쩌겠습니까. 흐르는 세월을 붙잡을 수도 없고.. 중국어는 좀 하십니까?"
"그럼. 무술 연기로 밥 먹고살려면 중국어는 기본적으로 좀 해야지. 영어보다는 중국어가 더 필요한 분야 아닌가. 중국 영화에도 몇 번 출연했었네."
"다행히 의사소통에는 별문제가 없겠네요. 그 친구가 영어는 좀 하는데 한국어는 젬병이라서요."
그때 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빈이 일어나며 말했다.
"그 친구가 도착을 한 모양입니다. 같이 나가보시죠."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난 정감독이 물었다.
"강대표가 스카우트했다는 그 친구 이름이 뭐라고 했지?"
"팽석상(彭錫祥)입니다."
날의 길이는 1미터, 손잡이까지 합치면 1.2미터 정도되는, 정글도와 유사한 형태의 새까만 박도(朴刀)였다. 물소 가죽을 칭칭 감아 놓은 손잡이조차도 새까만 색이었다. 칼날을 벼려 놓지 않은 연습용 박도라 더욱 그래 보였다, 칠흑같이 검은 박도가 공중에서 자유롭게 춤을 추고 있었다.
한 마리 날랜 묵호(墨虎)처럼 재빠르면서도, 주변의 사람들을 금방이라도 덮칠 것처럼 광포한 기세로 허공을 수놓고 있는 박도를 보며 정감독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멋진 칼질이야. 강대표 말대로 제대로 배웠어.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라고 했나? 팽가 비전의.."
수빈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지금 시전하고 있는 건 기수식의 일종입니다. 진정한 오호단문도는.. 훨씬 더 무섭고, 훨씬 더 사납습니다. 절기 이름에 호랑이가 무려 다섯씩이나 들어가 있잖습니까. 그냥 듣기 좋으라고 붙여준 이름이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비전절기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함부로 시전하지는 않죠."
수빈이 박수를 치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 짝짝짝.
"停! Stop!"
잠시 후 수빈과 팽석상 그리고 정도홍 감독이 같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수빈이 중국어로 팽석상에게 물었다..
"회사에서 잡아준 숙소는 편안했습니까?"
"네. 아주 좋더군요."
"다행이군요. 혹시.. 계약 조건에 더 추가하고 싶은 사항은 없으신가요?"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강감독님께서 신경을 많이 써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그럼 이제 우리가 같이 찍을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그전에 강감독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한가지 의문 사항과 한가지 부탁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래요? 그럼 편하게 말씀해 보시죠."
팽석상이 차를 드는 수빈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질문을 툭 던졌다.
"왜 접니까? 팽가에는 저보다 고수인 사람들도 많습니다. 태상가주께 왜 저를 콕 집어서 내어달라고 말씀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일전에 강감독님이 중국에 오셨을 때 안면을 트긴 했지만.. 둘 사이에 특별한 교감이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지 않습니까? 통성명(通姓名) 조차 안한 사이였습니다만.. 그런 저를 왜 원하셨는지가 궁금합니다."
수빈이 차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흠. 그게 궁금하셨나 보군요. 제가 같이 영화를 찍길 원하는 분은 장풍이나 검기를 뿡뿡 내뿜을 수 있는 절정 고수가 아닙니다. 어차피 그런 고수는 팽가 뿐만 아니라 중국을 다 뒤져도 없을 테고요. 제가 원했던 건 재빠른 몸놀림, 능숙한 칼질, 괜찮은 마스크 그리고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인재가 필요했던 거죠. 거기에 팽석상씨가 해당돼서 부탁드렸던 겁니다."
팽석상이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제 마스크가 괜찮다고 하니 감사합니다만.. 뛰어난 연기력이라니요? 전 TV나 영화에 출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따로 연기 수업을 받은 적도 없고요. 강감독님의 말씀이 납득이 잘 안됩니다만.."
수빈이 빙긋 웃었다.
"일전에 무대 인사를 위해 제가 홍콩에 들렸을 때, 그때 공항 직원으로 변장한 적이 있으시죠? 제가 그때 팽석상씨의 어깨를 밟고, 미리 준비해둔 박스 위로 뛰어 올라갔잖습니까? 그때 확인했었죠. 연기를 아주 자연스럽게 잘 하시더군요. 그때 맘먹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같이 영화를 한번 찍어봤으면 좋겠다고요."
벙찐 얼굴의 팽석상이 대꾸했다.
"그럼 그날 그 한순간으로 결정했다는.."
"맞아요. 그 한순간으로 결정했죠. 하나를 보면 능히 열을 알 수 있는 법입니다."
팽석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연기를 잘 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의문 사항은 풀렸습니다. 그럼 부탁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며칠 전 중국에 오셨을 때, 태상가주와 지도 대련을 하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제게도.. 무공 지도를 해주실 수 있습니까?"
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드리죠. 아시겠지만 내가수련법(內家手練法)에 대해서는 지도를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배우고 익힌 게 달라서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이죠. 하지만.. 칼질에 대해서는 지도를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날 태상가주와 대련을 하면서 팽가의 오호단문도를 봤습니다만.. 팽가에서는 오호단문도의 진체(眞體)를 제대로 파악을 못하고 계시더군요."
수빈의 말에 팽석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제게.. 오호단문도의.. 진체를.. 알려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럴 생각입니다. 제게 배우신 후 그걸 팽가에 전수를 하셔도 좋습니다. 아니면 본인만 아시고 팽가에는 꽁꽁 숨기셔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결정은 팽석상씨가 알아서 하시면 됩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수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제 입장에서는.. 저랑 친분이 있는 분이 팽가의 가주로 등극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요."
팽석상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릴 때, 담담한 수빈의 목소리가 이어 들렸다.
"그럼 이제 영화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눠 볼까요?"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몇 번 한 팽석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빈이 새롭게 제작할 영화의 액션 연기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어떻습니까?"
설명을 다 끝낸 수빈의 질문에 정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흥미로운 시도로군. 새롭기도 하고.. 난 아주 맘에 드는데.."
팽석상도 동의한다는 듯,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제가 관객이라면.. 아주 재밌게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두 분 다 좋아하시니 다행이군요. 그럼 이제는 제가 팽석상씨를 스카우트 해온 이유를 충분히 아실 겁니다. 돈으로 처바른 CG 보다 실제의 액션 연기가 못 미치면.. 이번 영화는 폭삭 망하는 거예요. 진정한 액션은 CG 보다 낫다는 걸 보여주는 게 이번 영화의 목표이자 흥행 요소입니다. 이해하셨죠?"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을 보며 수빈이 말을 이었다.
"그럼 다음 한 주 동안 두 분이 머리를 맞대셔서, 제대로 된 합(合)을 짜보세요. 액션이지만 실전과 똑같이 짜주셔야 합니다. 저랑 팽석상씨라면 실전 같은 연기를 충분히 소화할 수 있으니까요."
"알겠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프랑스에 출장을 다녀온 뒤에 확인을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번 영화에 출연할 두 명의 여배우를 액션 스쿨에 보내드릴 겁니다. 정감독님이 직접 맡으셔서 책임지고 훈련을 시켜주세요."
"알겠네. 내가 듣기론 다음 달부터 영화 촬영에 들어간다고 들었는데.. 언제까지 훈련을 마쳐야 하는 건가? 다음 달이면 시간이 너무 촉박한데.."
"제가 정감독님께 시간을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3개월 정도면 충분하시겠죠? 어차피 액션신은 나중에 몰아서 찍어도 되니까요. 제가 보내드리는 두 명은 제법 자질이 뛰어나서.. 가르치는 재미가 있을 겁니다. 그러니 제대로 단계를 밟아서 꼼꼼히 지도를 해주세요."
"그러지. 내가 책임지고 훈련을 시키겠네."
"정감독님만 믿겠습니다. 그럼.. 세부 사항을 좀 의논해 볼까요?"
6월 18일 월요일
수빈은 파리 패션위크에 모델로 참석하기 위해, 인천 국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파리로 출발했다.
수빈이 출국한 그날. KBC 방송국에서 새롭게 론칭하는 신규 프로그램에 관련된 뉴스가 일제히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박지영 피디가 연출하는 [여왕들의 게임]에 관련된 자세한 내용들이 뉴스로 나가자, 대중들의 반응이 폭발할 듯 끓어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