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201화 (201/236)

#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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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영 피디의 설명을 듣고 있던 수빈이 물었다.

"욕받이 용도로 제가 필요하신 겁니까?"

수빈의 물음에 박피디가 손을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그럴 리가요. 모시기 힘든 강감독님을 데리고서, 저희가 그런 짓을 할리가 있겠어요?"

"하지만 누가 들어도 표절이라고 할거 같은데요. 여자 4명을 생각 중이라고 하셨으니.. 여자 4명과 남자 4명이 한 곳에 모여 지내면서, 커플이 되는 걸 관찰 내지는 촬영을 하겠다.. 하트 시그널을 그냥 대놓고 베낀 거잖아요? 시청자분들에게 욕먹을게 뻔하잖습니까?"

박피디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지금 강감독님이 2가지를 오해하고 계세요. 하트 시그널 같은 연애 프로는 예전에도 있었어요. 누가 누굴 베꼈다고 주장하는 게 웃기는 이야기죠. 우리 쪽에서 포맷을 조금만 비틀면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여자 4명, 남자 4명이 나오는 게 아니에요."

수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전 설명할 때 여자 게스트를 4명 정도 출연시킬 계획이라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전 그렇게 들었는데요. 설마.. 연예인이 아니라 일반인들을 출연시킬 생각이십니까? 그럼 더 욕먹을 겁니다."

"일반인은 아무래도 힘들죠. 저희도 당연히 연예인을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말한 건 남자 숫자가 틀렸다는 거예요. 여자 4명에 남자 1명이죠. 남자 1명은 당연히 강감독님이시고요."

박피디의 말에 수빈의 사고 회로가 잠시 정지되어 버렸다. 잠시 후 겨우 정신을 차린 수빈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이제 보니 박피디님이 절 이 바닥에서 매장을 하시려고 작정을 하셨군요. 저에게 원한 같은 게 있으셔서, 이번 기회에 복수하시는 겁니까?"

"말도 안 돼요. 강감독님에게 원한 같은 건 눈곱만치도 없다고요."

짜증이 듬뿍 묻어나는 목소리로 수빈이 물었다.

"근데 왜 그러시죠? 남자 하나에 여자 4명이라.. 사람들이 절 어떻게 보겠습니까? 나쁜 놈, 죽일 놈, 개념 없는 놈이라고 하면서 손가락질할 겁니다. 제가 무슨 희대의 바람둥이도 아니고.. 설마 그런 포맷의 프로그램에 제가 순순히 출연 승낙을 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박피디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뭐 내용이 정 맘에 안드시면, 서로 협의해서 손을 좀 보면 되지 않겠어요?"

뻔뻔스러운 박피디의 태도에, 수빈이 기가 막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것 참.. 오늘 박피디님에게 제가 적응이 잘 안되네요."

"강감독님은 철석같이 저만 믿으시면 돼요. 힘드시면 잠시 쉬었다 이야기를 다시 나눠 볼까요?"

"..그러시죠."

잠시 후 수빈은 박피디와의 1차 만남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밴 안에서 수빈이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박피디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건지 모르겠네요. 아무리 봐도 따로 뭔가를 숨기고 있어요. 남자 1명과 여자 4명의 동거라니.. 유능하기로 소문난 방송국 피디가 그런 말도 안 되는 프로를 기획할 리가 없어요."

백성철이 대꾸했다.

"뭘 숨기는 건지는 모르지만, 뭘 노리고 있는지는 알겠더라. 막장 드라마가 사람들에게 욕은 먹지만, 시청률은 항상 높게 나오잖아? 그런 걸 노리는 거겠지. 화제의 중심인 널 출연시키고, 거기에 1 대 4라는 자극적인 내용으로 보도를 하면.. 시청률은 따놓은 당상이지. 일단 사람들이 한번 보기 시작하면, 수빈이 너의 매력에 빠져들어서 계속 보게 될 거고.."

"왜 갑자기 안 하던 아부를 하세요? 그리고.. 공영 방송인 KBC에서 저런 식의 프로그램을 제작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아까 쉬는 시간에 작가들과 이야기를 좀 나눠봤는데.. 프로그램 자체는 영상미 위주로 깔끔하고 제작해서, 심야 시간대에 내보낼 계획이래. 자기들도 논란에 휩싸이는 건 싫다는 거겠지. 그리고 말이다. 지금 KBC 쪽으로 네가 출연한다는 정보를 얻은 업체들의 광고 문의가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단다. 박피디가 상부로 제작 기획서를 작성해서 올린지 딱 3일 만에 말이다. 하루 만에 제작 결정이 내려지고, 이틀 만에 광고 문의가 빗발친다. 너 같음 포기하겠냐? 박피디도 그렇고 KBC도 그렇고.. 절대 포기 안 할 거다. 어떡하던 물고 늘어질 거야.."

"흠.. 오전에 있었던 간부 회의 때, 영화사 쪽으로 CF 제의가 갑자기 밀려 들어오고 있다더니.. 그 이유 때문이었나 보군요."

"얼마 전 네가 CF에 출연한 '디젤'이 대박 정도가 아니라 초초대박이 났잖아. 샛별이도 그걸로 여신 소리를 듣는 거고.. 다들 그런 효과를 노리는 거겠지. 근데.. 정말 출연할 거야? 정 맘에 안 들면 거절하면 되지 않겠어?"

"그게 맘처럼 쉽지 않아요. 약속을 해놓은 상태고 거기에 샛별이 문제도 걸려 있고.. 최대한 욕 안 먹는 방향으로 가도록 협상을 해봐야죠."

"그래. 네가 의견을 말하면 저쪽도 존중해 줄 거다. 그럼 내일 스케줄은 그대로 진행할 거야?"

"네. 그래야죠. 장감독님과 정감독님께는 말씀을 드렸나요?"

"그래. 이미 연락했다. 내일 아침에 시간 맞춰 오실 거다.

"그럼 내일 아침에 제작 회의를 한 다음에, YK로 가서 박사장님을 만나서 새로 계약할 배우 이야기도 좀 해야 하고, 간 김에 프랑스에 보낼 치수 측정도 좀 하고.. 저녁에는 이관장님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요."

"그래. 알았다. 그럼 내가 시간 맞춰서 아침에 데리러 갈게."

"네. 형."

대답을 한 수빈은 속으로 고민에 잠겼다.

'도대체 박피디가 무슨 속셈인 거지? 워낙 능구렁이 같은 여자라 속을 알 수가 없군. 분명히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

수빈이 고민에 빠져있는 그 시각. KBC 신관에 있는 예능 국장실. 얼마 전 예능 국장으로 발령받은 하상원 예능 국장과 박지연 피디 그리고 신규 론칭 프로그램에 합류할 작가들이 회의를 하고 있었다.

"먼저 사장님 말씀부터 전달하지. 이번 신규 론칭 프로에는 따로 CP가 없네. 박피디가 CP 자격 대행으로 전적인 책임을 지고 제작을 해달라고 신신당부하셨어. 그리고 프로그램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박피디가 CP로 진급을 하게 될 거야. 두둑한 보너스도 받을 거고.. 사장님이 당신의 입으로 직접 약속하셨다고."

박피디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열심히 해야겠네요. 사장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말이죠."

"사장님께서 제작비도 아낌없이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셨어. 그리고.. 이미 여기저기서 난리야 난리. 지금 온 방송국이 벌집 쑤셔놓은 것 같다고. 예능국 뿐만 아니라 보도국, 교양국에서 나한테 바리바리 전화가 오고 있어. 강감독이랑 제발 연결 좀 시켜달라고 말이지. 도대체 무슨 재주로 강수빈 감독을 잡아 온 건가? 좀 전에 강감독이 찾아와서 같이 미팅까지 했다면서? 방송국에 소문이 쫘해. 이미 다른 방송국에까지 다 펴졌을 거야."

박피디가 턱을 치켜들고 도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 게 다 피디의 능력 아니겠어요?"

"그렇지. 박피디의 능력이지. 인정하네. 그럼.. 다른 쪽이랑 연결은 가능한 건가?"

박피디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머. 국장님. 제가 대가리에 총 맞았어요? 연결해 주게.. 잘 아실만한 분이 그런 소리를 하세요."

"나도 그냥 해본 소리야. 미팅 결과는? 잘 끝난 건가? 박피디 말고 김작가가 이야기를 해보게나."

예능 국장에게 지목을 받은 작가 중 가장 고참 작가인 김작가가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강감독이 저희가 생각한 포맷을 별로 맘에 들어 하지는 않았어요. 아무래도 조정기간이 필요할 거 같습니다."

하국장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럼 곤란한데.. 혹시 중간에 틀어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최대한 빨리 론칭을 했으면 좋겠다는 게 사장님 생각이야. 지금 외부에서 벌써부터 알력과 힘 싸움이 시작되고 있다고. 강감독이 워낙 핫한 인물이잖아. 세계적으로 노는 거물이기도 하고.. 질질 끌다가는 어떤 돌발 변수가 터질지 몰라."

우려스러운 표정의 하국장이 박피디를 바라보며 물었다.

"박피디? 담당 피디로서 대책은 있는 거겠지?"

"당연히 있죠. 애초부터 우리가 내민 포맷을 강감독이 그냥 순순히 받아들일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어요. 오늘의 협상은 다음 협상을 위한 일종의 블러핑 같은 거죠. 받아들이면 좋고 아니면 아닌 대로 준비가 되어 있죠."

"어떤 준비가 되어 있는 건가?"

박피디가 싸늘한 눈빛으로 작가들과 예능 국장을 훑어보았다.

"지금부터는 극비 기밀 사항이에요. 만약 이 내용이 밖으로 흘러나가면.. 작가들은 다 교체할 거고, 국장님은 문책을 당할 거예요. 제가 사장님께 다이렉트로 찔러버릴 거니까.."

하국장이 조바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알았으니까 말해봐. 박피디가 협박하지 않아도 비밀은 지켜줄 테니까.."

"제가 이번 프로를 기획한 건 보름전이었어요. 보름전, 그러니까 5월 26일 토요일에 홈쇼핑을 보면서 기획을 한 거죠. 강감독이 제작한 라이프가 전미 박스 오피스 1위를 기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침내 때가 왔다고 판단을 내렸죠. 단순히 3일 전에 후다닥 기획한 게 아니라는 소리에요. 여러분들은 모르시겠지만, 제가 사전 섭외와 사전 기획을 철저히 했어요. 일단 이번 프로에는 예정대로 4명의 여자 출연자가 등장할 거예요. 그리고 누가 출연할지는 이미 어느 정도 결정이 나있는 상태에요."

"응? 제대로 된 협상도 시작되지 않았는데.. 벌써 말인가?"

"네. 아직 정식으로 계약을 하지는 않았지만.. 유선상으로 출연하겠다는 확답은 다 받아놨어요. 강수빈 감독이 출연하는 프로라고 운을 슬쩍 떼니까.. 다들 군말 없이 오케이 하더군요. 강수빈 그 이름 석자만으로 불가능한 게 없는 세상이 온 거죠."

"그렇긴 하지. 강감독 이름값이 견줄 데 없이 올라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강감독 상대로 어지간한 여자 연예인들을 내세웠다가는 시청자들이 납득을 안 할 거야. 원성만 살 수도 있다고. 누군가? 내정된 여자들이.. 지금 알려줄 수 있나?"

하국장의 물음에 박피디가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자세한 건 지금 알려줄 수 없어요. 절대적인 보안 유지가 필요해서요."

"그렇군. 그럼.. 그들 4명의 여성들과 강감독이 꽁냥꽁냥거리는 연애 프로가 되는 건가?"

박피디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천만에요. 그런 타이틀로 나갔다가는 강감독 걱정대로 사람들에게 욕먹기 십상이죠. 강감독이 4명의 여자들과 동거를 한다?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로 비칠 수도 있고, 역풍을 맞을 수도 있어요. 전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고요."

"그럼 어떤 프로라는 말인가"

"목적이 뚜렷하고 결과가 확실한.. 오디션 프로죠."

"오디..션?"

"네. 대외적인 프로그램의 설명은 이런 식으로 나가게 될 거예요. 우리 프로를 지원하는 스폰서 기업들을 1년간 대표하는 공식 광고 모델을 뽑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라고 말이죠. 실제 오디션 결과로 뽑힌 사람들이 CF를 찍는 모습까지도 방송으로 내보낼 계획이에요. 그럼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건전하면서도, 손에 땀을 쥐는 치열한 오디션 경쟁 프로가 되는 거죠. 물론 속으로는 강감독과 4명의 여성들 간의 꽁냥꽁냥을 보는 재미도 있을 거고요. 한마디로 일석이조라고 할 수 있죠. 이번 프로그램은 분명히 대박을 칠 거예요."

하국장이 박피디의 말에 제동을 걸었다.

"아니 잠깐만.. 공식 스폰서라니? 그건 또 뭔가? 첨 듣는 이야기라고.. 벌써부터 공식 스폰서가 있다고?"

박피디가 자세한 설명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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