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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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1일 월요일
라이프 영화의 관객 동원 피크 타임이 어느덧 끝이 나고, 서서히 마무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수빈은 일주일 전 중국 출장을 시작으로 정신없이 바쁜 한 주일을 보내고서. 새로운 한주를 맞이해 간부 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신축 건물 사장실 옆에 붙어있는 대회의실에서 수빈이 슬쩍 농을 던지고 있었다.
"영화사 고위 간부들 얼굴이 반지르르한 게.. 다들 윤기가 도네요. 대표인 저는 제대로 밥 챙겨 먹을 시간도 없어서 죽을 맛인데 말입니다."
수빈의 엄살에 간부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대표로 오상무가 대답했다.
"며칠 전 북미와 유럽 그리고 중국에서 1차 정산을 통해 4천억이 입금되었어요. 그중에서 직원들에게 보너스로 2.5프로, 그러니까 100억 가량이 보너스로 집행되었고요. 다들 그래서 얼굴이 좋은가 봐요."
"흠. 다들 저보다 돈을 더 좋아하는 거 같은데.. 앞으로 경영에 참고하도록 하죠. 그럼 개략적인 전망부터 한번 들어볼까요?"
"네. 대표님. 라이프를 개봉한 첫 주 성적을 보고, 영화 관계자들이 전망하기를 못해도 30위권, 잘되면 25위권 정도의 성적을 거둘 거라고 예상을 했었어요. 이해하기 쉽게 말씀드리면.. '캐리비안의 해적:낯선 조류' 정도의 성적을 거둘 거라고 예상을 했었습니다만, 이미 넘어섰어요."
"반가운 소식이네요. 그럼 지금은 어디까지 갈 거라고 내다보고 있나요? 이제 1주 정도 더 지나면 거진 스크린에서 내려갈 분위기 같던데.."
"현재로서는 21위나 20위 정도의 성적을 거두지 않을까라고 전망하고 있어요. 알기 쉽게 말씀드리면.. 역대 흥행 랭킹 21위는 '다크나이트 라이즈'고, 20위는 '트랜스포머:사라진 시대'입니다. 매출액은 둘 다 비슷해서 11억 달러 정도 되고요."
"애초 예상보다 흥행 랭킹이 올라간 이유가 있겠죠? 나름 분석을 해봤을 텐데.. 분석 결과 원인이 뭐라고 나왔나요?"
"현재 북미 대륙에서 배급을 맡고 있는 유니버설사에서 아주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어요. 북미를 넘어서 남미까지 적극적으로 배급을 하고 있는 중이죠. 지금 현재도 남미 대륙의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등에서 영화가 새롭게 개봉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유럽 쪽에서도 상당히 적극적으로 배급에 나서고 있고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잠시 한 호흡을 쉰 오소라가, 본인 스스로가 흥분이 되는지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라이프 영화 그 자체가 더없이 훌륭하다는 관객들의 평가가 대세를 이루고 있어요. 특히 대표님이 직접 연기하신 불치병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한 젊은이의 사실적이고 소름 돋는 연기가,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를 연기한 히스 레저의 광기 어린 연기에 버금간다는 평들이 전 세계 영화 팬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지금 SNS 상에서는 이러한 대표님의 연기를 극찬하면서, 내년도 아카데미상을..."
수빈이 손을 들어 오상무의 말을 막았다.
"듣고 있자니 좀 낯간지럽네요. 그 정도로 해두시고.. 결론은 영화가 평이 좋고, 배급사에서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기 때문에 예상보다 순위가 좀 올랐다는 얘기로군요. 그럼 국내 상황은 어떤가요?"
한창 흥이 올랐다가 제지된 오소라가 입맛을 살짝 다시면서 보고했다.
"이번 주 중으로 1,500만 정도는 무난히 달성할 거로 보여서, 역대 한국 흥행 랭킹 2위에 도달할 건 확실시되고 있어요. 문제는 1,700만 관객을 동원한 역대 흥행 랭킹 1위인 명량을 따라잡느냐인데.. 개봉 기간을 좀 더 늘리면 그것도 충분히 가능할 거로 내다보고 있고요."
오소라의 말에 수빈이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굳이 1위를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 영화를 계속해서 거는 건, 자신들의 영화를 개봉하기 위해 준비 중인 여러 사람들에게 원성만을 살 뿐입니다. 미련 두지 마시고, 정해진 날짜가 되면 스크린에서 바로 내리세요. 지금 저나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건 국내 흥행 랭킹 1위 같은 타이틀이 아닙니다. 새로운 도전과 새로운 영화 제작이 필요하죠. 라이프는 이미 우린 손을 떠났다고 생각하시고, 지금 이 순간부터는 신작 제작에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다들 아시겠습니까?"
- 알겠습니다. 대표님.
"좋습니다. 제가 알아야 할 다른 사항들이 있나요?"
"지금 이곳저곳에서 연락이 끊임없이 오고 있어요. 방송 출연 요청과 인터뷰 요청 그리고 CF 및 투자를 하고 싶다는 연락들이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어요."
"다 거절하세요. 어차피 제가 꼭 받아야 할 전화들은 백비서를 통해서 저에게 오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그런 요청들을 일일이 들어줄 만큼 제가 한가하지가 않아요."
"알겠어요. 근데 대표님. 요 며칠 전 영화사로 이상한 전화가 한통 왔었는데요."
"이상한 전화요?"
"네. 대표님의 정확한 신체 사이즈를 빨리 보내달라고 하던데요? 가봉은 나중에 하더라도, 치수를 정확히 알아야 옷을 제작한다고.. 그렇게 말하면 아실 거라고 하던데요. 급하데요."
"설마.. 루이비통?"
"네. 맞아요. 거기 회사에서 전화가 왔었어요."
수빈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내가 파리 컬렉션을 까먹고 있었군."
수빈의 말에 놀란 토끼 눈이 된 오소라가 반문했다.
"어머. 대표님. 파리 컬렉션에서 모델로 서시나요?"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그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넘어가시고.. 다른 게 또 있나요?"
"신입사원 채용 문제요. 조만간 채용 공고를 내야 하는데.. 날짜와 인원을 어느 정도 픽스를 해주셔야 가능해서요."
"그건 제가 검토를 해보고 주 중으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또 있습니까?"
오소라가 서류를 한 장 꺼내들어 읽기 시작했다.
"75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72회 로카르노 영화제, 42회 몬트리올 국제영화제, 31회 도쿄 국제영화제 그리고 40회 낭트 3대륙 영화제에서 라이프 영화의 출품을 부탁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39회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이 대표님께 안타깝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우리 쪽에서 원한다면, 비록 일정이 촉박하지만 라이프 영화 출품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우리 쪽의 의사타진도 동시에 해왔습니다."
"모스크바 영화제에서요?"
"네. 대표님."
"거기 일정이 어떻게 되는데요?"
"영화제 개최까지 열흘밖에 안 남았어요. 지금 현재는 달빛 속의 호위무사가 출품이 되어있습니다만.. 갑자기 라이프가 뜨는 바람에 급하게 연락을 한거 같아요."
"열흘이라.. 그냥 내년에 하겠다고 전해주세요. 아무래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우리 영화가 필요한 모양인데, 그렇다고 개봉 중인 영화를 그렇게 시간에 쫓겨서 출품할 수는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달할게요."
"그럼 나머지 영화제들은 시간이 충분한가요?"
"네. 대표님. 가장 빠른 게 로카르노 영화제인데 8월 초순이고요. 비교적 일정이 뒤쪽인 도쿄 영화제가 10월 말, 낭트가 11월 말이라 시간상은 문제가 없어요. 몬트리올 영화제와 베니스 영화제가 8월 말이라 살짝 일정이 겹치기는 하는데.. 몬트리올이 베니스보다 일주일가량 일찍 끝나서 큰 문제는 없을 거 같아요."
"좋습니다. 몬트리올 영화제는 어머님이 계시는 캐나다에서 하는 거라, 제가 꼭 참석을 하고 싶으니까.. 일정 조절을 잘 부탁합니다."
"걱정 마세요. 대표님. 제가 알아서 일정을 잘 조절할세요."
"또 제가 알아야 할게 있습니까?"
"현재로서는 없어요. 나머지들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그래요? 그럼 이걸로 전체적인 간부 회의는 끝마치는 걸로 하고, 제작부서 분들은 내일 아침에 저랑 구 영화사 건물에서 제작회의가 따로 잡혀 있으니까.. 그때 상세한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 알겠습니다. 대표님.
수빈이 대회의실을 나와서 사장실로 이동했다. 비서실 책상에 앉아 있는 백성철을 보며 수빈이 입을 열었다.
"형. 내가 옷 제작에 필요한 신체 치수를 정확히 알아야... 형 얼굴이 왜 그렇게 죽상이야?"
백성철이 수빈의 팔을 붙들고 사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를 말했다.
"수빈아. 좀 전에 유재식 형님한테서 전화를 받았는데 말이야."
"그런데요?"
"미안하지만.. 너보고 빚을 갚아야 할거 같다고 그러시네."
"빚? 설마.. 이번에 재식이 형님이 홈쇼핑에 출연한 걸 빚이라고 말하던가요?"
"아니. 그 형님 성품에 그런 말을 할리가 있겠냐? 그 형님도 다른 사람에게 둘러둘러 전달을 부탁받은 모양이야. 너랑 연락이 통 안되니까, 유재식 형님을 찔러서 연락을 하게 만든 모양이더라고."
"누가요? 제가 빚진 게 있다고.. 누군가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다고.. 누가 감히 그런 말을 하던가요?"
"KBC 박지연 피디. '유니언'을 연출했던.."
그 순간 수빈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고, 수빈의 입에서는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아.."
잠시 후 수빈이 허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젠장.. 샛별이 성형 전 얼굴을 방영 안 하는 조건으로, 제가 그 피디의 프로그램에 세 번 정도는 출연하겠다고 약속을 한 게 있었는데.. 독한 양반이네요. 그걸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네. 혹시 어떤 프로에 나와달라고 하는지 들었어요? 그 피디가 예전에 재식이 형님과 '해피 투모로우'를 연출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유니언이 끝나고 다시 그쪽으로 옮겼으려나?"
"내가 얼핏 듣기로는, 새로운 연애 프로그램이라고 들었다."
"새로운 연예 프로그램이면.. '연예가 중계'나 '한밤의 TV 연예' 같은 프로를 새롭게 론칭하는 모양이네요. 뭐 그 정도면 나가줘야죠. 약속한 게 있으니.."
백성철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처음에 그런 줄 착각했었지. 연예가 아니라 연애다. 연애 프로그램."
"...연애?"
"그래. 연애. 요즘 연애 프로그램이 다시 유행이잖아. '하트 시그널'이나 '로맨스 패키지' 같은 게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고. 거기에 맞춰 KBC에서도 새로운 연애 프로그램을 하나 제작할 모양이야. 거기에 널 첫 번째로 꼽을 심사(心事) 인가 보더라."
"정확하게 어떤 프로라고 하던가요?"
"나도 정확히는 몰라. 그냥 그런 프로라는 말만 전해 들었다."
수빈이 이를 뿌드득 갈며 말했다.
"군대도 안 다녀온 놈이 무슨 연애를 한다고.. 지금 바로 박피디에게 연락해서, 제가 보잔다고 오늘 저녁에 약속을 좀 잡아주세요."
"그래. 알았다."
그날 저녁 7시. 여의도 KBC 신관에 위치한 예능국의 한 회의실 테이블에 수빈과 백성철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테이블 건너편에서는 생글생글 웃고 있는 박지연 피디와 프로그램 작가들로 보이는 여성 네 명이서 호들갑을 떨며 앉아 있었다.
- 너무 잘생겼다. 실물이 백배 더 나아.
- 대박! 이번 프로는 무조건 대박!
- 얼굴에서 광채가.. 나 어떡하면 좋니?
- 나 무급으로도 계속 일할 수 있을 거 같아.
작가들끼리 속삭이는 이야기를 들으며, 수빈이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태껏 참고 계셨던 겁니까? 아니면 우연히 기억을 떠올리신 겁니까?"
박피디가 옆에 놓인 수첩의 한 페이지를 펼쳐서 수빈에게 보여주었다.
"보이시죠? 여기 강수빈 감독님의 출연 약속이 적혀 있는거.. 대문짝만 하게 적어 놓고 매일매일 보고 있었어요. 우연이라니요? 말도 안되죠. 단 하루도 잊어버린 적이 없는걸요."
"그럼 여태껏 왜 한 번도 연락을.. 설마.. 계속 참고 계셨던 겁니까?"
"당연하죠. 날이 갈수록 강감독님의 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데, 피디로서 당연히 참고 기다려야죠. 저도 참느라 힘들었다고요."
"후우.. 대단하시네요. 도대체 어떤 프로그램에 절 출연시킬 작정이십니까?"
박피디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서류 하나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제가 작성한 새로운 프로그램의 기획서예요. 강감독님도 잘 알고 계시죠? 방송국에서 프로그램 하나를 새롭게 론칭하려면 얼마나 많은 심사를 통과해야 하고, 얼마나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하는지.. 특히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영 방송인 KBC는 그런 절차가 타방송국들보다 훨씬 어렵고 복잡해요. 하지만.. 지금 제가 드린 기획서가 그 모든 문제들을 해결했죠."
고개를 살짝 갸웃한 수빈이 서류를 집어 들며 말했다.
"프로그램 하나를 새롭게 론칭하는 기획서치고는 좀 얇은 편이네요.."
수빈의 말에 박피디가 방긋 웃으며 대꾸했다.
"참고로 그 기획서는 KBC 방송국 기록을 경신(更新) 한 기획서에요. 제가 작성해서 올린지 반나절만에 부장, 국장을 거쳐서 사장까지 올라간 기획서죠. 심사고 평가고 간에.. 반나절만에 모든 과정들이 순식간에 진행되어서 사장 결재까지 떨어진 기획서에요. KBC 역사상, 역대 최단 시간 만에 제작 허가가 떨어졌죠."
수빈이 기획서를 들쳐보았다. 그리고선 고개를 저으며 바로 다시 덮어버렸다.
"연애 프로그램이라는 것 말고는 별다른 설명도 없군요. 그냥 제 이름만 큼지막이 적혀 있네요."
"맞아요. 출연자란에 강감독님 이름을 떡하니 타이핑해서 올렸죠. 그걸 보고 나서는.. 아무도 제게 시비를 걸지 않더군요. 오로지 딱 한가지 질문만 했어요. 정말로 출연시킬 자신이 있냐고 말이죠. 그래서 제가.. 자신 있다고 말씀드렸죠. 그 뒤로는 뭐.. 일사천리였죠."
어이없다는 듯 고갯짓을 한 수빈이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어떤 프로를 제작하실 생각이신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