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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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멋쩍어하는 얼굴의 케빈이 수빈에게 슬쩍 물었다.
"수빈아. 아까는 내가 너무 나갔지?"
"괜찮아. 어차피 라이브고 록 아니냐. MR이나 AR 따위는 틀지도 않는데 뭐 어때? 삘 가는 데로 달리는 거지. 그리고.."
수빈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대기실을 둘러보았다.
"로빈이 어디 갔어? 걔도 아까 보니 약간 제정신이 아니던데.. 다들 오래간만에 하는 록 공연이라 음악에 취했어."
옆에서 기웃거리던 경빈이 잘난 체를 하며 끼어들었다.
"록 하는 양반들은 이래서 안돼요. 절 보세요. 얼마나 차분하게 랩을 하는지.."
수빈이 빠르게 팔을 뻗어 경빈의 목을 휘어감았다. 헤드록을 걸며 수빈이 경빈의 머리를 콩콩 쥐어박았다.
"네 이놈. 분위기를 띄워야 할 래퍼 주제에.. 어디에다 자꾸 눈을 파는 거야? 네놈이 하이유 선배를 자꾸 힐끔힐끔 쳐다보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아아. 형. 아파요. 리허설이라 앞에 관객도 없는데 그럼 어딜 봐요? 그리고 오늘 하이유 선배 의상이.."
- 또각. 또각.
음료수를 마시고 있던 하이유가 킬힐 소리를 내며 가까이 다가왔다.
"내 의상이 왜? 이쁘기만 한데.. 강감독님 아니 강이사님. 감독 소리가 입에 붙어버렸네. 그렇죠? 이쁘죠?"
하이유가 자랑을 하듯 제자리에서 빙글 맴을 돌았다.
붉은색 미니스커트에 아랫배가 훤히 보이고, 등판이 과감하게 파인, 마치 발리 댄서들이나 입을법한 반짝이 의상 차림의 하이유를 보며, 수빈이 엄지를 높이 치켜들었다.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록 스프릿이 물씬 풍깁니다. 마치 록 페스티벌에 왕림한 록의 여신이나 여왕 같아 보입니다."
"그렇죠? 흐흥. 그럼 전 분장 좀 다시 고치고 올게요."
"네. 다녀오시죠."
하이유가 자리를 뜨자 경빈이 재빨리 물었다.
"저 누나 왜 저런데요? 정말 약이라도 빨았나? 하루 종일 엄청 업이 되어 있던데.."
"오늘 아침에 전화를 받았다더라."
"무슨 전화요?"
"청룡 영화제 심사위원장한테서.. 올해 여우 주연상 후보로 올리겠다는 전화를 말이다."
"아. 그래서.."
"라이프에서의 연기로, 이제 주연급 영화배우로 인정을 받는 거지. 실제로 영화를 찍으면서 연기가 많이 늘었고.. 이제는 어지간한 여배우들보다 연기를 더 잘해."
수빈이 경빈을 풀어주고, 한쪽에서 자신들의 악기를 손보고 있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
"송경호씨, 오정호씨. 두 분 다 드럼이나 건반이 좀 달려도, 연주하는데 크게 불편하지 않으시죠?"
기타리스트 송경호가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로 대답했다.
"전혀 문제없습니다. 대표님. 이 정도도 못 따라가면 나가 죽어야죠. 이걸로 밥 먹고사는데요."
"왜 이렇게 굳으셨지? 편하게 앉아서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럼.. 오정호씨도?"
"손가락이 부러져도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호 저놈이 요 몇 달 정산을 받으면서 통장에 돈이 억대로 계속 찍히니까, 정신줄을 살짝 놓아서 저런 겁니다. 제가 잘 챙길 테니까, 연주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요. 믿고 있겠습니다."
시간이 흘러 라이프 공연 시간이 임박했다. 밖에서 스태프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 라이프 팀. 무대 준비해주세요. 10분 전입니다.
수빈이 흩어져 있던 사람들을 한자리에 다 불러 모았다. 둥글게 선 사람들이 다 같이 손을 모았다.
"다들 잘 들으세요. 작사도 제가 했고, 작곡도 제가 했습니다. 디렉팅도 제가 한 곡이에요. 제가 원작자란 말입니다. 원작자가 허락할 테니.. 무대에 올라가면 원곡 따위는 신경 쓰지 마시고, 다들 삘가는데로 미쳐봅시다. 아시겠습니까?"
- 네!
"그럼 오늘 다 같이 무대에서 죽어봅시다. 하나 둘 셋."
- 파이팅!
알게 모르게, 생방송 특유의 딱딱함과 긴장감이 감돌고 있는 KBC 신관 공개홀이었다. 뮤직 뱅크 MC들의 다음 무대 소개 인사말이 끝났다. 라이프의 초연 무대라는 소리에, 방청객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무대의 조명이 하나둘씩 꺼지며 암전(暗電)이 되어버리자, 방청객들도 덩달아 얌전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무대에서, 어느 순간 드럼 스틱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딱. 딱. 딱.
스틱 두드리는 소리가 끝나자마자, 케빈의 드럼이 초장부터 냅다 내달리기 시작했다.
- 두구두구. 두구당당. 두두둥.
거기에 로빈의 건반이 질세라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 따랑. 당다라랑. 땅따다당.
이때만을 숨죽이며 기다려 왔다는 듯, 심장 박동 소리 같은 묵직한 베이스 사운드가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 둥둥. 두두둥. 둥둥둥.
무대의 조명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하는 순간, 마이크를 쥐고 무대 위에서 얌전히 손을 모으고 서있는 경빈과 성빈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 우아아. 짝짝짝.
사람들의 함성 소리와 박수소리가 터져 나오는 그때, 기타리스트 송경호의 불꽃같은 속주가 시작되었다.
- 끼리링. 끼잉. 끼리리링. 끼이잉. 낑낑낑.
- 우와아아아!
사람들의 함성이 점점 더 커져갈 때, 좀 전 대기실에서 자신이 주장하던 차분 따위는 얻다 팔아먹었는지, 잔뜩 흥분한 얼굴의 경빈이 마이크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R~ U~ Ready~?"
방청객들이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 Ready!
성빈이 거친 목소리로 방청객에게 명령했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아!"
방청객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나자, 두 사람이 팔을 앞으로 내지르며 힘차게 외쳤다.
"라이프! 라이프! 라이프!"
두 사람을 따라 방청객들이 팔을 앞으로 내지르며 소리쳤다.
- 라이프! 라이프! 라이프!
성빈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마~이!"
방청객들이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 라이프!
경빈이 목청이 찢어지라 외쳤다.
"유~어!"
분위기가 업된 방청객들이 공개홀이 떠나가라 외쳤다.
- 라이프!
그때 무대 옆에서 찢어진 청바지에 찢어진 티셔츠를 입은 수빈이 걸어 나오며, 언플러그드 버전과는 반대로 랩부터 시작을 했다.
"마이 라이프. 유어 라이프. 언제나 행복한 피에로처럼~"
경빈과 성빈이 흥겨운 몸짓을 하며 호응했다.
"처럼!"
"영원히 즐거운 어릿광대처럼~"
방청객들이 호응을 했다.
- 처럼!
경빈과 성빈 그리고 수빈이 입을 모아 랩을 하기 시작했다,
"그대의 인생은 끝없이 돌아가는 회전목마. 태어나 살고~"
- 살고!
"아파서 죽고~"
- 죽고!
"다시 또 태어나는 수레바퀴. 다람쥐 쳇바퀴처럼 끝없이 돌아가는 풍차 같은걸. 외로워 말고~"
- 말고!
"울지도 말고~"
- 말고!
"소중한 인생에 감사하며 행복을 느껴봐. 뷰티플 라이프."
- 라이프!
수빈이 마이크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하이~유~우."
화려한 차림의 하이유가 등장을 하자, 드럼 비트가 점점 더 빨라져 갔다. 건반의 타건 소리가 숨 쉴 틈 없이 터져 나오고, 리드 기타의 일렉 사운드가 사람을 잡아먹을 듯 달려들고 있었다. 거기에 맞춰 전력 질주할 때의 심장 박동처럼, 베이스도 덩달아 템포를 잔뜩 끌어올리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관중들의 함성 소리가 끝도 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우와아아아!"
후끈 달아오른 공개홀의 분위기에 감염이 되었는지, 잔뜩 열이 오른 얼굴의 하이유가 원곡보다 더 빠른 템포로, 더 높은 피치로, 마치 자신의 노랫소리를 방청객에게 집어던지듯, 열정적으로 불러젖히기 시작했다.
"난! 가끔 그대에게 물어보았죠. 당신은! 왜 항상 행복한 건지~"
수빈, 경빈, 성빈이 입을 모아 외쳤다.
- 건지!"
"그대는! 언제나 입버릇처럼 말했죠. 인생이란!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소유물이라고~"
- 소유물! 노! 노!
"그저 스쳐가는 바람의 흔적일 뿐. 잠시 머물다가는 펜션의 하룻밤 꿈처럼~"
- 꿈처럼!
"뛰어가도 잡을 수 없는 아름다운 무지개라고. 그러니 걱정 말고 항상 행복하게 살으라고. 뷰티플 라이프~"
- 뷰티플 라이프!
1절이 끝이 나자, 케빈의 드럼 소리가 마치 양철 지붕을 때리는 폭우처럼, 쉬지 않고 끝없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 두구두구두구. 두당당. 두구당당. 두구두구두구.
갈수록 점점 더 빨라지는 비트 속에, 수빈이 무대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속사포처럼 랩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마이 라이프. 유어 라이프. 나의 인생은 채무자. 너의 인생은 빚쟁이. 먼지처럼 사라지는 통장속 머니처럼. 순식간에 사라지는 숫자로 된 신기루야. 축복 속에 탄생하고~"
- 탄생하고!
"위로 속에 스러지고~"
- 스러지고!
"끝이 보이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 다람쥐 쳇바퀴처럼 끝없이 돌아가는 물레 같은걸. 괴로워 말고~"
- 말고.
"슬퍼도 말고~"
- 말고.
"기쁨 속에 하루하루 웃으면서 살아봐. 뷰티플 라이프~"
- 뷰티플 라이프!
수빈이 벌떡 일어나 하이유가 함께 합창을 시작했다.
"오늘도 두 손 모아 행복을 기도해요. 마이 라이프~ 유어 라이프~"
- 마이 라이프! 유어 라이프!
"내일도 변함없이 행복하길 기원해요. 그대의 인생. 나의 인생.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 우리의 인생을! Yeah!
공연이 끝나자 사람들의 함성소리와 박수소리에 KBC 신관 공개홀이 떠나갈 것만 같았다.
6월 3일 일요일
일요일 오후 6시 인천 국제공항.
목요일 KBC 뮤직 뱅크를 시작으로 한 음악 방송 스케줄을 순조롭게 소화한 수빈은, 백성철이 운전하는 밴을 타고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토요일에 있었던 MBS 음악 중심과 조금 전 낮에 있었던 SBC 인기가요의 무대에서는, 이미 뮤직 뱅크 무대를 시청했던 방청객들의 떼창으로 인해, 거의 콘서트 분위기로 무대 공연을 끝마쳤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음악 방송인 N카운트다운은 시간 관계상 출연을 못하겠다고 통보를 하였지만, 사실은 뒤끝이 심한 수빈의 주장 때문이었다는 건 BBG 멤버들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개봉관 숫자가 급격하게 증가한 라이프는 순식간에 천만 관객을 돌파하였고, 역대 국내 관객 동원 1위를 노리고 맹렬하게 질주하는 중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수빈은 중국 출장을 결정하였다. SBC 인기 가요 무대를 끝마치자마자 공항으로 달려온 수빈은, 곧바로 수속을 끝마치고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중국 북경으로 날아갔다.
북경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속에서, 수빈은 자신이 준비한 물품들을 꼼꼼하게 체크하고 있었다.
'유쿠와 훌루에 올릴 특수본 드라마 리메이크 버전은 잘 챙겼고, 문제는 이건데..'
수빈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나무 목합을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우황청심환 같은 큼지막한 크기의 알약이 세 알 담겨있었다. 중국으로 와달라는 부탁을 받은 후, 수빈이 직접 수기집결진의 기(氣)가 담긴 물로 제작한 알약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날 찾는 이유가 태상 가주의 소주천 완성 말고는 없어. 문제는 이걸 건네줄 건가 하는 것과 대가로 무얼 받아낼 건가인데..'
"아무래도 직접 부딪쳐 봐야 감이 잡히겠지?"
수빈은 조심스레 목합을 다시 챙겼다.
잠시 후 수빈이 탑승한 비행기가 북경 국제공항에 도착을 하였다. 수빈이 빠른 걸음으로 출국장 쪽으로 이동했다. 수빈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만약 태상 가주가 내가 만든 알약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저 친구를 내어달라고 딜을 해야겠군.'
수빈이 빙긋 웃으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