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
61 - 1
5월 31일 목요일.
국회의사당으로 가는 국회대로 그리고 국회대로와 연결된 여의서로가 사람들의 행렬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여의도 공원 쪽과 여의공원로 인근에는 수많은 텐트들이 난립되어서, 마치 난민촌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조금 전 막 점심을 해결한 KBC 신입 사원 김지영은, 얼마 전 국회의사당과 멀지 않은 곳에 신축된 KBC 신관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오늘 소동이 일어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 일 거라고는 상상을 못했었기 때문이었다.
KBC 신관 인근은 모여든 사람들로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간신히 헤집고 신관 건물 안으로 들어간 김지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김지영은 신관 1층에 있는 카페테리아에 들렀다. 작년에 입사해서 현재 자신의 직속 선배인 최영미 피디와 자신이 마실 커피를 사고서, 후다닥 발을 놀려 신관 공개홀로 이동했다. 공개홀 3층에 있는 부조정실로 들어간 김지영은, 부지런히 장비를 조작하고 있는 최영미에게 다가갔다.
"선배님. 여기 커피요."
최영미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어머. 후배가 들어오니까 정말 좋다. 내일 커피는 내가 살게요. 고마워요."
"아니에요. 제가 이런 거라도 해야죠."
그때 옆쪽에서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건 없는 거야?"
부조정실 실장인 김성태 실장의 물음에 김지영이 미안한 얼굴로 대답했다.
"죄송해요. 실장님. 제가 미처.."
그때 최영미가 뾰쪽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지영씨. 저런 거짓말쟁이 아저씨한테 커피 같은 거 사다 줄 필요 없어요. 그러니 신경 쓰지 마세요."
갑자기 무슨 소리냐라는 표정으로 김성태 실장이 최영미에게 대꾸했다.
"내가? 내가 왜 거짓말쟁이 아저씨야?"
"기억 안 나세요? 작년에 제가 신입일 때.. 지금은 다른 부서로 발령 나서 안 계시는 김영철 기사님하고, 둘이서 짜고서 절 놀려먹었잖아요."
"내가 언제 최피디를 놀려먹었어? 난 그런 기억이 없다고.."
최영미가 콧바람을 내뿜으며 반박했다.
"흥.. 이래서 맞은 사람만 기억하고, 때린 사람은 기억을 못한다는 말이 나온 거죠. 작년에 둘이서 짜고 절 속였잖아요. 뭐 수빈이가 머리가 나빠서 노래 가사를 못 외운다고요? 그래서 반드시 사전 녹화를 해야 한다면서, 소문난 멍청이에 돌머리라고 저에게 말하지 않았었나요?"
"어라? 어.. 그건.."
최영미가 계속해서 김실장을 몰아붙였다.
"그런 멍청한 인간이 영화감독은 어떻게 됐고, 영화는 무슨 재주로 찍을까요? 그리고 또 뭐라 그랬는지 기억 안 나세요? 수빈이가 입만 열면 쌍욕에, 술 버릇이 나쁘고, 아무 여자에게나 들이댄다고.. 저에게 그렇게 말했어요? 안 했어요?"
"아니.. 내가 최피디에게 그렇게 말을 한 건 맞아. 기억이 난다고. 하지만.."
그 순간 최영미가 맺힌 한이 있는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제가! 김실장님에게 속아서! BBG 팬카페에다가 내가 들은 게 사실이냐고 물어봤다가, 운영진에게 제명 당했던 여자예요. 알아요? 방송국에 근무한다고 뻥을 치면서, 방송국 직원에게 직접 들은 사실이라면서 거짓말만 줄곧 늘어놓는 여자로 찍혀서, 제가 팬카페에서 제명을 당했다고요. 알기나 해요?"
옆에서 듣고 있던 김지영이 눈이 휘둥그레지며 물었다.
"어머. 그럼 선배님이 그 방공녀?"
"방공녀? 방공녀는 뭐니?"
"방송국에서 근무한다고 공갈치고 다니는 여자. BBG 팬카페에서 나름 유명한데.."
최영미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내가 못 살아. 이게 다 저 아저씨 때문이라고. 내가 다시 가입하려고 운영진들에게 얼마나 싹싹 빌었는데.. 아직도 재가입을 못하고 있다고.."
김실장이 두 여자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작년까지는.. 분명히 그랬다고. 절대로 내가 거짓말을 한 게 아냐."
최영미가 찬바람이 도는 얼굴로 김실장을 외면했다.
"지영씨. 알았죠? 앞으로 김실장님이 뭐라 해도 다 믿으면 안 돼요. 그러다 내 꼴 나요."
"알겠습니다. 선배님. 근데.. 오늘 라이프 첫 무대라 그런지 밖에 난리도 아니에요. 신관 근처에 사람들이 정말 바글바글해요."
"음반만 내고 방송 무대를 한 번도 안 해서 더 그럴 거예요. KBC 입장에서는 어찌 보면 행운이죠. 뮤뱅이 음중이나 인기가요보다 방영일이 빠른 게 말이죠."
"정말 다행이에요. 근데요. 선배님. 요즘 조작설이 돌아다니는 거 아세요?"
"저도 알아요. 라이프 1위 조작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죠."
"그게 무슨 소린가요?"
"뮤뱅에서 순위를 선정할 때, 4가지 항목을 참고해서 순위를 매겨요. 가장 비중이 큰 게 음원 성적. 그다음이 선호도 조사. 그리고 음반 판매량과 방송 횟수. 이렇게 4가지 항목으로 점수를 매겨서 합산을 하는데.. 라이프가 음원 성적이 없잖아요? 음원 자체를 출시하지 않으니.. 그래서 원래대로 라면 1위를 차지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해요."
"근데 어떻게 1위를 하는 거죠?"
"팬들의 자발적인 조작이 있죠. 팬들도 다들 알아요. 라이프가 순위에서 1위를 하지 않으면, BBG나 하이유가 굳이 방송 무대에 설 생각이 없다는 걸 말이죠. 그래서 기를 쓰고 조작을 하고 있죠. 평가 항목 중에서 방송횟수는 라이프가 압도적인 1위에요. 라디오를 틀기만 하면 노래가 나오니까.. 음반 판매는 더 말할 것도 없죠. 문제는 선호도 조사인데.."
"그럼 선호도를 조작하는 건가요?"
"맞아요. 선호도 조작이 일어나죠. 단, 음악이나 아이돌을 좋아하는 팬들의 자발적인 조작이죠. 무슨 소리냐면.. 음원 순위가 높아서 자칫하면 1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런 곡이 있으면, 선호도 조사에서 대다수의 팬들이 절대 안 찍어요. 행여나 그 곡이 라이프의 1위 자리를 위협할까 봐서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라이프를 1위로 밀어서, 방송 무대에서 꼭 보고 싶다는 팬들 나름대로의 굳은 의지의 표명이죠."
"아. 그래서 조작이 맞지만 아니라는 거군요."
"그래요. 누가 시키거나 강요한 것도 아니고, 팬들이 알아서 그렇게 투표를 하겠다는데.. 그걸 누가 말리겠어요?"
"그렇구나."
한편 그 시각.
조금 전 구름 같은 인파를 헤치고, 방송국으로 무사히 들어온 BBG 멤버들이 대기실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수빈이 경빈에게 물었다.
"경빈아. 내가 올리라는 사진은 올렸냐?"
"네. 형. SNS로 대기실 사진 올렸어요."
"잘했다. 우리가 이미 방송국으로 들어갔다는 걸 알려줘야, 팬들이 밖에서 기다리지 않고 돌아가지."
"밖에 사람 정말 많던데요. 형 말대로 차를 바꿔타고 오길 잘했어요. 예전 활동 때 타던 차를 멋모르고 타고 왔으면.. 어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경빈이 호들갑을 떨 때, 수빈의 핸드폰으로 사진이 첨부된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누군가가 인천 공항을 출국하는 사진과 함께 짤막한 메시지가 적혀있었다.
- 오늘 오후 1시 비행기로 오성식씨가 미국으로 영구 출국했습니다.
얼마 전 자신이 독대한, 센트럴 그룹 오정수 회장의 수행비서인 정지영에게서 날아온 문자를 읽으며 수빈이 중얼거렸다.
"비정(非情) 한 아버지로군. 돈과 사업을 위해서는 자식 따위는 죽어도 상관없다는 거겠지? 아들이나 아버지나 둘 다 정상이 아니로군."
옆에 앉아 있던 로빈이 물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기라도 했어?"
수빈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요 근래 날 괴롭히는 인간이 하나 있었거든. 오성식이라고.. 라이프 영화 개봉을 훼방놓던 놈이야."
"아. 그 이야기는 나도 얼핏 들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메가 박스 회장 아들이라며?"
"맞아. 그래서 내가 보복 차원에서, 메가 박스를 인수 합병하겠다고 바람을 좀 잡았지. 그랬더니 이틀도 안 지나서 그놈 아버지가 나를 보자고 하더라고. 그래서 만났지. 그리고 그 자리에서 둘이서 합의를 봤어."
"뭐라고 합의를 봤는데?"
"오성식이를 경영에서 완전히 제외해라. 그리고 후계자 자격을 박탈해라. 그렇지 않으면 적대적 M&A를 진행하겠다. 그렇게 말했더니 별 고민도 안 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승낙하더군. 거기에 내가 조건을 하나 더 걸었지."
"뭘?"
"알아봤더니 그놈이 군대 면제받으려고, 미국으로 유학 가서 미국 시민권을 따고 온 상태였어. 그래서 내가 말했지. 징벌의 의미로 그놈을 군대에 자원입대시켜라. 정 군대 가는 게 싫다고 그러면.. 유산을 미리 정산해서 그놈에게 준 다음, 미국으로 이민을 보내라. 그리고 차후 한국으로의 입국을 금지시켜라. 그렇게 조건을 걸었지."
수빈의 말에 로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뭐? 둘 다 나쁜 조건은 아닌 거 같은데.. 징벌이라고 할게 있나? 한국 남자라면 군대야 원래 가야 하는 거고.. 미국 이민이야 돈 많이 줘서 보내면,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 뭐가 비정하다는 거야?"
수빈이 핸드폰을 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내가 아버지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놈을 군대에 집어넣었을 거다.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게 자식 목숨을 살릴 수 있는 길이니까."
"그게 뭔 소리냐? 난 이해가 안 되는데.."
"그런 쓰레기 같은 놈이.. 유산을 미리 챙겨서 돈을 잔뜩 가지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면, 그놈이 뭘 하며 살 거 같으냐?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공부를 할까? 아니면 새사람이 되고자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사업을 할까?"
"진탕 놀겠지.. 유산을 정산 받았으면, 수중에 돈이 넘쳐날 텐데 그럴 리가 있겠냐."
"그래. 당연히 그러겠지. 그나마 안전장치 역할을 해주던 한국과의 인연도 끊고 놀다 보면.. 내가 보기에는 그놈은 3년 이내에 길에서 총에 맞아 죽던지, 집에서 약물 과다 복용으로 죽을 거다. 그놈의 돈을 보고 온갖 똥파리들이 주위에 모여들 테니.. 안 봐도 뻔하지."
"그래서 비정하다는 거냐?"
"그래. 나이가 어린 친구들이야 거기까지 생각을 못하겠지. 오히려 대박이라며 좋아할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나이 좀 먹고 지위가 회장쯤 되는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지. 그런데도 미국으로 보냈다는 건.. 죽어도 상관없다는 소리야. 저승 가는 노잣돈이라는 것도 모르고, 군대 안 가도 된다면서 희희낙락하며 미국으로 날아갔겠지."
"쉽게 말해서.. 말썽 부리는 자식 하나를, 간단하게 돈으로 정리한 거로군?"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내 판단으로는 그래. 뭐 몇 년 지나면 결과를 알 수 있겠지.."
- 똑똑똑.
대기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 BBG 여러분들. 리허설 준비해 주세요.
수빈이 소파에서 힘차게 일어나며 말했다.
"다들 리허설하러 가자."
어느덧 시간이 흘러 오후 5시가 다 되었다. 뮤직뱅크 방송 전 광고가 나가고 있었다. 신관 공개홀 부조정실에서, 신입 사원 김지영이 최영미 피디 옆에서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선배님. 지금 광고 타임인데도 KBC 2TV 실시간 시청률이 이미 3프로를 넘어섰데요. 평상시에는 0.8, 0.9 막 이랬는데.."
"나중에 BBG랑 하이유가 등장하면 10프로도 넘을 거예요. 집중하세요. 곧 시작하니까.."
"네. 선배님."
잠시 후 뮤직뱅크 생방송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