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197화 (197/236)

#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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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디자인의 목조 건물이었다. 건강을 염려해서인지 편백 나무로만 제작된 통나무집 형태의 거실에서, 세 사람이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잔을 앞에 두고, 거실 한편에 놓인 TV를 바라보고 있던 한호 그룹 이영호 회장이 중얼거렸다.

"홈쇼핑을 이용해서 여론을 주도하겠다.. 머리가 보통이 아니야. 아무튼 저 정도면 잘 해결된 거 같지?"

세 명중 가장 연장자인 이회장의 질문에, 막내 격인 BJ 이정기 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김회장님 충고를 듣고 미리 손을 쓴 게 백번 옳은 것 같습니다."

- 탁.

속에서 열불이 나는지, 화랑 그룹 김강식 회장이 자신의 앞에 놓인 언더록스 스카치를 시원하게 들이킨 다음 힘차게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런 일은 두 사람이 알아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면 될 거 아뇨? 아무 상관도 없는 나는 왜 여기까지 부른 거요?"

"이 친구가.. 왜 이렇게 뿔이 나 있는 건가? 오래간만에 얼굴 보는데 기분 좀 풀게나. 자네가 충고해준 덕분에 일도 잘 풀렸고.. 감사의 뜻으로 자네가 좋아한다는 맥켈란 라리끄 6도 내가 특별히 내놓았지 않은가. 그거 한 병에 4천 짜리라고.."

세 사람 중 가장 연장자인 한호 그룹 이영호 회장의 달램에도 불구하고, 입을 삐쭉 내민 김회장이 뚱한 얼굴로 대답했다.

"4천? 내가 전화로 충고한 게 4천 짜리 밖에 안될 거 같수? 맥켈란 1926도 아니고.. 재벌 회장쯤 되면 그 정도는 내와야지."

"알았네. 알았어. 내가 한 병 구해서 자네 집으로 보내주지. 그러니 그만 얼굴 좀 펴게나."

"내가 억울해서 그럽니다. 억울해서.."

김강식 회장이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면서 하는 중얼거림에, 세 사람 중 나이가 가장 적은 BJ 그룹의 이정기 관장이 입을 열었다.

"김회장님. 아니 여기 우리밖에 없으니까 옛날 식으로 합시다. 형님. 뭐가 그렇게 억울하다는 겁니까?"

"억울하지. 다들 나처럼 제대로 한번 당해봐야 하는 건데.. 그걸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을 건데 말이야."

이영호 회장이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대꾸했다.

"이보게. 동생. 내가 이 나이에 손자 친구라는 놈한테 당하는 걸 그렇게 보고 싶은 건가?"

김회장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내가 어디 삼도천 물맛까지 보고 왔다는 형님이 당하는 걸 보고 싶다는 소리겠소? 한호에 이윤석이도 있고.. BJ에 이태우도 있고.."

"거참.. 형님. 애들이 당하는 걸 보고 재밌다고 낄낄거리며 구경할 생각이었단 말입니까? 심보를 곱게 써야죠. 형님이나 저나 요단강 구경 갈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이관장의 말에 김회장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우.. 나 혼자 당한 게 억울해서 그러지. 쩝."

이회장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강수빈이라는 놈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 좀 해주게나. 이런 이야기를 전화로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난 놈이라는 건 나도 알겠네만.. 제대로 겪어본 자네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말이야. 나나 이관장이나 이번 일로 그나마 좀 아는 거지. 별로 아는 게 없어."

이회장의 말에 김회장이 턱을 문지르며 대꾸했다.

"어차피 기본적인 정보들이야 다들 알아서 뒷조사를 했을 거고.. 결국 궁금한 건 그거 아니요? 앞으로 저놈과 어떤 관계로 있는 게 좋은 건가. 살날이 얼마 안 남은 우리들이 죽고 나서도, 자식들이나 손자들은 저놈이랑 계속 맞부딪힐 게 뻔할 테니.."

"그렇죠. 형님. 지금이야 BJ가 한발 물러서면 해결되는 간단한 문제지만.. 앞으로 또 어떤 일로 만나게 될지 모르잖습니까?"

"내가 해줄 말은 하나뿐이요. 저놈은 그냥 가만히 놔두는 게 최선이라는 거. 핏줄들 건사하려면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전하시구려. 난 애들에게 이미 그렇게 말해놨으니까.."

"그렇게 똑똑한 놈인가?"

이회장의 물음에 김강식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똑똑? 세상에 똑똑한 놈이야 널렸죠. 형님. 저놈은 똑똑하니 머리가 특출나니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는 놈이 아닙니다. 뭐랄까.. 평생을 피구덩이 속에서 뒹굴던 살인귀(殺人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놈이란 말입니다. 저놈은 눈 하나 깜박 안 하고 사람 목을 딸 수 있는 놈이에요. 평생을 온실에서 자란 우리 애들이랑은 종자(種子) 자체가 다릅니다."

- 딸그락.

김회장이 언더록스 잔을 가볍게 흔들며 말을 이었다.

"내가 이 자리니까 솔직히 밝히는 건데.. 전 이미 저놈에게 항복했습니다. 두 번 다시 건드리지 않겠다고, 제가 자필로 각서까지 써주겠다고 말했었죠. 저놈은 안 건드리는 게 최선입니다."

"하지만 형님. 사업을 하다 보면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관장의 질문에 김강식 회장이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은 다르네. 저놈은 좁디좁은 국내 시장에는 별 관심이 없어. 목표가 웅대한 놈이라고.. BJ에서도 그냥 저놈이 제작하는 영화를 받아서 틀면 그뿐 아닌가? 뭐 하러 부딪히나?"

"으음.."

"저놈은 물욕이 별로 없는 놈이야. 꿈을 먹고사는 몽상가 타입이라고. 우리처럼 돈 벌려고 눈이 벌개서,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건드리는 스타일이 아냐. 아마도 평생을 영화제작과 음반 제작을 하며 살아가겠지. 그걸로 세계 제패? 천하 통일? 뭐 그런 거창한 꿈을 꾸는 놈이라고. 낭만적인 인생을 꿈꾸는 놈이지. 그럴만한 능력과 재력까지 다 갖추고 있는 놈이기도 하고.."

- 꿀꺽.

술을 한 모금 마신 김회장이 이관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맞붙어 싸우면 이길 자신은 있고? 내가 저놈하고 붙어서 박살 났을 때, 그때 저놈이 가지고 있던 재산이 얼만 줄 아나? 100억도 채 안됐었어. 지금은 그놈 재산이 현금만 2천억일세. 그리고 내가 비서실에 물어봤네. 이번 영화로 저놈이 얼마쯤 벌수 있을 거 같냐고.. 역대 흥행 랭킹 20위쯤 될 거 같다고 하더군. 20위라고 하길래, 난 처음에 얼마 안 하는 줄 알았지. 20위 정도면 1조 2천억쯤 번다고 들었네. 왜 사람들이 영화 제작을 투기라고 말하고, 집 팔고 빚 얻어서 영화를 찍는지 그때야 깨달았지. 그중에 반만 저놈 손에 떨어져도.. 재산이 현금만 1조 가까이 될걸세."

- 꿀꺽.

김회장이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뒤 말을 이었다.

"오늘따라 술맛이 좋군.. 그놈 재산이 100억 일 때 내가 붙었다가 작살났었네. 천하의 김강식이 꼬리를 말았다고. 이제 그놈 손에 1조라는 어마 무시한 돈이 쥐어졌지. 우리처럼 부동산이나 주식에 묶인 돈이 아니라 빳빳한 현찰이라고.. BJ가 맞붙어서 이길 자신 있나? 만약에 싸워서 이기면.. 앞으로 내가 죽을 때까지 이관장을 형님으로 받들어 모시지. 난 자신 없네. 솔직한 말로.. 우리 세 명이 힘을 다 합쳐도 박살 날 걸? 아까도 말했지만, 애들 건사하려면 그냥 가만히 놔두는 게 최선이야."

김회장의 토로(吐露)에 이회장이 이관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나야 영화 쪽이랑 별 상관도 없고, 그놈이랑 손자 놈이랑 친한 친구 사이라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지만.. 자네는 입장이 다르지 않은가? 어쩔 건가?"

"어쩌긴요. 그룹을 통째로 말아먹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이태우 그놈을 두들겨 패서라도 싸움을 말려야겠죠."

이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형님들. 제가 먼저 좀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리고 김회장님에게는 저도 맥켈란 한 병 보내드리겠습니다. 일전에 전화로 여쭤봤을 때 해주신 충고도 감사드리고, 오늘 이야기도 아주 잘 들었습니다."

"알면 좋은 걸로 보내라고.."

"네. 형님."

통나무집을 나온 이정기 관장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를 불러 급히 차를 타고 떠났다. 남은 두 사람은 술을 마시며 마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친구가 그렇게 무섭나?"

"형님이 그놈 진면목(眞面目)을 못 봐서 그런 겁니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경험을 한 건지는 저도 의문이지만.. 그놈이 제 눈앞에서 살기를 피울 때, 몸에서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어요. 형님도 아시잖습니까? 제가 군부 독재 시절 때도 대거리하던 놈이라는 거.. 그런 제가 기가 질려서,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우리 애들 100명을 붙여놔도 게임이 안돼요. 그나마 다른 쪽에 관심이 없는 놈이라 다행인 거죠. 그냥 자기 하고 싶은 거 하도록 가만히 놔두는 게 상책입니다."

"윤석이한테 이야기를 해둬야겠군.."

"단단히 당부를 해두는 게 좋을 겁니다. 저승에서 한호 그룹이 무너지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요. 우리 애들한테는 확실히 이야기 해놨습니다. 그놈 건드리는 놈은 그룹에서 바로 쫓아낼 거라고.."

"나도 그래야겠네. 암튼 고마우이. 술이나 한 잔 하세.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것 같으니.."

"형님. 저도 얼마 안 남았습니다."

- 쨍.

두 사람이 건배를 하며 술을 들이켰다.

5월 27일 일요일

일요일에도 불구하고 영화사로 출근한 수빈은, 전날의 홈쇼핑 방송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체크하고 있었다.

"반응이 좋아도 너무 좋아. 나쁜 일은 아니지만.. 어디선가 작전이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나타난 현상으로 봐서는 우군인 거 같은데, 도무지 정체를 모르겠군.."

수빈이 고민에 빠져있을 때, 핸드폰으로 문자가 날아왔다.

- 이사님. 긴급히 확인하셔야 될 기사입니다. 링크 보내드립니다.

고개를 갸우뚱한 수빈은, 홍보팀 김팀장에게서 날아온 문자에 첨부된 링크를 눌러보았다. BJ 그룹의 신임 회장인 이태우 회장의 짤막한 인터뷰가 실린 기사였다.

라이프 영화를 배급함에 있어서 영화 배급사로서 큰 오판을 했고, 자신들의 미숙함으로 인해 불편을 겪었을 강감독과 영화 팬들에게 사과의 뜻을 전한다며,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라이프가 더 많은 개봉관에서 상영될 수 있도록 최대한 협조를 할 계획이라는 기사였다.

기사를 읽던 수빈이 이해가 안 된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이건.. 거의 항복 선언인데. 그룹 회장이 직접 나서서 이런 인터뷰를 한다고? 그것도 이렇게나 빨리?"

- 똑똑똑.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백성철이 안으로 들어왔다.

"대표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네? 이 시간에요? 누구시죠?"

백성철의 등 뒤로 이정기 관장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날세. 강대표. 잠시 이야기 좀 하세나."

잠시 후 소파에 앉아서 이관장과 이야기를 나누던 수빈이 피식 웃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제야 알겠군요. 마빈이 홈쇼핑에 지시를 내린 걸 이영호 회장이 알았고, 이영호 회장이 내용을 알아보고선 이정기 관장님께 물어봤군요? 두 분은 평상시에 친했었고요."

"친한 사이지. 이회장도 예술품에 조예가 깊은 양반이니까.. 젊었을 때는 같이 술도 많이 먹었고."

"그래서 두 분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결국.. 김강식 회장에게 조언을 구해보자. 그렇게 됐다는 거죠?"

"그렇지. 자네랑 한바탕 붙었던 사람이 그쪽이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보다 자네를 더 잘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물어봤지."

"그랬더니 김회장님이 기를 쓰고 말리더란 거죠?"

"전화로 그러더군. 미쳤냐고.. 대가리에 총 맞았냐고.. 왜 가만히 있는 사자의 코털을 뽑으려 하냐면서 펄펄 뛰더군."

"어쩐지.. 제가 잘 모르는 작전 세력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긴 했었습니다."

"앞으로 BJ 그룹, 화랑 그룹, 한호 그룹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자네랑 싸우지 않을 생각이네. 일종의 불가침 조약 같은 거지. 도울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겠네. 그 대신.."

"그 대신 저도 그쪽 영역을 건드리지 말라는 소리죠? 좋습니다. 전 영화 제작과 음반 발매 말고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국내 영화 시장에도 별 관심이 없고요. 정저지와(井底之蛙)가 되고 싶지 않으니까요. BJ가 이번처럼 개봉관을 가지고 장난질만 치지 않는다면, 저랑 부딪힐 일은 없을 겁니다."

"고맙네. 앞으로는 국내에서 재벌이랍시고 자네에게 시비를 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걸세. 적어도 우리들이 있는 한 말일세.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어떤 의미에서는 자네도 이미 재벌이야."

수빈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제법 많이 벌긴 했죠. 근데.. 다 좋은데 말입니다. 한 가지가 빠졌네요."

"어떤게 빠졌다는 말인가?"

수빈이 서늘한 눈동자로 말했다.

"주동자의 처벌. 이번 일을 꾀한 주동자에 대한 처벌 부분이 빠져있군요."

"우리도 알아봤네. 메가 박스 쪽, 그러니까 센트럴 그룹 회장 아들이 이번 일을 꾸몄더군. 그쪽을 지지던 볶던 우리는 상관 안 하기로 결정했네. 센트럴이 말만 그룹이지 사실상 재벌도 아냐.. 자네 맘대로 하게나."

"그럼 제가 잡아먹어도 상관없다는 거죠?"

"상관없네. 어차피 영화관 체인 사업은 그다지 돈이 되는 사업도 아니야. 오히려 적자 보기 십상인 사업이지. 사실상 영향력 때문에 가지고 있는 건데.. 현재로서는 BJ도 지금 이상의 숫자로 늘릴 생각이 없어. 지금도 이미 한계에 도달한 상태야."

"알겠습니다. 그럼 그쪽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약속을 분명히 하셨으니.. 중간에 끼어들면 참지 않겠습니다."

"그럴 일 없네. 자네 맘대로 하게나."

잠시 후 이관장을 보내고 생각에 잠겨 있던 수빈이 핸드폰을 들었다.

[네. 이사님.]

"김팀장. 미안하지만 잡아 놨던 인터뷰나 방송 출연이 있다면, 전부 물리고 취소하세요. 음악 방송에만 나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음악 방송에 나간다면, 방송국에서도 이해를 해줄 겁니다.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리고 공식 기사를 내주세요. 내일부터 라이프 영화가 BGV, 쇼박스, 나우와 협상해서 개봉관 숫자를 크게 늘릴 계획이라고 말입니다."

[아. 이제 해결이 다 된 겁니까?]

"그래요. 조금 전 모든 사태가 해결됐습니다."

[그럼 메가 박스만 제외되는 겁니까? 그러니까.. 플러스N 말입니다.]

"그쪽하고는 그 어떤 협상도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증권가 찌라시에 소문을 하나 내주세요."

[어떤 소문 말입니까?]

"YK에서 영화 산업 진출을 위해 메가 박스를 노리고 있다고 말입니다. 기업사냥을 할 계획인 것 같다고 소문을 흘려주세요."

[알겠습니다. 이사님.]

전화를 끊은 수빈이 매서운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한번 칼을 뽑았으면 끝을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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