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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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실을 나온 수빈은 곧바로 YK로 이동했다. 시간이 흘러 YK에 도착한 수빈은 사장실에서 차를 마시며 박사장과 독대를 하고 있었다.
"인상이 별로 안 좋으십니다."
수빈의 말에 박사장이 찻잔을 내려놓고 팔짱을 끼었다. 자신이 화가 나 있다는 걸 적극적으로 어필하면서 박사장이 입을 열었다.
"강이사. 강이사한테 난 빙다리 핫바진가?"
"무슨 말씀을..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왜 이렇게 화가 나신 겁니까?"
"몰라서 묻나? 내가 배급사에서 장난질 친다는 소리를 듣고 하도 열이 받아서 말이야. 내 나름대로 손을 좀 써보려고 했더니.. 오상무가 극구 말리더군.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자네가 명령을 내렸다면서? 나한테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말이지."
"죄송합니다. 비밀 유지가 좀 필요해서요. 그리고 사장님에게 말씀드리기에는.. 이번 일이 제 개인사와 관련이 되어 있어서 입장이 좀 그랬습니다."
"개인사? 무슨 개인사?"
"개인적인 치정 문제라서.."
스르륵 팔짱을 푼 박사장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치정? 호오. 흥미진진하군, 갑자기 아침 드라마로 넘어가는데.. 자세하게 말해보게나."
"꼭 들어셔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들어야지.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살짝 한숨을 내쉰 수빈이 이번 사태에 얽힌 일들을 솔직하게 설명을 하였다. 잠시 후 설명이 다 끝나자 박사장이 어이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놈 그거 등신 아냐? 고작 그 정도 일로 이런 짓을 벌인다고?"
"원래 치정이란 게 이성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거라서요."
"거참.. 그 등신 같은 놈이야 그렇다 치고. 그놈의 계획에 동참한 메이저 배급사들은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자네랑 붙었다가 화랑 그룹이 어떻게 됐는지를 보고서도 다들 정신을 못 차렸나 본데..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는 건가?"
"아무래도 밥그릇 싸움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동참을 했겠죠. 그리고.. 화랑 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고 자체적으로 판단을 내렸을 겁니다. 그때는 제가 녹취록이라는 확실한 물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제가 이길수밖에 없었던 싸움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에는, 녹취록처럼 유리한 증거 따위는 저에게 쥐뿔도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죠. 그리고 앞으로도 물증 따위가 튀어나올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여보라는 듯 마음 놓고 시비를 걸고 있는 거죠."
수빈이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었다.
"거기에 결정적으로.. 방송사를 여러 개 보유하고 있는 BJ가 끼어든 만큼, 언론 환경이 자신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할 거라는 판단도 같이 했을 겁니다. 당장 라이프 영화와 관련된 뉴스들이, 방송이나 신문지상에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죠."
근심 걱정 하나 없는 밝은 얼굴의 박사장이 물었다.
"그래서? 언론 환경이고 나발이고 그래서 뭐? 녹취록이 없으면 강이사가 싸움을 못 이기나? 난 추호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네. 내가 보기엔 그 작자들이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거야. 이번 싸움은 상황이나 증거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바로 자네에게 싸움을 걸었다는 그 자체가 패착이지. 겁도 없이 말이지.. 양들이 떼거지로 모여봐야, 호랑이 한 마리를 못 당하는 법. 사람을 못 알아보고 덤비면,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지."
박사장의 말에 수빈이 피식 웃었다.
"이거 이거.. 절 너무 믿으시는 거 아닙니까?"
"믿지. 마누라는 못 믿어도 자네는 믿네. 그리고.. 자네가 이길 거라는 것도 믿고.. 당연히 계획은 준비되어 있겠지?"
"준비되어 있습니다."
"거보라고. 내 말이 맞지. 어떤 계획인가?"
"아까도 말했듯이 이번 싸움은 물증 같은 게 없는 싸움입니다. 사실.. 저쪽이 잘못을 한건 맞지만, 누가 선이다 악이다 단정 지어 말하기에는 애매한 구석도 있죠. 아까도 말했듯이 밥그릇 싸움이니까요. 그런 싸움은 결국.. 여론으로 결판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말입니다. 우회(迂廻) 작업을 통한, 선동(煽動) 작전을 펼치려고 합니다."
수빈의 말에 박사장이 혀를 찼다.
"쯧.. 강이사는 다 좋은데 말이야. 가끔씩 말을 어렵게 하는 단점이 있다니까.. 쉽게 설명해 주게나."
"일반적으로 선동 작전이라고 하면, 보통 사람들은 하나만 생각합니다. 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반복해서 들려주는 것. 그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말이죠. 일종의 세뇌 같은 겁니다. 이번과 같은 경우라면.. 제가 방송에 직접 나가거나 아니면 기자들과 인터뷰를 통해서,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거죠. 메이저 배급사가 나를 왕따시켰다. 그래서 제가 힘들었으니, 일반 대중 여러분들은 저 나쁜 메이저 배급사를 성토해 달라. 뭐 그런 식이겠죠. 물론 사실이기는 합니다만.. 전형적인 하책(下策)이죠. 물증도 없고 언론 환경도 나쁜 상황에서 그랬다가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거나 적들에게 역공을 당하기 십상입니다."
"그럼 상책(上策)은 뭔가?"
"일반 대중들 스스로 자신들이 알아서 판단을 내리게 만드는 겁니다. 제가 억울하게 배급사들에게서 왕따를 당했다는 말을, 대중들에게 단 한마디도 내뱉지 않은 상태에서 말이죠. 물론 대중들이 그렇게 판단을 내리도록, 자연스럽게 유도를 하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말이죠. 자신이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바꾸는 걸 체질적으로 싫어합니다. 그건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거부 반응을 일으키죠. 일종의 생존 본능과도 같은 겁니다."
수빈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만약 대다수의 대중들이 제가 유도하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린다면.. 이번 싸움은 끝난 거나 다름없습니다. 대중들이 이미 마음속으로 내린 결정을 되돌릴 방법 따위는 적들에게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제가 그들을 공격할 물증이 없는 만큼, 적들도 반격을 꾀하며 절 공격할 수 있는 물증 따위는 없기 때문이죠."
"강이사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아듣겠네. 하지만.. 어떻게 대중들을 자연스럽게 유도할 건가? 그것도 배급사 이야기를 단 한마디 꺼내지 않고서 말이야. 지금 방송이나 신문들도 우리 편이 아니지 않은가? 자유롭게 나가서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음악 프로 정도 아닌가? 설마 음악 프로에 나가서 은근슬쩍 운을 뗄 생각인가?"
수빈이 고개를 저었다.
"즐겁고 흥겨운 음악 프로에 나가서 그런 심각한 이야기를 하면 욕먹습니다. 대중들이 짜증부터 낼 거예요. 그리고.. 이런 기득권 세력의 갑질과 관련된 여론전은, 어린 친구들보다는 사회에서 활동이 왕성한 연배가 좀 있는 분들의 판단이 중요한 겁니다. 사회 구조적인 문제와 관련된 여론은, 대체적으로 장년배에서 만들어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럼..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할 건가?"
수빈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비밀입니다. 이번 주말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아시게 될 겁니다."
"이것 참.. 그럼 난 이번에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으란 소린가?"
"아니죠. 사장님이 꼭 해주셔야 할게 있습니다."
"그게 뭔가?"
"급하게 결재를 하나 해주셔야 합니다."
"뭘?"
그때 사장실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김비서가 서류철을 들고 안으로 들어와, 수빈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김비서."
"아니에요. 작성하기에 어려운 서류도 아니고.. 제가 직접 파악을 해봤는데, 지금도 열심히 찍고 있어서 이사님이 원하시는 물량 정도는 아무 문제가 없을 거 같아요. 워낙 수량이 적어서.."
"그래요? 다행이네요."
김비서가 나가자 수빈은 서류를 박사장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뭔가?"
"지금 찍고 있는 라이프 음반 물량 중에, 5천 장을 제가 새치기해서 반출해 갈 테니까 허락해 주십사 하는 서륩니다."
"5천 장? 5만 장이나 50만 장도 아니고 5천 장을? 그걸 누구 코에 붙여? 설마 이번 주말에 긴급 팬사인회라도 열 생각인가? 그걸로 대중들의 여론을 유도하려고?"
"그 정도로 여론이 움직일 리가 있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죠."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럼 어디다 쓸려고?"
"그건.. 비밀입니다. 빨리 사인이나 해주시죠."
입맛을 다신 박사장이 서류에 사인을 하며 말했다.
"이것 참.. 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는 소리로군. 알았네. 주말이 지나면 알게 된다니까.."
사인을 다 끝낸 박사장이 말했다.
"아. 강이사. 그 소식은 들었나?"
수빈이 서류를 챙기며 물었다.
"어떤 소식 말입니까?"
"얼마 전 YK가 시총 1위로 올라섰다는 소식 말이야. 이제 국내 탑은 YK야. 2위랑 제법 차이가 많이 난다고. 그 바람에 다른 기획사에 있는 연예인들이, 원래 소속되어 있는 기획사들과 재계약을 꺼려 하는 분위기라고 하더군. YK로 이적을 하려고 말이야."
"좋은 소식이군요. 어지간한 연예인들은 다 받아들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도 이번 일이 잘 끝나면 조만간 영화사를 키울 생각인데, YK도 이번 기회에 시세 확장을 좀 하시죠."
"나도 그럴 생각이네. 강이사가 열심히 벌어다 준 덕분에, YK에 자금이 넘쳐흐르고 있다네. 이번 기회에 다른 기획사도 좀 인수를 해서, 국내에서는 YK 독주 체제를 갖춰볼까 생각 중이야."
"저도 적극적으로 도와드리겠습니다. 한번 힘껏 달려보시죠."
"그러세나. 달려보자고."
잠시 후 사장실을 나선 수빈은 A&R 팀으로 내려가는 도중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형님. 저 수빈입니다."
[내가 알지. 그래. 수빈아. 출장 갔다 돌아온 거야?]
"네. 형님. 잘 다녀왔습니다. 제가 유럽에서 전화로 부탁드렸던 거 있잖습니까? 어떻게.. 두 분 다 시간이 괜찮으십니까?"
[주말 저녁에만 도와주면 된다면서? 그때는 원래 특별한 스케줄이 없어. 주말 낮이야 결혼식 때문에 바쁘지만, 밤에는 한가하지. 유미야 원래 좀 한가한 편이고..]
"감사합니다. 형님. 그럼 두 분 다 내일하고 모레 시간이 되는 걸로 알고 작업을 진행하겠습니다."
[그래. 시간만 정확히 알려줘라. 유미는 내가 알아서 잘 데리고 갈 테니 걱정 말고.]
"네. 형님. 혹시.. 불편하시거나 걱정되시면 지금이라도 말씀하세요."
[왜? BJ 때문에? 걱정 마라. 난 BJ 쪽 방송국에는 출연하는 프로가 없다. 난 공중파랑 JBC만 출연해. 유미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걔는 그런 거 전혀 신경 안 쓴다. 그리고.. 이 바닥에서는 나도 힘 좀 쓴다. 알지?]
"알고 있습니다. 형님. 감사합니다."
[뭘.. 내가 그동안 수빈이 너에게 이것저것 부탁을 많이 했었는데, 이런 거라도 도와줘야지. 그럼 약속대로 내일 밤에 다시 통화를 하자고.]
"네. 형님.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은 수빈이 힘찬 발걸음으로 A&R 팀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면서 중얼거렸다.
"모든 준비는 다 끝났군. 이제 결과만 지켜보면 되겠어."
5월 26일 토요일
토요일을 맞아 주말 아침부터 수빈은 하루 종일 자신이 수립한 작전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조율을 하였다.
저녁 6시가 다 되어갈 무렵, 바쁘게 하루를 보낸 수빈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녁 굶지 말라고 매니저가 챙겨준 도시락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뚜껑을 열고 수빈이 막 한 숟가락 뜨려고 할 때 문자가 날아들었다.
- 수빈아. 내가 직접 확인을 했는데, 아무 문제없이 준비 완료란다.
문자를 본 수빈이 피식 웃었다.
"이 친구 보게. 내가 확인을 다 했는데 굳이 또.."
수빈이 답장을 보냈다.
- 그래. 신경 써줘서 고맙다. 친구야.
수빈이 도시락을 먹는 동안 문자가 한 번씩 계속 날아들었다.
- 수빈아. 유미랑 같이 시간 맞춰 잘 도착했다.
도착한 문자에 맞춰 수빈이 답장을 보냈다.
- 알겠습니다. 형님. 감사합니다.
또 다른 문자가 도착했다.
- 저희 쪽은 준비가 끝났습니다.
또 다른 문자에 맞춰 수빈이 답장을 보냈다.
- 잘 부탁해요. 김팀장.
잠시 후 도시락을 다 먹은 수빈이 시간을 확인하였다. TV 리모컨을 집어 들은 수빈이 TV를 켜며 중얼거렸다.
"대중을 선동하는데 가장 좋은 매체는 뭐니 뭐니 해도.. 역시 TV지."
수빈은 출연진 섭외부터 방송 내용, 방송 시간, 방송하는 채널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자신이 치밀하게 기획하고 설계한 프로그램을 방송하려고 하는 채널을 찾기 시작했다. 빠르게 채널을 바꾸며, 수빈이 마치 비 맞은 래퍼처럼 혼잣말을 빠르게 쏟아냈다.
"사람들은 가끔씩 착각을 하곤 하지. TV라고 하면 뉴스, 예능, 드라마, 음방, 다큐 같은 것들만 있는 걸로 말이야. 하지만.. 지금의 내 상황을 그런 쪽에 나가서 떠들기에는 주제가 너무 무겁고 불분명해. 어쩌면 아직 어린놈이 돈독이 올랐느니, 젊은 놈이 시건방지니, 돈 좀 벌었다고 유세하니 등등.. 그런 역풍을 맞을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야지. 그리고 그런 프로들은 사전에 적들이 알아채고 방해 작업을 한다거나 훼방을 놓을 수도 있지."
수빈이 원하는 채널을 찾았는지 리모컨을 내려놓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런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의 관심이 덜하면서도, 가볍게 볼 수 있고, 편안하게 느끼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프로그램이 필요해. 그런 프로그램이라면 역시.. 홈쇼핑이 딱이지."
수빈은 홈쇼핑 화면에 집중했다. 아직 7시가 되지 않아서 자신이 기획한 프로가 방영되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아래쪽으로 큼지막한 광고 자막만이 물 흐르듯 계속해서 지나가고 있을 뿐이다.
- 초! 초! 초! 대박!! 한호 홈쇼핑에서 준비한 초대박 기획 상품. 현재 시중에서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는 '라이프' 앨범의 스페셜! 리미티드! 에디션! 전격 출시!! 전 세계에서 오직 한호 홈쇼핑에서만 구매 가능! 국민 MC 유재식과 함께 하는 '라이프 앨범'의 스페셜 리미티드 에디션 판매 방송이 곧 시작됩니다. 시청자 여러분! 채널 고정!!
현재 미국에 유학 중인 마빈이 최대 주주로 되어 있는, 한호 그룹의 홈쇼핑 채널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수빈이 중얼거렸다.
"이번 방송으로 나를 방해하는 세력들을 깡그리 다 정리해야지."
잠시 후 본방송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