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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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이 당황해할 때, 뿔테 안경을 끼고 옆구리에 서류철을 들은 한 명의 여성이 927호에서 나왔다. 뿔테 안경을 끼고 깡마른 그녀는 사감 선생님처럼 날카로운 눈매로 복도의 남자들을 훑어보더니, 손을 들어 수빈을 가리켰다.
"당신. 지각해서 아직 오디션을 보지 않았다는 건방진 동양인이 당신이죠?"
"저요?"
"그래요. 당신. 여기에 동양인이 당신밖에 더 있나요?"
수빈이 주위를 둘러보며 대답했다.
"그렇긴 하군요."
"근데 왜 아직도 준비를 안 하고 있죠? 설마 그런 복장으로 오디션을 볼 생각은 아니겠죠?"
"오디션을 꼭 봐야 하는 겁니까?"
수빈의 질문에 어이없어 하는 그녀가 자신의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방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는 건가요? 그렇다면 당장 꺼져버려요. 우리도 바쁘니까."
"제가 안으로 들어가긴 해야 합니다만.."
그녀가 복도에 돌아다니는 바구니를 하나 발로 툭 밀었다.
"그럼 빨리 옷을 벗으세요. 벗은 옷은 여기에 담고요. 아무도 들고 가지 않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수빈이 황당함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수빈이 하나둘씩 옷을 벗자, 무공으로 단련된 예술 조각 보다 더 아름다운 몸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불구경하듯 지켜보고 있던 남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 몸이 정말 잘 빠졌는데. 설마 약쟁이인가?
- 그게 가능할 리가 있겠냐. 그랬다면 나도 벌써 먹고 있겠지.
- 멍청한 놈.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 남자 몸이 아름답기까지 하네. 게이들이 환장하겠는걸.
수빈은 사각 트렁크만 남겨두고 탈의를 끝냈다. 사감 선생님 같은 그녀가 수빈을 보며 콧소리를 내었다.
"흐응. 이런 멋진 몸이라니.. 건방질만하군요. 그 얼굴에 이런 몸까지."
수빈이 쓴웃음을 짓자 그녀가 가까이 다가와 나지막이 말했다.
"이봐요. 내가 당신을 위해 충고 하나 하죠. 오디션에 갑자기 꽂아준 당신의 백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델핀은 그런 거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니 오디션을 볼 때 최선을 다하세요."
"델핀이 누굽니까?"
수빈이 농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때 한 무더기의 남자들이 927호에서 우르르 나왔다. 그 모습을 본 그녀가 수빈에게 말했다.
"지금 바로 방으로 들어가세요. 지각하는 바람에 당신만 못 봤으니까.."
그녀가 수빈을 내버려 두고 복도에 서있는 남자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다들 오디션 보느라 수고하셨어요. 지금부터 호명하는 분들은 디자이너의 옷을 입고 2차 심사를 할 거예요. 8, 17, 34, 37.."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수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바구니를 옆에 끼고 팬티 차림의 수빈이 927호를 향해 걸어갔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고, 파리에 가면 파리의 법을 따르라고 한다지만.. 이건 도가 너무 지나친걸.'
살짝 굳은 인상의 수빈이 들어간 927호는 별다른 집기가 없는 널찍한 사물실이었다. 입구 반대쪽에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심사위원으로 보이는 다섯 명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 머리 위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인쇄된 종이가 벽에 붙어 있었다.
[Dior, Paris Fashion Week Men‘s June 20]
'6월 20일 파리 패션 위크라.. 예상대로 모델 오디션인가 보군. 근데.. 디오르? 디오르가 가방 만드는 루이비통이랑 무슨 상관이 있지? 그리고 내가 왜 이걸 보고 있는 거야?'
수빈이 벽에 붙어 있는 글귀를 보고 의문을 품는 동안, 다섯 명의 심사위원의 눈빛이 이채롭게 변해갔다. 심사위원들끼리 수군수군 대기 시작했다. 심사위원 중 나이가 가장 젊어 보이는 백인 여성이 수빈에게 말했다.
"몸이 멋지네요. 그럼 본인 소개를 간단하게 해주세요."
수빈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싫은데요."
수군대던 심사위원들이 조용해졌다. 다들 벙찐 얼굴로 수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쪽부터 소개를 좀 해봐주시죠. 누군지를 말이죠. 정말 궁금한데요."
젊은 백인 여성이 화가 많이 났는지, 하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더니 날카롭게 소리쳤다.
"당신!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오디션을 보러 온 사람의 태도가 그게 뭐죠?"
태연한 표정의 수빈이 대꾸했다.
"전 오디션을 보겠다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만.."
"그래요? 그럼 당장 나가세요."
그 순간 가운데에 앉아 있던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백인 여성이 입을 열었다.
"릴리안느. 조용히 해봐. 뱅상 아저씨의 소개로 참석한 친구라고. 아저씨 얼굴을 봐서라도 이대로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어. 내가 이야기를 나눠 볼테니까 빠져 있어봐."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수빈을 바라보던 중년의 여성이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아나요?"
"모릅니다."
"델핀 아르노(Delphine Arnault)라고 해요."
"델핀 아르노.. 이름을 보니 베르나르 아르노의 딸이라도 되는가 보죠?"
"맞아요. 딸이죠. 지금 현재 LVMH의 이사를 맡고 있고요. 이제 제 소개를 했으니, 그쪽 소개를 들어보죠. 뱅상 아저씨랑 무슨 관계죠?"
"조금 전까지는 사업 파트너 겸 친구 사이였습니다만.. 이제 보니 친구로 삼기에는 많이 무례한 사람 같군요. 아무래도 다시 생각을 해봐야겠습니다."
수빈의 대답에 델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친구 사이라고요? 그러기에는.. 제가 말하는 뱅상이 누군지 알고 있나요?"
"뱅상 볼로레. 비방디 그룹의 회장 말하는 거 아닙니까?"
"맞아요. 그런데 친구 사이라고요? 흐음. 놀랍군요. 프랑스에서 열 손가락안에 꼽히는 그룹의 회장이 이렇게 젊은 동양인과 친구 사이라니. 애인이라면 몰라도..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수빈, 수빈 강이라고 합니다."
델핀이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데.. 오늘 모델 오디션을 보러 온 게 아니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어디서부터 오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뱅상 아저씨가 오늘 꼭 만나봐야 될 젊은 친구라고 해서, 오늘 있을 디오르 오디션에 꽂아달라고 부탁을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군요. 그럼 모델이 아니면 원래 직업이 뭐죠?"
"영화감독입니다."
"영화..감독? 영화감독에 이름이 수빈이라면.. 설마.. 설마 '달빛 기사'를 연출한 그 천재 감독? 얼마 전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을 수상한?"
충격을 받았는지 말을 하는 델핀의 얼굴이 점점 새파래지고 있었다. 수빈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그 감독이 맞습니다."
- 쾅.
델핀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힘차게 내리치더니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putain! Vincet!"
(나쁜놈! 뱅상!)
델핀이 허공으로 주먹질을 하며 다시 한번 외쳤다.
"putain merde! Vincet Bollore!"
(염병할 나쁜 새끼! 뱅상 볼로레!)
수빈이 침착한 얼굴로 바구니에서 옷을 꺼내서 주섬주섬 껴입기 시작했다.
잠시 후 수빈은 델핀의 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수빈이 입을 열었다.
"제 빅팬이시라면서 왜 절 못 알아보셨죠?"
미안한 얼굴의 델핀이 변명을 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수상하는 영상을 봤어요. 그때 얼굴이랑 지금 얼굴은.. 몸도 그렇고.. 너무 달라서 못 알아봤어요. 그리고 영화 속에서 볼 때는.."
델핀이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아. 상투. 영화 속에서는 제가 상투를 틀고 있었죠."
"샹투? 아무튼 그걸 하고 있어서 미처 알아보지 못했어요."
"그렇군요. 근데.. 아까 오디션장에 디오르라고 적혀 있던데. 디오르라면 크리스찬 디오르 말하는 거 아닙니까? 그게 루이비통이란 무슨 관계죠?"
"어머. 모르셨군요. 디오르를 루이비통에서 인수한지 좀 됐어요. 제가 원래 디오르에서 근무를 했었죠. 얼마 전에 본사로 옮겨왔지만요. 지금 디오르 책임자가 급하게 회사를 나가는 바람에, 제가 잠시 일을 같이 보고 있는 중이에요."
"아, 그랬군요."
그때 델핀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을 바라보는 델핀의 얼굴이 마녀처럼 표독스러워졌다.
"뱅상! 야 이 $(%&)%(*%()($)#*@*@(@@!$%"
핸드폰에 대고 거침없이 욕설을 퍼붓고 있는 그녀를 보며 수빈이 고개를 저었다. 핸드폰을 붙들고 한참을 씩씩대던 그녀가 수빈에게 핸드폰을 넘겼다.
"수빈 씨를 바꿔달래요."
수빈이 핸드폰을 받았다.
"여보세요?"
풀이 잔뜩 죽은 뱅상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미안하네. 강감독. 내가 진심으로 사과를 하지. 일전에 델핀이 자네 팬이라고 하는 걸 내가 들어서.. 난 그냥 둘이 잘 모르는 상태에서 만나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한 건데. 후우.. 델핀이 저렇게 화를 내는 건 처음 봤어.]
"흠. 화난 게 델핀만은 아니죠. 저도 화가 많이 났으니까요."
[하아.. 내가 다시 한번 사과를 하겠네.]
"사과는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대신 그날 한 부탁들은 그냥은 못 들어드리겠습니다.]
[제발 좀 살려주게. 강감독. 내가 어떡했으면 좋겠나?]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야죠. 영화 흥행에 최선을 다해 주세요. 1억 달러당 한 가지씩 부탁을 들어드리겠습니다."
[흠. 그럼 3억 달라로군. 뭐 좋네. 내가 최선을 다해보지. 그 영화라면 충분히 가능한 액수야. 문제없다고.]
수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런 이런.. 목소리가 다시 살아나셨군요. 제가 너무 쉬운 조건을 걸었나 보죠?"
[그럼. 내가 미국, 캐나다, 남미 싹 다 돌릴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라고. 3억 달라 정도야 우습지. 아무튼 미안하네. 이걸로 그만 용서를 해주게나..]
"좋습니다. 영화 흥행만 잘 된다면..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알겠네. 친구. 그럼 다음에 또 통화하자고.]
수빈이 뱅상과 통화를 끝내고 핸드폰을 건네주자, 옆에서 듣고 있던 델핀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저하고도 약속을 하나 하는 게 어때요?"
"어떤 약속 말입니까?"
"유럽 쪽에서 개봉을 부탁하기 위해 절 찾아오셨다면서요?"
"네. 맞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영화 개봉을 도와드리죠. LVMH가 명색이 프랑스 재계 서열 2위에요. 그 정도 힘은 충분히 있죠. 그 대신!"
"그 대신?"
"영화 흥행에 성공하면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는 걸로 약속해요. 영화 내용이야 뱅상 아저씨가 저렇게 장담할 정도면 안 봐도 뻔할 테고.. 음.. 전 별로 잘못한 게 없으니 1억 유로 어때요?"
"그러니까.. 유럽에서 개봉하는 걸 도와줄 테니, 영화 흥행을 1억 유로 이상 올리면 저보고 부탁을 하나 들어 달라는 거죠?"
"정확해요."
"어떤 부탁입니까?"
"파리 패션 위크에서 디오르 모델로 참석해 주세요. 어차피 6월 말이니까 영화가 거의 내려갈 때잖아요? 스케줄상 큰 문제가 없을 거 같은데요."
수빈이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제가 전문 모델이 아니라서.. 워킹 연습을 하거나 런웨이를 걸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상관없어요. 그 몸에 그 얼굴이면.. 그냥 옷을 걸치고 아무 생각 없이 걷기만 해도 충분해요. 그런 멋진 몸을 숨기고 다니는 건, 전 세계 여성들에게 죄를 짓는 거랑 마찬가지예요."
그녀의 말에 수빈이 기겁을 하며 황급히 되물었다.
"설마.. 절 벗겨놓고 런웨이를 걷게 할 생각은 아니시겠죠?"
"물론 아니죠. 가을을 대비하는 패션인데 그럴 수는 없죠. 그건 제가 약속드릴게요."
"흠. 그런 조건이라면 좋습니다. 제가 한번 도전을 해보도록 하죠."
- 짝짝짝.
"좋아요. 약속하신 거예요. 그럼 이제 영화를 한번 볼까요? 얼마나 좋은 영화길래 뱅상 아저씨가 그렇게 칭찬을 하는지 너무 궁금해요."
잠시 후 수빈은 영화를 보며 펑펑 울고 있는 그녀를 달래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