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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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프랑스 파리행 비행기에서 편안하게 드러누워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뱅상 볼로레 회장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준 선물이라며 1등석 티켓을 끊어줬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금발에 늘씬한 몸매의 스튜어디스가 수빈에게 다가왔다. 스튜어디스가 수빈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손님. 일어나세요. 부탁하신 대로 도착시간 1시간 전입니다."
수빈이 기지개를 펴며 일어나 앉았다.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제가 해야 할 일이죠. 파리에는 자주 가보셨나요?"
"이번이 초행입니다."
"그러시구나. 제가 파리 출신이라 잘 아는데.. 제가 안내를 해드릴까요?"
"네?"
수빈은 이게 뭔 소린가 싶어 고개를 들어 스튜어디스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그녀가 배시시 웃더니, 수빈의 손에 쪽지 하나를 건네주고 총총히 떠났다. 수빈은 자신의 손안에 놓인 곱게 접힌 쪽지를 쳐다보았다.
'이거 지금 나한테 작업 거는 거지?'
수빈이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중얼거렸다.
"아서라. 군대도 안 갔다 온 놈이 뭔 연애질이냐. 그래도 혹시 모르니.."
수빈은 주섬주섬 쪽지를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등받이에 허리를 편하게 기댄 수빈은, 비버리 힐스의 저택에서 뱅상 회장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첫 번째 부탁은 간단하네. BB 앨범의 라이선스를 주게나. 음악을 미국인만 하는 게 아니지 않는가? 앨범을 팔아먹을 곳은 미국 말고도 천지라고. YK의 영업력으로는 절대 무리야. UMG에 라이선스를 내어주면.. 내가 책임지고 팔아 주겠네."
"흠. 나쁜 제안은 아니군요. UMG에서 아시아 시장은 절대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면 가능할 거 같기도 한데요."
"그건 내가 약속하지. 내가 지금 눈독을 들이고 있는 건 남미 쪽이야. 멕시코, 쿠바, 브라질. 아르헨티나.. 머릿속에서 뭐가 떠오르나? 하로초, 삼바, 살사, 탱고.. 다들 춤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인간들이지. 브라질과 멕시코만 합쳐도 인구가 4억이 넘어. 엄청난 시장이라고. 그쪽 사람들에게 BB 앨범을 내다 팔면 엄청난 대박이 터질걸세."
"좋습니다. 제가 돌아가서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다른 조건은요?"
"나랑 손잡고 유니버설사에서 영화를 한편 만들어 보는 게 어떻겠나? 강감독의 차기작으로 말이야. 제작비는 우리 쪽에서 충분히 대겠네."
"글쎄요. 제가 자금이 쪼달릴만큼 어려운 형편이 아니라서요. 영화 제작비 정도는 저도 충분히 있습니다."
수빈이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자 마음이 급한 뱅상 회장이 급히 설득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이지. 하지만 강감독. 이걸 생각해 보게나. 강감독이 본격적으로 메이저 시장에 진출하려면, 거기에 걸맞은 겉치레도 필요한 법이야. 유니버설, 폭스, 디즈니, 콜롬비아, 파라마운트, 워너.. 이들 6대 메이저 제작사 중 한 곳에서 영화를 제작한 감독이라는 타이틀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그래야 할리우드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법이라고."
"흐음.."
수빈이 마뜩잖은 듯 가볍게 한숨을 내뱉자, 뱅상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람의 능력보다는 그 사람의 이력으로 평가를 하네. 그게 간편하니까.. 콜롬비아사에서 극진히 모셔가서 블록버스터를 제작한 동양에서 온 젊은 천재 감독. 사람들이 강감독의 작품을 볼 때, 그 정도 이력은 있어야 색안경을 안 끼고 본단 말일세. 이건 돈보다 강감독의 앞날을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자네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받으려면 반드시..."
수빈의 뱅상의 말을 끊었다.
"알겠습니다. 차기작은 유니버설과 손잡고 제작을 하겠습니다. 그 대신 제가 50 프로의 제작비를 대겠습니다. 나머지를 유니버설에서 대시죠."
"굳이 귀찮게 그럴 필요 있나? 우리가 전액을 다 대겠네."
수빈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금이 유입되면 반드시 사람이 따라오는 법입니다. 사람이 따라오면 간섭이 시작되는 게 당연하고요. 적어도 반반은 되어야 제가 찍고 싶은 영화를 제 마음대로 찍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간섭을 받으며 영화를 제작할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까요."
수빈의 발언에 뱅상이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흐음. 알겠네. 그 문제는 계약서를 작성할 때 다시 이야기를 나눠보세."
"마지막 부탁은 뭡니까?"
"나에게 독점권을 주게. 좀 전에 본 영화의 음악도 아주 좋더군. 특히 시작 부분에 등장하는 록 음악은 아주 끝내줬어. 당연히 음반을 제작하겠지? 앞으로 강감독이 제작하는 영화, 앨범 등에 대한 미국 유통을 독점하게 해주게나. 내가 섭섭지 않게 계약금을 주겠네."
"불가합니다. 그건 들어줄 수가 없어요. 제가 제작한 영화는 훌루에 공급을 하기로 이미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그건 OTT 아닌가? 내가 말하는 건 개봉관에 거는 걸 말하는 걸세. 차기작이야 유니버설에서 당연히 배급을 하겠지만.."
수빈이 손을 들어 뱅상의 말을 잘랐다.
"회장님. 아무리 절 꼬셔도 안되는 건 안되는 겁니다. 그 대신..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제가 제작한 작품들에 대해서 유니버설에게 우선 협상권을 드리겠습니다. 그 정도로 만족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수빈의 말에 뱅상이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후 뱅상 회장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세. 지금은 그 정도만 약조해줘도 충분하네. 차후 다시 또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수빈이 회상을 멈추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좀 당한 거 같지? 뱅상 그 작자가 협상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어. 강호 속담에 늙은 생강이 맵다더니.. 그리고 지금 현재로서는 내가 너무 을(乙)인 상태야. 이러면 결국 협상에서 밀릴 수밖에 없지. 최대한 빨리 영화사의 덩치를 키우고 명성을 쌓아야만 해."
수빈이 뒷머리를 등받이에 지그시 기대었다.
'그러려면 이번 영화는 반드시 성공해야만 해. 아무쪼록 파리에서의 협상도 잘 이루어졌으면 좋겠군.'
수빈은 뱅상 회장과 헤어질 때의 장면을 떠올렸다.
"제가 프랑스에서 만나야 하는 유력자가 누굽니까?"
"비밀이네. 다 알고 만나면 재미없지 않은가? 한 가지는 말해줄 수 있네. 그 사람이 강감독을 맘에 들어 하면, 이번 영화를 유럽에 개봉하는 건 일도 아닐세. 일사천리로 진행될 거야. 그 정도의 힘은 충분히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뱅상 회장이 묘한 눈길로 수빈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자네라면 틀림없이 협상이 잘 이루어질 걸세. 내가 장담하지. 만약 일이 잘 안 풀리거나 문제가 발생하면, 나에게 전화를 하게나. 내가 해결해 줄 테니까.."
수빈이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그때 날 바라보던 뱅상 회장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어. 도대체 누구를 소개해 주길래 그런 눈빛을 한 거지?"
그때 안전벨트 사인이 켜지며 착륙 안내 멘트가 들렸다.
잠시 후 비행기는 파리의 샤를 드골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수빈이 비행기 입구를 나설 때, 아까 자신에게 쪽지를 줬던 스튜어디스와 눈이 마주쳤다. 지중해처럼 푸른 눈동자가 매혹적인 그녀가 가볍게 눈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뭐라고 말하는지는 입모양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call.]
수빈이 가볍게 웃으며 오른손 엄지와 약지를 펴서, 손으로 전화 거는 모양을 한 다음 자신의 귀에 가져다 대었다.
'시간이 나면 전화 정도는..'
수빈은 입국장을 나서자, 자신의 이름이 적혀있는 피켓을 들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잠시 후 평범한 세단의 뒷자리에 앉은 수빈이 파리 시내를 향해 출발했다.
운전석 뒷자리에 앉은 수빈이 기사에게 물었다.
"제가 만나야 하는 사람이 누군지 혹시 아시나요?"
기사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릅니다. 저희는 돈을 받고 픽업을 대신해 주는 업체라서요. 목적지만 알고 있을 뿐이죠."
"목적지가 어딥니까?"
"라 데팡스(La Defense)."
"라 데팡스라면 파리의 신시가지 아닌가요? 최첨단 고층 빌딩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는 곳.."
"맞습니다. 그쪽에 있는 빌딩 중 한 곳으로 모셔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동양인 분이 파리에 대해서 잘 아시는군요. 프랑스어 발음도 훌륭하고요."
"감사합니다. 어떤 빌딩인지는 아십니까?"
"모릅니다. 주소지만 네비게이션으로 찍어서 갈 뿐이죠."
기사의 대답에 수빈은 속으로 살짝 짜증을 내었다.
'무슨 수수께끼를 푸는 것도 아니고.. 뱅상 회장이 장난기가 심한 건가? 아니면 만나야 될 사람의 성격이 괴팍한 건가? 아무튼 조짐이 영 별론데..'
시간이 흘러 파리 시내로 입성한 차는, 파리의 명물인 에펠탑을 왼쪽으로 끼고 계속 달렸다. 에투알 개선문을 지나 뇌이쉬르센 지역을 통과하여 센 강을 건넌 차는 한참을 내달리고 있었다. 저 멀리 라데팡스의 명물인 신(新) 개선문이라고 불리는 그랑드 아르슈(Grande Arche)가 눈에 들어왔다.
'다 와가는 모양인데..'
이윽고 수빈을 태운 차가 세련된 디자인의 최신식 고층건물 앞에 정차했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빌딩 안으로 들어가시면 안내를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수빈은 차에서 내려 빌딩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그제야 수빈은 자신이 어디에 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빌딩 1층의 한편이 온통 가방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자주 봤던 명품 로고가 박힌 가방들을 쳐다보며 수빈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LVMH(Louis Vuitton Moet Hennecy)가 쓰는 건물인가 본데.. 설마 루이비통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을 만나야 되는 건 아니겠지? 그 양반은 세금 때문에 벨기에로 이민 가지 않았나? 도통 감을 못 잡겠군,'
수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1층 로비로 들어갔다. 안내 데스크를 찾아간 수빈이 안내원에게 말했다.
"오늘 약속이 있어서 찾아왔는데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수빈 강이라고 합니다."
안내원이 잠시 키보드를 두드리더니, 붉은색 줄이 달린 출입증을 내밀었다.
"9층으로 올라가시면 안내를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출입증은 반드시 목에 패용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혹시.. 제가 만날 분이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저도 모릅니다. 단지 오디션이 열리는 9층으로 안내하라고만 되어 있어서요."
의외의 대답에 수빈이 눈이 휘둥그레져 되물었다.
"오디..션 말입니까?"
"네. 지금 한창 진행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가방 만드는 회사에서 무슨 오디션을 본다는 거죠? 전 디자이너나 가죽세공업자가 아닌데요."
잘생긴 수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안내원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도 마음 같아선 자세히 알려드리고 싶은데.. 제가 아는 게 없어요. 이 빌딩에서는 워낙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고,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어서요. 단지 9층에서 1시부터 오디션이 시작되었고, 수빈씨가 30분 지각했다는 것 밖에 몰라요. 저도 안타깝네요."
안내원의 말에 수빈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무튼 감사드립니다. 그럼.."
수빈이 떠나려고 할 때 안내원이 말했다.
"혹시 필요하시다면.. 제 연락처를 드릴까요? 다른 궁금한 게 또 있으면 바로 물어볼 수 있게 말이에요."
수빈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9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며 수빈이 중얼거렸다.
"마지막 건 아무래도 작업 멘트 같은데.. 내 얼굴이 프랑스에서 먹히는 건가? 아니면.. 외국이라 날 알아보는 사람들이 없어서 편하게 대시를 하는 건가?"
잠시 후 9층에 도착한 수빈은 9층 입구에 있는 안내 데스크를 찾아갔다. 남자 안내원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927호로 가시면 됩니다."
수빈은 927호를 찾아서 발걸음을 재게 옮겼다.
'921, 922, 923.. 저기를 돌면 나오겠군.'
수빈이 모퉁이를 돌아서자 사람들의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복도에 사람들이 떼지어 모여 있었다. 온통 남자들뿐이었다.
"이게 다 뭐다냐?"
얼마나 놀랐던지 수빈의 입에서, 캐나다에 계시는 어머니가 자주 쓰시던 표현이 툭 튀어나왔다.
짧은 팬츠만 달랑 걸치고 벌거벗은 남자들이 수빈의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