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190화 (190/236)

#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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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0일 목요일

본사 건물 개관식 및 시사회를 맞이해서 '수박 시네마' 건물 앞쪽이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교통정리 및 초대 손님들의 안내를 맡은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수빈은 새로 건립한 수박 프로덕션 빌딩 최고층에 있는 자신의 사장실에서 오상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제 회의 때 말씀하신 대로, 오늘 아침에 유럽과 일본 그리고 동남아 쪽으로 직원들을 파견했어요. 오늘 시사회가 끝나고 나면, 저는 내일 아침 비행기로 중국으로 넘어갈 계획이에요."

"중국 쪽은 이전 달빛과 비슷한 계약 조건이거나 아니면 아주 조금이라도 더 좋은 조건이면 충분합니다. 무리하지는 마세요. 그리고 만약에 문제가 생기면, 바로 저에게 연락을 주세요."

"네. 알겠어요. 무리하지는 않겠지만, 최고의 조건으로 계약을 하고 올 생각이에요. 이번 영화를 싼값에 넘길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요."

기합이 잔뜩 담긴 오상무의 대답에 수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알아서 잘 하시리라 믿습니다. 개봉관은 확정이 되었나요?"

"네. 5월 16일 수요일, 전국 254개의 개봉관에서 개봉을 하기로 확정되었어요. 다행히 전작인 달빛이 반응이 좋았던 관계로, 생각보다 더 많은 개봉관을 잡을 수 있었어요."

"우리가 직접 다 배급하는 겁니까?"

"네. 메이저 배급사가 끼지 않더라도 200여 개의 개봉관이라면, 우리 영화사 직원들만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요."

"잘하셨습니다. 생각보다 빠르긴 하지만, 이번 기회에 배급 경험을 제대로 한번 쌓아 보세요. 그럼 저도 내일 아침에 미국으로 출장을 떠나겠습니다. 제법 출장이 길어질 거 같은데.. 제가 없는 동안 잘 좀 부탁합니다."

"걱정 마세요. 제가 잘 지키고 있을게요."

"믿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부탁한 손님은 어떻게 됐나요?"

"오늘 오신다고 확답을 받았어요. 언제쯤 자리를 마련해 드릴까요?"

"시사회가 끝나면 사장실로 모셔주세요. 간단하게 차나 한잔하시지 않겠냐고 권하시면 될 겁니다. 만약에 그분이 바쁘다고 말씀하시면, 굳이 억지로 잡을 필요 없습니다. 우리 영화가 그분의 기대치를 만족 못 시켰다는 소리니까요."

"알겠어요. 실수하지 않도록 제가 직접 처리를 할게요."

수빈이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럼 슬슬 우리도 나가 볼까요?"

"네. 대표님. 근데.. TV 광고는 정말로 안 하실 생각이세요?"

수빈이 단호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안 합니다. 개봉관이 300개도 안되는데 광고를 어떻게 합니까? 사람들 보고 영화를 보러 와달라고 부탁하기에는 죄송스럽죠. 괜히 사서 욕먹을 필요 없습니다. 그때 말씀드린 대로 당분간 국내 시장은 버립니다."

"잘 알겠습니다."

시사회를 맞이해서 슈트와 정장을 쫙 빼입은 두 사람은, 건물과 건물을 이어주는 연결 다리를 건너 시사회가 열리는 대극장 쪽으로 이동했다.

잠시 후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시사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속속 도착을 하였다. 마침내 대망의 '라이프' 시사회가 시작되었다.

- 훌쩍. 훌쩍.

영화가 거의 끝나갈 즈음, 시사회에 참석한 모든 관객들이 흐느끼거나, 울거나, 통곡을 하고 있었다. 한번 겪었던 일이라 사전에 미리 이야기를 해둔 덕분에, 수빈은 느긋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영화가 끝이 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동안에도, 조명이 켜지지 않은 탓인지 울음소리가 쉽사리 그치지 않았다.

이윽고 수빈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나갔다. 거기에 맞춰 조명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단상에 선 수빈이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다들 아직 많이 힘드신 걸로 보입니다. 서두르실 필요 없으니, 여유를 가지고 설문지를 작성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바깥에 다과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즐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시사회에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수빈이 말을 끝내자 그제야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짝짝짝.

수빈이 바깥으로 나가자 오상무가 다가왔다.

"대표님. 이정기 씨를 사장실로 모셨어요. 별말 없이 순순히 응하시던데요?"

"그래요? 다행히 영화가 그분 맘에 드셨나 보군요. 절반은 이미 성공했네요. 그럼.. 제가 없을 때는 오상무가 업무 대행을 해야 하니까, 저와 같이 가셔서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해보죠. 다과회는 다른 간부들이 있으니까 괜찮을 겁니다. 그리고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고요."

"네. 대표님."

잠시 후 수빈과 오상무가 사장실로 들어서니, 머리가 허옇게 세고 양복 차림을 한 노년의 남자가 소파에 앉아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중후한 느낌의 이정기와 의례적인 인사말을 주고받은 후 건너편 소파에 착석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수빈과 이정기 두 사람 모두 가끔씩 서로를 바라보며, 자신들의 앞에 놓인 차만 홀짝거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침묵을 지키고 있자, 덩달아 오상무도 말 한마디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젊은 사람치고 인내심이 상당하군."

이정기가 먼저 입을 열자, 수빈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애늙은이 같다는 소리를 가끔씩 듣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이정기가 뜻 모를 이야기를 던졌다.

"난 코끼리를 좋아한다네.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지."

수빈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당장은 필요하지 않아 보입니다."

"그런가? 좋은 이야기로군. 그리고.. 당장은 들어줄 수가 없다네."

수빈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건 기대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습니다. 단지 너무 늦지 않은 시간에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정기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건 내가 뒷문을 열어주도록 하지. 마지막으로.. 조만간 강감독 작품으로 전시회를 열고 싶네."

"그러려면 제 작품을 소유하고 계신 분들께 부탁을 해서 대여를 해야겠군요? 신작도 좀 있어야 할 거구요. 제가 적극적으로 협조하겠습니다."

이정기가 수빈을 잠시 동안 지그시 바라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머리가 영특하고 지켜보고 있으면 반짝반짝 빛이 난다. 그래서 뭐라도 해주고 싶은 기분이 절로 든다.. 돌아가신 형수가 자네와 관련해서 해준 말이었지. 틀린 말이 하나 없군. 역시.. 형수가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나. 대단한 양반이었지. 오늘 차 잘 마셨네."

이정기가 일어나며 말했다.

"조만간 내가 한잔 대접하지."

수빈이 일어나 공손히 대답했다.

"초대해 주시면 언제든지 달려가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보세. 나오지 말게나."

"알겠습니다. 조심해서 돌아가시죠."

이정기가 사장실을 나가자 황당한 얼굴의 오상무가 급히 수빈에게 물었다.

"도대체.. 두 분이서 무슨 말씀을 나누신 거예요? 선문답도 아니고.. 전 한마디도 못 알아듣겠어요."

수빈이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저분이 누군지는 정확하게 알고 계시죠?"

"그럼요. 초대를 하기 위해서 자세하게 조사를 해봤죠. BJ 그룹 소유의 미술관 관장을 하고 계신 분이잖아요. 돌아가신 정미영 회장님과는 시동생과 형수 관계고요."

"맞습니다. 현재 BJ Ent.의 회장인 이태우 회장의 작은아버지 되시는 분이죠. BJ 그룹의 지분을 적지 않게 소유하고 있기도 하고요. 즉, 이태우 회장을 상대로 실력 행사를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이, 우리 쪽에서 급작스럽게 시사회에 초대를 했는데, 아무런 조사도 안 해보고 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시죠?"

"네. 당연히 조사를 해봤을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떤지, BJ 그룹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다 알고 왔을 겁니다. 대단한 비밀도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초대를 받아들였다는 건,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당신이 보기에 썩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고 스스로 판단을 내렸기 때문에 오셨을 겁니다. 그래서 확인을 해보고 싶었겠죠.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떤 영화를 제작했는지를 말입니다,"

수빈이 남은 차를 단숨에 털어 넣은 다음 말을 이었다.

"저분 정도의 나이가 되면, 남이 한 말을 잘 믿지 않습니다. 듣지도 않고요. 오로지 자신이 본 것만 믿으려고 하고, 자신이 직접 확인한 것만 신뢰하죠. 늙으면 고집만 세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다행히.. 제가 그분 마음에 드셨나 보네요. 별말 없으신 거 보니, 제가 만든 영화도 흡족해하시는 거 같고요. 우리 쪽에서 보면 일이 아주 잘 풀린 거죠."

오상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이제 조금 알겠어요. 근데.. 그거랑 코끼리랑 무슨 상관이에요?"

"아. 코끼리. 그건 관상명정 이야기죠. 돌아가신 정회장님 관상명정을 제가 그려드렸죠. 그때는 호랑이 그림을 그려드렸는데.. 본인은 코끼리를 좋아하니까, 자신의 관상명정을 코끼리로 그려달라고 저에게 직접 부탁을 하신 겁니다."

"당장은 필요 없다는 건?"

"아직 정정하셔서, 돌아가시려면 아직 멀어 보인다고 말씀드렸던 거죠."

"그럼 그분이 말한 당장은 안된다는 건 뭐예요? 뒷문은 또 뭐죠?"

"비록 이태우 회장이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아무리 조카라고 하더라도 그룹의 회장이 하는 일에 당장 잘못되었다고 태클을 걸고 나설 수는 없다는 소리죠. 저도 그걸 바라고 모신 건 아니라고 대답했고요. 단지 너무 늦기 전에, 예전처럼 좋은 관계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드렸죠. 그룹의 회장쯤 되는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정책을 바꾸려면 거기에 걸맞은 명분이 필요한 법입니다. 그러려면 누군가가 이태우 회장이 퇴각할 명분과 퇴로를 열어 줘야 하는데.. 그걸 당신께서 해주시겠다고 답하신 거죠."

"그럼 전시회는?"

"그건 그냥 단순한 전시회죠. 제 그림이 맘에 드시나 봅니다. 전시회까지 열려고 그러시는 거 보니.. 전시회를 열 때, 제가 최대한 도와드리겠다고 답한 것뿐입니다."

오상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그냥 그렇게들 이야기를 나누시면 되죠. 뭘 그렇게 비비꼬아서 이야기를.."

수빈이 고개를 저었다.

"비비 꼰게 아닙니다. 자질구레한 설명을 생략 한 거죠. 너라면 이 정도는 알아듣겠지? 이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어야 인정해 줄 거야.라고 하시길래 제가 맞춰 드린 것뿐입니다. 노친네 비위를 잘 맞춰 드리면, 자다가도 유산이 떨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수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과회장으로 다시 돌아가죠.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된 것 같네요."

잠시 후 두 사람은 다과회장으로 다시 돌아가, 시사회에 참석한 손님들을 접대하기 시작했다.

5월 11일 금요일(한국 시간)

시사회 다음날 아침 수빈은 백성철이 모는 밴을 타고 인천공항으로 나갔다. LA까지 가장 빠른 직항 편인 11시 20분발 싱가포르 항공 비행기를 탄 수빈은 할리우드가 있는 LA로 날아갔다.

5월 11일 금요일(미국 시간)

도착 예상시간 보다 20분가량 더 소요되어, 미국 서부시간으로 아침 7시경 LA 국제공항에 도착한 수빈은 짐을 찾아 입국장을 나섰다.

입국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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