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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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통화를 끝낸 후, 회식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의 원망 속에 양해를 구했다. 회식 자리를 오상무에게 부탁한 수빈은 식당을 나와 하이유와 함께 YK로 급히 이동했다.
잠시 후 YK에 도착한 수빈은 하이유와 함께 A&R 팀 녹음실로 올라갔다. 미국 출장을 가있는 정팀장을 제외하고 최민식과 이성호가 나와 있었다.
"이거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 나오라고 해서 미안해요."
거구의 이성호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이사님. 어차피 저희 둘 다 퇴근을 하기 전이었습니다. 요 근래 샘플링 문의가 너무 많아서, 몇 주째 계속해서 야근을 하는 중이라서요."
"그래요? 너무 무리하는 거 같은데.. 제가 정팀장이나 사장님께 말을 좀 할까요?"
옆에서 듣고 있던 최민식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사님. 저희가 그걸로 짭짤하게 벌고 있는 중인데.. 그건 저희를 도와주시는 게 아니라 죽이시는 겁니다."
이성호가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둘 다 이제 가정이 있어서.. 집에서는 늦어도 좋으니까 지금처럼 돈 많이 벌어오라고 성화라서요."
수빈이 말없이 두 사람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잠시 후 녹음실 부스에서 하이유가 노래 연습을 하고 있을 때, 마빈이 빠진 BBG 멤버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건 빈쌍이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경빈이 녹음실 안으로 들어오며 호들갑을 떨었다.
"형! 이거 좋은데요."
"그래? 오는 동안 랩 가사 좀 손보라고 한건 어떻게 됐냐?"
"억지로 손을 보려면 볼 수도 있지만.. 굳이 안 바꿔도 될 거 같은데요. 지금 이 상태로도 느낌도 나쁘지 않아요."
"네가 하기 귀찮아서 그런 건 아니고?"
"아니에요. 형님. 랩이란 게 원래 자신의 심경이나 느낌을 말로 전달하는 거잖아요. 거기에 반드시 따라야 하는 법칙 같은 건 없다고요. 유행이야 있긴 하지만.."
말수가 적은 성빈도 동의했다.
"형님.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래? 성빈이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거겠지. 알았다."
수빈의 대답에 경빈의 입이 댓 발 튀어나올 때, 케빈과 로빈이 안으로 들어왔다. 수빈이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은 다음 급하게 물었다.
"가사를 영어로 바꿔달라고 한건 다 된 거야?"
수빈의 물음에 케빈이 대답했다.
"아직 조금 남았어. 이거 영어 버전도 오늘 녹음할 거야?"
"그래. 오늘 중으로 다 끝내야만 해. 한글로 된 버전은 기타와 피아노 두 가지 악기만으로 반주를 해서, 비교적 담담한 분위기로 녹음을 할 거야. 그런 다음 영화 엔딩 때 사용할 거고.. 영어로 된 버전은 신나는 록 버전으로 녹음을 해서, 영화 시작 곡으로 삽입할 거다. 일종의 수미상관(首尾相關)인 거지."
마빈이 물었다.
"피아노는 내가 치면 되는 거야?"
"아니. 엔딩곡은 연주자를 따로 불렀어. 넌 록 버전으로 녹음할 때 부탁할게. 아무래도 연주자가 달라야 들을 때 분위기도 다를 거 같아서 말이지."
"그래? 알았어."
수빈이 손뼉을 치며 사람들을 독려했다.
"자자. 다들 서둘러. 시간이 없다고. 수정할 건 빨리 수정하고, 악보도 좀 외워서 연주를 맞춰봐야지. 하이유 선배는 녹음 부스 안에서 열심히 연습 중이니까, 우리도 서두르자고."
잠시 후 BBG 멤버들이 연주를 맞춰본다고 녹음 부스가 시끌벅적할 때, 백비서가 녹음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백성철이 수빈을 보며 말했다.
"대표님. 모셔왔습니다."
백성철의 뒤로 뾰로통한 얼굴의 최아림이 등장했다.
"오빠. 내가 언제 한번 밥 먹자고 할 때는 시큰둥 하더니.. 연주 부탁은 당일치기야? 아니 당일치기도 아니지. 전화받은 지 두 시간도 안 지났으니까. 내가 이래 봬도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라고. 알아 몰라?"
수빈이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알지. 아림이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지. 베를린에서 공연할 때 통화까지 했는데 내가 왜 모르겠니? 암튼 미안하다. 내가 영화만 개봉하고 나면 한턱 제대로 내마. 아니 열 턱이라도 쏘마. 그러니 이번 한 번만 부탁하자. 연주료도 아주 많이 줄게."
"치. 알았어. 악보는 있어?"
"당연히 있지. 자자. 일단 여기 앉으라고."
시간이 흘러 본격적인 녹음이 시작되었다.
수빈이 마이크를 켜며 말했다.
"하이유씨. 1절은 최대한 담담하게, 툭툭 던지듯 부르면 됩니다. 2절부터는 감정을 넣으셔도 되고요. 어차피 영화에는 시간상 1절 파트만 들어가니까.. 2절부터는 원 없이 불러보세요. 피아노가 먼저 시작하고 거기에 맞춰서 녹음된 기타 반주를 틀 겁니다. 아시겠죠?"
- 네. 감독님.
"아림아. 피아노 타건은 최대한 부드럽게 해줘. 피아노와 하이유씨가 마치 서로 대화를 하듯 진행하면 되는 거야. 기타 반주 소리는 나중에 다시 만지면 되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알았지?"
- 네. 오빠.
잠시 후 녹음 부스 안에서 땅 따다다당~ 하며 부드러운 피아노의 선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거기에 미리 녹음한 기타 소리가 얹혔다. 하이유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라이프~ 난 가끔 그대에게 물어보았죠. 당신은 왜 항상 행복한 건지..."
수빈이 마이크를 끈 채 듣다가 노래가 맘에 안 드는지 중얼거렸다,
"살짝 감정 과잉 같은데.."
그때 옆에서 콘솔 박스를 조작하던 조민석이 말했다.
"이사님. 지금 정도면 충분히 절제된 거 아닙니까? 자기가 사랑하는 지인이 세상을 떠났는데.. 사람이 너무 담담해도 이상하지 않을까요?"
이성호가 번들거리는 머리통을 흔들며 한 팔 거들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이사님이 생각하시는 게 있겠지만.. 어차피 영화를 보는 대다수의 사람은 저처럼 평범한 사람들 아닙니까? 너무 노래가 삭막하면 영화 감상할 때 오히려 분위기를 해칠 거 같은데요."
"성호씨가 평범한 사람은 아닌데.. 알겠어요. 일단 1절이 끝나고 나면 같이 한번 들어 봅시다."
잠시 후 수빈이 다시 마이크를 켰다.
"거기까지.. 일단 1절이 어떤지 다 같이 들어봅시다. 그런 후에 수정할 부분이 있으면 수정을 한 다음, 다시 녹음을 재개할게요. 민석씨?"
조민석이 빠르게 손을 움직이더니 방금 전 녹음한 노래를 틀었다. 녹음 부스와 녹음실에 하이유가 부른 노래가 흐르기 시작했다. 감상을 하던 사람들이 한마디씩 던졌다.
- 노래 좋은데. 피아노 연주도 좋고.
- 노래가 듣다 보면 울컥하는 게 있네.
- 가사에 철학적인 느낌이 충만한걸.
눈을 지그시 감고 듣고 있던 수빈이 마이크를 켰다.
"하이유씨. 1절하고 2절 가사를 보면 서로 호응하는 구절이 있죠? 1절에서 '항상 행복한 건지'와 2절에서 '항상 웃고 있는지' 그리고 '바람의 흔적일 뿐'과 '빛바랜 추억일 뿐' 마지막으로 '펜션의 하룻밤 꿈처럼'과 '나비의 한여름 꿈처럼'이 있습니다. 이 부분을 부를 때에는 목소리에 좀 더 힘을 실어줬으면 좋겠네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 네. 알겠습니다.
"아림아. 내가 좀 전에 말한 부분에서는 타건을 좀 더 강하게 해줘, 그리고 '꿈처럼' 구절 있지? 그 부분만 스타카토를 살짝 해줘. 꿈. 처. 럼. 미. 라. 솔. 이런 식으로 말이야. 그리고.. 마지막 구절 있잖아. 뷰티플 라이프~ 하는 그 부분. 그러니까 악보상 마지막 미에서 도까지 미끄러지듯이 글리산도를 좀 해줘봐. 바로 뒤에 랩이 따라붙어야 하니까, 분위기를 좀 더 업을 시켜야 할거 같아."
- 네. 오빠.
"다시 녹음하겠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엔딩곡 한글 버전의 녹음이 끝이 났다. 수빈이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최종 체크합니다. 듣다가 혹시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누구라도 말을 해주세요. 여기서 이상 없다고 그러면 지금 들으시는 게 최종적으로 영화에 삽입이 될 거라서, 더 이상은 고칠 기회가 없어요."
수빈이 최민식에게 눈짓을 하였다. 녹음실에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후의 쓸쓸하고 허무한 마음을 달래주듯, 부드럽고 감미로운 피아노 소리와 따뜻하고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하모니가 되어 가슴속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듣고 있던 사람들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녹음실에서 마치 반주처럼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 사람 마음을 후벼파는데. 훌쩍. 노래가 담담한 것 같으면서도 격렬해.
- 귀로 들을 땐 바람 소리처럼 무심한데, 듣다 보면 가슴속이 용암처럼 뜨거워져.
- 앞으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살아 있다는 게 행복한 거지.
- 몇 번을 들어도 적응이 안 되네. 노래가 마법의 주문 같다. 눈물 나게 만드는 마법.
잠시 후 수빈이 마이크를 켰다.
"수고하셨습니다. 10분만 쉬었다가 록 버전 녹음을 할게요. 다들 기운 차려서 신나게 한번 놀아봅시다. 살아있다는 사실을 축복한다는 느낌으로 말이죠. 다들 살아 있어 즐거운 인생이잖아요. 삶의 기쁨에 가득 찬 멋진 파티를 한번 벌여봅시다."
시간이 흘러 녹음 부스에서 금방이라도 부서질듯한 케빈의 드럼 소리가 폭발하듯이 울려 퍼졌다. 수빈의 전자 기타가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처럼 끝없이 피치를 올리며 내달렸다. 로빈의 스피디한 키보드 타건 소리가 상하좌우를 넘나들며 불을 뿜고 있었다. 그리고 래퍼들의 거침없는 랩이 리듬을 타며 미친 듯이 뛰어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하이유의 귀를 찌를 듯 송곳처럼 파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화룡점정을 하고 있었다.
녹음 부스에 있는 사람들이 마치 오늘만 사는 사람들처럼 달려나가고 있었다.
콘솔박스를 만지며 열심히 녹음을 하고 있는 최민식 옆에서, 최아림이 부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끼여서 같이 놀고 싶다.."
옆에 있던 이성호가 극구 말렸다.
"안됩니다. 아까 이사님 말씀 못 들어셨습니까? 처음의 발라드라면 몰라도.. 지금 하고 있는 록 버전의 연주에 참여했다가는, 고지식한 클래식계에서 안 좋은 소리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최아림이 입술을 깨물더니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안들키면 되죠."
최아림이 녹음 부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사람들이 큰 소리로 환호하며 두 손들어 최아림을 반겼고, 수빈이 연신 고개를 저었다. 최아림이 수빈을 향해 악다구니를 써는 모습이 잡혔다.
이윽고 아름답고 뛰어난 선율의 피아노 소리가 더해져 더욱 풍성해지고 화려해진 연주 속에, 삶의 환의에 가득 찬 록 버전의 녹음이 재개되었다.
부스 밖에서 최민식이 귀를 쫑긋 세운 채 녹음을 하며 중얼거렸다.
"끝내주는군. 환희의 찬가 록 버전을 듣는 기분이야."
이성호가 대꾸했다.
"나도.. 이건 대박 중에서도 대박이야."
다음 날 새벽까지 진행된 녹음이 끝나고, 수빈은 녹음된 음원을 들고서 수정 작업을 위해 예전 영화사로 이동하고 있었다. 밴 안에서 백성철이 말했다.
"꼬박 밤을 새웠는데 좀 쉬어야 하지 않냐?"
"형. 내일이 시사회잖아요. 영화 음악을 수정하고 편집을 다시 손보려면 시간이 빠듯해요."
"후. 정말 그러다 잘못될까 걱정이다. 그럼 아침에 잡혀 있는 회의는 어떡할까?"
"이따 점심 먹고 1시쯤 하는 걸로 미루세요. 그때쯤이면 수정 작업이 다 끝날 거예요. 그리고.. 조부장 보고 오전 중으로 최아림과의 계약을 마무리 지으라고 하세요. 그게 돼야 음원을 등록하고 CD를 출시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 알았다."
잠시 후 영화사에 도착한 수빈은 편집실까지 빠른 걸음으로 이동하였다. 수빈은 백성철이 가져다준 컵라면과 김밥으로 아침을 때우며 수정 작업에 매진했다.
시간이 흘러 최종 수정 작업을 끝마친 수빈이 영화를 보고 있었다.
"좋아. 내가 보기엔 어제보다 더 좋아졌어. 남은 건 이제 흥행몰이를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인데.."
수빈은 최종 편집본을 챙겨 일어났다. 편집실을 나선 수빈은 밴을 타고 대학로에 있는 신축 본사 건물로 이동하였다.
정식 시사회전 마지막 간부 회의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