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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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일 목요일
영화사와 YK를 오가며 편집과 음악 작업에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던 수빈은, 오늘 하루는 집에서 작업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컴퓨터 앞에 앉은 수빈이 열심히 키보드를 치고 있었다. 한참을 두드리던 수빈은 잠시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이 정도면 큰 줄기는 다 잡힌 것 같은데.. 10개 국어는 무리더라도 영어나 중국어 번역 정도는 미리미리 작업을 해놔야지."
그때 수빈의 핸드폰이 울렸다. 백성철 비서에게서 온 전화였다.
"형. 왜요? 저 지금 많이 바쁜데.."
[작업하는데 미안하다. 지금 영화사에서 난리가 났나 보더라. 오상무가 너랑 만나고 싶다고 꼭 연락을 해달라고 부탁을 해서 말이야.]
"그래요? 갑자기 무슨 일이래. 오늘 하루는 날 찾지 말라고 했는데도 형이 전화를 한거 보니.. 오상무가 형을 어지간히도 볶았나 봐요. 이거 내가 괜히 핸드폰을 바꿨나? 형만 너무 힘드네."
[그래야 비서인 내 권위가 제대로 선다며? 네가 작업하기도 편하고. 네가 나한테 그렇게 말했잖아?]
"그렇긴 하죠. 그렇긴 한데.."
[그럼 됐어. 나야 그런 일 처리하라고 있는 사람이잖아. 오상무가 빨리 봤으면 하는데 영화사로 올 거야?]
"그럼요. 아무리 작업이 바빠도 가봐야죠."
[그래? 알았다. 나 밑에 있으니까 준비하고 내려와라.]
"네? 아니 그럼 미리 그렇게 말을 하시지."
[안된다고 그러면 조용히 돌아가려고 했지. 작업 방해하면 안 되니까..]
"알았어요. 형. 금방 내려갈게요."
전화를 끊은 수빈이 중얼거렸다.
"하여간 성격이 너무 우직하다니까.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거지만.."
수빈은 빠르게 옷을 챙겨 입고 밑으로 내려갔다.
시간이 흘러 수빈은 영화사 회의실에서 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착 가라앉은 회의실 분위기가 현재 상황의 심각성을 알려주고 있었다.
"배급사 네 군데에서 다 거절했다고요?"
수빈의 질문에 오상무가 빠르게 대답했다.
"BJ와 나우에서는 당분간 어렵다고 말했어요. 3~4개월 정도는 기다려야 한다고 하더군요. 사실상 거절이죠. 그리고 플러스N과 쇼박스 쪽에서는 직접적으로 대놓고 말했어요. 자기들은 우리 영화를 배급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이죠."
옆에서 얼굴이 상기되어 있던 법무부 조부장이 보탰다.
"대표님. 국내 배급사에서 우리 영화를 거부할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반정부 영화도 아니고 19금 영화도 아니지 않습니까? 민감한 주제를 다룬 것도 아니고요. 이건 부당행위에 해당하고 공정거래법 위반입니다. 배급사의 자유재량권을 벗어난 담합(談合) 행위입니다. 즉각 법적인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수빈이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법적인 조치를 취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잘 아시잖아요? 시간만 질질 끌뿐, 우리에게 이로울게 하나도 없습니다."
수빈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뻔하지 않겠습니까? 그냥 제가 맘에 안 든다는 거죠. 잘 나가는 게 꼴보기 싫고요. 그것까지는 이해를 하겠는데.. 재벌 그룹인 BJ까지 동참했다는 게 문제입니다. BJ를 꼬드겼던 아니면 BJ가 주동이던, 이렇게 단체 행동을 하려면 주모자나 주동자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게 누구냐는 건데.."
수빈이 손가락을 멈추며 YK에서 근무했던 회계부 강부장을 바라보았다.
"강부장."
"네. 대표님."
"강부장은 지금 즉시 YK로 연락을 해보세요. 홍보부 김팀장에게 내가 부탁한 서류를 달라고 하시고, 박사장님에게 연락을 하셔서 최근 국내 배급사 관련해서 특별한 사항이 있었는지 알아봐 달라고 하세요. 특히 미국 쪽 관련해서 주목할 만한 일이 발생했는지 살펴봐달라고 하세요. 아무래도 그런 쪽은 우리보다 박사장님이 더 잘 아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강부장이 연락을 취하기 위해 일어나서 회의실을 나섰다.
수빈은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밝게 웃으며 말했다.
"다들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국내 유수의 재벌 그룹인 화랑과도 한판 붙었던 몸입니다. 다들 기억하시죠? 그때도 제가 이겼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여러분들은 절 믿고, 본인이 맡은 일만 잘 하시면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 알겠습니다. 대표님.
"좋습니다. 그럼 대책을 세워 봅시다. 제가 항상 말하지만.. 가장 먼저 해야 되는 게 지피지기입니다. 적이 누군지는 지금 조사 중이니까.. 지기(知己) 즉, 우리 쪽 상황부터 정확하게 파악을 해봅시다. 오상무?"
"네. 대표님."
"공사는 차질 없나요?"
"네. 완전 차질 없어요. 모레면 다 끝납니다. 음향이나 조명시스템들도 테스트를 완벽하게 마쳤어요."
수빈이 각 팀장들을 보며 물었다.
"확실합니까?"
박형석 음향팀장이 자신 있는 얼굴로 대답했다.
"음향은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국내 최고 수준이라고 제가 장담합니다."
"조명은요?"
최진후 조명팀장이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컴퓨터로 제어되는 최첨단 조명장치까지 설치했습니다. 전 세계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습니다. 제 목을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공사 건은 걱정을 안 해도 되겠군요. 오상무. 시사회 준비는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차질 없이 준비가 진행 중이에요. 다음 주 목요일인 5월 10일에 VIP 손님을 100분 정도 초청해서, 완공식 겸 시사회를 대극장에서 진행하기로 계획이 잡혀 있어요."
"영화 시사회를 방해하려는 움직임은 없습니까?"
"네. 전혀요. 연락을 드렸던 분들 중 시간이 안되는 몇몇 분들 빼고는 다들 참석하시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아직까지 참석을 취소하겠다는 통보를 받은 적은 없어요."
수빈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하기야 굳이 시사회까지 막으려 들지는 않겠죠. 그러려면 참석하려는 VIP들을 다 설득하거나 겁박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하려면 상대방도 부담이 될 테니까요. 우리 쪽으로서는 잘 된 일이네요."
그때 오소라가 뭔가 생각이 떠오른 듯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무슨 일이 있었나요?"
"네. 이번 시사회에 배급사 네 군데 모두 초청을 했었는데, 참석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한 명도 없었어요. 다들 바빠서 못 온다고 했었는데.."
"흠. 그 말인즉슨 이번 담합이 하루 이틀 사이에 급조된 게 아니라는 소리군요? 제법 시간을 두고 준비했다는 건데.."
수빈은 입을 굳게 다물고 손가락을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회의실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 톡. 톡. 톡.
'어떡하던 날 짓밟으려고 다들 난리로군. 후.. 이번 기회에 나에게 적대적인 세력들을 발본색원(拔本塞源) 해야 하겠는데. 지금 당장은 한수에 담합을 깨뜨릴 수 있는 묘책(妙策)이 없어. 그럼 어떡해야 할까? 영화사에 미치는 피해를 최소한도로 줄이면서, 시간을 두고 헤쳐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해. 그렇다면..'
잠시 후 생각을 정리한 수빈이 중얼거렸다.
"양동(陽動)에 공성(空城) 그리고 고육(苦肉) 인가.."
가까이 있던 오소라가 의문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양동이에 담긴 공을 고대로 찬다고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대표님."
수빈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축구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하나씩 자세하게 설명을 해드리죠."
그때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며, 흥분한 얼굴의 강부장이 서류를 들고 뛰어들어왔다. 그리고 급히 수빈에게 다가가 말했다.
"알아낸 것 같습니다. 대표님."
수빈은 강부장이 건네주는 서류를 차분히 읽기 시작했다.
"재계 동향이라.. 4월 27일 인천 공항으로 센트럴 그룹 오정수 회장의 아들이 미국 LA에 있는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무사히 마치고 귀국했다. 센트럴 그룹? 여기가 어딥니까? 전 첨 들어 보는 곳인데요."
"영화관 체인인 메가박스와 메이저 배급사인 플러스N을 소유하고 있는 그룹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메가박스만 알고, 모체인 그룹은 잘 모르죠."
"호오. 그래요? 냄새가 풀풀 나는군요. 거기에다 김팀장이 알아낸 트위터 주소지인 미국 LA에 있었고요. 아들 나이가 27세고 이름이 오성식이네요. 응? 오성식?"
수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성식. 오성식.. 왠지 낯이 익은 이름인데.."
오소라가 한마디 던졌다.
"영어 가르치는 분 아닌가요?"
강부장이 어이가 없다는 듯 대꾸했다.
"그분은 나이가 이제 환갑입니다."
오소라의 헛소리를 깔끔하게 무시하고 수빈은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히 내가 들어봤던 이름이야. 내가 들어본 이름을 잘 기억 못한다? 그럴 리가 없지. 내가 기억을 못한다면 분명히..'
수빈은 머리 한구석에 몰아놨던 이전의 기억들을 더듬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수빈의 뇌리를 스치는 대사가 있었다.
[내가 지금은 급하게 미국으로 가야 돼서 그냥 놔두지만.. 한국으로 돌아오면 널 절대 그냥 두지 않을 테다. 내말 알아듣겠어? 딴따라 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감히 내 여자를 건드려? 넌 뒈졌어.]
수빈의 머릿속으로, 작년에 자신이 입원해 있던 병원으로 갑자기 쳐들어와서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버린, 철없는 부잣집 아들 같은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수빈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제야 짐작이 되는군. 확인이 필요하겠어.'
수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잠시 전화 좀 하고 올테니 다들 쉬고들 계세요."
수빈은 회의실 밖으로 나가, 전화기를 꺼내어 최아림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법 오래 신호가 가더니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나 수빈."
[어머. 오빠. 전화번호 바꿨어요? 첨 보는 번호라 누군가 했네.]
"그래. 며칠 전에 바꿨다. 그래서 내가 알려주려고 직접 전화했지."
[그랬구나. 알았어요. 오빠. 그럼 이 번호로 저장해 놓을게요. 그리고.. 자주 좀 연락해요. 예전 일은 다 잊고 서로 친하게 지내기로 했잖아요.]
"알았어. 자주 연락할게. 그동안 영화 찍느라 내가 너무 바빴어. 너 지금 어디야?"
[나? 베를린. 공연 때문에 지금 독일에 와 있어요.]
"그렇구나. 공연 잘하고.. 아. 맞다. 뭐 하나만 물어보자. 예전에 너 좋다고 따라다닌 남자가 있었다고 했었지?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성식 오빠? 그 오빠가 왜?]
"아. 맞다. 성식.. 오성식이라고 했었지. 그 사람 집안이 뭐 하는지 혹시 아냐?"
[영화관 할걸? 메가 박스라고 있잖아. 그게 그 집안 소유라고 들었어. 우리 엄마랑 그 집 엄마랑 좀 친해. 갑자기 그건 왜 물어봐? 무슨 일 있어?]
"아냐. 그냥 궁금해서.. 공연 잘하고 한국 오면 밥 한번 먹자."
[그래요. 오빠. 둘이서 같이 밥 한번 먹어요. 샛별이는 빼고. 알았죠?]
"그래. 알았다."
수빈은 전화를 끊고 기가 찬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결국 이 모든 건 치정(癡情)에 의한 복수극이라는 거지? 하기야 그것만큼 끈질기고 잔혹한 게 또 없는 법이지. 말로서 좋게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후. 싸질러 놓은 똥이 아직까지도 날 괴롭히는군."
마음을 결정한 수빈은 다시 회의실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은 수빈이 좌중을 둘러보며 단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의 해결 방법이 결정되었습니다. 강행돌파(强行突破). 협상이나 양보 따위는 절대 없습니다. 어느 쪽이던 한쪽이 꼬꾸라져야 끝나는 싸움입니다. 다들 정신 바짝 차리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까?"
- 알겠습니다. 대표님.
기합이 바짝 들어간 간부들을 보며 수빈이 말을 이었다.
"다행히 좋은 소식도 있습니다. 우리 쪽에서 상대하기가 가장 껄끄러운 BJ가 직접 꾸민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단지 따라만 가는 입장이겠죠. 이번 일이 자신들에게 이익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요."
수빈이 심호흡을 한 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제가 이번 일을 해결할 방법으로, 양동에 공성 그리고 고육을 언급했습니다만.. BJ가 주동자가 아니란 게 밝혀졌기 때문에 한가지를 더 첨가할 생각입니다. 반간계(反間計)를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를 못해, 멀뚱멀뚱 자신만 쳐다보고 있는 간부들을 보며 수빈이 말했다.
"자세한 설명은 조금 이따 드리겠습니다. 먼저.."
수빈이 오소라를 보며 말했다.
"시사회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들 명단이 있죠? 그것부터 좀 봅시다."
수빈은 오소라가 넘겨준 참석자 리스트를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여기에는 없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