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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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플로어에 흐르던 Viva la Vida의 전주가 끝나자, 음악의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다. BPM이 조금씩 빨라지며, 은은한 방울소리 같기도 하고 맑은 종소리 같기도 한 여러 가지 다양한 소리들이 섞여서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음? 편곡을 한 건가? 저런 명곡을 함부로 손댔다가는 욕을 바가지로 먹을 텐데.."
제임스의 말에 음악을 집중해서 듣고 있던 테일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냐. 편곡을 한 게 아냐. 저 친구 장비를 보라고. 구닥다리 2CD 비트 믹스 머신을 사용하고 있잖아. 다른 CD를 그냥 같이 틀고 있는 것뿐이야. Viva la Vida는 원곡 그대로라고. 템포만 좀 빨라졌을 뿐.."
"그래? 아무튼 저 친구가 비트 하나는 예술로 찍는 것 같은데.. 사장이 왜 스카우트 해왔는지 알 것 같다."
"나도 알겠는걸. 듣고 있으니 신이 절로 나는군.. 사람들에게 익숙하고 이미 검증된 노래에 비트만 새롭게 첨가해서 흥을 돋우고.. 응?"
열심히 주절주절 말을 이어가던 테일러가 귀를 쫑긋 세우며 말을 멈췄다. 클럽에 새로운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움빠 움빠 움빠 움빠
전주를 듣고 있던 제임스가 기가 차다는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이제는 30년 전 노래를 트는 건가.."
테일러가 황당한 눈빛으로 무대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정확히는 36년 전 노래지. 세상에나.. LA 클럽 음악의 최첨단을 달린다는 크로코에서.. 유리스믹스(Eurythmics)의 스위트 드림(Sweet Dreams)을 들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이러다가 다음 곡으로는 2차 세계대전 때의 노래가 나올지도 모르겠는걸.."
두 디제이의 당혹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리스믹스의 스위트 드림이 감각적이고 명징한 비트에 실려 플로어 가득 달콤함을 퍼뜨리고 있었다.
한편 그 시각.
한국에서 수빈은 간부들과 함께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본사 건물 공사 건부터 들어보죠."
수빈의 말에 오소라가 대답했다.
"네. 대표님. 현재 준공 검사를 끝마쳤어요. 최종적으로 내부 인테리어 작업 중입니다. 늦어도 이번 주말이면 실내 공사까지 다 완료될 거예요."
"그래요? 그럼 5월 5일 어린이날과 8일 어버이날은 사람들이 다들 바쁠 테니 넘기고.. 9일이나 10일쯤 관련된 사람들을 초대해서 완공식을 합시다. 겸해서 이번 영화 시사회도 열고요."
오소라가 걱정 어린 얼굴로 물었다.
"대표님. 그때까지 영화가 완성이 다 되나요? 촬영이 끝난지 며칠 안 된 걸로 아는데요."
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때쯤이면 다 완성이 되어 있을 겁니다. 걱정 마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초대 손님들 명단을 작성하고, 완공식 겸 시사회를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할게요."
조부장이 슬쩍 끼어들었다.
"대표님 마음에 드는 영화가 나올 거 같습니까?"
수빈이 초여름 풀잎처럼 싱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맘에 들다 마다요. 전 세계 어디 영화제에 내놔도 자신 있습니다. 사실 이번 영화는.. 여러 가지 클리셰를 섞어서, 하나로 잘 비벼놓은 비빔밥 같은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남녀의 사랑, 삼각관계, 불치병, 요절.. 흔하디흔한 소재들이죠.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나온 지 600년이 다 되어 갑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가 나온 지도 100년이 넘었죠.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찾아보고 있지 않습니까? 클리셰라는 건 그만큼 검증이 되어 있다는 거죠. 단 하나, 진부함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말이죠."
수빈은 마치 자신에게 들려주 듯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진부함을 넘어서기 위해서 각본을 참신하게 쓴다? 아무리 잘 비틀어봐야 클리셰라는 소리를 들을 겁니다. 지나치면 오히려 사람들을 불편하게만 만들고 마이너로 흘러가게 됩니다. 그럼 어떡해야 할까요? 차별성과 특별성을 부여해야 하는 겁니다. 영화라면 역시.. 배우들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 그리고 음악이죠. 저 스스로 연출과 음악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습니다만, 문제가 되는 건 배우들의 연기 부분이었죠. 그랬는데.."
수빈이 자신 있는 표정으로 간부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나중에 시사회 때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이번 영화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조부장이 말을 받았다.
"대표님 말씀을 들으니 기대가 아주 큽니다. 그럼 배급은 어떡할까요?"
"그게 난제죠. 우리 단독으로 배급을 하겠다고 나서기에는 역량이 아직 모자라요. 인원과 경험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다른 메이저 배급사 한 군데와 협력을 했으면 합니다. 같이 협업을 하면서 우리도 좀 배워야죠. 물론 국외는 우리 단독으로 협상을 해나가겠지만, 국내는 역부족입니다. 메이저 배급사가 어디 어디죠?"
수빈의 질문에 오소라가 빠르게 대답했다.
"BJ Ent.와 플러스N 그리고 쇼박스와 나우. 이 네 군데가 메이저입니다."
"그럼 네 군데 모두 접촉을 해보세요. 우리 영화에 관심이 있는지 알아보시고, 같이 배급을 하겠다고 나서면, 업체별로 정산 배율이나 조건들을 잘 검토해 보세요. 대목 중에 하나인 어린이날이 지나갔으니까, 비교적 협상이 쉬울 겁니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다른 사항이 있나요?"
그때 이제나저제나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YK 홍보팀 김팀장이 손을 번쩍 들었다.
"안 그래도 궁금했었는데.. 홍보팀에서는 어쩐 일로 온 거죠?"
"저번 주말부터 YK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사실은 오늘 A&R 팀이 직접 와야 되는데.. 도저히 몸을 뺄 수가 없어서 제가 대신해서 온 겁니다. 얼마 전 발매한 다크 탬블러 CD 판매와 관련해서 급하게 보고드릴게 있어서요."
"다탬 CD가 왜요?"
"초판 1만 장이 다 팔렸습니다. 절품 상태라 오늘 중으로 다시 찍을 생각입니다만.. 아무래도 물량을 많이 잡아야 할거 같아서요. 이사님께 허락을 받으려고 아침 일찍 백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회의가 잡혀있다고 해서 제가 직접 달려왔습니다."
"그래요? 생각보다 너무 빨리 팔렸는데.. 5만 원에 판 게 맞나요?"
"맞습니다. 정가 5만 원에 팔았습니다."
"그런데도 벌써 다 팔렸다라.. 처음 물량이 풀린 게 언제였죠?"
"2월 14일입니다만.. 구정을 생각하면 2월 19일에 풀렸다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애초에 예상한 것보다 너무 빨리 팔렸는데. 설마.. 사람들이 새로 나온 게임 CD라고 착각을 해서 구매한 건 아니겠죠?"
수빈의 말에 김팀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명색이 단가가 5만 원짜리 CD인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국내 판매량은 3천 장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만장 중에 일본에 4천 장, 중국에 3천 장이 넘어갔습니다. YK 홈페이지에 판매 공고가 나가자마자, 양국에서 수입을 하고 싶다고 연락이 와서 물건을 넘겼습니다만.."
"다만?"
"처음에는 국내나 국외, 둘 다 판매가 지지부진했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지나치게 고가다 보니, 대표님의 팬분들과 대표님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소장 차원에서 조금씩 구입을 했다고 합니다. 3월까지는 그랬었는데.. 4월 초부터 판매가 조금씩 늘더니, 얼마 전부터 판매량이 폭증했습니다. 사실상 초판 만 장의 대부분은, 지난주에 다 팔려나갔다고 보시면 됩니다."
"갑자기 폭증한 이유는 뭔가요?"
"지금 현재 각국의 클럽 디제이들 사이에서 소문이 무섭게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YK에서 알아본 바로는, 그들 사이에서는 CD가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답니다. BB라고 말입니다."
"BB요?"
"네. 'Beat Bible'을 줄여서 BB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마치 성경처럼 디제이들 사이에서는 필수적으로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CD로 통하고 있습니다. 미처 구매하지 못한 디제이들 사이에서는 서로 돌려쓰거나, 아니면 웃돈을 얹어서 거래하고 있답니다. 저번 주말부터 YK로 구매 문의가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고, 샘플링 문의가 폭증해서 지금 A&R 팀에서 비상이 걸렸습니다."
"호오. 좋은 소식이군요. 나름 짭짤하게 벌수 있겠는데요. 그래서 얼마 정도를 더 찍을 생각인가요?"
"1차적으로 200만 장을 더 찍을 생각입니다."
그 순간 회의실 전체에 정적이 감돌았다. 잠시 후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수빈이 입을 열었다.
"...농담이겠죠?"
"사실입니다. 성경이라면 그 정도는 찍어줘야죠."
"200만 장이면.. 시중 판매가로 천억입니다. 알고는 있는 거겠죠?"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이틀전인 토요일에, 미국 3대 메이저 음반사 중에 하나인 UMG(Universal Music Group)에서 정식으로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미국 쪽으로 100만 장을 넘겨달라고요."
"아무리 미국 음반 시장이 크다고 하지만.. 히트곡 하나 없는 CD를 백만 장이나 팔 자신이 있다고 하던가요?"
"네. 자신 있답니다. 땅덩어리가 넓어서, 우리처럼 한두 달을 생각해서 판매를 하는 게 아니더군요. 넉넉잡아 1년 정도면 다 팔 자신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30만 장, 중국에서 50만 장을 요청했습니다. 지금 다들 CD를 구하려고 난리라고 합니다. 초판 물량이 워낙 적다 보니, 그런 현상이 더 심한 것 같습니다."
"이것 참.. 어느 정도 히트를 칠 거라고는 예상했었지만.. 이 정도로 대박이 터질 거라고는 전혀 상상을 못했는데요. 놀랍네요."
"미국 쪽 이야기로는 올해 이후에도 성경처럼 매년 조금씩 팔려나갈 거라고 예상하고 있답니다. 비트의 바이블이니까요. 새롭게 음악 하는 사람들이 매년 일정 숫자로 생겨나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근데.. 이런 중차대한 일이 있었는데, 난 왜 지금 처음으로 듣는 거죠?"
"저번 주 금요일 저녁부터 이사님을 찾았습니다만.. 백비서가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서요. 거의 '날 쏘고 가라' 수준이라서.. 연락을 못 드렸습니다."
"아. 급한 일이 아니면 절대 방해하지 말라고 제가 말했었죠. 그래서 그런 거였군요. 이거 제가 미안한데요."
"괜찮습니다. 이사님. 오늘부터라도 부지런히 찍어서 팔면 되니까요."
"아니 근데.. 그 정도 물량이면 차라리 미국에서 라이선스를 받아 가서 찍는 게 낫지 않나요? 로열티를 우리 쪽에다 주고 말이죠. 굳이 100만 장을 찍어서 보내 달라고 할 필요가 없을 텐데요. 시간도 걸리고, 배송 비용도 들고, 여러 가지 서류도 처리해야 하고, 송금 문제도 그렇고.."
김팀장이 뿌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 요청이 있었습니다만, 제가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수빈이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왜요?"
"이사님. YK가 세계 최고라는 미국 메이저 음반사를 상대로 언제 또 갑질을 해보겠습니까? 아마 조만간 복사판이 돌고, 불법 음원이 돌아다닐 겁니다. 하지만! YK 마크가 찍히고, 이사님이 그리신 재킷이 담겨 있는 CD가 정품이라는 걸 정책적으로 계속 유지했으면 합니다. 샤넬이나 루이비통 같은 명품들처럼 말이죠."
그때야 이해를 한 수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잘 하셨습니다. YK에서 미국 상대로 갑질 좀 해보도록 하죠. 그럼 다 끝난 건가요?"
"아닙니다. 저작권 관련 문제와 수익 배분 문제로 몇 가지 더 결정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요? 어디 나머지도 들어봅시다. 빨리 결정해 드릴 테니.."
"네. 이사님."
한편 한국에서 회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그 시각.
LA에 있는 클럽 크로코에서는 신입 디제이의 예행연습이 끝나가고 있었다.
"비트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친군가? CD 종류가 다양한 것 같은데.."
제임스의 말에 테일러가 동의를 하였다.
"그러게 말이야. 5곡에 5장을 돌려쓰던걸. 나도 좀 가졌으면 좋겠는데.. 복사를 해주려나 모르겠네."
"돈을 좀 주겠다고 하면 해주지 않을까?"
"일단 가서 물어보자고."
잠시 후 두 사람은 새로 온 디제이에게서 의외의 말을 들었다.
"그러니까 스미스. 네가 직접 제작을 다 한 게 아니라는 거지?"
"그래. 제임스. 이건 BB CD에서 내가 곡에 맞게 일부를 각각 따와서 만든 거라고. 동부 뉴욕은 이미 이런 방식으로 디제잉을 하는 게 붐이야. 서부까지 아직 퍼지지 않아서 네놈들이 모르고 있는 것뿐이지. 내가 살던 휴스턴도 붐이 불기 시작했으니까.. 조만간 서부 쪽도 붐이 번질걸."
"그 CD를 나도 좀 구할 수 있을까?"
"똑같은 이야기를 몇 번을 하는 거야? 지금은 못 구한다니까. 소문으로는 지금 다시 찍고 있다고 하니까, 금방 구할 수 있을 거야. 너희들에게 미안하지만 내건 절대 빌려줄 수 없어. 그러다 손상이라도 되면 내가 아주 곤란해진다고. 원본 CD는 음질이 고품질이라서 관리를 잘 해줘야 한단 말이야."
옆에서 듣고 있던 테일러가 물었다.
"스미스 네 말대로 라면.. 주옥같은 비트만 3시간이 넘게 담아서 비트의 바이블과도 같다는 그 CD를 만든 작자가 도대체 누구야?"
"나도 잘은 모르지만 한국인이래. 원래 직업은 영화감독이고, BB 재킷 그림까지 직접 그린 사람이래. 재킷 그림이 아주 멋지지. 이름이 수빈이라고.. "
그 순간 제임스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어? 나 그 감독 알아. 얼마 전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서 신인 감독상 받은 친구잖아? 아직 20대 초반이라는 젊은 친구. 그 친구가 직접 만들었다고?"
"그렇게 들었어."
옆에서 테일러가 감탄 어린 표정으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대단하군. 영화감독이라.. 그 친구가 제작했다는 영화를 언제 한번 봤으면 좋겠는걸."
미국 내에서 수빈의 명성이 영화계를 넘어 음악계까지 알음알음 퍼져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