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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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C '본격연예 한밤'에서 수빈의 수상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미모의 여성 리포터가 활달하게 입을 열었다.
"요즘 연예계에서 가장 핫한 분이죠. 아이돌이자 배우이고 천만 영화의 감독이기도 한 강수빈 영화감독의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얼마 전 폐막한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서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입니다. 저희가 단독으로 수상식 영상을 입수했는데요. 보시기에 앞서.. 먼저 사진 한 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냥 바로 영상을 보여드리면 충격이 클까 봐서요."
입만 열면 구라라는 남자 MC가 말을 받았아.
"그냥 바로 보면 충격이 크다는 게 무슨 말이죠?"
"사진을 보시면 아십니다."
잠시 후 모니터에 두 명의 남자가 어깨를 맞대고 있는 사진이 떠올랐고, 스튜디오 여기저기에서 비명 같은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놀란 얼굴의 남자 MC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삐쩍 마른 남자가.. 강수빈 영화감독 맞죠? 살이 많이 빠졌지만 강감독의 얼굴이 아직 남아있네요."
여성 리포터가 대답했다.
"맞습니다. 최근 찍고 있는 영화에서 불치병 환자의 역할을 맡아서, 체중 감량을 무척이나 많이 했다고 합니다. 얼핏 보면 못 알아볼 정도로 살이 많이 빠졌는데요. 하지만 보시다시피 잘생김은 아직도 얼굴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옆에 같이 서있는 분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짐 자무시' 감독인데요. 독립 영화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이번 영화제의 심사위원이신데, 강수빈 감독의 팬이라서 직접 수상을 해주기 위해 오셨다고 합니다. 그럼 강수빈 감독의 수상 소감을 들어보시겠습니다."
MC가 정해진 대본대로 멘트를 날렸다.
"미국에서 하는 영화젠데 강감독이 한국말로 수상 소감을 발표했나요? 영어로 했으면 보시는 분들이 알아듣기가 힘들 텐데요. 저야 영어가 좀 되지만.."
"그렇습니다. 강감독이 영어로 수상 소감을 말해서, 저희가 자막 처리를 했습니다. 한번 보시죠."
수빈이 꽃다발을 품에 안고 단상에 있는 마이크 앞에서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었다.
"먼저 저에게 신인 감독상을 주신 샌프란시스코 영화제 관계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찍느라 고생하신 스태프 여러분들과 배우 여러분 그리고 같이 작업을 하셨던 장진석 영화감독님과 박도홍 무술감독님과도 이 영광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수빈이 입가에 슬쩍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리고 지금 제 앞에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계시는 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전 어디 아픈 게 아닙니다. 가난해서 밥을 못 먹고사는 것도 아니고요. 건강하고 벌어놓은 돈도 많습니다. 영화 때문에 다이어트를 강제로 한 것뿐이니까, 너무 그렇게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수빈이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뒤 말을 이었다.
"흔히들 영화는 종합 예술이라고 합니다. 영상, 각본, 미술, 조명, 소품, 음악, 세트, 연기 등등 수많은 분야의 중합적인 총합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종합 예술은 사실상 과거에는 상상도 못했던 거죠."
수빈이 잠시 고개를 들어 위쪽을 쳐다본 다음 다시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만약 이 세상에 정말로 신(神)이 존재한다면.. 절 영화가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살게 해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멋진 세상에 태어날 수 있게 해주신 어머님께 감사드립니다."
수빈이 꽃다발을 높이 치켜들며 큰 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한편 그 시각. 플러스N과 메가박스를 소유하고 있는 센트럴 그룹 오정수 회장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 정지영은 TV로 '본격연예 한밤'을 보고 있었다.
정지영이 TV를 보다 중얼거렸다.
"어쩜 말도 잘하네."
자신 명의의 아파트 거실 소파에서, 분홍색 나이트가운을 입고 TV를 지켜보고 있던 정지영이 감탄 어린 얼굴로 계속 중얼거렸다.
"젊고 잘생긴 얼굴에 능력도 뛰어나고 몸도 좋고.. 거기에 말까지 잘하다니.. 완전 사기캐릭터인걸. 이러니 아림이 그년이 홀딱 넘어갔겠지."
정지영이 TV를 꺼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조양호 비서님. 저 정지영이에요."
[알고 있소. 부탁한 건 어떻게 돼가는 중이요?]
"제가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는 중이에요. 쇼박스와 플러스N 쪽은 처음부터 동의를 했습니다만, BJ 쪽에서 계속 시큰둥했었는데요. 며칠 새 기류가 바뀌었어요. BJ Ent.의 신임 회장께서 심기가 아주 불편하신 모양이에요."
[이태우 신임 회장 말이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얼마 전 BJ의 주식 배당금 분배가 있었죠. 주총도 있었고요. 거기서 신임 회장에 대한 비난이 많이 나왔나 봐요. 정미영 회장이 심혈을 기울여서 준비하던 영화도 엎었고, 구정 대목 때 달빛의 흥행몰이 여파로 제대로 재미를 못 봤으니까요.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봉순호 감독에 요 근래 화제 집중인 강수빈 주연이면.. 누가 봐도 대박 조합인데 신임 회장이 멍청하게 엎었다는 거죠."
[그때만 해도 달빛이 개봉도 하기 전이었던 걸로 아는데? 강수빈 그 새끼가 이렇게까지 뜰 줄은 아무도 예상 못했을 시점 아니오.]
"그런 걸 누가 신경쓰나요? 중요한 건 결과니까요. 그래서 BJ 쪽에서 강수빈에 대해 안 좋은 말들이 흘러나오고 있어요."
[그럼 BJ 쪽에서도 합류하겠다고 한 거요?]
"아직 결정은 안 되었지만, 조만간 실무진 쪽에서 '강수빈 죽이기'에 동참할 거 같아요. 강수빈 감독이 새로 찍고 있는 영화가 얼마 안 있어 개봉할 거예요. 그때 BJV와 메가박스에서 상영을 거부하고, 쇼박스와 BJ Ent. 그리고 플러스N에서 배급을 하지 않겠다고 나서면, 신작은 제대로 스크린에 걸어 보지도 못하고 말라죽을 겁니다. 나우는 당연히 대세를 따를테니까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그러니 조비서님이 회장님 아드님께 말씀 좀 잘해 주세요. 제가 오성식님을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뛰고 있다는 걸 말이죠."
[알겠소. 내가 잘 말해드리겠소.]
"병역 문제는 어떻게 돼가나요?"
[이삼일 내로 해결될 거요. 아마 일주일 정도면 한국으로 귀국할 수 있을 것 같소.]
"어머. 잘 됐네요. 그럼 한국으로 오시면 같이 식사나 하면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죠."
[그럽시다. 정비서가 수고가 많았소.]
"감사해요. 그럼 조비서님. 조만간 봬요."
통화가 끝나자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나긋나긋한 태도의 정지영은 사라져 버렸다. 독 오른 사갈(蛇蝎)과도 같은 표정으로 정지영이 내뱉었다.
"수고가 많았소? 나이도 어린 새끼가.. 자기가 모시는 후계자 백을 믿는다 이거지? 회장님에게 아들이 세명이나 된다는 걸 잊어버렸나 본데. 후계자라는 게 정식으로 왕관을 물려받기 전까지는 바람 앞의 등불이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네."
센트럴 그룹 오정수 회장의 내연녀이기도 한 정지영이 소파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저러다 후계자 구도에서 탈락하면 닭 쫓던 개가 될 텐데 말이야."
4월 25일 수요일
아침 일찍 거실 바닥에서 소주천을 하고 있던 수빈이 눈을 뜨며 뇌까렸다.
"벽곡단만 줄창 먹고 금식을 했더니, 내공 자체가 순수해지고 양도 제법 늘어났어. 이 상태라면 조만간 대주천에 도전할 수 있겠는데."
수빈이 일어나서 식탁으로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계속해서 단식을 할 수는 없지. 이번처럼 말도 안 되는 짓거리는 이번 인생에서 한 번으로 족하다고."
단식 기간 동안 축난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 충분히 식사를 한 수빈은 YK로 출근했다. 제1 녹음실로 올라가면서 수빈이 백성철에게 말했다.
"형. 당분간 하루 종일 영화 음악 작업에 매달려야 하니까, 특별히 급한 일 아니면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그래? 그럼 영화 편집 작업은 언제 하는 거야?"
"편집은 제가 쉴 때 미리 해둔 분량도 있고, 이미 머릿속에서 완성이 되어 있어서 나머지도 금방 해요. 지금 급한 건 영화 음악이에요. 건물 개관식까지 며칠 안 남아서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요. 계속 야근을 해야 할 거예요."
수빈의 말에 백성철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후. 그러다 수빈이 너 진짜 탈 나겠다. 도통 쉬지를 못하네."
"괜찮아요. 그리고 이번 영화만 스크린에 걸고 나면.. 다음 작품부터는 여유를 가지고 작업을 할 생각이에요. 저도 힘든 게 싫은 사람입니다."
"그래. 알았다. 아무도 방해 못하게 하마. 그 대신 밥때가 되면 내가 연락할 테니까, 그때는 녹음실에서 나와야 된다. 알았지?"
"알았어요. 형."
백성철과 헤어진 수빈은 마음이 급한지 빠른 걸음으로 제1 녹음실로 향했다.
4월 30일 월요일
수빈이 녹음실에 틀어박혀서 작업에 매진한지 벌써 5일이 흘렀다. 새로운 한주를 맞이해서 수빈은 아침부터 영화사 간부들과 회의를 하기 위해 수박 프로덕션으로 가는 길이었다.
한국에서 아침 9시가 막 넘어가는 무렵 수빈이 영화사에 막 도착할 때, 미국 LA에서는 오후 5시가 되어 서서히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LA 할리우드 거리에 있는 유명한 클럽 'Croco(크로코)'도 서서히 영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매일 유명한 디제이들이 공연이 펼쳐지는 클럽 크로코는, 내부 바와 외부 라운지 그리고 디제이들의 공연 무대와 댄스 플로어가 구비되어 있는 대형 클럽이었다. 실내 조명들이 하나둘씩 켜지고 종업원들이 열심히 개장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공연 무대 근처에서 두 명의 남자가 서성대고 있었다.
LA에서 유명한 클럽 디제이로 일하면서, 크로코에 매일 고정 출연하고 있는 제임스와 테일러였다. 이들 두 사람은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너도 들은 모양이야? 월요일부터 이렇게 일찍 클럽에 나온 거 보니.."
제임스의 물음에 테일러가 대답했다.
"당연히 들었지. 크로코 클럽 사장이 듣도 보도 못한 촌뜨기 디제이 하나를 영입해 왔다는 걸 말이야. 밥줄이 걸려있는데 신경 안 쓸 수가 없잖아?"
"후.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래. 뭐 좀 알고 있는 거 있냐? 사장이 전격적으로 영입해 왔다는 디제이 말이야. 혹시 젊고 잘빠진 게이인가? 사장 취향에 딱 맞는.."
"그런 쪽이 아니래. 내가 듣기로는 원래 직업이 작곡가였다고 하던데? 디제잉을 한지는 얼마 안 되었다고 들었어."
"테일러! 너 뭐 좀 들은 게 있구나? 혼자만 알지 말고 좀 풀어나 봐."
테일러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나도 자세히는 몰라. 사장이 휴스턴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그쪽 동네 클럽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디제이를 발견해서 스카우트 해왔다는 것 밖에는.. 조금만 기다려 보면 정체를 알 수 있겠지. 오늘이 데뷔 무대니까 예행연습을 하러 곧 모습을 보일 거야. 기다려 보자고."
"후. 어떤 놈인지 너무 궁금하군. 응? 저기 걸어오는 저놈 아닌가? 내가 모르는 놈인걸."
"맞는 거 같은데.. 나도 클럽에서 처음 보는 얼굴이야. 전형적인 샌님 타입인걸. 저런 놈이 디제잉을 한다고?"
"그러게 말이야. 일단.. 지켜보자고."
- 빰 빰 빰 빰 빠바밤 빠밤.
잠시 후 두 사람은 새로 스카우트되어 왔다는 디제이가, 공연 무대에서 예행연습을 하면서 트는 첫 번째 음악의 전주 부분을 듣다가 황당한 얼굴로 변했다.
"이 친숙한 전주는.. Viva la Vida? 내가 듣고 있는 게 맞는 거야?"
제임스의 말에 테일러가 대답했다.
"맞아. Viva la Vida.. 아무리 히트곡이라고 하지만, 음악에 있어서 가장 앞서나간다는 LA 클럽에서 11년 전 발표된 노래를 틀겠다고? 지금 제정신인가?"
디제이 두 사람의 당혹감 속에, LA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크로코 클럽의 플로어에 1998년 영국에서 결성된 얼터너티브 록 밴드 콜드플레이의 Viva la Vida의 전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