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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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3일 월요일
수빈은 월요일 영화 촬영분을 무사히 끝마치고 밤늦게 YK 사장실에 들렀다. 노크를 하고 사장실 안으로 들어서니, 박사장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수빈을 바라보았다.
훤칠한 키에 탄탄한 몸을 자랑하던 수빈은 온데간데없고, 비쩍 말라 바람이라도 강하게 불면 날아갈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영화가 사람을 잡는구먼. 괜찮나?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살만 좀 빠졌을 뿐 괜찮아요. 보기보다는 체력이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박사장이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내일이면 촬영이 모두 끝난다며?"
박사장의 질문에 수빈이 햇살처럼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내일 오전부터 반나절 임대한 청담동 매장에서의 촬영을 마지막으로 모든 촬영이 끝납니다. 아무리 늦어도 내일 점심쯤이면 제가 죽을 테니까.. 몇 시간만 더 버티면 이제 원 없이 먹을 수 있게 되는 거죠. 삼겹살, 치킨, 짜장면, 탕수육, 피자, 콜라.. 내일 저녁에는 배가 터지도록 먹을 생각입니다."
"자네가 이렇게 식탐을 보이는 건 처음 보는군. 힘들긴 힘든가 봐."
"두 번 다시는 이런 종류의 영화는 안 찍을 생각입니다. 근데.. 어쩐 일로 갑자기 보자고 하셨습니까?"
"SBC 방송국에서 YK 쪽으로 연락이 왔어. 원래는 영화사로 먼저 연락을 했었는데.. 그쪽이 촬영 때문에 바빠서 제대로 응답을 안 해주는가 보더라고. 그래서 나보고 도와달라고 연락을 했더군."
수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SBC에서 뭘 도와달라는 겁니까?"
"저번 주에 끝난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서, 강이사가 올해의 신인 감독상을 수상했지 않은가? 촬영 때문에 바쁜 와중에서도 강이사가 미국까지 직접 다녀오기도 했었고.. 그래서 자료 영상을 좀 받을 수 있을는지 물어보더군. '본격연예 한밤'에서 독점으로 영상을 내보내고 싶다고 말이야."
"의외네요. 샌프란시스코 영화제는 국내에서 별 관심이 없는 영화제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신인감독상은 한 해에 10명씩 무더기로 마구 퍼주는 상이라 대단한 상도 아니고요. 상금도 딸랑 만 달러에 불과해서, 경비로 쓰고 나니 남는 것도 없더군요. 방송국에서 갑자기 그런 영화제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뭐죠?"
"다른 이유가 뭐가 있겠나? 요즘 가장 핫한 강이사 자네 관련 소식이니까 그런 거지. 상이 중요한 게 아니라 받은 사람이 누구냐가 중요한 거라고."
"흠. 알겠습니다. '본격연예 한밤'이 일전에 달빛 때 도움을 준 적도 있고, 지금 찍는 영화의 홍보도 될 테니까 영상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제가 미국 갈 때 박상민 지원팀장이 동행했으니까.. 신인감독상 수상할 때 찍은 영상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별로 볼만한 게 없을 거예요. 샌프란시스코 영화제는 아카데미나 깐느처럼 수상식이 거창하지 않습니다. 그냥 영화관 복도에서 사람 몇 명 모아놓고 수상식을 하는 거라서요."
"그런 영화제에 강이사는 왜 간 건가? 원래 참석 안 하기로 하지 않았나?"
"네. 안 갈려고 했었죠. 그랬는데.. 거기 조직위원회에 '짐 자무시' 감독이 있습니다. 그 양반이 날 만나고 싶다고 하도 졸라대서요. 키는 나보다도 더 큰 양반이 말이 얼마나 많은지.. 전화기를 붙들고 1시간 가까이 통화를 하다가 결국 제가 승낙을 했습니다. 뭐 알고 지내면 나중에 미국으로 진출할 때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해서.. 어쩔 수 없이 다녀왔습니다."
"그래서? 도움이 될거 같던가?"
"일단 이번 영화의 영화 음악을 녹음할 때, 필요하다면 자신이 뉴욕 필을 소개해주겠다고 하더군요. 싼 가격에 말이죠. 자신이 멤버쉽 회원이라나 뭐라나.. 그리고 다음 작품은 미국에서 개봉을 꼭 해달라는 부탁도 받았습니다. 달빛은 훌루에 이미 올라가서 미국에서 개봉을 할 수 없으니까요. 계약 조건상 불가능 합니다. 지금 찍는 작품의 미국 개봉을 위해서 자기가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 말은 하는데.. 그때가 되봐야 아는거죠."
"좋은 소식이군. 그럼 그 대단한 뉴욕 필과 함께 영화 음악 작업을 하게 되는건가?"
"아뇨. 아마 달빛의 영화 음악이 클래식 위주라서 그런 제안을 한것 같은데.. 이번 영화는 한국 노래 위주로 작업을 할거라서요. 다음 기회에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아쉽군. 만약 한다고 그러면 나도 뉴욕으로 구경이나 가볼까 했었는데.."
"다음 기회에 하게 되면 제가 꼭 초청해 드리죠. 다른 안건은 없으신가요?"
"이런.. 내가 힘든 사람을 너무 오래 잡아놨군. 미안하네. 빨리 가서 쉬게나."
"알겠습니다. 사장님. 내일 이후로는 이제 여유가 좀 나니까.. 자주 들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세. 내일 있는 마지막 촬영도 잘 하게나."
수빈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사장실을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4월 24일 화요일
청담동 명품거리에 있는 '라보엠' 웨딩드레스 샆.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처럼 영화 속의 수빈이 영원한 잠 속으로 빠져들어갈 촬영 장소였다.
값비싼 실내 장식에 천장에 걸려있는 샹들리에 불빛을 받아 사방에 걸려있는 순백의 웨딩드레스들이 아름다움을 서로 뽐내고 있었고, 한가운데 위치한 둥그런 무대를 감싸고 있는 하얀색 레이스 커튼이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촬영 준비를 하느라 수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정신이 없었다. 곳곳에 켜져 있는 눈부신 조명 속에서 박시후 영상팀장이 시도 때도 없이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다.
- 시간 없어. 빨리빨리 움직여. 여기 반나절 빌리는데 돈이 얼만 줄 알아?
- 조명. 있는 데로 다 때려 부어. 여기가 천국인 것처럼 눈이 부시게 만들라고.
- 소품팀. 김수호랑 정윤아 의상 다시 한번 확인해 봐. 특히 정윤아 드레스에 먼지 한올, 얼룩 한 점이라도 있으면 작살날 줄 알아.
- 음향팀. 촬영 때 드레스 옷자락 스치는 소리까지 다 잡을 수 있도록,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해주세요.
시간이 흘러 분장을 끝낸 수빈이 촬영 현장을 확인하러 들렀다. 병색이 완연하다 못해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의 수빈이 검은색 웨딩 보타이에 숄더 라펠 형태의 회색 턱시도를 입고 있었다. 지나치게 마른 몸매로 턱시도가 헐렁거려서, 누가 보더라도 안쓰러워 보이는 수빈이 박팀장에 말을 건넸다.
"준비가 잘되어 가나요?"
"네. 대표님. 원샷에 끝낼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연기자들이 감정 잡기 힘든 신이라 한 번에 끝내는 게 좋습니다. 이따가 영상을 확인한 다음, 모자라는 부분들은 따로 단독 샷을 따면 됩니다. 그러니 이번 신만큼은 원테이크에 끝냈으면 좋겠네요."
"네. 대표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주인공들은 도착을 했나요?"
"네. 아침 일찍 도착을 해서 지금 2시간이 넘게 분장을 받고 있습니다. 다들 마지막 신이다 보니.. 예민함이 장난 아닙니다. 분장이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다시 하느라..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습니다."
"여배우들인데 그 정도는 이해해 줘야죠."
그때 갑자기 촬영 현장 여기저기에서 '휘유'하는 휘파람 소리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어깨가 훤히 파이고 소매까지 시스루로 처리되어 있는 머메이드 스타일의 순백색 웨딩드레스를 입은 김샛별과 신부 들러리처럼 푸른색의 밝은 파스텔 톤의 원피스를 입은 하이유가 풀 메이크업을 하고선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둘 다 너무나 아름답군요."
수빈의 중얼거림에 박팀장이 맞장구를 쳤다.
"촬영을 시작한 이래로 오늘이 최고로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수빈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기다린 보람이 있군요. 그럼 아름다운 숙녀분들을 모시고 대장정의 마무리를 멋지게 지어 볼까요?"
"네. 최종 점검을 하고 바로 슛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후 촬영이 시작되었다.
생기라고는 일절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휠체어에 기대어 앉은 수빈의 고개가 자꾸만 옆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때마다 하이유가 휠체어의 뒤에서 수빈의 고개를 바로 세우고 있었다, 하이유가 금방이라도 울듯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조금만 참아.. 오빠 힘든 거 알아.. 이제 조금만 참으면 보내줄 테니까.. 지금은 제발 조금만 버텨줘.."
수빈의 고개가 다시 천천히 기울어져 갔다. 하이유가 다시 세웠지만 금방 다시 기울어져 갔다. 그러자 하이유가 급하게 수빈의 뺨을 두드리며 미친년처럼 소리를 쳤다.
"정신 차려. 오빠. 제발 정신 차리라고.. 야 이 새끼야. 이렇게 떠나면 그만이야? 나랑 윤아는 어떡하라고..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좀만 더 버티라고.. 제발.. 오빠!"
그 순간 수빈의 눈이 천천히 떠지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미안.. 잠시.. 꿈을 꿨어. 천국에서.."
그때 차르르 하는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둥근 무대를 감싸고 있던 하얀색 레이스 장식의 커튼이 걷어지기 시작했다.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조명 속에 김샛별이 아름다운 순백색 웨딩드레스를 입고, 입가에는 더없이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등장하였다.
수빈과 김샛별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수빈이 입꼬리를 올리며 밝게 웃었다. 하이유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신부.. 너무 예쁘지?"
"아아. 예뻐. 마치.. 천사 같아.. 아까 본 게 천국이 맞나 봐.."
"우리 오빠 억울해서 어떡해.. 저렇게 아름다운 신부를 두고.. 흑흑.."
하이유가 서럽게 울기 시작할 때, 수빈이 자꾸만 감겨져 가는 눈을 다시 힘겹게 뜨며 김샛별을 바라보았다. 수빈이 처연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미안..해.. 부디.. 날 용서해..줘.."
수빈이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김샛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듯 천장을 한번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아아.. 죽기 정말 싫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수빈의 고개가 힘없이 앞으로 툭 떨어졌다. 하이유가 수빈의 뒤에서 수빈을 어깨를 힘껏 끌어안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김샛별이 수빈에게 천천히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천천히 수빈의 무릎 위에 얼굴을 묻은 김샛별이 독백을 하기 시작하였다.
"오빠. 사랑해요. 이제 그만.. 편히 쉬세요.. 내 사랑.. 흑.. 흐흑.."
예정된 독백이 끝나자 김샛별이 미친 듯이 울기 시작하였다. 두 여인의 울음 속에 휠체어 밖으로 내민 수빈의 손이 힘없이 덜렁거렸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한참을 울고 있을 때, 박팀장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커트.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커트 소리가 들렸지만 촬영 현장에서 움직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죽기 싫다' 마지막 촬영이 끝이 났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수빈은 거실에서 양념치킨과 프라이드치킨 두 마리를 시켜놓고서 열심히 먹고 있었다. 잠시 후 TV에서 '본격연예 한밤'이 시작되었다.
양념과 기름 범벅이 되어있는 손가락을 물티슈로 닦으면서 수빈은 TV 화면에 집중했다.
"오늘 틀어준다고 그랬지? 어디 내 수상 소식을 어떤 식으로 방송하는지 한번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