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182화 (182/236)

#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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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일 화요일

전날 밤부터 봄비가 거하게 내리더니, 날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그칠 줄을 모르고 있었다.

여태껏 별 탈 없이 순조롭게 영화 촬영을 진행해 나가던 수빈은, 당일 계획되어 있던 야외 촬영을 전면 취소하고 제작진 전원에게 하루 휴가를 주었다. 오래간만에 맞이한 망중한을 즐기지도 못하고 수빈은 YK 사옥으로 나갔다.

과도한 체중 감량으로 뺨이 홀쭉해지고 피골이 상접해진 수빈은, YK 사옥에 있는 자신의 방에서 회사 사람들이 무더기로 제출한 음악을 듣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 테이블에 발을 올린 채, 눈을 살포시 감고 음악 감상 중이던 수빈은 노크 소리에 눈을 떴다.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이사실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입장을 하였다.

마빈을 발견한 수빈이 음악을 중지시키며 말했다.

"어서 와라. 마빈. 일은 잘 해결된 거냐?"

마빈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딴소리를 하였다.

"너..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한 달 새 반쪽이 되어 있는데.."

"아. 이거. 지금 한참 항암 치료 중이라서.."

마빈의 눈동자가 좌우로 급격히 흔들리자 수빈이 말을 덧붙였다.

"영화 말이다. 영화.. 팬미팅 때 들어서 알고 있잖아?"

"그때 들어서 알고는 있었는데.. 그 얼굴로 그런 소리를 하니 진짜 같아서 말이지. 알고도 놀라게 되네."

"일은 잘 해결된 거야?"

수빈의 거듭되는 질문에 마빈이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결정 났다. 다른 건 다 포기하고.. 방송, 신문, 잡지 같은 미디어 계통의 사업만 내가 물려받기로 했어. 거기에 현금 유통이 괜찮은 업체 하나를 끼워 주겠다고 하더군. 다 합쳐봐야 자동차나 건설 같은 주력 업체의 반에 반도 안되겠지만.."

"마빈. 네가 그런 주력 업체를 물려받겠다고 나서면, 당장 네 목숨이 위태로울 거다."

"알아. 그래서 네 충고대로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를 모셔 놓고, 그 두 사람 앞에서 주력 업체는 포기하겠다고 선언했어. 그리고 그런 업체들이 내 적성에 맞지도 않을 거 같고.. 그래서 유학을 가면 미디어 쪽으로 열심히 공부할 거다. 귀국해서 제대로 한번 키워보려고.. 도와줄 거지?"

"그래. 내가 얼마나 도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힘닿는 대로 도와주마."

"고맙다. 친구. 그리고.. BBG에서 퇴출시키지 않고 끝까지 남게 해준 것도 고맙고."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마빈에게 수빈이 부드럽게 말했다.

"마빈. 명색이 내가 YK 등기 이사야. 전체 주식의 15프로를 가지고 있는 대주주라고. 소속 연예인 계약 하나도 맘대로 못해서야 되겠냐? 언제라도 다 같이 모여서 놀 수 있으니까 걱정 말라고. 넌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거야. 미국에는 언제 출발하냐?"

"오늘 저녁 8시에 LA로 출발한다. 방송 쪽으로는 UCLA가 알아주더라고."

수빈이 놀란 어투로 말했다.

"뭐? 그렇게 빨리?"

"하루라도 빨리 가야 하루라도 빨리 돌아오지. 배웅은 나오지 마라. 나 혼자 조용히 출국하고 싶으니까."

수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배웅 가면 엉엉 울까 봐 그러는 건 아니고?"

"웃기고 있네. 내가 울긴 왜 우냐? 그리고.. 그 얼굴로 어딜 오겠다는 거야?"

마빈이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말했다.

"미국에 무사히 도착하면 연락하마. 그리고 너도 몸조심 해라. 그때 팬미팅 때 한말처럼 널 노리고 있는 세력이 있다면, 아무리 너라도 조심해야지.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복수는 내가 꼭 해주마."

수빈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답했다.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날려고 그러네. 너나 조심해. 예로부터 있는 사람들이 더 지독한 법이야. 미디어 쪽도 안 넘겨주려고 수작을 부릴 수도 있으니까."

"할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동안은 그러지 못할 거다. 그 사이에 나도 최대한 빨리 자리를 잡아야지. 다음에 또 보자. 친구."

"그래. 친구."

수빈은 이사실 문을 나서는 마빈의 등을 쓸쓸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그새 나도 정이 많이 들었나 본데. 괜히 울적해지는 거 보니.."

고개를 몇 번 흔든 수빈은 다시 음악을 틀고 집중해서 듣기 시작했다.

4월 2일 월요일

오소라와 최성미가 샌프란시스코 국제 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떠났다. 필름 마켓을 자세히 둘러보기 위해 원래의 일정보다 하루 일찍 떠난 것이다.

4월 17일 화요일

2월 12일에 크랭크인 된 '나는 죽기 싫다' 촬영이 벌써 3개월이 넘게 진행되고 있었다. 수빈은 오늘도 변함없이 종반으로 접어든 촬영에 가일층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페스 단말기를 착용한 수빈이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신 No. 83. 병원 세트에서 하는 마지막 촬영입니다. 오늘 촬영이 끝나고 나면, 주인공의 집에서 하는 촬영과 나머지 야외 촬영만 하면 모든 촬영이 끝이 납니다. 제가 출장 갔다 와서, 또다시 병원 세트를 이용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다들 집중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네. 대표님.]

[염려 마세요. 대표님.]

잠시 후 촬영이 시작되었다.

칙칙한 형광등 불빛 아래 반은 푸르고 반은 하얀색 벽으로 둘러싸인 병원 입원실의 침대.

줄무늬로 된 환자 복을 입고서 얼굴이 가죽만 남아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수빈이, 새하얀 시트에 몸을 반쯤 묻은 채 비스듬히 일으켜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낡은 구두를 침대 밑에 벗어두고, 값비싸 보이는 꿀단지를 조심스럽게 들고서, 침대에 올라앉아 양반다리를 하고 있는 성강호의 모습이 보였다.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의 수빈이 성강호와 실랑이 중이었다. 삼 년 가뭄 끝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져 있는 목소리로 수빈이 힘없이 말했다.

"아버지.. 쿨럭. 아. 목..아파. 아버지. 제발.. 그러지 마세요.. 의사.. 선생님 말 못 들었어요? 가망이 없다..잖아요. 이러는 건 괜히 돈만.. 날리는 거예요. 그게 어떻게 번.. 컥컥. 번 돈인데.."

그러자 흥분한 성강호가 피처럼 붉은 얼굴로 목에 핏대를 잔뜩 세우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비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무슨 개소리야! 의사 지가 뭔데? 응? 지가 뭔데? 지가 뭔데 가망이 있니 없니 개소리를 쳐씨불이는 거야? 의사가 신이야? 사람 목숨이 얼마나 질긴 건데.. 지들이 뭘 안다고 떠들어. 떠들긴.."

성강호가 몇 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킨 다음 말했다.

"자자. 아들. 이거 한술만 먹어봐. 환자는 일단 잘 먹고 봐야 되는 거야. 그리고.. 옛날부터 목 아픈 데는 꿀이랑 도라지가 최고라고 했어.. 이거 내가.. 산청까지 직접 가서 힘들게 구한 거니까.. 어여.. 어여 먹어봐."

수빈이 거죽만 남은 얼굴로 힘없이 웃더니, 못 이기는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성강호가 기쁜 얼굴로 꿀단지 뚜껑을 열더니, 조그마한 티스푼으로 조심스럽게 꿀을 조금 떠서 수빈의 입가로 내밀었다. 수빈이 힘겨운 몸짓으로 꿀을 받아먹었다. 수빈이 창백하다 못해 푸르뎅뎅한 입술로 몇 번 오물거리더니, 곧바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컥.. 커억.. 아.. 목이.. 목이 넘 아파요."

수빈의 입술 밖으로 꿀과 침이 섞여 질질 흘러내리자, 성강호가 황급히 자신의 손으로 수빈의 입을 정성스럽게 닦아주었다, 얌전히 성강호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던 수빈이 좀 전보다 더 갈라져 금방이라도 피를 토할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커억.. 아버..지.. 나 이제.. 정말 죽는가 봐. 한.. 모금도.. 쿨럭. 목구멍으로.. 캑캑.. 못 넘기겠..어."

수빈의 말에 북받치는 감정을 못 이긴 성강호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같은 말을 끝없이 반복하기 시작했다.

"걱정 마라. 걱정 마. 넌 안 죽는다. 암. 안 죽어. 절대 안 죽어. 암. 안 죽고 말고. 무슨 일이 있어도 안 죽는겨.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넌 안 죽어. 암. 그렇고말고.."

눈가가 시뻘게진 성강호가 수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죽어도.. 내가 먼저 죽는 거야. 그게 순리야. 내 아들.."

성강호의 진심이 느껴지는 말에 수빈의 눈가가 붉어지며 말했다.

"아..버..지.."

"그래. 말해. 아들.. 뭘 더 사다 줄까? 뭐든지 말만 해라. 뭐가 먹고 싶어? 환자는 무조건 잘 먹어야 되는 거여.. 뭐든. 이 아버지가 땅끝이라도 쫓아가서 사 오마."

수빈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흐르기 시작했다.

"아버.. 아빠.. 아빠. 나 정말 죽기 싫어. 흑흑. 죽기 싫다고.. 살고 싶어. 쿨럭. 아빠. 나 좀.. 쿨럭. 나 좀.. 제발 나 좀.. 살려줘. 커억. 아빠. 나 정말 죽기 싫어.."

성강호가 들고 있던 꿀단지를 내려놓고, 서럽게 울고 있는 수빈을 와락 부둥켜안았다. 수빈의 통곡을 들으며, 성강호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결의에 찬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걱정 마라. 아들. 니놈이 죽기는 왜 죽어. 이 아빠만 믿어. 알았지? 이 아빠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낼 거야. 어떤 일이 있어도 살려낼 거니까 걱정 마라."

"아빠. 그래요. 나 좀.. 나 좀 제발.. 살려주세요. 어흑흑.. 쿨럭. 쿨럭."

수빈의 기침이 심해지더니 갑자기 목에서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우웨엑.. 쿨럭. 헉헉. 우엑. 쿨럭. 쿨럭. 우에엑.."

그 모습을 본 성강호가 대경실색한 얼굴로 수빈을 향해 고함을 쳤다.

"아들! 아들.. 아들.. 아들!"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도 수빈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성강호가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바닥으로 뛰어내리렸다. 신발도 신지 않은 성강호가 병실 밖으로 달려가면서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의사! 의사! 의사 새끼 어디 갔어? 야이 개새끼들아. 의사 어디 갔냐고! 당장 의사 데려와!"

멀리서 성강호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릴 때, 병원 침대에 모로 기대어 있든 수빈이 서서히 옆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끝내 의식을 잃고만 수빈이 뼈만 앙상한 팔을 침대 밖으로 떨어뜨리며 힘없이 쓰러져 버렸다.

수빈이 쓰러진 그 상태에서 3초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박시후 영상팀장의 힘찬 목소리가 세트장에 울려 퍼졌다.

- 커트! 좋았습니다!

그 순간 촬영장이 울음바다가 돼버렸다.

- 아. 진짜. 훌쩍. 겨우 이 악물고 참았네.

- 흐흑. 아. 둘 다 연기 진짜 대박이다.

- 엉엉. 대표님. 제발 죽지 마세요.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온 수빈이 입술에 묻은 가짜 피를 닦으면서 페스 단말기를 받아들 때, 몇 발자국 앞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두 명의 여인을 발견하였다.

서로 손을 꼭 붙잡고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하이유와 김샛별에게 다가간 수빈이 말을 걸었다.

"촬영 준비 안 하십니까? 다음 신이 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두 사람이 병실 밖에서 대화를 나누다 극적으로 화해를 하는 신일 텐데요."

수빈의 물음에 가을 독사처럼 독이 바짝 오른 눈빛의 하이유가 거칠게 대답했다.

"절대 안 질 거예요. 감독님 연기에 절대 지지 않을 거라고요."

깁샛별도 덩달아 독기 오른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요. 그 정도 연기는 우리들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요."

수빈을 향해 마치 선전포고를 하듯 내뱉은 두 사람이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분장을 받으러 떠나자,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수빈이 중얼거렸다.

"그럼 저야 더없이 좋죠."

잠시 후 페스 단말기로 방금 전 찍은 영상을 확인한 수빈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바로 신 84 찍겠습니다. 빨리 준비를 끝내주세요. 오늘 중으로 병원 세트 신을 다 찍어야 합니다. 서두르세요."

- 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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