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180화 (180/236)

#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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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실에 도착한 수빈의 눈에 연습생들을 담당하고 있는 댄스 트레이너 박송희와 보컬 트레이너 이진희의 모습이 보였다. 그 외에도 현재 배우 팀과 가수 팀을 담당하고 있는 팀장 및 실장들의 모습도 보였다. 심지어는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YK 소속의 유명 배우들과 가수들의 매니저들도 여러 명 참석하고 있었다.

잠시 후 20여 명이 넘게 모여있는 사람들 앞에 선 수빈은, 안면이 있는 사람들과 간단하게 목례로 인사를 주고받은 후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YK에서 이사직을 맡고 있는 강수빈입니다. 다들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시라고 해서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모여 계시네요. 여러분들이 저에게 원하는 게 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제일이 바쁘다 보니, 일일이 개별적으로 만나서 사정을 들어드릴 수가 없다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다들 모여 계실 때 제가 공지를 좀 할까 합니다. 공지 내용은 분야를 음악과 영화로 나누어서 해드릴 생각입니다. 그럼 먼저 음악과 관련한 공지 사항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수빈이 사람들을 둘러본 후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 중에 YK에 몸을 담은 사람으로서 가수를 꿈꾸고 계시거나, 이미 가수 활동을 하고 계시는 분들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지금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는 건 말씀 안 드려도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한 달 후! 그러니까.. 3월 중순부터는 제가 지금 찍고 있는 영화의 음악 작업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그때까지 본인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곡을 1곡 준비하셨다가, 제가 사내 공지를 띄우면 제 방으로 오셔서 제출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중에 좋은 곡이 있다면, 제가 편곡 작업을 성심성의껏 해서 영화에 삽입곡으로 넣겠습니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고를 테니, 기존 가수든 데뷔를 준비하는 연습생이든 상관없습니다. 간단한 내용이니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를 하셨을 겁니다. 혹시 질문 있으면 받겠습니다."

사람들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잠시 후 모여있는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질문을 하였다.

- 반드시 자작곡 이어야 하나요?

"자작곡이든 누군가에게 받은 곡이든 상관없습니다. 단, 본인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곡 1곡만을 제출하시길 바랍니다. 스스로 자신이 없어하는 곡까지 들어줄 만한 시간이 제게는 없으니까요."

- 지금 아이돌 데뷔를 준비하고 있는 나이가 어린 친구들의 곡들도 받습니까?"

"물론입니다. 아까 말씀드렸잖습니까? 연습생이어도 상관없다고요. 물론 나이가 어리면 아직까지는 곡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좀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곡만 좋다면, 세기나 테크닉이 부족한 부분들은 제가 메워드리겠습니다. 저작권도 당연히 인정해 드릴 겁니다."

- 가창력은 안 보나요?

"네. 안 봅니다. 그런 부분은 보컬 선생님이 잘 지도해 주실 거라고 믿기 때문에, 전 상관하지 않습니다. 제가 관심을 두는 건 제가 곡을 들었을 때, 좋으냐 나쁘냐 딱 그거 하나입니다. 만약 좋다고 느껴지면.. 제가 시간을 얼마든지 할애해서 앨범 작업까지 해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가창력 따위는 상관없이요."

가창력과 무관하게 곡이 좋으면 앨범까지 내주겠다는 수빈의 답변이 끝나자,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지켜보던 수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영화 쪽 관련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쉽게도.. 지금 찍고 있는 영화에는 남은 배역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음 차기작이 들어갈 때쯤, 미리 사내 공지를 띄우겠습니다. 그런 후 YK에 소속되어 있는 분들이 우선적으로 오디션을 볼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어려운 내용이 전혀 없죠? 질문 있으면 받겠습니다."

- 차기작이 들어가는 게 언제쯤일지 알 수 있을까요?

"아마 6월쯤 작품 선택이 끝나고, 준비작업이 시작될 겁니다. 늦어도 7월 이내에는 오디션을 볼 생각입니다."

- 꼭 직업이 배우여만 합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배우분들이 보시는 게 유리하겠죠? 연기력에 관련해서는 제 기준이 상당히 높은 편이라서요."

- 하지만 하이유도 이번 영화의 주연으로 찍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수빈은 연습실에 온 이후 처음으로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지금 촬영하고 있는 영화가 개봉한 뒤에.. 내가 하이유 정도의 연기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하시는 분은, 가수든 연기자든 개그맨이든 상관없습니다. 직업에 상관없이 얼마든지 지원하시면 되겠습니다."

잠시 시간을 둔 후 수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질문이 없으시면 다들 이해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별도로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제 비서에게 연락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애꿎은 사장님은 그만 괴롭히시고요. 그럼 다음에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수빈은 빠른 걸음으로 연습실을 나와서 다시 사장실로 올라갔다.

잠시 후 소파에 마주 앉은 박사장이 말했다.

"조금 전에 미국에 있는 김사장하고 통화했네. 내일 오후에 조부장이 미국으로 출장 갈 거라고 말해놨어. 미리 준비 해놓고 있겠다고 하더군."

"수고하셨습니다. 다른 말씀은 없으시던가요?"

"뭐 매번 똑같은 말이지. 나머지도 빨리 가져가라고 재촉하더군. 더 늦어지면 시세보다 비싼 가격으로 주식을 팔겠다고 엄포를 놓으면서 말이야."

"그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일단 올해 중으로 내가 책임지고 5프로를 더 인수하기로 했네. 나머지 10프로는 강이사가 올해 중으로 인수할 거라고 말했지. 그럼 나랑 강이사가 각각 25프로씩 해서 50프로를 가지게 되는 셈이야. 이제는 그 누구도 우릴 방해할 수 없다네."

"좋은 소식이긴 한데.. 제가 올해 중으로 남은 10프로를 인수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후아. 10프로면 500억이 넘을 건데.. 이것 참. 부지런히 벌어야겠는데요."

"지금 찍고 있는 영화가 대박 나면 간단한 문제 아닌가?"

박사장의 말에 수빈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영화로 돈 버는 게 그렇게 쉬우면 누구나 다 영화에 투자하겠죠."

"자네한테는 쉬워 보이던데? 아닌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신도 아니고.. 뚜껑은 열어봐야 아는 거죠."

"정말 그럴까? 옆에서 지켜보는 나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던데. 뭐 좋네.. 회사 일들은 잘 해결된 건가?"

"네. 잘 해결했습니다. 먹음직스러운 떡밥을 왕창 던져 놨으니.. 당분간은 저나 사장님을 괴롭히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좋아. 이제야 내가 편히 좀 지내겠군. 고생했네. 강이사. 그러니 앞으로는 자주 좀 들러라고. 이런 일이 생기기 전에 말이야."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리고 다음 달에 KBC 사장이 바뀐다더군. 일전에 말한 대로 KBS 오사장을 사외 이사로 발령을 내서, 매달 월급 형식으로 입금해주면 되는 거지?"

"네. 회사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못하게 하시고요. 뭐라 헛소리하면 자른다고 하세요. 그럼 찍소리 못할 겁니다. 어차피 돈이 전부인 작자니까요."

"알겠네. 내가 알아서 잘 처리하도록 하지. 오늘 고생했어."

"네. 사장님. 이만 가보겠습니다. 앞으로는 자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야지. 잊지 말게나. YK는 자네 회사야. 내께 아니라고. 언젠가는 영화사와 합쳐지겠지만, 그전에라도 최대한 회사의 덩치를 키워놔야지. 그래야 자네의 꿈이 한발이라도 가까워질 거 아닌가? 아시아 최고의 연예 기획사와 아시아 최고의 영화사를 동시에 소유하고 있는 젊은 천재 영화감독. 그 정도 명함은 되어야 할리우드와 제대로 붙어볼 수 있지 않겠나? 나는 그 모습을 보는 게 꿈인 사람이라고. 빨리 보여주게나.."

박사장의 격려 섞인 타박에 수빈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앞으로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수빈은 YK를 나와 집으로 향했다.

영화 촬영을 하며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2월 15일부터 17일까지 수빈은 집에서 드라마 작업에 매진하면서 구정 명절을 보냈고, 18일에는 예정된 팬미팅을 무사히 치렀다.

날이 가면 갈수록 촬영 스태프들의 손발이 들어 맞고, 최첨단 시스템인 페스 시스템에 익숙해지면서 촬영 스피드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애초에 작성한 타임 테이블보다 무려 일주일이나 빠른, 2월 28일에 수빈은 YK에서 발병 신을 찍고 있었다.

2월 28일 수요일

YK A&R 팀 전용 녹음실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여기저기 눈부신 조명들이 켜져 있었고. 곳곳에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녹음실 콘솔 박스 앞에 앉아 있는 조민석이 긴장한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한쪽 편에서는 핏이 딱 떨어지는 하얀색 와이셔츠에 검은색 슈트 바지를 착장하고 있는 수빈이, 페스 단말기를 쓴 채로 빠르게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지금 1번 롱 사이드, 2번 투 샷, 3번 웨이스트, 4번 클로즈업 카메라와 5번 부감 카메라가 같이 찍을 겁니다. 혹시 걸리는 곳이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 좀 해봅시다. 김종호 팀장?"

[네. 대표님.]

"좀 전에 찍은 시험 영상을 제가 말한 순서대로 짧게 짧게 띄워봐 주세요."

[알겠습니다.]

잠시 후 영상을 확인 한 수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 눈에는 서로 걸리는 곳이 없습니다. 팀장들 중에 혹시 거슬리는 게 있으신 분?"

[조명팀입니다. 부감은 조명을 따로 쏴야 할 것 같은데요. 화면이 조금 어둡습니다.]

"그래요? 최팀장님. 그럼 일단 부감샷을 같이 찍고, 제가 가편집을 한 후에 부감에서 필요한 장면만 따로 따든지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다른 팀들은 이상 없습니까?"

[소품팀입니다. 대표님 피 주머니는 이상 없나요?]

"네. 이상 없습니다."

[그럼 소품팀은 이상 없습니다.]

"다른 팀은요?"

[영상팀. 이상무.]

[음향팀. 이상 없습니다.]

[지원팀. 이상 없습니다.]

[조명팀. 부감 말고는 이상 없습니다.]

[소품팀. 이상 없어요.]

[페스팀. 이상 없습니다.]

"그럼 이 상태로 바로 찍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이번 신 촬영이 끝나면 제가 체중 감량을 해야 돼서 사흘간 휴식입니다. 그런 만큼 마지막까지 집중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다들 자기 자리에 스탠바이 해주세요."

수빈은 페스 단말기를 벗고 머리와 분장을 가볍게 손질한 후, 콘솔박스에 있는 의자 쪽으로 걸어갔다. 수빈은 바짝 얼어있는 조민석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민석씨?"

"네. 이사님."

"갑자기 왜 이렇게 긴장하세요? 좀 전까지 다른 신들은 이상 없이 잘 찍었잖아요. 마지막 신이라서 긴장이 되는 건가요?"

"저기.. 앞에 신들은 대사가 전혀 없었잖습니까? 지금은 대사가 있어서.. 자꾸 긴장이 됩니다."

"아. 제가 레베카 목 상태가 안 좋다고 더블링을 주문할 때, 절 보면서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그 대사요?"

"...네."

수빈이 부드럽게 웃으면서 조민석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긴장할 필요 없습니다. 그냥 평상시처럼 저랑 같이 앨범 녹음한다고 생각하세요. 영 어색하면 제가 편집 때 자르면 되니까, 그렇게 예민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절대로 자르면 안 되는데요. 이사님."

"응? 왜요?"

조민석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어제 집에다 오늘 영화 촬영하는데, 대사까지 있다고 제가 자랑을 잔뜩 해놔서요."

수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더욱더 명연기를 보여 주셔야겠네요. 긴장 푸시고 카메라가 없다고 생각하세요. 정 힘들면 다른 건 보지 마시고, 제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보시면 됩니다. 아시겠죠?"

"네. 알겠습니다."

수빈이 의자에 앉으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신 21. 주인공 김수호가 발병하는 첫 신입니다. 원테이크로 갈 테니까 다들 긴장해주세요. 스탠바이. 레디~. 액션."

수빈의 얼굴이 확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잔뜩 찌푸린 얼굴의 수빈이 마이크 스위치를 올렸다.

"레베카. 신곡 녹음하는데 목 상태가 왜 이따위야? 가수는 목소리가 생명이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처먹겠냐?"

마음속으로 시간을 재던 수빈이 다시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뭐야?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고 있는 거야? 행사는 중요하고 녹음은 안 중요해?"

몇 초후 수빈이 성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그래. 돈 많이 벌어라. 목 그렇게 관리하다간 언젠가 작살 날 거다. 잠깐 대기하고 있어."

마이크 전원을 내린 수빈이 짜증이 가득한 얼굴과 목소리로 조민석을 바라보며 대사를 치기 시작했다.

"민석씨. 그냥은 도저히 안되겠다. 저년이 돈독이 단단히 올라서 녹음 전날까지 밤새 행사 뛰고 왔다네. 아무래도 더블링을 좀 빵빵하게 깔아야겠어. 아까 녹음한 테이크 중에서 그나마 내가 괜찮다고 한거 있지? 그거 6데시벨만 내려서 깔아줘 봐."

긴장이 어느 정도 풀렸는지 자연스러운 표정의 조민석이 대사를 받았다.

"네. 알겠습니다."

조민석이 콘솔 박스를 열심히 만지자, 수빈이 다시 마이크를 켰다.

"레베카. 다시 녹음할 테니 목소리에 집중해서 불러. 안 그러면.."

대사를 치며 수빈은 내공을 끌어올려 성대를 조금씩 조으기 시작했다.

"안 그러면 내가 그냥.. 어..라?"

그 순간 수빈의 목소리가 갑자기 갈라지기 시작했다.

"목이 갑자기 왜 이러지? 흠흠. 안 그러면 내가 그냥 두지.. 아. 갑자기 왜 이래?"

수빈의 목소리가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갈라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내가 목이 다 쉬었나 보네. 크흠."

쩍쩍 갈라져버린 목소리로 수빈이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레베카. 빨리 녹음 끝내고 쉬자. 나도 힘들다. 콜록. 콜록."

수빈이 마른 기침을 몇 번 내뱉더니,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듯 마이크 스위치를 꺼버렸다. 그리고 의자에서 급히 허리를 숙이며 격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콜록. 커억. 아. 갑자기 왜 이러지. 콜록. 컥. 커억.. 콜록. 우웨엑. 우웨엑."

수빈이 갑자기 입에서 새빨간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우웨엑. 우엑.. 컥. 우엑."

새하얀 와이셔츠와 콘솔 박스에 선홍색 피가 이리저리 튀며, 와이셔츠에 붉은색이 빠르게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손으로 입을 닦은 수빈이 초점이 나간 멍한 눈빛으로, 피로 붉게 물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정해진 대사를 치기 시작했다.

"이게 뭐지? 갑자기 이게 무슨.."

그 순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해 버렸다.

옆에서 놀란 토끼 눈이 된 조민석이 대경실색한 표정으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큰 소리로 외친 것이다.

"강이사님! 이사님!"

조민석이 황급히 수빈의 어깨를 붙들며 다급한 얼굴로 계속 외쳤다.

"이사님. 이사님. 괜찮으세요?"

그 순간 박시후 영상팀장의 분기탱천한 목소리가 녹음실에 울려 퍼졌다.

- NG! N~G.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그리고 거기서 갑자기 이사님을 찾으면 어떡해요!

NG 신호가 나자 수빈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살짝 웃으면서, 자신을 어깨를 꽉 붙들고 있는 조민석의 손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민석씨. 저 안 죽어요. 연깁니다. 연기. 이거 많이 놀라셨나 본데.."

그때야 정신이 들었는지 조민석이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더니, 민망함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 어쩌.. 어쩌죠? 제가 너.. 무 놀라서.. 놀라서 깜짝 놀라서.. 아. 죄송합니다. 이사님."

"괜찮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다시 찍으면 됩니다. 그만큼 제 연기가 좋았다는 거 아니겠어요?"

수빈이 차분하게 달래는 말에 조민석이 넋 나간 표정으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네. 너무 리얼해서.. 연기라는 걸 제가 깜박 잊고.. 아까 이사님이 이사님 얼굴만 쳐다보고 있으면 된다고 해서.. 그래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피가.. 선명한 붉은 피가 마구마구.. 아. 알고 있었는데.. 피가.. 대본을 읽어봐서 저도 알고 있었는데..연기라는 걸 알았는데.. 저도 모르게.."

수빈이 조민석의 어깨를 쓰다듬어며 안심을 시켰다.

"연기가 오늘이 처음이다 보니 많이 놀라셨나 봅니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NG 나는 건 현장에서 늘 있는 일이에요. 걱정할 필요도 없고, 자책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신경 쓰지 말고 잠시 쉬고 계세요."

그때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온 박시후 영상팀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표님. 의상을 예비 의상으로 갈아입고, 피 주머니도 새로 차셔야 하겠습니다. 분장을 다시 받은 다음에 새로 찍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전에.. 일단 찍은 영상부터 확인을 해봅시다."

박팀장이 눈짓을 하자 박상민 지원팀장이 황급히 페스 단말기를 들고 왔다. 단말기를 착용한 수빈이 말했다.

"김종호 팀장. 조금 전 찍었던 영상을 1번부터 순서대로 다 띄워 주세요."

[알겠습니다.]

잠시 후 영상을 다 살펴본 수빈이 말했다.

"4번 클로즈업 카메라 영상을 다시 띄워주세요."

[네. 대표님.]

수빈은 영상을 보며 머릿속으로 빠르게 편집을 하기 시작했다.

'이거 어쩌면.. 그냥 써먹을 수도 있겠는걸..'

"4번 영상을 슬로로 걸어줘요. 0.5배속으로요."

[네.]

"그래도 너무 빠르네요. 0.25로 다시 걸어봐요.

[네. 알겠습니다.]

"좋아요. 그 속도로 다시 한번 보여주세요."

[알겠습니다.]

수빈의 눈에 다급한 얼굴로 이사님을 거듭 외치면서, 자신을 붙드는 조민석의 얼굴이 슬로로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좋은데. 표정이 아주 살아 있어.'

"김팀장. 음소거로 다시 돌려봐요."

[음소거 말입니까?]

"네. 아무 소리도  안들리게요."

[네. 알겠습니다.]

수빈은 소리 없이 진행되는 영상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뇌까렸다.

'좋아. 편집으로 충분히 살릴 수 있겠어. 이사님이라고 외치는 소리야 지워버리고 음악으로 대체하면 될 거고.. 어쩌면 원래 바라던 영상보다 더 좋을 수도..'

"됐습니다."

[네. 대표님.]

수빈은 페스 단말기를 벗고, 피 주머니를 들고 있는 소품팀장과 와이셔츠를 들고 있는 지원팀장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거 다 필요 없습니다."

두 사람이 수빈의 말에 의아해 할 때, 수빈이 주위를 둘러보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촬영은 이걸로 종료하겠습니다. 재촬영은 필요 없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어요."

부지런히 재촬영을 준비하고 있던 스태프들이 의아해 할 때 수빈이 다시 외쳤다.

"지금 영상으로도 충분하니까.. 현장 정리 잘하시고 퇴근하세요. 다들 아시겠지만 내일부터 3일간은 휴식입니다. 다들 3월 3일에 봅시다."

- 우와. 더 안 찍어도 되나 보다.

- 감독님. 수고하셨습니다.

- 연휴다. 빨리 정리하고 퇴근합시다.

수빈은 죄인처럼 멍하니 콘솔 박스 앞에 앉아 있는 조민석에게 다가가 말했다.

"민석씨. 고생하셨습니다. 집에 가거든 부인께 이 말을 꼭 전해주세요. 관객들의 인상에 남는 끝내주는 명연기를 펼쳤다고, 감독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더라고 말입니다. 영화 개봉하면 부부 동반해서 꼭 보러 가세요. 제가 멋들어지게 편집해 드릴 테니 말입니다."

"...정말요?"

수빈의 말에 조금 정신이 드는지 조민석이 되묻는 말에 수빈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천만 감독이 인정한 연기라고 집에 가서 자랑하셔도 좋습니다."

다 죽어가던 조민석의 표정이 환해지더니,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꼭 보러 가겠습니다."

"그래요. 꼭 보러 가세요."

수빈은 조민석의 어깨를 두드린 후, 옷을 갈아입으러 녹음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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