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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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너머 불만 가득한 박사장의 볼멘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야. 강이사. 이거 너무 연락이 뜸한 거 아냐?]
"또 그러신다. 잘 아시잖습니까? 제가 영화 제작 때문에 바쁘다는 거.."
[그래. 알고야 있지. 어쩐 일로 전화한 건가?]
"미국에 있는 김사장님 주식 있잖습니까? 아직 20프로 남은 주식 말입니다. 제가 이번에 목돈이 좀 생겨서 5프로 정도를 더 인수했으면 합니다."
[이야. 강이사. 중국에서 돈 많이 벌었나 봐? 5프로라고 해도 250억이 넘을 건데..]
"좀 벌었습니다. 일전에 김사장님이 최대한 빨리 인수해 갔으면 한다던 말이 기억나서요. 돈이 생길 때마다 조금씩이라도 인수를 하려고요."
[그래. 알았어. 내가 김사장에게 미리 연락을 해두지. 주식을 인수하려면.. 거기 영화사에 있는 법무팀 조부장을 미국으로 다시 한번 출장을 보내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하겠습니다. 내일 입금이 되면 모레쯤 미국으로 출장을 보내겠습니다."
[알겠네. 그렇게 말을 해두지.]
"감사합니다. 여유가 좀 생기면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수빈의 말에 박사장이 서운한 티를 팍팍 내며 목청을 올렸다.
[강이사. 그럼 안 되지. 섭섭하게 이럴 건가? 지금 회사에서 강이사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CD 발매 건도 A&R 팀이 자체적으로 진행하다 올 스톱 되어 있다더군. 강이사가 도통 신경을 안 써줘서 말이지. 자네가 컨펌을 해줘야 발매를 할거 아닌가? 그리고 연습생 트레이너들도 강이사가 오기만을 이제나저제나 하며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고 들었어. 몇 달째 학수고대하고 있다던데..]
"하아. 제가 몸이 하나라서.. 그럼 말 나온 김에 제가 내일 저녁 8시쯤 한번 들러보겠습니다. 너무 늦을까요?"
[그런 게 어딨나. 급한 사람이 기다리는 거지. 내일 올 스탠바이 시켜 놓겠네. 잠깐이라도 와서, 그동안 밀린 일들 처리 좀 하고 가라고. 내가 매일매일 밑에 직원들에게 얼마나 시달리는 줄 알아? 내가 강이사에게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다들 나만 쪼아대니 원..]
"그래요? 저한테는 아무도 연락을 한 하던데요?"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야지. 나야 몇 년 있으면 떠날 사람이지만.. 자네야 아직 남은 세월이 새까맣잖아. 감히 함부로 전화를 못하지. 사람들이 느끼기에 자네가 좀 어려운 측면도 있고..]
"알겠습니다. 제가 내일 촬영이 끝나는 대로 YK에 들리겠습니다."
[그래. 부탁 좀 함세. 하이유와 강이사가 YK 양대 산맥이잖아. 그런 두 사람이 전부다 영화에 빠져 있어서 YK 전체가 휘청거리고 있다고. 이러다 밥 굶게 생겼어. 이쪽도 먹고살아야 할거 아닌가..]
박사장의 말에 수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뮤란이 일본에서 떼돈을 벌고 있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회사 주가가 올라가면 올라갔지 떨어진 적이 없는데.. 그런 거짓말이 제게 먹히겠습니까? 알아서 잘 하고 계시면서 자꾸 엄살을 피우시면 곤란합니다. 아무튼.. 내일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내일 보자고.]
"네. 사장님."
수빈은 전화를 끊고 한숨을 길게 내쉬며 중얼거렸다.
"하아. 일이 끝이 없네."
"그러게 말이다.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어? 그러다 쓰러질까 걱정된다."
백성철의 말에 수빈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까지는 절 대신할 만한 사람이 없어요. 당분간은 제가 고생을 해야죠. 뾰쪽한 방법이 안 보이네요."
"수빈아. 이럴 때는 집에서라도 잘 쉬어야 해. 집에 도착하면 딴 거 하지 말고 푹 쉬어."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에요."
백성철은 안심 시킨 수빈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내일 YK에 들고 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밤을 새워 그림을 완성시킨 수빈은 새벽녘에야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
2월 13일 화요일
수빈은 아침 9시경 남양주 종합촬영소로 나갔다. 세트장에 도착해 보니 크랭크인 이틀째를 맞아 촬영장이 활기에 가득 차 있었다. 수빈의 눈에 세트장 한구석에서 각 파트별 팀장급 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잡혔다.
그때 수빈을 발견한 김종호 페스 관리팀장이 급히 뛰어와 모니터용 안경과 송수신기가 일체화되어 있는 페스 단말기를 건네주며 말했다.
"보고 드리겠습니다. 어제 말씀하신 대로 '페스 단말기'로 명명(命名) 된 장비를, 가지고 있는 재료를 총동원해서 최종적으로 10개를 제작하였습니다. 현재 박시후 영상팀장을 비롯해 음향, 조명, 소품, 지원팀장에게 보급이 완료되었습니다. 그 외 대표님 1개, 페스팀 2개 해서 현재 8개가 현장에 보급되었고 2개가 여분으로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제작을 더 하려면 다시 재료를 외국에서 공수해와야 합니다."
"아뇨. 더 이상의 제작은 필요 없습니다. 지금으로도 충분해요. 많다고 다 좋은 건 아닙니다. 남은 2개도 제 허락 없이는 절대 풀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법무팀과 의논을 해본 결과, 특허는 힘들 거 같지만 실용신안 쪽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합니다. 특히 영화 촬영 쪽으로 전문화된 프로그램을 직접 짠다면, 별문제 없이 등록이 가능할 거 같습니다."
"그렇게 진행을 하세요. 제가 허례허식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닙니다만.. 세계 속에서 경쟁을 하려면 때로는 적당한 겉치레도 필요합니다. '최첨단 촬영 시스템을 이용하여 제작된 영화'라는 단 한 줄의 문구가 많은 난관들을 돌파해 주는 열쇠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페스 관련하여 수익이 발생하면, 페스 관리팀에게 충분히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힘을 내주세요."
"감사합니다. 대표님.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수빈은 김종호 페스 관리팀장의 팔뚝을 가볍게 쓰다듬은 후, 팀장급이 모여있는 곳으로 걸어가 인사를 나눈 다음 한마디 던졌다.
"페스 정말 좋죠?"
박시후 영상팀장이 대표로 말을 받았다.
"네. 정말 편하더군요. 현장에서 바로바로 확인할 수 있어서, 앞으로 시간 단축이 많이 될 거 같습니다."
수빈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제 하루 경험한 걸 바탕으로, 제 나름대로 머리를 짜내서 고안한 방법이 있습니다. 일단 제일 먼저 연기자가 예행연습을 하거나 동선을 체크할 겁니다. 그때 모든 카메라들이 제가 미리 지정해 놓은 샷을 동시에 찍을 겁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페스로 제가 바로 확인을 해서, 수정이나 변경 사항을 지시할 거예요. 머릿속으로 빠르게 편집을 해가면서 말이죠. 그런 다음 서로의 앵글에 걸리지 않는 카메라들을 총동원해서, 한방에 최대한 많은 샷을 찍을 생각입니다."
수빈이 생각을 정리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물론 오버 숄더 샷이나 풀샷. 그룹샷 같은 샷들을 그런 식으로 찍을 수는 없어요. 하지만 빅 클로즈업, 클로즈업, 바스트, 웨이스트 샷 같은 것들에서 필요한 샷들은.. 어쩌면 원샷으로 촬영을 끝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럼 촬영 시간이 많이 단축될 거고, 연기자들이나 스태프들의 체력 관리도 훨씬 수월해질 겁니다."
박시후 영상팀장이 조심스럽게 반박 의견을 내었다.
"하지만 대표님. 연기자들에게는 연기에 몰입할 시간과 분위기라는 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수정 작업을 하느라 현장이 어수선하고, 즉각적인 변화가 지나치게 자주 발생하면.. 어쩌면 연기의 깊이가 떨어져서, 보기에 조잡해질 위험성도 있습니다."
"당연하겠죠. 연기자는 기계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런 걸 조율하는 게 또 감독의 능력 아니겠습니까? 제가 최대한 무리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이끌어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날 대본 리딩 때 다들 보셨잖아요? 우리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아주 훌륭한 배우들입니다. 아마도 빠른 시간 내에 적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박팀장이 수긍한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도 대표님이니까 그나마 가능한 일인 거죠. 다른 감독들은 머리가 안 따라줘서 시도조차 못할 겁니다. 복잡다단하게 얽혀있는 샷들을, 현장에서 편집까지 고려해서 머릿속으로 바로바로 계산을 해나가면서 한 번에 최대한 많은 샷을 찍겠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저같이 평범한 인간들은 머릿속에서 아예 상상조차 안 하는 방식입니다. 아무튼, 대표님만 믿고 열심히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박팀장의 발언에 수빈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요즘 제 주변에 말 잘하는 분들이 너무 많아져서 당황스럽네요. 일단 다들 그렇게 아시고.. 오늘 내일 시험적으로 진행을 해보면.. 대충 계산서가 뽑혀져 나올 겁니다."
- 짝.
수빈이 힘차게 손뼉을 친 다음, 환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 하루도 다 함께 신명 나게 찍어봅시다. 새로움에 두려움을 가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했습니다. 다 같이 즐기면서 찍어보자고요."
수빈의 말에 모여있던 팀장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 알겠습니다. 대표님.
어느덧 시간이 흘러 이틀째 촬영이 시작되었다.
수빈은 서두르지 않고 느긋한 자세로 촬영에 임했다. 새로운 방식을 시험해가며 촬영을 진행하다가, 아무리 작은 문제라도 문제점이 발견이 되면 그 즉시 촬영을 중단 시켰다. 이후, 적절한 해결책이 나올 때까지 스태프들과 토의에 토의를 거듭하여 문제점이 해결이 된 후에야 비로소 촬영을 재개하였다. 그런 방식으로 진행하다 보니 촬영의 속도가 좀처럼 나지 않았다.
하루 온종일 비록 예상보다 훨씬 적은 분량을 찍긴 했지만, 새로운 촬영 기법의 완성도를 조금씩 조금씩 높여가며 서로 간의 호흡을 완벽하게 맞춰 나가는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저녁 6시가 되자 촬영을 중단시킨 수빈은 팀장들을 불러 모았다.
"다들 아시겠지만, 지금 촬영 현장에 60여 명 가까운 인원들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실제로 영화사 직원은 십여 명밖에 안되고, 나머지 분들은 팀장들이 예전에 같이 작업하던 분들을 불러 모으셔서 촬영에 임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얼핏 듣기로는 그분들과 오늘 회식을 할 거라 하던데.. 그런 자리에 제가 참석해 봐야 다들 불편하기만 할 테니, 전 빠지도록 하겠습니다. 빨리 가봐야 할 데도 있고요."
수빈의 말에 팀장들이 태클을 걸었다.
- 같이 가시죠. 대표님.
- 감독이 빠지면 안 되죠.
- 그러면 유혈사태가 발생합니다.
- 서운합니다. 대표님.
수빈이 손을 들어 팀장들을 진정시킨 후, 품에서 반짝이는 황금색 카드를 여러 장 꺼내어 들었다.
"그 대신! 회사 법인 카드를 내어드리겠습니다. 돈 따위에 연연하지 마시고.. 몸에 좋은 걸로 마음껏 드시면서 회식을 하세요. 단, 내일 또 촬영이 있으니 너무 늦게까지 달리지는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자.. 카드들 받아 가시고.. 다들 오늘 하루도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이만 퇴근들 합시다."
법인 카드를 받아 든 팀장들이 희희낙락하는 표정으로 힘차게 외쳤다.
- 수고하셨습니다. 대표님.
수빈은 주차장으로 이동해 밴을 타고 YK 사옥으로 출발하였다. 이동 도중 수빈은 오상무에게서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 대표님. 청톈에서 돈이 들어왔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자금을 분배해서 입금 처리하였고, 내일 오후 3시 비행기로 조부장이 미국으로 날아갈 계획입니다.
문자를 읽은 수빈은 오상무에게 수고했다고 답장을 보냈다.
길이 막히지 않아 YK 사옥에 약속시간 보다 일찍 도착한 수빈은 곧바로 사장실로 올라갔다. 수빈은 김비서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박사장을 만나기 위해 방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수빈을 발견한 박사장이 환하게 웃더니,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수빈에게 다가왔다. 군대에서 첫 휴가를 받아서 집에 온 아들을 반기듯, 박사장이 수빈을 힘주어 끌어안으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다 얼굴 까먹겠어. 그동안 별일 없었나?"
박사장의 물음에 수빈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네. 별일 없었습니다만.. 사장님 얼굴이 생각보다 좋아 보이십니다? 그리고.. 너무 과하게 반기시는 거 아닙니까?"
"어제 내가 말했지 않은가. 하루하루 직원들 등쌀에 죽을 지경이라고."
수빈을 이끌고 소파에 앉으며 박사장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어제 강이사랑 통화를 끝내고 바로 사내 공지를 때렸지. 내일 강이사가 회사로 오기로 했으니까, 업무상 볼일이 있는 사람들은 내일 저녁에 대기하고 있다가 직접 만나서 해결하라고 말이지. 그랬더니.. 오늘은 날 찾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군. 내가 얼마나 편하던지.. 낮잠까지 푹 잤다네."
소파에 앉은 수빈이 떨떠름한 얼굴로 대꾸했다.
"아주 편하고 좋으셨겠습니다.. 저를 팔아서 말이죠."
"꼬우면 강이사가 자주 좀 들러. 나라고 그러고 싶었겠나? 나도 힘들어. 요즘 YK에 입사하고 싶다는 청탁이 얼마나 많이 들어오는 줄 알아? YK가 조만간 국내 원 탑으로 올라설 거라고 소문이 퍼져서.. 사람들이 너도 나도 들어오고 싶어서 환장을 하고 있다고. 그뿐인 줄 알아? YK 연습생이 되고 싶다는 애들이 끝도 없이 밀려들어오고 있어. 이게 다 강이사 자네 때문이지 않은가? 날 이렇게 힘들게 만들고선 자기는 팔자 좋게 세월아 네월아 영화만 찍겠다고? 사람이라면 그럼 안되지. 암. 안되고 말고. 그럼 내가 억울해서 못 살지.."
박사장의 말에 수빈이 쓰게 웃으며 물었다.
"아직까지 퇴근 안 하고 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많은가 봐요?"
"많다 뿐인가. 내가 아는 것만 해도 5팀이 넘어."
수빈이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되물었다.
"그렇게나 많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