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176화 (176/236)

#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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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성의 아파트 안으로 들어간 얀이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 역시 볼 때마다 대단해. 내가 장담컨대 이러고 사는 학생은 NYU에 너 혼자뿐일 거다. 내가 햇빛이 쨍쨍하기로 유명한 LA에서 살았었지만, 이런 집은 여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학생 혼자 사는 아파트답게 별다른 집기나 가구 없이 널찍한 내부는, 한가운데 반쯤 쳐져 있는 큼지막한 검은색 커튼을 경계로 생활 공간과 영화 관람 공간이 정확히 나누어져 있었다.

천장에서 바닥까지 빈틈이 보이지 않는 두터운 검은색 커튼이 영화 관람을 위해 외부의 빛을 차단하는 목적으로 설치되어 있었고, 밖으로 나있는 들창 타입의 창문들에도 빠짐없이 검은색 커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아파트 내부를 둘러보던 하이네도르프가 얀의 말을 받았다.

"작년에 스페인에 있는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본 페르시아나(Persiana) 보다 더 심하다고.. 사진을 현상하는 암실(暗室)에 들어온 기분이야."

그 순간 냉장고 앞으로 걸어가던 김동성이 이마를 찌푸리면 말했다.

"이것들아. 남의 소중한 취미에 함부로 태클 걸지 말라고.. 잡소리 하지 말고 다들 이리로 와라. 자기가 마실 맥주는 자기가 알아서 꺼내."

말이 끝나자마자 후다닥 달려와서 맥주를 꺼내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김동성이 으름장을 놓았다.

"뭐라고 안 할 테니 넉넉하게 꺼내. 영화 관람할 때 모자란다면서 왔다 갔다 하면 죽여버릴 테니까.."

잠시 후 3명은 맥주를 잔뜩 들고서, 대형 화면에 돌비 서라운드 음향 시스템까지 완벽하게 갖춰져 있는 최신형 홈시어터가 설치되어 있는 공간으로 이동하였다.

검은색 커튼들을 꼼꼼하게 쳐서 외부의 빛을 완전히 차단한 채, 모니터 불빛에 의존하여 눈앞에 놓인 맥주와 피자 쪽으로 손을 뻗던 얀이 김동성에게 물었다.

"어떤 영화야? 넷플릭스에 새롭게 올라온 거야?"

리모컨을 조작하고 있던 김동성이 대답했다.

"아니. 오늘자로 훌루에 올라온 최신 한국 영화야."

"아. 훌루. 안 그래도 요즘 뉴스에 나왔더라. 훌루가 디즈니에서 인수한 다음 가입자가 엄청 늘었다고 들었어. 새로운 콘텐츠를 많이 공급한다더니.. 한국 영화도 올라오는 모양이네. 영어 자막은 당연히 있겠지?"

하이네도르프가 물었다.

"독일어 자막은 있으려나?"

김동성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찾았다. 다들 이제부터는 조용히 해. 어디 보자. 가능한 자막은.. 10개 국어? 10개 국어로 되어 있다는데? 정말이려나. 일단.. 독일어는 나중에 확인해 보고 둘 다 볼 수 있는 영어 자막으로 보자."

잠시 후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 초반에는 맥주 마시는 소리와 피자 먹는 소리 거기에 서로 잡담을 나누는 소리까지 섞여서 방안이 왁자지껄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세 사람 모두 영화에 집중하는지 방안이 점점 조용해졌다. 어느덧 모든 잡다한 소리는 사라지고, 오로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만이 방안을 점령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영화가 다 끝날 때쯤, 침묵을 지키며 영화를 보고 있던 얀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하이네켄. 그만 좀 처 울어라. 덩치는 산만한 놈이.. 영화 보는데 방해되잖아."

"훌쩍.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미국놈의 새끼.. 넌 이런 영화를 보고도 눈물이 안 나오냐?"

그때 김동성이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내질렀다.

"둘 다 닥쳐. 영화 보는데 방해되잖아. 계속해서 떠들면 둘 다 쫓아내버릴 거야."

잠시 후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자 얀이 중얼거렸다.

"좋은데.. 아주 좋아.. 영화 전반적으로 비장미가 넘치면서도 편집이 깔끔해. 군더더기가 전혀 없어. 그리고 영어 자막의 퀄리티도 아주 훌륭해.."

하이네도르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동의한다. 자막과 편집 둘 다 거슬리는 곳이 딱히 안 보여. 미장센도 훌륭해. 그리고.. 액션 장면들에서 CG가 완전 대박이야. 한국 영화가 많이 발전했다더니 요즘 CG 작업에 돈을 많이 들이나 봐?"

"CG는 나도 인정. 아주 자연스러웠어. 아무래도 제작비가 많이 들어갔을 것 같다.."

그때 김동성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부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꼴에 영화 연구가 전공이라고 떠들기는.. 네놈들이 한국 영화에 대해서 뭘 안다고 떠드냐? 내가 알기론 이 영화 제작비는 800만 달러밖에 안된다고. 쥐뿔도 모르는 것들이 아는 척을 하고 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CG 비용만 해도 그것보다 많이 나올걸?"

얀의 반박에 김동성이 가소롭다는 듯 턱짓을 하며 말했다.

"지금 나오는 메이킹필름을 봐라.. 배우가 직접 연기를 하고 있잖아. CG 따위는 없다고."

잠시 후 충격을 먹은 듯 약간 질린듯한 목소리로 하이네도르프가 중얼거렸다.

"거짓말. '재키 챈'도 저런 액션은 불가능해. 전설의 '브루수 리'가 환생이라도 한 건가.."

그때 심각한 얼굴의 얀이 진지한 태도로 김동성에게 물었다.

"킴. 이 영화 말이야. 미국에서 개봉한 적이 없는 거지?"

"당연한 거 아냐? 그랬으면 내가 영화관으로 달려가서 벌써 봤겠지. 한국에서 엄청 히트친 영화란 말이야. 내가 알기로는 한국하고 중국에서만 개봉한 걸로 알고 있어. 한국에서도 며칠 전에야 스크린에서 내려온 따끈따끈한 신작이라고."

"그래? 킴. 일단 독일어 버전으로 한번 더 볼 수 있도록 맞춰놔 봐. 난 아버지에게 전화 좀 해야겠다."

얀의 말에 하이네도르프가 물었다.

"영화제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래. 안 그래도 올해 출품작들이 영 시원찮다고 걱정을 하고 계셨는데.. 내가 보기에 이 정도 수준의 작품이면 출품하기에 충분해."

얀이 전화를 걸러 커튼 밖으로 나가자 김동성이 하이네도르프에게 물었다.

"무슨 영화제를 말하는 거야? 그리고 그게 얀의 아버지랑 무슨 상관이야?"

"샌프란시스코 영화제가 얼마 안 남았잖아. 그리고 얀의 아버지가 거기 심사위원 중 한 명이시지."

김동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얀의 아버지가 누군데?"

"응? 몰라? 지금 우리가 다니고 있는 NYU 직속 선배잖아. 티쉬(Tisch) 출신의 '짐 자무시'라고.. 유명한 영화감독 있잖아. 집이 LA에 있는 얀이 왜 머나먼 뉴욕까지 와서 학교를 다니겠냐? 자기 아버지가 나온 학교라서 여기까지 온 거라고."

길 가다 모르는 사람에게 느닷없이 뺨을 얻어맞은 사람처럼 황당한 얼굴의 김동성이 황급히 되물었다.

"설마.. '천국보다 낯선'과 '커피와 담배'를 연출한 그 짐 자무시 말하는 거야? 인디 영화의 대부라는..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그 짐 자무시가 얀의 아버지라고? 나를 티쉬로 인도한 그 짐 자무시가?"

"몰랐어? 얀의 풀 네임이 얀 자무시잖아. 자무시라는 성이 흔한 것도 아닌데.."

"빌어먹을.. 한국인인 내가 미국인들 성 따위에 관심을 가질 거라고 생각하냐? 그것도 남자 놈을.."

잠시 후 통화를 끝마치고 온 얀에게 입이 댓 발 나온 김동성이 시비를 걸었다.

"어이. 얀 자무시. 한국인은 샌프란시스코 하면 금문교(Golden Gate Bridge)랑 자이언츠밖에 모른다고. 샌프란시스코 영화제 따위는 한국 사람들이 알지도 못해. 그리고.. 이미 훌루에 올라온 영화를 왜 거기에다 출품하겠다는 거야?"

"샌프란시스코 영화제가 미국 배급사가 정해지지 않은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제잖아. 일종의 필름 마켓 역할까지 겸하는 영화제라고. 달빛이 훌루에는 올라왔더라도 아직까지 미국 영화관에 걸린 적이 없으니 자격이 충분해. 그리고.. 내 기억엔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 갔다가, 한국 영화인 '봄날은 간다'와 '파이란'을 본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고. 그 정도면 한국인들도 제법 아는 영화제 아닌가?"

하이네도르프가 끼어들었다.

"얀. 킴이 짐 자무시 감독의 열혈팬인가 봐. 그래서 유학을 NYU로 왔단다. 네 아버지가 짐 자무시인 줄 지금 알았다네. 그래서 괜히 시비를 걸고 있는 거야."

하이네도르프의 말에 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내 아버지가 짐 자무시인 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난 그냥 조금 전 영화가 맘에 들어서, 내가 아는 영화제 심사위원에게 단순히 추천을 하고 온 것뿐이라고. 아버지랑 나랑 사이가 친한 줄 알면 오산이야."

얀의 말에 김성동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여간 이기적인 미국 놈들 같으니라고. 개인주의가 아주 쩔어요. 다들 더 이상 꼴보기 싫으니까 빨리 내 아파트에서 나가버려. 꺼지라고."

그때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얀이 황급히 태세 변경을 하며 말을 바꿨다.

"헤이. 킴. 이번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 나랑 같이 구경하러 가지 않을래? 간 김에 내 아버지를 킴에게 소개해줄게."

"정말이지? 약속할 수 있어?"

"그럼. 킴. 미국인은 약속을 잘 지킨다고."

얼굴이 풀린 김성동이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얀에게 말했다.

"얀. 전화하고 왔는데 목 안 말라? 맥주 좀 더 마실래?"

"맥주보다.. 독일어 자막으로 한번 더 보고 싶은데.."

"그럼. 당연히 봐야지. 오늘 아예 10개 국어로 해서 열 번을 돌려 보자고.."

그때 옆에 있던 하이네도르프가 잘 됐다는 듯 끼어들었다.

"그럼 다른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친구들도 불러서 영화 자막이 어떤지 확인해 볼까?"

그 말에 김동성이 불같이 화를 내었다.

"야. 하이네켄. 넌 농담과 진담을 구별 못해? 누가 독일놈 아니랄까 봐.. 그러니 유머 감각이 젬병이라고 독일인들이 놀림당하는 거야. 이 좁은 집에 누굴 더 부르겠다는 거야?"

그러자 얀이 중얼거렸다.

"난 좋은 의견 같은데.."

얀의 말을 들은 김동성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암. 불러야지. 그래. 다 불러라.."

하이네도르프가 침울한 표정을 하고 있는 김동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킴. 걱정 마. 설마 사람들을 한꺼번에 무더기로 부르기야 하겠어? 스텔라가 스페인어랑 프랑스어를 할 줄 아니까 일단 스텔라부터 불러보자고. 네가 좋아하는 스텔라 말이야.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김동성이 하이네도르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맥주 좀 더 마실래?"

2월 12일 월요일

새로운 한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 9시경.

수빈은 '나는 죽기 싫다' 크랭크인을 맞아 고사를 지내기 위해 남양주 종합촬영소로 가는 길이었다.

"형. 예정보다 너무 일찍 출발하는 거 아닌가요? 고사는 11시부터라고 들었는데.."

수빈의 질문에 백성철이 대답했다.

"그게 이성호 소품팀장이랑 박상민 지원팀장이 나에게 부탁을 하더라고. 대표님을 한 시간만 일찍 모셔와달라고 말이지. 새롭게 제작한 장비 설명을 꼭 해야만 한다고 난리를 치던데.."

"그래요? 제가 부탁한 게 있었는데 잘 해결한 모양이네요."

백성철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후.. 그래야겠지. 안 그랬다간 회계부 강부장이 가만 놔두지 않을 거다."

"응? 강부장이 왜요?"

"둘이서 뭘 제작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암튼 10억을 좀 넘게 썼다고 들었다. 네가 지시한 일이라면서 막무가내로 돈 내놔라 그러는 바람에 강부장이 열 좀 받아있더라고. 네가 허락했다고 하니 안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말에 수빈이 감탄성을 터뜨렸다.

"이야.. 배포들도 크시네. 10억이면 어지간한 독립영화 10편을 찍을 수 있는 돈인데. 뭘 보여줄지 정말 궁금하네요."

그때 수빈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수빈이 전화를 받았다.

"네. 장감독님. 아침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수화기 너머 흥분한 장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감독. 기뻐하게나. '달빛 속의 호위무사'가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 초대를 받았어.]

"네? 갑자기요? 샌프란시스코 영화제면.. 보통 3월 중순경에 열리는 영화제 아닙니까? 개최일이 한 달 정도밖에 안 남았을 건데요. 이제 와서 초대를 한다고요?"

[그러게 말이야. 나도 그쪽 전화받고 깜짝 놀랐어. 그쪽 심사위원장이 우연히 우리 영화를 봤나 봐. 미국에 아직 개봉을 안 했으면, 자기들 영화제에 출품을 해줄 수 있겠냐고 정중하게 부탁을 해왔어.]

"흠.. 왜 전화하셨는지 알겠습니다. 드림픽처스에서 결정을 못 내려서 저에게 전화하신 거죠?"

[맞아. 드림픽처스에 전화해서 물어보니 자기들에게는 권한이 없데. 자네 허락이 있어야 출품할 수 있다고 그러던데?]

"한국을 벗어 나서 국외로 나가는 건 무조건 우리 쪽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계약서에 그렇게 되어 있죠."

[출품할 거지? 나랑 같이 손잡고 영화제에 참석하자고.]

"출품은 하셔도 됩니다. 제가 법무부서에 따로 이야기를 해놓겠습니다. 근데.. 제가 영화제에 참석하는 건 좀 힘들 거 같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제가 지금 새로운 작품에 들어가는 거.. 상을 준다는 보장도 없는데 미국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알았어. 그 문제는 그때 가서 다시 이야기를 해보자고..]

"네. 감독님. 제가 법무팀 쪽에 말해서 전화드리라 하겠습니다."

장감독과의 통화를 마친 수빈은 영화제 출품을 지시하기 위해 법무부 조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간이 흘러 남양주 종합촬영소 주차장에 도착한 수빈은 밴에서 내렸다. 자신을 마중 나와 있는 이팀장과 그 옆에서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하고 있는 박팀장을 바라보며 수빈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이거 이거.. 이팀장 얼굴 표정이 환한 거 보니 기대가 아주 큽니다."

이팀장이 뒷짐을 진채로 서서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대에 실망시키지 않을 겁니다.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습니다."

말을 끝마친 이팀장이 박팀장을 슬쩍 쳐다보자, 박팀장이 카메라를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팀장이 뒷짐을 지고 숨겨놨던 물건을 앞으로 돌려 수빈에게 내밀었다.

"이걸 한번 착용해 보시죠."

새까만 색깔에, 해녀들이 씀직한 큼지막한 수경 같은 형태에 헤드셋이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물건이었다. 옆쪽에는 안테나같이 길쭉한 봉이 부착되어 있고, 아래쪽에는 마이크가 달려있는 정체불명의 물건을 받아들은 수빈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게.. 도대체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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