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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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아침부터 걸려온 오상무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
[대표님. 조금전 청톈에서 연락이 왔어요. 어제 하루 '달빛' 관람객이 250만이나 들었다고 하네요.]
"어제라면 중국도 평일이었을 텐데.. 평일에 그 정도면 아직 기세가 꺾이지 않았나 보네요."
[네. 그래서 청톈의 애초 계획은 이번 주 금요일에 스크린에서 내리는 거였는데, 일요일까지 이틀 더 연장해서 영화를 걸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잘 됐군요. 하루 더 걸릴 때마다 몇 억씩 수익이 더 늘어나니까요."
[네. 그쪽 말로는 일요일까지 계속 걸리면 이번 주에 2천만 정도는 더 관람할 거로 예상하고 있다네요. 그리고 중국 '유쿠'에는 다음 주 월요일에 업데이트를 할 계획이지만, '훌루'에는 원래 스크린에서 내리기로 한 일정에 맞춰서 이번 주 토요일에 '달빛'이 업데이트 될 거라고 합니다. 훌루 쪽 일정은 청톈 단독으로 바꿀 수가 없나 봐요.]
"그건 상관없습니다. 훌루는 북미가 메인 시장이니까요."
[그렇게 이야기하더라고요. 마지막으로 청톈에서 '특수본' 작업을 최대한 빨리 해달라고 부탁을 해왔어요.]
오상무의 말에 수빈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드라마 상영 시간을 다 합치면 20시간이 넘습니다. 한 두 주 내로 뚝딱해서 끝마칠 수 있는 분량이 아니에요. 중국 출장 갔을 때 분명히 그렇게 전달을 했는데, 벌써부터 재촉을 하는군요. 아무튼,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끝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해주세요."
[알겠어요. 대표님. 청톈에 그렇게 전달하고, 전 공사 현장에 나가 있겠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수빈이 전화를 끊으며 중얼거렸다.
"이 양반들이 만만디는 어디다 팔아먹고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거야. OTT 시장에 목이라도 매겠다는 건가.."
그때 또다시 수빈의 핸드폰이 울어댔다.
"여보세요?"
[이사님. 저 홍보팀 김팀장입니다.]
"네. 아침부터 어쩐 일이세요?"
[일전에 촬영한 CF 있잖습니까. 디젤사 CF요.]
"네. 기억합니다. 새봄 신학기를 겨냥한 CF였죠."
[네. 그동안 겨울 한파가 너무 심해서 묵혀놓고 있었는데.. 이제 슬슬 날이 좀 풀릴 거라는 소식이 들리더니, 디젤사에서 CF 방송 일자를 잡았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언제라고 하던가요?"
[구정이 끝나고 2월 19일부터 3월 4일까지 2주간 집중적으로 틀 거라는데요. 입학 시즌에 맞춰서 내보내려고 하나 봅니다.]
수빈이 거실 탁자에 올려져 있는 탁상용 달력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때는 영화 촬영 기간이라 제가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것 같은데요. 흠. 지원 사격을 해주긴 해야 할 것 같은데.."
수빈이 잠시 머리를 굴리더니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팬미팅을 한번 여는 게 어떨까요?"
[팬미팅 말입니까?]
"네. 구정이 끝나는 마지막 날인 2월 18일 일요일에 팬미팅을 한번 개최해 보죠. 구정 때만 잠깐 쉬고, 그 다음날부터는 다시 영화 촬영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다른 날에는 제가 시간을 내는 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당장 이번 주에 뭘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죠. 아무래도 그날밖에 없을 거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팬미팅 행사 내용은 디젤사 CF 선공개를 포함해서 제가 임의로 한번 짜봐도 되겠습니까?]
"네. 그러세요. 어차피 설날 연휴 마지막 날이라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오지는 않을 겁니다. 너무 거창하게 하지 마시고, CF 선공개를 해서 SNS 상에서 어느 정도 화제몰이가 될 정도로만 해줘도 충분할 겁니다. 혹시 사람이 필요하면 박상민 지원팀장이랑 같이 이야기를 나눠보세요."
[알겠습니다. 이사님. 제가 박팀장이랑 팬클럽 임원진들이랑 연락해서 계획을 한번 짜보겠습니다.]
"그래요. 부탁드릴게요."
수빈이 전화를 끊은지 5초도 지나지 않아 또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수빈은 발신자를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 액정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오늘 날이라도 잡은 거냐. 아침부터 웬 전화가 이렇게 많이.. 응? 이 양반이 어쩐 일이야?"
수빈이 전화를 받았다.
"장진석 감독님. 오래간만입니다."
몇 초간 침묵이 흐르더니 상대방이 혀 꼬인 소리로 말했다.
[...강감독. 미안하네. 내가 정말 강감독 볼 면목이 없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내가 드림픽처스 사장이랑 몇 번을 싸웠는데.. 그 욕심 많은 돼지 새끼가 끝까지 내 부탁을 안 들어주더라고.]
"혹시.. 저 때문에 싸우셨습니까?"
[맞아. 나도 양심이 있는 사람이야. 영화가 누구 때문에 대박을 쳤는데.. 개새끼. 강감독 인센티브 좀 주자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입을 싹 씻더군. 미안하네. 강감독.]
"장감독님. 괜찮습니다. 저 '달빛' 때문에 돈 많이 벌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대박 났다는 소식 아직 못 들으셨습니까?"
[그건 그거고.. 감독으로서 일한 대가는 받아야 할거 아닌가? 내가 받을 돈에서 얼마라도 때서 주겠네.]
"아이고. 감독님. 제가 그 돈을 어떻게 받습니까. 저 걱정 마시고 그동안 고생한 감독님 가족들 호강이나 좀 시켜주세요."
[후아.. 어제 열받아서 술을 하도 많이 먹었더니 아직 정신이 없어. 내가 드림픽처스 사장에게 아주 쌍욕을 퍼부어 주었지. 은혜도 모르는 새끼. 누구 때문에 돈방석에 올라앉았는데.. 아무튼 그쪽이랑은 두 번 다시 같이 일 안 하기로 했다네. 이제 나 시간 많아. 조만간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네. 네. 알겠습니다."
수빈은 전화를 끊으며 작게 뇌까렸다.
"걸리면 제대로 한번 손을 봐야겠군.."
잠시 후 수빈은 백성철의 연락을 받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드라마 작업과 영화 촬영 준비를 위해 수빈은 집을 나섰다.
2월 7일 수요일
공식적인 기록으로 1,413만 관객을 동원한 '달빛 속의 호위무사'가 '국제 장터' 다음가는 역대 흥행 랭킹 4위를 기록하며 스크린에서 내려왔다.
2월 8일 목요일
수빈은 회의실에서 이성호 소품팀장, 박상민 지원팀장과 함께 의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표님께서 원하시는 건.. 현장에서 찍은 영상들을 좀 더 편리한 방법으로 바로바로 빠르게 확인을 하고 싶다는 거죠?"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던지는 이팀장의 질문에 수빈이 대답했다.
"맞아요. 지금은 촬영 현장에서 한 커터, 한 커트 찍을 때마다 조그만 모니터로 일일이 확인을 하잖습니까? 그것도 주간의 경우에는 햇빛을 막기 위해 박스를 씌워가면서 말이죠. 그런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것들을 개선하고 싶다는 겁니다."
수빈의 말에 박팀장이 정리를 하였다.
"여태껏 하셨던 대표님 말씀을 종합하면 두 가지로 요약이 되겠군요. 첫 번째는.. 컷트 영상을 빠르고 손쉽게 확인을 하고 싶다는 것. 이건 돈을 좀 투자해서 최첨단 시스템으로 바꾸면 별다른 문제없이 바로 가능할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현장에서 편집을 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겠지만, 여러 앵글에서 찍은 영상을 동시에 띄워놓고 한눈에 보시면서 임시로라도 편집을 현장에서 바로 하고 싶으시다는 거 아닙니까? 대표님 머릿속에서 말입니다."
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바로 그겁니다. 제가 여타 다른 감독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면, 머릿속으로 영상을 입체화 할 수 있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겁니다. 그 점을 촬영 현장에서 최대한 활용하고자 합니다. 제가 바라는 영상은 제 머릿속에 다 들어 있어요. 영화 촬영은 그런 영상을 조금씩 채워나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죠. 비록 제 머릿속이기는 하지만 현장에서 바로 편집을 할 수 있다면.. 불필요한 촬영을 대폭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시간과 돈. 둘 다 절약할 수 있겠죠."
박팀장이 알겠다는 듯 머리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제 생각에 이것도 돈만 많이 쓴다면 충분히 가능할 거 같습니다. 이번에 촬영 장비들이 다 최신형으로 바뀌면서 디지털화되었기 때문에 모니터만 여러 대 이어 붙이면..."
그때 이팀장이 치고 들어왔다.
"아니지. 그걸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고성능 컴퓨터가 우선이야. 영상이 조금이라도 버벅거리면 타임 테이블이 부정확해져. 그럼 대표님 머릿속에서 편집 자체가 꼬여버린다고. 그러니까.."
박팀장이 반박을 하고 나섰다.
"그러면 촬영 현장에서 사용하기에 이동성이 너무 떨어지지 않을까요? 평범한 컴퓨터로는 그게 안될 겁니다. 결국에는.."
- 탕.
그 순간 수빈이 손바닥으로 회의실 탁자를 가볍게 내리쳐 두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자세한 세부 사항은 두 분이서 알아서 의논을 해보세요. 자금은 충분히 지원을 하겠습니다. 그 대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을 보며, 수빈은 차마 제발 좀 적당한 수준에서 일을 진행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대신.... 최대한 빨리 결과물을 내주시길 바랍니다."
-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네. 대표님. 지금 아이디어가 넘쳐납니다.
회의실을 빠져나가려던 수빈은 의욕에 가득 찬 얼굴로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 모든 걸 체념한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너무 불타오르지는 말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말해봐야 소용없겠지.."
2월 10일 토요일
한국은 주말인 토요일 밤이 깊어 자정이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뉴욕에서는 한 젊은이가 맨해튼 거리를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김동성이라는 이름의 이 젊은이는 전형적인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난 독자로서, 미국의 명문대 중에 하나인 뉴욕대(NYU)에서 Tisch School of the Arts 과정을 밟고 있는 학생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와 음악을 좋아했던 김동성은, 3년 전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좀 더 깊이 있게 공부하기 위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로 결정했었다. 현재 NYU에서 영화 연구(Cinema Studies)를 전공하고 있는 김동성은, 학교에서 조별 과제를 끝내자마자 같이 놀자는 조원들의 유혹을 냉정히 뿌리치고 집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오늘 오전 10시면 업데이트가 된다고 했지? 지금 이미 10시가 넘었으니까 집에 가면 업데이트가 되어 있을 거야.'
자신이 좋아하는 집 근처의 그리말디스 피자리아에서 피자를 잔뜩 산 다음, 집에서 맥주와 함께 먹으며 영화 감상을 할 마음에 김동성의 걸음이 자꾸만 빨라지고 있었다.
잠시 후 피자 박스를 손에 들고 맨해튼 브릿지 아래에 위치한 덤보(DUMBO : Down Under the Manhattan Bridge Overpass) 지구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 도착한 김영철은 깜짝 놀랐다.
자신의 아파트 방 문 앞에서, 두 명의 건장한 남자가 쪼그려 앉아 자신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김동성을 발견하고선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미국 국적의 금발 머리에 멀대처럼 키가 큰 남자가 소리쳤다.
"헤이. 킴. 어딜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독일 국적의 떡대가 좋고 사각형 얼굴에 잿빛 머릿결의 남자가 외쳤다.
"오우. 내가 좋아하는 그리말디스 피자로군. 잘 먹을게."
두 사람의 정체를 확인한 김동성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이네켄.. 얀.. 네놈들이 왜 여기 있는 거냐? 왜 내 아파트 방문 앞에서 죽치고 있는 거냐고?"
김동성의 말에 떡대가 좋은 남자가 인상을 구기며 대답했다.
"내 이름은 하이네도르프라고.. 네덜란드의 하이네켄하고 아무 상관없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먹겠냐?"
"알았어. 하이디. 그 짧은 김과 킴도 제대로 구별도 못하는 놈이 말이 많아. 근데.. 왜 여기서 날 기다리고 있는 거냐?"
얀이 엉덩이를 툭툭 털며 말했다.
"뻔하잖아? Tisch 3대 미녀인 스텔라가 같이 놀자고 하는 걸 뿌리치고, 킴이 그렇게 즐거운 표정으로 급히 가야 할 곳이 있다면.."
하이네도르프가 김동성이 들고 있는 피자 쪽으로 손을 뻗으며 대꾸했다.
"보나 마나 영화 감상 때문이겠지. 분명 새로운 좋은 영화가 나온 게 틀림없는 게야. 자. 킴. 무거운 피자는 내가 들어줄 테니, 어서 빨리 궁전의 문을 열어달라고.."
인상을 와락 찌푸린 김동성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네놈들도 기숙사 방에 TV 있잖아. 각자 자기들 방에서 영화 감상하면 될 거 아냐. 왜 나의 즐거운 시간을 방해하는 거냐고?"
얀이 다정하게 김동성의 어깨를 부둥켜 안으며 대답했다.
"킴. 기숙사에 있는 조그만 구닥다리 TV로 영화를 보면 눈만 버린다고. 난 네가 부러워. 나도 한국에서 태어나고 싶다고. 미국에서는 부모가 대학 다니는 아들을 위해 이런 근사한 아파트를 구해주지 않는단 말이야. 최신형 TV는 더더욱 사주지 않지. 등록금도 내가 벌어서 내야 하는 처지라고.."
하이네도르프가 김동성의 손에 있는 피자를 뺏어들며 맞장구를 쳤다.
"독일도 마찬가지야. 킴. 가난한 친구들을 위해서 부디 자선을 베풀어 달라고."
더 이상 버틸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은 김동성은, 열쇠를 꺼내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두 사람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이놈들아. 한국에서 태어나면 무조건 군대에 끌려가야 된다고. 군대 안 가도 되는 나라에서 태어난 새끼들이 말이 많아.. 안에 들어가서 내 물건에 함부로 손대면 죽는다. 내말 알아들었어?"
- Yes. Sir.
잠시 후 세 사람은 문을 열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