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54 - 3
널찍한 영화사 세미나실.
맹렬히 타들어가는 폭탄의 심지를 지켜보고 있는듯한 긴장감이 장내를 짓누르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대사를 주고받고 있는 두 주연 여배우에게 쏠려 있었다.
옆에 앉아 있던 성강호가 수빈의 발을 툭툭 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둘 다 눈빛이 장난 아닌데? 며칠 새 사람이 저렇게 확 변해도 되는 거냐?"
수빈은 성강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짧게 대답했다.
"쉿. 조용히 해주세요."
수빈은 일전의 대본 리딩에서 막혔던, 신 18번을 다시 연기하고 있는 두 사람을 냉철하게 바라보면서 머릿속으로는 기타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는 줄감개를 연상하고 있었다. 수빈은 상상 속의 줄감개를 움켜쥐고 천천히 한 바퀴 돌렸다.
- 끼이익.
'아직은 아냐. 충분히 여유가 있어. 더 감을 수 있는 상태야.'
수빈은 손을 들어 연기를 중단시킨 후 하이유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하이유씨."
"네. 감독님."
"당신은 인기 절정의 가수 '레베카'입니다.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죠. 뭐하나 부족할게 없는 여자라는 소리에요. 그런 대단한 여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 하나 쟁취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게 누구 때문이죠?"
"정윤아 때문이죠."
"맞아요. 연적인 정윤아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죠. 그럼 대사에 쌍욕이 들어가 있지 않더라도, 정윤아를 대하는 태도 자체는 거칠어야죠. 무대 위에서 거칠 것 없이 뛰어다니는 게 레베카잖아요. 그런 레베카의 성격이 관객들의 눈에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요? 왜 그렇게 주저주저합니까? 무서워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게 두렵습니까? 그러다... 죽기라도 할거 같습니까?"
수빈의 정곡을 파고드는 질문에 하이유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잠시 후 하이유가 거칠게 내뱉었다.
"알겠어요. 감독님. 감독님 말처럼 설마 죽기야 하겠어요?"
"오케이.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수빈은 김샛별을 바라보며 말했다.
"김샛별."
"네. 감독님."
"너 대본 다 안 읽어봤어?"
"대본이 닳도록 읽어봤어요."
"그런데 아직도 캐릭터 파악이 안돼? 김샛별이 그런 끝내주는 외모를 가지고도 왜 콜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거지?"
샛별이 즉각적으로 대답을 하였다.
"어렸을 때 남자에게 당한 성추행 경험으로.."
수빈이 샛별의 말을 자르고 들어갔다.
"잘 아네? 남자에게 당한 거잖아. 김샛별이 여자를 무서워할 이유가 있나? 내가 쓴 대본에 그런 내용이 단 한 줄이라도 있었어? 김샛별이 여자를 두려워하고 기피한다는 내용이 있냐고?"
"..없었어요."
"근데 왜 도망가? 과거의 상처 때문에 어렵사리 힘들게 겨우 얻은 남자잖아. 그런 소중한 자신의 남자를 가로채려는 악독한 여자가 눈앞에 있는데.. 왜 엉덩이를 빼지? 붙어야지. 싸워야지. 샛별이 네가 훨씬 더 유리한 고지에 있는 거 아냐? 기어오르는 레베카를 밟아버리겠다는 마음으로 대사를 쳐야 할거 아냐. 지금처럼 뒤로 슬슬 빼면서 연기하면 관객들이 납득하겠냐고.."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수빈이 고개를 돌려 세미나실을 둘러보았다. 정적 속에 휩싸여 숨소리조차 안 들리는 고요한 실내를 휘둘러 보며 수빈이 입을 열었다.
"신 18. 다시 갑니다."
다시 두 사람의 연기가 시작되었다. 잠시 후 옆자리의 성강호가 주문을 외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좋아. 아주 좋아. 그렇지. 잘하고 있어. 그래. 그거지.."
- 끼리리리릭.
수빈의 머릿속에서는 줄감개가 다시 천천히 회전을 하고 있었다.
'가능한가? 못 버티고 터질 가능성은? 아직은 괜찮은가?"
결정을 내린 수빈이 다시 손을 들어 두 사람의 연기를 중단시켰다. 옆에서 다급한 성강호의 애절한 목소리가 속사포처럼 들려온다.
"강감독. 어이 강감독. 왜 그래? 잘하고 있잖아. 훌륭하게 잘하고 있다고.."
수빈은 성강호의 만류를 깔끔히 무시하고, 얼음처럼 냉정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며 물었다.
"둘 다 이 영화의 감독인 절 못 믿습니까?"
- 전 믿어요.
- 믿고 있어요.
두 사람의 대답에 냉기가 풀풀 날리는 차가운 어투로 수빈이 말했다.
"근데 왜 그러죠? 연기의 수위를 왜 배우인 당신들이 알아서 정합니까? 감독인 제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언질을 준 적이 있었나요? 절제된 연기를 하고 싶다는 개소리는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런 건 정도연 정도는 돼야 가능한 거니까요. 감독인 제가 별말을 안 하면.. 아. 내 연기가 부족하구나, 많이 모자라구나라는 생각에 점점 더 격렬하게 연기를 해야 하는 게 배우의 역할 아닙니까? 제가 제동을 걸기 전에는 최대한 격하게 연기를 해야죠. 당신들이 감독이에요?"
- 아닙니다.
- 아니에요.
"주위를 둘러보세요. 성강호, 정도연, 마동식.. 이름만 들어도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대배우들이, 당신들 새까만 후배 두 명 때문에 여태껏 대사 한마디 못하고 차가운 의자에 앉아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러다 대배우들 엉덩이에 치질이 걸리게 생겼어요. 그분들에게 죄송스러운 마음은 없는 겁니까? 안 미안해요?"
고개를 푹 숙이는 두 사람을 향해, 수빈이 달래듯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자신을 풀어 놓으세요. 감독인 절 믿으시면 됩니다. 이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당신들이 오버해서, 과하게 연기를 한다고 손가락질하며 욕할 거 같습니까? 정신 나간 미친년들이라며 뒤에서 비웃을 거 같아요? 천만에요. 자신을 내던질 줄 아는 훌륭한 배우라고 입을 모아 칭송할 겁니다. 가는 방법은 다르지만.. 다 같이 영화에 미쳐있고 굶주려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러니까 좀 더 배역에 몰입해서, 자신을 마음껏 뛰놀게 스스로를 풀어주세요."
수빈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굳게 다문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 18 다시 갑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각오를 굳힌 듯 자신의 자리에서 단 한치도 뒤로 물러서지 않은 채 강하게 맞부딪히기 시작했다. 마치 생사가 오고 가는 전장에서 일기토를 벌이는 장수처럼, 배수진을 치고 결사항전을 다짐하는 군사처럼, 불꽃이 튀어 오르는 듯 날이 바짝 선 연기를 펼치고 있는 두 여배우의 격한 열정이 세미나실을 휩쓸기 시작했다.
- 끼리리리릭. 텅.
수빈의 머릿속에서 감기던 줄이 뚝 끊어지며 줄감개가 느슨해졌다.
'더 이상은 무리야. 아니 어쩌면..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
수빈이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자 옆에서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입을 헤벌리고 정신없이 연기를 감상하고 있던 성강호가 깜짝 놀라 허리를 튕기며 황급히 내뱉었다.
"수빈아. 수빈아. 아니 강감독. 강감독. 제발.. 그러면 안 돼. 강감도~옥."
수빈은 성강호가 애달프게 떠드는 소리를 묵살하고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캐릭터를 잘 파악하신 것 같네요. 연기에 임하는 자세도 아주 좋았습니다. 이런 수준의 연기라면.. 나머지 대사들은 굳이 안 들어봐도 되겠습니다. 현장에서 얼마든지 변주(變奏)가 가능한 수준이라서.. 시간 관계상 다음 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두 분 다 훌륭한 연기였습니다."
그 순간 금방이라도 터질 듯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감이 풀어지며, 세미나실 곳곳에서 사람들이 내쉬는 안도의 한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길 잠시. 누군가가 외로이 박수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들불처럼 삽시간에 번져나간 박수소리가 광풍이 되어 세미나실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세미나실이 떠나갈 듯 폭풍처럼 울려 퍼지는 박수소리에, 사람들이 외치는 함성소리가 뒤섞여서 들리기 시작했다.
- 두 분 다 연기 좋았어요.
- 감동받았습니다.
- 하이유 짱! 김샛별 짱!
- 소름 돋는 연기였습니다.
잠시 관망을 하던 수빈은 박수 소리가 그치지 않자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진정되자 수빈이 입을 열었다.
"남들이 보면 영화 시사회라도 한 줄 알겠습니다. 대본 리딩입니다. 대본 리딩. 다들 고정하세요. 시간이 빡빡합니다. 그럼 다음 신 넘버... 응?"
수빈의 눈에, 허리를 숙인 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고 있는 두 주연 여배우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수빈은 사람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20분만 쉬었다 합시다. 주연 여배우 분들이 휴식이 필요할 거 같네요."
사람들이 자리에서 우르르 일어나자 수빈도 휴식을 취하기 위해 세미나실을 나섰다. 세미나실을 나서자마자, 마치 아나콘다가 먹잇감을 조르듯 강하게 자신의 어깨를 감싸오는 굵은 팔뚝이 있었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마동식이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말을 건네왔다.
"강감독님. 오늘 보니 완전 대박이십니다."
그때 수빈을 뒤따라오던 성강호가 펄쩍 뛰어서 팔로 수빈의 목을 휘어감았다.
"독한 놈 아니 독한 감독 같으니라고.."
"아아. 아파요. 놓고 말하세요."
그때 뒤에서 정도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도 같이 가요."
수빈은 슬쩍 뒤를 돌아보며 한마디 했다.
"아니 다들 왜 절 따라오시는 겁니까? 각자들 개인 대기실이 있잖아요?"
성강호가 팔을 풀며 대꾸했다.
"몰라서 물어? 좋은 거 얻어먹으려면 돈 많은 사장한테 붙어야지."
잠시 후 영화사 사장실에서, 수빈은 세 명의 대배우들과 함께 백성철이 내어온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야. 좋은데요? 이거 무슨 찹니까?"
마동식의 질문에 수빈이 대답했다.
"질 좋은 보이차입니다. 몸에 좋은 거니 많이 드세요."
"더 좋아지면 큰일 나는데.."
"근데 왜 자꾸 존댓말을 하십니까? 일전에 편하게 지내기로 한걸로 기억하는데요."
"에이. 사석에서나 그런 거죠. 지금은 공식적인 자리 아닙니까. 강감독님. 근데..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네. 말씀하시죠."
"오늘 보니 영화가 대박이던데.. 다음 작품 혹시 구상하고 있으신 게 있습니까?"
"다음 작품요?"
"네. 다음 작품에서는 저도 정식으로 출연을 한번 하고 싶습니다만.."
마동식의 말에 수빈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야 좋죠. 일전에 말씀하신 대로 둘이서 찐하게 액션 한번 찍어보시죠? 제가 생각해 놓은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피 튀기는 처절한 액션 속에서 피어나는 사나이들의 찐한 우정. 어떻습니까?"
"이야. 말만 들어도 흥분됩니다. 언제쯤이면 다음 영화를..."
그때 홀짝홀짝 차를 마시고 있던 성강호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어이. 동식아. 똥물에도 파도가 있는 거야. 순서를 지켜야지. 새치기를 하면 되겠어?"
그러자 얌전히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던 정도연이 한마디 거들었다.
"다음 작품에서 주연 여배우는 당연히 저겠죠?"
정도연까지 끼어들자 성강호가 입맛을 쓰게 다시며 말했다.
"이번 영화 크랭크인도 안 했는데 다음 작품은 무슨.. 일단 그건 제쳐두고. 강감독. 아까 보니 독하게 몰아붙이데.. 보는 내가 조마조마해서 죽는 줄 알았다."
정도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맞아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 디렉팅 하는 스타일이 굉장히 특이하시던데요? 화도 안 내고 욕 같은 건 하지도 않고.. 배우들이 부족한 점을 정확히 파악해서, 냉정한 얼굴로 조근조근 아주 말로 죽여버리시던데.."
"그게 더 무섭지. 머리도 좋은 감독이 말발로 치고 들어오면, 나같이 무식한 배우는 저항할 방법이 없다고. 조금 있다 내가 리딩 할 차롄데.. 벌써부터 겁난다."
수빈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대배우께서 엄살을 피우고 그러십니까. 걱정 마세요. 살살 해드릴 테니.. 강호형님. 지켜보시니 어때요? 망하지는 않을 거 같습니까?"
"망해? 아까 같은 연기력에 이런 멤버로 망하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진다. 아무리 개봉을 해봐야 아는 게 영화라지만.. 적어도 본전은 확실히 뽑고도 남을 거다.
"다행이네요. 자.. 다들 그만들 일어나시죠."
성강호가 일어나며 슬쩍 던졌다.
"살살 부탁해요. 강감독님."
수빈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형님. 저만 믿으세요."
잠시 후 휴식시간이 끝나고 다시 대본 리딩이 시작되었다. 세미나실에서 수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성강호씨. 똑같은 이야기를 또 해야 합니까? 지금 당신이 맡은 역할은 동네 슈퍼마켓 사장입니다. 조폭도 아니고 형사도 아니고 하물며 왕도 아니에요. 슈퍼 사장 눈빛이 그렇게 매서우면 손님이 기분 나빠서 물건 사겠어요? 가게 말아먹을 일 있습니까? 눈에 힘을 빼고, 허리를 더 숙이세요. 조금 간사할 정도로 보이는 게 차라리 더 낫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알겠습니다. 감독님."
"깐느의 여왕이라는 분 연기가 왜 그런 거죠? 제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요? 지금 이 시점에서 이도희는 마음이 죽은 사람입니다. 사막처럼 메마른 감성의 소유자라고요. 그런 여자 눈빛이 그래요? 지금 그 눈빛은 남자랑 소풍 가기로 약속해서 들떠있는 여자의 눈빛 같은데요? 애인이랑 데이트라도 하러 갑니까? 무미건조한 눈빛을 보여주셔야죠."
"죄송해요. 감독님. 다시 할게요."
"마동식씨. 아무리 카메오라지만.. 기본적인 역할은 해주셔야죠. 물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의사들이 말을 다 잘 하는 건 당연히 아닙니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선입견이라는 게 박혀 있어요. 배우는 관객들의 기대에 부합하는 연기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마동식씨의 연기는 누가 봐도 물리치료사 아니면 헬스 트레이너죠. 누가 그쪽을 보고 국가고시를 패스한 의사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대사의 딕션에 신경을 쓰고 좀 더 자연스럽게 연기를 하세요."
"주의하겠습니다. 감독님."
수빈의 날카로운 지적과 거기에 호응하는 배우들의 열연 속에 대본 리딩이 무사히 끝나가고 있었다.
2월 6일 화요일
수빈은 아침 일찍부터 걸려오는 전화를 연달아 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