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172화 (172/236)

#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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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인사말이 오고 간 뒤 웨이터에게 가장 비싼 코스 메뉴를 주문한 후, 수빈은 자신의 정면에 앉아있는 정도연을 보며 말했다.

"어제 성강호 형님의 전화를 받고 많이 놀랐습니다. 아직까지도 제 가슴이 뛰어서 진정이 잘 되지 않네요. 개인적으로 정배우님의 빅 팬입니다."

수빈의 말에 정도연이 손으로 입을 슬쩍 가리며 웃으면서 대답했다.

"오홍홍. 감사해요. 저도 강감독님의 팬이랍니다."

"좋아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여기 계신 두 분 다 워낙 바쁘신 분들이라서..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여쭤보겠습니다. 혹시 제가 찍는 영화에 카메오가 아니라, 정식으로 계약을 맺고 출연 하시길 원하시는 겁니까?"

"어머. 강감독님. 터프하시다. 굉장히 직설적이시네요. 솔직히 말하면.. 그럴 마음이 조금 있어요. 그러니 강호 오빠를 통해서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겠죠?"

"다행입니다. 기대는 했지만 막상 아니라고 그러시면 어떡하나 걱정을 많이 했었습니다. 정배우님에게 그런 마음이 있으시다니, 제작자 겸 감독의 입장으로서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근데.. 제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여쭤봐도 될까요?"

"그래요. 이왕 이렇게 된 거.. 강감독님이랑 같이 작업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서로 터놓고 이야기하는 게 편하겠죠. 제가 내숭 떨 나이도 지났고."

"감사합니다. 그럼 여쭤보겠습니다. 이번 영화의 주요 배역들은 일찌감치 제 마음속으로 내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소지영' 역할을 할 여배우만 제가 미리 선정을 못해서, 여러 여배우들의 포트폴리오를 받아서 그중 몇 명에게 출연 제안을 했었죠. 물론 제가 다 까였습니다만.."

그 순간 정도연이 가볍게 치고 들어왔다.

"미친년들이네요. 굴러온 복을 제 발로 차버리다니.."

정도연의 거침없는 발언에 수빈이 성강호를 슬쩍 쳐다보니, 성강호가 태연한 표정으로 설명을 해주었다.

"신경 쓰지 마. 도연이가 원래 입이 좀 걸은 편이야."

"아무튼, 정배우님은 그동안 쌓아 놓은 필모그래피 만으로도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대배우이십니다. 포트폴리오에 한 줄 기입할 단역 역할이 필요한 신인 여배우가 아니시라는 거죠. 정도연이라는 이름 석자만으로도 모든 감독들이 자신의 영화에 나와주길 바랄 겁니다. 그런 분이 왜? 무슨 연유로? 초보 감독이 찍는 제 영화에, 몇 신 되지도 않는 조연으로, 정식 계약까지 하시면서 출연을 하시려는 겁니까? 제가 잘 이해가 안 돼서요."

수빈의 말에 정도연이 고개를 돌려 의혹 어린 눈으로 성강호를 바라보았다.

"어이. 도연아.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오빠. 나한테 강감독이 이런 분이라고 이야기 한적 없잖아요? 어제 통화할 때도 그냥 알았다고만 하시더니.."

"내가 대가리에 총 맞았냐? 꽁꽁 숨겨두고 나만 찾아먹어도 시원찮을 판에.. 내가 왜 다른 배우에게 강감독 좋은 점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냐? 경쟁자만 잔뜩 늘어날게 뻔한데.. 네가 내 입장이라면 안 그랬을 거 같냐?"

"그래도 이건 아니죠. 오빠랑 나랑 그런 사이인가요?"

성강호가 정도연의 성난 눈을 슬쩍 피하며 중얼거렸다.

"이미 시집가서 잘 살고 있는데 굳이 내가 부추길 필요까지는 없잖아.."

잠깐 씩씩거리던 정도연이 수빈을 직시하며 말했다.

"강감독님. 제가 보기엔 감독님은 본인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아직 파악을 못하고 계신 거 같아요."

정도연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수빈이 이해를 못하고 있을 때, 성강호가 치고 들어왔다.

"도연아. 네가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해두는데.. 강감독이 머리가 나쁘거나 눈치가 둔해서 그런 게 절대 아냐. 강감독 머릿속에는 좋은 영화를 찍겠다는 생각밖에 없어서 그런 거라고. 감독으로서의 갑질이니 유세니 하는 그런 시답잖은 일에는 관심이 전혀 없는 친구야. 뒷돈이나 여배우들 몸 로비 같은 건 아예 생각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도대체 두 분이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수빈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성강호가 열을 내며 대꾸했다.

"어이. 강감독. 정도연이라고 너무 숙이고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야. 천만 감독이 어디 길가에 나뒹구는 돌멩이처럼 흔한가? 그것도 20대 초반의 젊고 능력 있는 감독이라면.. 배우들에게 있어서 앞으로 몇 십 년 동안 명작들을 숱하게 찍게 해줄 튼튼한 동아줄과도 같은 거라고. 아니 엄청난 보물이 묻혀 있는 보물섬이라고 봐도 무방할 거야."

성강호가 흥분한 마음을 달래려는지 잠시 숨을 돌린 후 말을 이었다.

"일반인들이야 잘 모르겠지만 영화 좀 찍어봤다는 배우들은 뼈저리게 잘 알고 있지. 연기력이고 나발이고, 무조건 감독 잘 만나는 게 장땡이라는걸. 대중들이 잘 모르는 무명 배우가 갑자기 뜨고 나면 한 번씩 그런 기사가 나오지? 배우의 재발견이니 뭐니 하며 말이야. 재발견은 개뿔.. 감독 잘 만나서 뜬 거지. 그 배우가 그전에는 뭐 연기를 못해서 못 떴나? 배우에게는 능력 있는 감독이 갑중의 갑이고 상전 중에 상전이야. 그러니 강감독이 도연이처럼 이미 다 늙어빠진 여배우한테 그렇게 고분고분하고 조심스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야."

성강호의 말에 수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전 장감독님이랑 공동 감독으로 영화 한편 찍은 게 경력의 전부입니다만.."

성강호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이것 봐. 강감독. 설마.. 내가 강감독이랑 친해서 이번 영화에 출연하는 걸로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친분은 친분이고 작품은 작품이야. 내가 누구랑 친하다고 아무 영화에나 막 나가는 그런 배우로 보여? 강감독 작품이니까 군소리 안 하고 도장 찍은 거라고. 솔직히 말해줄까?"

성강호가 갑자기 식탁 위에 놓인 물컵을 들고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다 마신 물컵을 식탁 위에 힘차게 내려놓으며 성강호가 말을 이었다.

"달빛이 지금 천사백만 가까이 들었다지? 이 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아. 그게 강감독 작품이라는걸. 말이 공동감독이지. 편집, 각본, 액션, 연기, 음악.. 다 강감독이 만져줘서 그 정도로 나온 거 아냐? 내 말이 틀려? 장감독 혼자였음 잘해야 4~5백만 들었겠지. 지금 내 주위에 강감독이랑 자리 한번 만들어달라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제작자며 배우며 작가며.. 줄을 선다 줄을 서. 그나마 내가 영화판에서 위치가 좀 되니까 안된다며 버티고 있는 거라고. 그뿐인 줄 알아? 얼마 전 봉감독이..."

그때 정도연이 끼어들었다.

"봉감독님 이야기는 저도 들었어요. 비록 무산되었지만, 봉감독님이 찍기로 한 'SAT'라는 작품에서 강감독님이 영화 음악을 맡기로 하셨다면서요? 각본 수정 작업까지 직접 하셨고요. 얼마 전 봉감독님이 사석에서, 자신의 잣대로 함부로 잴 수 없는 뛰어난 재능의 감독이라며 강감독님 칭찬을 하셨대요. 제가 강감독님 영화에 출연을 해볼까 하는 이유도 그 이야기를 들어서에요. 얼마나 뛰어나면 봉감독님이 그런 칭찬을 할까라는 의문이 들어서 한번 만나 봬야겠다는.."

성강호가 정도연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까고 있네. 어디서 씨알도 안 먹힐 구라를 쳐.."

정도연이 목을 홱 돌려 성강호를 매섭게 째려보자, 성강호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강감독 능력이야 소문난 지 오래됐잖아? 이 바닥에서 톱클래스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고. 솔직히 말해봐. 겁나서 그러는 거지?"

성강호의 질문에 정도연이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 채 대답을 못하자, 수빈이 대신해서 질문을 던졌다.

"겁나서 그렇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강감독. 강감독은 한국 영화판에서 탑 3에 드는 감독이 누구라고 생각해?"

수빈이 지체 없이 대답했다.

"봉순호, 박찬옥, 최명훈. 이 3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빈의 말에 성강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 감독들의 공통점이 뭔 줄 알아? 다들 자신들의 패밀리라고 부르는 배우들이 있어. 특정한 감독과 여러 작품들을 계속해서 같이 작업하는 배우 집단이 있다고."

"아.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그런 패밀리라고 불리는 배우들의 명단 그 어디에도 정도연이라는 이름 석자는 없어. 봉순호, 박찬옥, 최명훈 이 3명의 감독이 도연이에게는 말이야. 캐스팅은커녕 아예 시나리오조차도 안 보여 준다고. 뭔 말인지 알아? 깐느의 여왕이니 연기력이 특출한 배우니 떠들어봐야.. 도연이는 천만을 달성한 영화에 단 한 번도 출연한 적이 없어. 도연이 보고 천만 배우라고 불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아니.. 그분들이 정배우님에게는 왜 시나리오를 안 주는 거죠?"

"그거야 내가 감독이 아니니까 나도 잘 모르지."

그 순간 정도연이 자조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안 예뻐서 그래요."

성강호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 아무튼, 좋게 말하면 도연이가 불만이 많았을 거고.. 솔직히 말하면 입에서 쌍욕이 절로 나오는 일이지. 그런 와중에 말이야. 젊은 나이의 신인 감독이 혜성처럼 등장한 거야. 20대 초반에 제작한 첫 작품으로 무려 천사백만을 찍은 유능한 감독이 말이지. 근데 또 문제가 발생한 거야. 사람들이 그 감독의 패밀리라고 부르는 배우 집단에 정도연의 이름은 또 빠져있다는 거지. 미치고 환장하는 거지. 겁도 덜컥 났겠지. 그럴 때.."

수빈이 성강호의 말을 잘랐다.

"혜성처럼 등장했다는 젊은 감독이 저를 지칭하고 있다는 건 잘 알겠습니다. 근데.. 제가 패밀리가 따로 있나요?"

"사람들이 벌써 추려놨지. 나를 포함해서 김해수, 김샛별 거기에 하이유까지.."

성강호의 말에 수빈이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도 모르는 패밀리가 벌써부터 있군요."

"드라마나 영화 제작 스태프들의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 옆에서 지켜보면 각이 나오는 거지. 도연이가 겁이 덜컥 났을 거야. 강감독마저 자기를 안 찾으면 어떡하지? 난 평생 천만 배우라는 소리는 못 듣고 늙어죽는 게 아닐까?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을 거야."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는지 조금은 편해진 얼굴의 정도연이 말했다.

"오빠.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진짜로.."

못 들은척 성강호가 말을 이었다.

"도연이 마음 같아선 강감독을 어떡하든 직접 한번 만나고 싶었겠지. 근데.. 이 바닥에는 암묵적인 룰이 있어. 여배우가 그런 식으로 감독에게 먼저 접근하면 안 돼. 만약 그랬다간 온간 해괴망측한 루머가 돌아다니게 된다고. 몸주고 배역 땄다 정도면 양호한 수준이지. 도연이 자존심에 차마 그럴 수는 없는 거야. 그런데 말이야. 이게 웬 떡이야? 그 젊은 신인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 카메오로 나와달라고 먼저 부탁을 하네? 내가 전화로 카메오로 나와줄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아마 좋아서 팔짝팔짝 뛰었을거다. 그리고 이 기회를 어떡하든 잡아야겠다고 굳게 결심했겠지. 그래서 오늘 만남이 이루어진 거라고."

성강호가 정도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말이 틀렸냐? 틀린 게 있음 어디 한번 말을 해봐라. 도연이 넌 나에게 고마워해야 해. 내가 너랑 같이 '밀항'을 찍은 그 인연으로 강감독이 나에게 부탁한 거라고. 나 아니었음 수간호사 카메오 역할은 아마 해수가 했을거다."

마치 성강호의 말을 인정한다는 듯, 별다른 이견 없이 정도연이 가만히 앉아만 있자 수빈이 물었다.

"정배우님. 강호 형님 말씀이 맞습니까?"

"오빠 말이 100프로 다 맞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해요. 전 강감독님이랑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요. 이번 작품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시나리오 정도는 받을 수 있으면 해요. 제가 너무 욕심이 많나요?"

수빈이 고개를 저으며 단호한 어투로 대답했다.

"천만에요. 아까 제가 말씀드렸죠? 제가 정배우님 팬이라고요."

수빈이 의자 옆에 놓여 있는 가방을 집어 들어 식탁 위로 올렸다. 주섬주섬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하나를 꺼낸 수빈은 식탁 위에 서류 봉투를 올린 후 정도연 쪽으로 밀었다.

정도연이 서류 봉투를 집어 들며 물었다.

"이게 뭔가요?"

"어젯밤에 작업한 수정 대본입니다. 어제 강호 형님으로부터 정배우님이 제 영화에 정식으로 출연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소리를 듣고서, 제가 밤을 새워 대본을 수정했습니다. 수간호사 출연 분량을 좀 늘이고, 대사도 많이 집어넣어서 캐릭터 자체를.."

- 쿵. 쿵. 쿵.

갑자기 터져 나오는 충돌음에 깜짝 놀란 수빈이 고개를 돌려서 쳐다보니, 성강호가 허리를 숙인 채 식탁에 머리를 들이박고 있었다.

"형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식탁에 머리를 박은 상태로 성강호가 마치 혼이 날아간 듯 무력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아이고. 난 뒤졌다.. 강감독. 요 근래 해수랑 통화한 적 없지?"

"네. 저도 좀 바쁘고 해서 없습니다만.."

성강호가 천천히 허리를 일으켜 세우더니, 오른손으로 붉게 달아오른 이마를 쓰다듬어며 말했다.

"하기야 해수가 아무리 강감독하고 친한 사이라고 해도.. 그런걸로 연락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성강호가 공중으로 길게 한숨을 내뿜었다.

"후우.. 나 때문에 도연이에게 카메오 역할이 돌아갔다고 내가 해수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아냐? 나중에 차기작에서 자기 말고 도연이가 뽑히면 책임질 거냐며 얼마나 쥐잡듯이 잡던지.. 그나마 도연이가 맡은 역할이 엑스트라에 가까운 역할이라서 겨우 넘어갔었는데."

성강호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말을 이었다.

"출연 분량이 늘어났다는 걸 해수가 알게 되면.. 이제 난 죽은 목숨이다. 강감독. 그냥 원작대로 가면 안 될까?"

그 순간 옆에서 째지는듯한 하이 소프라노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오빠! 장난쳐? 오빠가 뭔데? 감독이 까라면 까야지 뭔 개소리야."

수정 대본이 자신의 생명줄이라도 된 양 강하게 움켜진 정도연이, 당장이라도 포를 뜰 듯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성강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2월 5일 월요일

수빈은 아침 일찍 일어나 보통 때보다 이른 시간에 영화사로 출근했다. '나는 죽기 싫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대본 리딩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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