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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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하이유와 함께 월악산에서 안전하게 하산을 하였다. 덕주사 주차장에 도착한 수빈은 하이유를 밴에 태워 배웅을 한 다음 자신의 밴에 올라탔다.
"어떻게 된 거야? 잘 안된 거야? 예상보다 너무 빨리 내려온 거 같은데."
차에 올라타자마자 다급히 물어오는 백성철의 질문에 수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잘 됐어요. 정상까지 안 올라가서 빨리 내려온 것뿐이에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잘 풀린 거 같아요."
"그래? 다행이네."
"이틀 뒤에 대본 리딩이 있죠? 그전에 성강호 형님을 좀 만나서 의논을 했으면 좋겠는데. 오늘은 이미 늦었고.. 내일 말고는 시간이 없겠네요. 형님이 내일 시간이 되시려나 모르겠네."
그때 백성철이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수빈아. 그전에 말이다. 네가 없을 때 샛별이 아버지한테서 전화가 왔었어. 나랑 제법 길게 통화를 했었는데.. 이걸 뭐라고 말을 해야 되려나."
수빈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작전이 실패했다고 그러죠?"
백성철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
"모를 리가 없죠. 실패할걸 알면서 꾸민 작전이었으니까요."
"응? 그런 거였어? 샛별이 아버지 말로는 한 2~3초?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당황해하고, 금방 알아채버려서 완전 실패로 끝났다고 많이 미안해하더라고."
"그럴 거예요. 형은 잘 모르겠지만 샛별이 몸은 예사 몸이 아니에요. 지독히도 사람을 가린다는 그 어려운 '천성무영각'을 익힐 수 있는 특별한.. 흠. 이렇게 말하면 잘 모르시겠구나. 쉽게 말하면 골격계, 신경계, 감각계 등이 일반인들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뛰어난 체질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 샛별이를 어설프게 급조한 트릭으로 속여 넘긴다? 아주 잠깐이면 몰라도 제가 짠 속임수를 금방 알아챘을 겁니다."
의문에 찬 표정으로 백성철이 물었다.
"그러면 힘들게 작전을 왜 짠 거냐? 실패할걸 뻔히 알면서.."
수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가정을 해봐요. 형이 형수에게 선물을 사줬다고 말이죠. 첫 번째 경우는, 형이 선물을 주길래 형수가 별생각 없이 받았어요. 두 번째 경우는, 완전히 똑같은 선물이지만 그걸 형이 아주 힘들고 어렵게 구했다는 걸 형수가 이미 알고 있어요. 그럼 선물을 받았을 때 형수가 느끼는 감정이 양쪽 모두 똑같을 거 같아요?"
"당연히 두 번째 경우에 더 많은 감동을 받겠지."
"그런 겁니다. 사람들은 선물에 담겨있는 내용물의 가격이나 브랜드가 중요하다고 착각을 하죠. 하지만 실제로 감동을 주는 건, 그 선물에 담겨있는 정성과 노력입니다. 몇 천만원 하는 에르메스 버킨백 보다 자필로 정성 들여 쓴 편지와 십만원짜리 상품권이 더 감동스러운 법입니다."
수빈의 말에 백성철이 입맛을 쓰게 다시며 말했다.
"수빈이 말에 다 동의하지만.. 마지막 백 이야기는 틀린 거 같다. 와이프라면 백에 더 감동받을 거 같은데."
"그런 건 그냥 좀 넘어가세요. 아무튼, 작전은 실패하더라도 생색은 최대한 내야만 하는 겁니다. 감독과 선배 배우가 이렇게 힘들게 작전을 꾸미면서까지, 샛별이 너에게 관심과 신경을 쓰고 있다는 티를 팍팍 내줘야 한다는 거죠. 그래야 보다 큰 감동을 이끌어 낼 수 있고, 샛별이의 연기에 대한 자신감을 고취시킬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아주 짧은 찰나에 불과했겠지만, 그 몇 초간의 경험으로도 분명히 얻는 게 있을 겁니다. 그 몇 초가 극중 "정윤아' 연기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단초가 되어줄 수 있을 거예요."
수빈의 말에 백성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슨 뜻인지 이제 알겠다. 이제 서울로 돌아가면 되는 거지?"
"네. 형. 집으로 가요."
"알았다. 가는 동안 한숨 자라. 그리고.. 백은 네가 틀린 거야."
"네. 네. 잘 알겠어요."
백성철의 고집스러운 주장에 수빈이 웃으며 대꾸할 때, 갑자기 수빈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성강호였다. 수빈이 전화를 받았다.
"형님. 안 그래도 전화드리려고 했었는데.. 잘 됐네요."
[응? 왜?]
"작전이 다 완료되어서요. 결과를 보고드릴 겸 월요일 대본 리딩전에 둘이 만나서 의논을 좀 할까 해서요."
[그래? 결과는 잘 나온 거냐?]
"네. 형님.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잘 끝난 거 같습니다. 기대를 살짝 해봐도 좋을 거 같습니다."
[역시 천만 감독 강감독이야. 능력이 좋아.]
"칭찬 감사합니다. 근데.. 어쩐 일로 전화를 주신 겁니까?"
[아. 강감독 내일 시간 되지?]
"그럼요. 시간 됩니다. 안 그래도 내일 형님이 시간이 되면 만날까 하고 있었다니까요."
[잘 됐다. 내일 다 같이 보면 되겠다. 일전에 강감독이 나보고 섭외를 부탁한 정배우 있잖아. 간호사 역할로 카메오 출연을 해줬으면 한다던..]
성강호의 말에 수빈이 반색을 하며 물었다.
"아. 그분이 하시겠다고 하던가요?"
[그게 말이야. 좀 전에 연락이 왔었는데, 시나리오를 몇 번 읽어봤다네. 그러면서, 일단 먼저 강감독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는데.]
"저를요? 카메오로 출연을 하기 전에 저를 만나보시겠다고요?"
[그래. 이거 내 짐작이긴 한데.. 아무래도 배역 욕심을 좀 내나 봐.]
"배역 욕심을요? 그분이요? 그럴 리가 없는데. 혹시.. 형님이 그분이 하실 역할을 잘못 알려드린 거 아닙니까?"
[그럴 리가 있겠냐? 극중 수간호사 역할이라고 내가 분명히 말했지.]
"그 역할은 스크린에 4신 밖에 안 걸립니다. 전부 다 병원 신이라 하루면 촬영이 다 끝날 분량이고요. 특별히 욕심낼 역할이나 분량이 아닌데.."
[그걸 누가 몰라서 그러나. 허어. 이거 이거.. 이제 보니 요점을 전혀 파악을 못하고 있네. 하기야 강감독이 이 바닥 물을 먹은 지 얼마 안 된 신인 감독이긴 하지. 강감독이 이제야 좀 사람같이 보이는군. 사람이 그런 맛도 있어야지.]
핸드폰 너머 성강호가 즐거워하는 모습이 수빈의 눈에 선하게 보였다. 꾹 참고 수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님. 제가 지금 어떤 점을 놓치고 있는 거죠?"
[강감독은 지금 문제의 본질을 전혀 파악을 못하고 있어. 영화에서 카메오와 일반 출연자가 다른 점이 뭐라고 생각해?]
"출연료 아닙니까. 카메오는 감독이나 출연 배우들과의 친분 때문에 잠시 얼굴을 내비치는 거고, 일반 출연자들은 계약을 한 후 돈을 받고 출연을 하는 거죠. 저도 카메오로 몇 번 출연을 해봐서 잘 압니다."
[땡. 그건 영화를 관람하는 일반 대중들의 마인드고. 연예가 중계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천만 감독이 하면 곤란하지.]
"그럼 뭔가요?"
[그건.. 숙제야. 내일 만날 때까지 생각을 해 보라고. 내일 2시쯤 어떤가? 점심이나 같이 하면서 보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숙제라는 말에 수빈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전 좋습니다. 형님. 제가 쏠 테니, 그분이 원하시는 어디라도 상관없다고 전해주세요."
[알았어. 천만 감독한테 한턱 얻어먹어 보자고. 시간은 그렇게 하고.. 장소는 잡히는 데로 문자로 쏴주지.]
"알겠습니다. 형님."
[그럼 내일 보자고.]
수빈은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뭐지? 카메오에 대해서 내가 뭘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걸까? 감독이 특별히 알아야만 하는 내용이 있는 건가.. 후. 모르겠군.'
수빈은 핸드폰을 꺼내어 카메오에 대해서 검색을 해보았다.
[카메오 : 영화나 방송에서 직업 연기자가 아닌 유명인사가 잠시 얼굴을 비추거나 배우가 평소 자신의 이미지에 걸맞지 않은 단역을 잠시 맡는 것 또는 그 역할]
유명 포탈의 시사상식사전에 나온 내용을 읽어보던 수빈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알고 있는 거랑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걸까.."
수빈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몸을 뒤로 젖혀 시트에 등을 묻은 채 고민에 빠졌다.
'문제가 잘 안 풀릴 때는 기본으로 돌아가야지. 이럴 때 제일 필요한 건 역지사지의 마인드야. 만약 내가 정배우라면.. 왜 배역에 욕심을 부리는 걸까? 왜 날 보자고 하는 걸까? 나에게 원하는 건 과연 뭘까?'
그때 수빈의 머리통을 강하게 후려치는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설마 이건가? 정말로? 그렇다면.. 이건 대박이다. 물실호기. 절대 놓칠 수 없는 찬스야.'
수빈은 황급히 시트에서 튕기듯 일어나, 똑바로 허리를 곧추세우며 중얼거렸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밴에 있는 노트북을 집어 든 수빈이 서둘러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그 모습을 룸미러로 지켜보던 백성철이 말했다.
"수빈아. 좀 쉬라니까 뭐 하는 거냐? 할게 있으면 이따 집에 가서 천천히 해도 되잖아."
"아뇨. 형. 시간이 모자라요. 내일 약속시간까지 다 끝내야만 해요."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며 무섭게 집중하는 수빈의 모습을 보며 백성철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다음날 아침 10시경.
밤새 작업을 한 수빈은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좋아. 하루 만에 한 것치고는 맘에 드는군. 이 정도면 한번 밀어붙여 볼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수빈은 작업한 내용을 출력하며 시간을 확인하였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군. 잠시라도 눈 좀 붙여야겠어.'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수빈은 쪽잠을 청했다.
시간이 흘러 오후 1시 30분경.
수빈은 신라호텔 23층에 위치한 한식 전문점 '가연'의 룸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산타워를 쳐다보며 앞으로의 일정과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점검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문쪽을 쳐다보니, 성강호가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히죽히죽 웃으며 룸 안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있는 수빈을 발견한 성강호가 손을 높이 쳐들며 말했다.
"어이. 강감독. 빨리 왔나 보네."
수빈은 헤죽헤죽 웃으며 손을 높이 쳐들고 말했다.
"오셨습니까. 형님."
수빈을 바라보던 성강호가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이거 영 불길한데.. 강감독이 웃고 있는 거 보니 아무래도 숙제를 풀은 모양이야."
수빈이 환하게 웃으며 한자 한자 또박또박 끊어서 말했다.
"포. 트. 폴. 리. 오."
성강호가 인상을 확 구기더니 짜증을 내며 말했다.
"제길.. 내가 이래서 학교 다닐 때부터 머리 좋은 인간들을 싫어했다고. 얼마 만에 알아챈 거냐?"
"1분 정도? 전화 끊고 금방 알아챘습니다. 배우든 감독이든 카메오로 출연한 작품은 포트플리오에 올라가지 않죠. 조연이든 주연이든 정식으로 계약을 한 작품만이 포트플리오에 등재되는 거니까요."
"후.. 그 말이 맞아. 누가 어느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했다는 건 그냥 일반인들의 가십거리에 불과하지. 배우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그냥 지인의 영화 흥행을 도와주는 차원에서 상부상조하는 거야. 내가 엘지 유니폼을 입고 잠실 야구장에서 시구를 했다고 해서, 내가 그날 시합에서 뛴 건 아니잖아? 그거랑 똑같은 거야."
"비유가 좀 이상하긴 합니다만.. 아무튼 정배우께서 제가 찍는 영화에 정식으로 계약을 하고 출연할 마음이 있다는 뜻이죠? 그걸 깨닫고.. 어제 오후부터 설레서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잤습니다."
"그거야 나도 정확히는 모르지. 어제 내가 말했잖아. 짐작이라고.. 조금 있다 본인에게 직접 들어보면 알겠지. 그것보다.. 우리 영화 여배우 이야기부터 해보자고. 작전 수행 결과가 어떻게 된 거야?"
"누구부터 해드릴까요?"
"하이유부터 해봐. 결과가 어떤지 한번 들어보자고."
수빈이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하배우에게 살아오면서 3번의 안 좋은 경험이 있더라고요. 결국 그게 누적이 되어서, 타인을 대할 때 가면을 쓰고 살아가게 된 것 같습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생존 본능인데.. 그게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강력하게 작동하는 거죠."
"그랬군. 강감독이 말을 안 해줬으면 나도 발견을 못했을 거야. 듣고 나서 보니 어렴풋이 보이더라고.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거야?"
"첫 번째는.. 하배우가 아주 어렸을 때라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만 아주 더운 여름날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하배우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셨는데, 지방에 일거리가 있어서 하배우와 남동생을 집에 남겨두고 갔다고 하더군요. 근처에 사는 이모에게 애들을 좀 봐달라고 부탁을 하고 말이죠. 그리고 혹시 이모가 오기 전에 애들이 집밖으로 나가서 사고가 날까 봐 문을 잠그고 나갔답니다."
"말로만 들어서는 별문제가 없었을 거 같은데?"
"근데 이모가 이틀이 지나서 삼 일째 아침에 찾아왔답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말이죠. 문제는.. 가난한 집안이어서 집안에 먹을게 하나도 없었다고 하더군요. 이틀 내내 굶었답니다. 어린 나이에 괴롭고 무서웠겠죠. 하선배 이야기로는 그때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극심한 공포를 느꼈답니다. 어려서 죽음이란 게 뭔지는 정확히 몰랐겠죠. 오래된 기억이라 좀 부정확한 것도 있을 겁니다. 남동생은 너무 어려서 기억조차 못한다고 하더군요."
수빈의 말에 성강호가 혀를 차며 안타까워 했다.
"쯧쯧. 이틀 굶는다고 죽는 건 아니겠지만, 그건 어른들이나 하는 생각이지. 애들이 뭘 안다고.. 그 어린게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그때의 기억이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기는 하지만, 워낙 어릴 때의 일이라 어떻게 잘 넘어갔다고 하더라고요. 망각(忘却)을 하기 쉬운 나이기도 하고요. 두 번째는.. IMF 시절이었다고 하네요. 그때 집안이 완전히 기울어져서, 결국 부모님과 헤어지고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배우 말로는 부모님과 헤어지기 싫어서 며칠을 울었답니다. 그리고.. 굳게 결심을 했다는군요. 돈을 많이 벌기로요. 초등학생이었지만 자신에게 닥쳐왔던 모든 고통들이, 결국 가난 때문에 발생했다는 걸 깨닫게 된 거죠."
"눈물 나는 스토리로군. 근데.. 뭔가 좀 이상한데? 하이유는 가수로 데뷔해서 대박이 났잖아. 돈도 많이 벌은 걸로 아는데. 그럼 이제 아무 문제없는 거 아냐?"
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떼돈을 벌었죠. 빚도 다 갚고 집안을 완전히 일으켜 세웠죠. 하지만.. 세 번째 안 좋은 경험이 데뷔 시절에 있었습니다. 그때가 2008년 9월 초였다고 하더군요. 하배우가 수십 번의 오디션 끝에 기획사에 합격을 하고, 가수 데뷔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을 때라고 합니다. 앨범 녹음도 잘 끝마쳤고, 방송 무대를 연습하고 있었답니다. 하배우가 2008년 9월 18일 '엔카운트다운'에 '마야'라는 곡으로 데뷔를 했으니까.. 방송 데뷔 열흘 전쯤이었겠죠."
그때 성강호가 수빈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가만있어 봐. 2008년 9월쯤이라면.. 나도 떠오르는 게 있는데 혹시 그 사건인가?"
수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형님이 생각하는 사건은 10월에 일어났습니다. 하배우가 데뷔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한 남자 배우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미 고인이 되신 분이라 자세하게 말씀드리기는 그렇고.. 아무튼 뉴스가 떠들썩하게 났었죠. 그때 하배우가 충격을 좀 받았다고 합니다. 연예인이라고 해서 다 행복한 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네요. 자신도 며칠 후면 연예인이 되니까, 아무래도 받아들이는 게 일반인들과 달랐겠죠."
"듣고 보니 누군지 알겠군.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이었다고 들었어."
"금방 잊어버리고 다시 데뷔 준비를 열심히 했다고 하더군요. 형님 말처럼 경제적인 문제였다고 하니, 성공만 하면 자신에게는 그럴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을 한 거죠. 그리고 성공적으로 데뷔를 했습니다. 그리고 데뷔한지 열흘 만에.."
성강호가 말을 받았다.
"국민 여배우라고 불리던 그녀가 세상을 떠났지. 나도 엄청 충격받았어. 우울증 때문이었다고 들었는데.. 기억이 새록새록 하게 나는군."
"그때 하배우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답니다. 워낙 유명한 여배우였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없는데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어린 나이에 도무지 이해가 안 됐던 거죠. 하배우가 16살 때 일어난 일이었으니.. 모든 걸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겠죠. 그때의 충격으로 잊어버린 줄 알았던 어렸을 때의 기억, 즉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다시 엄습했다고 합니다. 데뷔해서 돈만 많이 벌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 걸 깨달은 거죠."
성강호가 양손을 깍지 껴 머리 위로 올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결국 그 모든 게 겹쳐져서 지금처럼 방어 본능이 강하게 작동되는 거로군."
"전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본인 스스로는 극복했다고 주장하지만.. 그런 일들은 말처럼 쉽게 극복되는 게 아니죠."
"그걸 강감독이 어떻게 해결을 한 건가?"
수빈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가 무슨 재주로 해결합니까? 전 신이 아닙니다. 정신과 의사도 아니고요. 그리고 그런 문제는 하루아침에 고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길게 보고 치유해 나가야죠. 전 그냥.. 진지한 태도로 열심히 들어줬을 뿐입니다. 그리고 제 경험도 조금 들려줬죠. 그게 답니다."
"그 정도로 변화가 있을까?"
"전 분명히 있을 거라 봅니다. 무대에서 노래할 때의 생명력 넘치는 하배우를, 연기 때에도 소환만 할 수 있다면.. 극적인 변화도 가능할 거라 봅니다. 그리고 자신의 문제점을 정확히 인식했다는 게 제일 중요한 거죠. 병명을 알아야 치료도 시작할 수 있는 거니까요."
"제발 그랬으면 좋겠군. 이제 샛별이 이야기를 해보자고."
"네. 형님."
-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룸의 문이 열리며 한 명의 여성이 안으로 들어섰다. 한때 자신이 유행을 시켰던 업스타일 머리를 하고, 검은색 재킷에 옅은 푸른색 스키니진을 입고서, 한 손에는 선글라스를 들은채,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를 발견한 수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드디어 만나게 되는구나. 깐느의 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