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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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3일 토요일.
수빈은 주말에 특별한 스케줄이 잡혀 있지 않아 오전 10시가 넘어갈 때까지 늦잠을 자고 있었다. 그때 '삐비빅' 소리와 함께 현관 문이 열리며 백성철 매니저가 집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오고 있었다.
누군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소리에 잠에서 깬 수빈이 침실 밖으로 걸어나가니,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백성철이 일어나며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 때문에 깼냐? 조심해서 들어온다고 했는데.."
"괜찮아요. 오랜만에 푹 자고 일어났어요. 근데.. 아침부터 어쩐 일이세요? 오늘은 별다른 스케줄이 없는 걸로 아는데요?"
백성철이 말없이 손을 들어 거실 창밖을 가리켰다. 수빈이 고개를 돌려 거실 밖을 바라보니 온 세상이 소복이 쌓인 흰 눈에 덮여 있었다.
"어라? 밤사이에 폭설이 내린 모양이네요."
"그래. 오늘 오후 늦게까지 눈이 온다고 하더라. 어제까지만 해도 일기예보에서 진눈깨비 정도라고 했는데.. 날이 추워서 그런지 함박눈이 펑펑 내리더라고. 어떻게 할 거냐?"
"당연히 강원도로 가야겠죠.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오겠어요."
"강원도가 아니라 충북 제천으로 가야 돼."
"응? 왜요?"
"내가 잘못 알았어. 그때 산악 전문가가 치악산 밑쪽에 월악산이 있다고 해서, 당연히 강원도에 있으려니 했는데.. 지도에서 찾아보니 충북 제천 쪽에 있더라고."
"뭐 위치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산악 전문가들끼리야 그렇게 유명한 산 이름만 말하면 다들 알아들으니까 그렇게 말했겠죠. 그것보다.. 조실장한테 연락해서 그쪽으로 오라고 하시고, 우리도 빨리 준비해서 출발하죠."
수빈의 말에 백실장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그게.. 내가 오면서 연락을 해봤는데, 오늘 눈이 이렇게 많이 올 줄 몰라서 이미 행사를 다 잡아놨다고 하더라. 월악산에 가려면 못해도 3개는 펑크 날 거라고 하던데.. 어떡하지?"
"뭘 어떡해요. 회사에서 책임지고 배상하겠다고 알려주시고 행사는 취소하라고 전하세요."
"그래. 알았다."
백성철이 조실장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핸드폰을 꺼낼 때, 수빈은 샤워를 하러 욕실로 걸어갔다.
잠시 후 충북 제천으로 가는 밴 안에서 수빈은 월악산에 대해서 검색을 하고 있었다.
"월악산 최고봉이 영봉(靈峰)인데, 밤에 달이 뜨면 달이 영봉에 걸린다고 해서 '월악(月岳)'이라는 이름이 붙었데요. 그리고 영봉의 높이가 1,000 미터 정도밖에 안된다고 하네요."
운전을 하던 백성철이 말을 받았다.
"맞아. 한라산 절반밖에 안되는 높이야. 수빈이 네가 그때 말했었잖아? 너무 높이가 높아서 산을 올라가다가 진이 다 빠지면 안 된다고. 그리고 겨울 설경이 빼어나야 되고, 사람들이 북적거리지 않는 산이면 더욱 좋겠다고 했었잖아. 그런 조건의 산을 물어봤더니 전문가가 월악산을 추천해주더라고."
"제 생각에는 잘 고른 거 같아요."
"그럼 다행이지. 수빈아. 가는 동안이라도 쉬어라. 담 주부터 또 바쁘잖아. 쉴 수 있을 때 쉬어놔야지."
"알았어요. 형."
수빈을 태운 밴이 고속도로를 타고 충주호 방향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시간이 흘러 오후 1시가 넘어갈 때, 수빈은 월악산을 올라가는 등반 코스 중 하나인 덕주사 주차장에서 하이유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린지 삼십여 분 정도 지났을 때 하얀색 밴이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밴에서 가수 2팀 조실장이 뛰어내리더니 수빈에게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인사를 하였다. 인사를 마친 조실장이 서둘러 밴의 문을 여니, 오는 동안 졸았는지 부스스한 얼굴의 하이유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색 패딩으로 온몸을 감싼 하이유가 눈을 비비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수빈을 발견하였다. 하이유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조실장에게 물었다.
"실장님. 강이사님이랑 제가 절에서 합동 공연을 하는 건가요?"
수빈이 하이유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와 공연을 하는 게 아니라 지금부터 저와 함께 겨울 산행을 해야 합니다."
"네? 겨울 산행요? 갑자기 왜요?"
"제가 영화감독으로서 하이유 배우님께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이왕이면 경치 좋은 곳에서 하는 게 어떨까 해서 이쪽으로 모셨습니다. 행사는 제가 취소시켰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수빈의 눈초리가 부드럽게 휘더니 눈꽃처럼 순백한 미소를 지으며 수빈이 물었다.
"저랑 같이 등산하기 싫으십니까?"
하이유가 묘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단둘이서?"
"네. 저랑 단둘이서만 올라갈 겁니다."
잠시 후 수빈은 하이유와 함께 겨울 산을 타고 있었다.
산행을 시작한 지 1시간 정도 지났을 때, 두 사람은 송계 삼거리를 지나 영봉 쪽으로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묵묵히 산을 타던 하이유가 수빈에게 물었다.
"정상까지 얼마나 남았나요?"
"조금 가파르기는 하지만, 아마 40분 정도면 도착할 겁니다."
"후우. 힘드네요."
"그럼 잠시 좀 쉬었다 갈까요?"
"네. 5분만 쉬어요."
수빈이 주위를 둘러보니 한쪽 편에 3평 정도 되는 조그마한 공터가 보였다. 수빈은 하이유를 이끌고 공터로 걸어갔다.
이름 모를 나무들이 봄이라도 온양 눈꽃을 활짝 피운 채 공터를 보호하려는 듯 빽빽이 둘러싸고 있었고, 차가운 겨울바람이 신을 내며 휘파람 소리와 함께 가끔씩 공터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새하얀 눈송이들이 사방천지로 휘날리고, 마치 뽀얀 안개 무리처럼 이리저리 밀려다니며 공터를 떠다니는 게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환상적이었다.
갑작스런 겨울 산행이 힘에 많이 부쳤는지, 공터에 있는 평평한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은 하이유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름답네요. 온 세상이 다 하얀색 물감으로 색칠을 해놓은 거 같아요."
수빈이 하이유 옆자리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그러네요. 설경(雪景) 산행으로 유명한 산이라고 하더니 정말 아름답군요. 사람의 마음을 순수하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그런 것 같아요. 마치 다른 별에 잠시 놀러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하이유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근데.. 이렇게 아름다운 산에 왜 등산객이 없죠? 오는 동안 한 명도 못 본거 같은데요."
"제가 듣기로는 보통은 동창교 쪽에서 올라온다고 합니다. 그쪽이 시내랑 가깝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쪽 루트로 등산하는 사람은 잘 없다고 하네요."
수빈의 말에 하이유가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 이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해보세요. 일부러 사람이 없는 길까지 골라가며, 절 힘들게 산행을 시키는 이유가 뭔지 너무 궁금해요."
"역시 눈치가 빠르시군요. 이왕이면 속세랑 멀직히 떨어진 멋진 곳에서, 하배우랑 단둘이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데려왔습니다."
"이렇게 멋진 풍경이면 충분하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해보시라고요. 강.감.독.님."
하이유가 호기심과 짜증이 섞여있는 얼굴로 재촉을 하자, 수빈이 빙긋 웃으며 좌우로 고개를 슬쩍슬쩍 돌린 다음 말했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배우의 열성 팬들도, 극성맞은 기자들도, 매니저나 가족들조차 없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에서 오직 저와 하선배 단둘이 있는 거죠. 제가 질문을 하면.. 숨기는 거 없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말고, 솔직하게 대답해 주실 건가요?"
"네."
"아무리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라도?"
"네. 그래요."
"약속?"
"약속해요."
수빈이 빛나는 눈빛으로 하이유를 직시하며 물었다.
"죽음이란 게 너무나 무섭고 두렵죠?"
뜬금없는 수빈의 질문에 하이유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딱딱해졌다가 금방 다시 풀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 하이유가 방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죽음이 안 두려운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요? 그리고.. 제가 나이가 몇인데 벌써부터 그런 걸 생각하나요? 이번에 찍는 영화의 남자 주인공처럼 제가 불치병을 앓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전 아주 건강하다고요."
수빈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하배우는 아직 젊고 건강하시죠. 그래서 제가 계속 헷갈렸던 겁니다. 그 바람에 얼마 전 대본 리딩을 할 때서야 간신히 알아차릴 수 있게 된 거죠."
하이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못하겠어요."
수빈은 하이유의 말을 못 들은 척 자신의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전 하배우에게 항상 궁금한 게 있었습니다. 작년 여름 병원에서 제가 퇴원한 후로, 하배우와 전 갑자기 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원래는 회사 내에서 우연히 만나더라도, 서로 본척만척하는 서먹서먹한 사이였었는데 말이죠."
"그거야 우연히 들은 강감독이 작곡한 음악이 제 맘에 너무 들어서 그런 거죠. 곡을 받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친해지게 된 거잖아요.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있나요?"
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도 당연히 그런 이유일 거라고 생각했었죠. 그런 선입견 때문에 미처 눈치를 못 챘던 겁니다. 그러나.. 진실은 그게 아니죠. 그런 식이라면 하배우가 여태껏 26장의 앨범을 냈으니, 저처럼 친하게 지내는 작곡가가 못해도 십여 명은 족히 넘어야겠죠?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조실장 말로는 하배우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저를 포함해서 세 명이 채 안된다고 하더군요."
"그건 제가 낯가림이 좀 심해서 그래요. 강감독님은 저랑 나이도 비슷하고 같은 소속사니까 빨리 친해지게 된 거죠."
계속해서 자신의 말에 반박하는 하이유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수빈은, 앉아있던 바위에서 일어나 하이유 앞으로 다가가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하이유와 눈높이를 맞춘 다음 수빈이 솜털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하배우 아니 하선배. 정말로 그런 단순한 이유 때문입니까? 저에게서 본인과 비슷한 향기를 맡아서, 그래서 같이 있으면 맘이 편해서 급격히 친해진 건 아니고요?"
자신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수빈을 보며 하이유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죠?"
"동질감 또는 동병상련이라고 해두죠. 선배.. 나도 선배처럼 죽음이 무섭고 두렵습니다. 그게 얼마나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자신에게 한 발 한 발 가까이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가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질리도록 느껴봤으니까요. 저항할 수 없이 지켜만 봐야 하는 자신의 무력감에 치가 떨리는 그 심정.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제가 잘 압니다."
수빈이 하이유를 날카롭게 관찰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선배가 병원에서 퇴원한 저를 봤을 때, 마치 오랜 시간을 함께한 자신의 동료나 친구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선배처럼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고 있는 제가, 왠지 모르게 익숙하고 친숙해 보였을 겁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깨달았을 겁니다. 자신과 동류(同類)의 사람을 만났다는걸.. 그리고 무척이나 기뻤겠죠."
수빈의 자신의 말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하이유에게 말했다.
"선배. 제가 손을 잡아도 될까요?"
수빈의 물음에 하이유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 상태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빈이 손을 뻗어 하이유의 손위를 살짝 덮으며 부드럽게 움켜잡았다.
"무대 위에 혼자 올라가서 노래를 부를 때의 하선배는 누구보다 생생하게 살아서 펄떡입니다. 지켜보고 있으면 생명의 축복이란 게 어떤 건지 절로 느껴지죠. 하지만.. 하선배가 일상생활을 할 때에는 철저하게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기에 두터운 갑옷까지 온몸에 두른 채 말이죠. 워낙 잘 제작된 가면이라 보통 사람들은 눈치채기가 거의 불가능할 겁니다. 같이 연기를 해보지 않았다면, 저조차도 알아채지 못했을 겁니다."
수빈은 하이유의 차갑게 얼어붙은 손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하선배. 그런 극단적인 증상은 전쟁터에 강제로 끌려 나온 병사들에게서 가끔씩 나타납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고슴도치처럼 바늘을 사납게 세워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거부하려고 노력하죠. 그러면 죽음까지도 막아낼 수 있다고 굳게 믿으니까요.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한 방어기제가 작동한 겁니다. 하지만 그건 지나친 두려움 때문에 뇌가 오작동을 한 거에 불과할 뿐이죠. 그런다고 죽음을 피해 갈 수는 없으니까요."
수빈은 하이유의 차가운 손을 데우기 위해 양손으로 빠르게 비비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병사들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식사시간이죠. 식사시간이 되면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걸 확인하고선 환희에 차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말이죠. 그리고 식사시간이 다 끝나면.. 또다시 생존본능에 따라 바늘 달린 딱딱한 갑옷을 입습니다. 하선배. 하선배 같은 경우는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때가 병사들의 식사시간에 해당할 겁니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고 즐기는 시간이겠죠."
수빈은 하이유의 몸이 더 이상 떨리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얼음처럼 차갑던 손도 어느새 봄볕처럼 따뜻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때가 되었음을 직감한 수빈은 하이유의 손을 잡은 채 얼굴 가득 햇살처럼 따사로운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선배. 어린 시절 선배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제게 말해 줄 수 있습니까? 왜 인기 절정의 가수인 선배가 항상 죽음의 공포를 등에 짊어지고 살아가는지.. 제게 들려줄 수 있나요?"
하이유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수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잠시 흔들리던 하이유의 눈빛이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마침내 하이유가 입을 열었다.
"날짜가 언젠지 정확하게 기억도 안 나는 아주 어린 시절이었어요. 단지 그날의 기억만이 또렷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남아 있을 뿐이에요. 아주 더운 여름날이었어요. 그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