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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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동 미래주택단지에 있는 한 저택. 서울 중심가 한복판 금싸라기 땅 위에, 무려 150평이 넘는 대지 위에 세워진 저택답게 정원부터 별채, 본채 등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그런 으리으리한 저택 안에서 마침 저녁 식사가 시작되려는 중이었다. 금방이라도 상다리가 부러질듯한 푸짐한 저녁 상이 족구를 해도 될 만큼 넓은 거실에 한 상 거하게 차려져 있었고, 그 주위를 6명의 사람들이 빙둘러 앉아 있었다.
꼬장꼬장하게 생겨 척 봐도 고집불통으로 보이는 김샛별의 부친 고민수가, 정면에 앉아 있는 수빈을 직시하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자네가 내 딸을 연예계로 밀어 넣은 장본인이지? "
막 숟갈을 집어 들려던 수빈은 손을 다시 상 밑으로 내리고 공손히 대답했다.
"억지로 제가 밀어 넣지는 않았습니다. 본인이 그렇게 원한다면 노력을 해보라고 한마디 거들었을 뿐이죠."
"말은 잘하는군. 내 딸에게 성형까지 하라고 부추긴 당사자가 바로 자네 아닌가?"
그때 샛별의 모친인 이성자가 살짝 화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여보. 손님들 첫 숟갈도 뜨기 전에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손님들 식사부터 다 하시고 이야기하세요."
"쯧. 어차피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은 거야. 이런 분위기에서 밥 먹다가는 얹히기 딱 좋아."
고민수가 수빈을 바라보며 물었다.
"수빈군. 딸을 맡긴 부모 입장에서 걱정이 돼서 몇 가지만 간단하게 물어보겠네. 괜찮겠지?"
"네. 물어보시죠."
"얌전히 학교생활 잘 하던 내 딸을 왜 연예계로 진출시킨 건가?"
같은 질문이 또다시 반복되자 수빈이 빙긋 웃으며 되물었다.
"그러시는 아버님은 따님이 성형까지 감수해가면서 연예계로 진출하려는 걸 왜 안 막으셨습니까? 부모 된 입장에서 충분히 못하게 말리실 수도 있으셨을 건데요."
"흐음.."
고민수가 즉답을 하지 못하고 신음성을 흘리자 수빈이 바로 말을 이었다.
"전 샛별이가 얼마 전에 부모님의 동의하에 SN과 계약을 맺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샛별이를 처음 만났을 때 듣기론, 집에서 부모님의 반대가 극심하다고 들었거든요. 그때만 해도 샛별이를 연예계에서 평생 못 볼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오늘 그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이유를 알았다고?"
"네. 아버님께서는 평생 교편을 잡으신 교육자 출신이시죠?"
"맞네. 어떻게 알았나?"
"오면서 주워들은 이야기도 있고 와서 직접 뵈니 바로 알겠더군요. 아버님에게는 교육자 특유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고 있으니까요."
"몇 년 전 선친께서 돌아가셔서 내가 학교 이사장에 취임을 하긴 했지만, 원래는 학생들을 가르치던 선생이었지.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수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버님. 아버님께서는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학생들을 가르쳤던 경험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샛별이를 보고 바로 알아차리셨던 거죠? 이번에는 아무리 말려봐야 소용이 없겠다는 걸 말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허락해주신 거 아닌가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마치 옆에서 지켜보기라도 한 듯 수빈의 확신에 찬 말에, 고민수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결국은 장탄식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아.. 자네 말이 맞네. 예전에도 샛별이가 연예인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번씩 꺼내기는 했었어. 그때마다 내가 뜯어말렸고.. 이 세상 모든 부모들은 자식이 힘들어하거나 상처받는 걸 원하지 않아. 나라고 별반 다를 게 있겠나? 그래서 계속 말렸지. 하지만 이번에는.."
수빈이 고민수의 말을 자르고 들어갔다.
"못 말리셨겠죠. 샛별이의 마음가짐이나 자세가 완전 달라졌을 테니까요."
"어느 날 갑자기 눈빛 자체가 완전히 변해버려서 왔더군. 예전에는 단순히 연예인에 대한 동경과 꿈이 담겨 있었다면.. 이번에는 눈빛 속에 확고한 신념이 자리 잡고 있었어. 그걸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깨달았지. 아.. 이번에는 말려봐야 소용없겠구나. 잘못했다가는 애가 집을 나갈 수도 있겠구나라는 걸 말이야."
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하셨습니다. 아버님. 원하는 꿈이 있고, 그 꿈을 이루고자 하는 신념까지 있는 사람은 뭔 짓을 해도 못 말리는 법입니다."
수빈이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보기에는 샛별이가 참 운이 좋은 것 같습니다. 아버님처럼 통찰력이 뛰어나신 분을 부모로 둔 덕분에, 큰 다툼 없이 꿈을 향해 똑바로 나아갈 수 있게 됐으니까요. 이 세상에는 아버님처럼 지혜롭고, 생각이 깨어있는 훌륭한 부모가 절대로 흔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버님은 존경받아 마땅한 부모이자 어른이십니다."
"이런.. 수빈군이 갑자기 내 얼굴에 금칠을 하니 당황스럽군."
"절대로 빈말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부모로서 자식을 위해 올바른 선택을 하신 겁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날의 결정을 자랑스러워하시는 날이 반드시 올 거라 믿습니다."
고민수가 수빈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수빈군 아니 강감독. 오늘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강감독이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겠네. 강감독. 소영이가 아직 어려서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네."
고민수가 수빈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부디 내 딸을 잘 부탁하네."
수빈도 덩달아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같이 작품을 하는 감독으로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좌중의 분위기가 사뭇 화기애애해지자 샛별이 어머니가 나서서 입을 열었다.
"다들 시장하실 텐데 어서 식사부터 하시죠. 못다 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고요."
부드럽게 풀어진 분위기에서 식사를 하던 도중, 밴에서 미리 정한 작전대로 성강호가 나서서 바람을 잡기 시작했다.
"샛별이 아버님. 뭐 아버님이랑 저랑 연배가 비슷해서.. 제가 솔직히 까놓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래 봬도 제가 명색이 1억 배우 아니겠습니까? 저 스스로 배우 보는 눈이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볼 때.. 샛별이는 훌륭한 여배우가 될 자질이 충분해요. 외모적인 조건도 좋고, 발음도 뛰어나고, 연기에 대한 열정까지 있습니다. 아~주 좋아요. 근데.. 한가지 딱 아쉬운게 있는데.."
성강호의 낚시에 고민수가 가볍게 낚였다.
"아. 그렇습니까? 성배우가 보시기에 제 딸의 어떤 면이 아쉽습니까?"
"경험입니다. 경험. 아직 나이가 어리다 보니 경험이 적어서 연기가 겉도는 경향이 있어요. 연기를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깊이가 좀 부족해요."
옆에 있던 수빈이 나서며 한 팔 거들었다.
"이번 작품에서 따님이 맡은 역할이, 어릴 때의 성추행 경험으로 트라우마가 생겨서 대인기피증이 있는 역할입니다만.. 연기는 곧잘 하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빨아당기는 맛이 떨어집니다."
성강호가 맞장구를 쳤다.
"그거에요. 그거. 연기가 흡입력이 떨어져요. 주연 여배우가 그럼 안되는 거예요. 그러다가는 영화 망해요. 그래서 말입니다. 저희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려고 합니다."
성강호가 슬쩍 눈짓을 하자 말없이 앉아서 밥만 먹고 있던 백성철이, 자신의 옆에 놓아둔 상자를 집어 들어 상위로 올렸다. 그런 다음 상자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개봉하였다. 상자 안에는 이성호 소품팀장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검은색 수갑과 빨간색 밧줄 그리고 핑크색 억압복이 들어 있었다.
그걸 본 샛별이 어머니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도대체 이게 다 뭐예요?"
반면 샛별이 아버지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지금 뭐 하자는 건가? 이런 민망한 물건들을 내 집에 들고 온 이유가 뭔가?"
격앙된 고민수와 달리 수빈은 차분한 얼굴로 차근차근 하나씩 자세하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설명을 다 들은 고민수가 충분히 이해를 했는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성추행 당했을 때의 느낌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보라고, 내 딸에게 지금 간접 경험을 시켜주겠다는 소리로군?"
"그렇습니다. 옛말에 '백견이불여일행(百見而不如一行)'이라고 했습니다. 백날 대본을 읽고 머릿속으로 상상을 해봐야, 한번 실제로 겪어보는 것보다 못하다는 거죠. 그렇다고 저희가 나서서 그런 나쁜 경험을 강제로 시켜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이런 일은 가족분들이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흠. 하지만 효과가 정말로 있겠나? 아무리 눈을 가리고 몸을 묶어놔도, 자기 어미가 자신의 몸을 더듬는다는 걸 알고 있는 상태면 별 의미가 없을 거 같은데."
"그래서 오늘 하루는 좀 불편하더라도, 따님께서 구속을 당한 상태에서 잠자리에 들었으면 합니다. 아침에 잠이 덜 깨서 비몽사몽 일 때, 그때 단 몇 초만이라도 그런 경험을 느끼게 해주는 게 이번 일의 목적이니까요."
고민수가 옆에 앉은 자신의 딸을 쳐다보며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냐?"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말없이 듣고만 있던 샛별이가,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빛내면서 대답했다.
"전 좋아요. 오늘 하루가 아니라, 영화 촬영이 다 끝날 때까지 매일매일 계속했으면 좋겠어요. 지금 이게 다 제가 연기력이 부족해서 일어난 일이잖아요? 감독님과 성강호 선배님께서 절 위해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시는 게 오히려 죄송스러울 따름이에요."
고민수가 수빈을 다시 바라보며 말했다.
"알겠네. 그렇게 한번 해보도록 하지. 여배우가 연기를 못해서 영화감독과 대선배 배우가 이렇게 집에까지 찾아와서 부탁을 하는데, 부모 된 입장으로서 그 정도 부탁도 못 들어 주겠는가. 우리 부부가 내일 아침에 강감독이 말한 대로 한번 해보겠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성강호가 큰 소리로 말했다.
"자자.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이왕 말 나온 김에 어떻게 하는지 한번 테스트를 해봅시다. 다들 샛별이 방으로 가서 시험을 해보자고요."
성강호가 마치 양 떼를 몰듯 사람들을 데리고 우르르 샛별이 방으로 이동하자 고민수가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강감독이 나랑 둘만이 있는 자리에서 할 이야기가 있는 거 같은데.. 샛별이 어미 대신 나보고 더듬으라고 하는 거라면 사양하겠네. 아무리 내가 아비지만 남자인 내가 딸년에게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어."
"그런 건 바라지도 않고 시키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연기라 생각하시고 따님의 뺨 정도는 가볍게 한대 때려주실 수 있지 않을까요?"
"응? 그게 뭔 소린가?"
"핸드폰은 있으시죠?"
"당연히 있지. 요즘 세상에 핸드폰 없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럼 저에게 잠시 좀 줘보시겠습니까?"
의아해 하는 고민수로부터 핸드폰을 건네받은 수빈은 뭔가를 열심히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수빈에게서 핸드폰을 돌려받은 뒤 사용법까지 다 듣고 난 고민수가 감탄 어린 눈빛으로 수빈을 바라보고 있을 때, 사람들이 다시 거실로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수빈이 빠르게 말을 건넸다.
"아버님. 이번 일에서 아버님의 역할이 제일 큽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빈의 부탁에 고민수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걱정 말게. 강감독이 이렇게까지 치밀하게 계획을 짜왔는데.. 나 때문에 엉망이 되면 안 되겠지. 내가 최선을 다해 보겠네."
이윽고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자 다 같이 왁자지껄 떠들면서 다시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그날 밤 수빈은 자신의 집에서 오래간만에 꿀잠을 자고 있었다. 그리고 창밖에는 겨울눈이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