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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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빠르게 인천 국제공항을 빠져나가는 밴 안에서 백성철에게 말했다.
"형. 라디오 좀 틀어봐요. 조금 있으면 '배청수의 음악캠프' 시작할 거예요."
"걱정 마. 이미 주파수 다 맞춰놨어. 그냥 틀기만 하면 된다. 시간 되면 틀어줄 테니까, 그동안 만이라도 좀 쉬고 있어라. 시작하려면 아직 20분 넘게 남았어."
"그래요? 그럼 가기 전에 제가 형에게 부탁했던 건 어떻게 됐어요?"
수빈의 물음에 백성철이 안타까운 마음에 한숨을 길게 쉬며 대답했다.
"후우. 좀 쉬라니까 그러네. 박팀장 말 들어보니까 이틀 새 비행기만 5번을 갈아탔다며? 라디오에 출연하려면 체력을 좀 비축해야지. 나중에 다 끝나고 나서 이야기해도 되잖아?"
"비행기에서 푹 자서 괜찮아요. 중국이 시차가 많이 나는 나라도 아니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백성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김샛별 부모님 면담하는 건 내일 저녁 6시로 잡아놨다. 성배우가 그날 시간이 좋다고 해서 말이야. 내일 다 같이 샛별이 집으로 찾아가서 부모님을 만나 뵙기로 약속을 잡아놨어."
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네요. 그럼 하이유 선배는요?"
"네가 말한 대로 산악 전문가를 만나서 내가 자문을 구해봤는데.."
"뭐라고 하던가요?"
"네가 나에게 알려준 고대로 설명을 해줬어. 그랬더니 강원도에 있는 월악산을 추천하더라고. 거기가 딱이래. 근데 얼마 전 다른 산악인이 촬영했다면서 월악산을 찍은 사진을 보여줬는데.. 내가 보기에는 아직은 네가 바라는 상태가 아니야."
"그래요? 그럼 일기예보를 예의 주시해야겠는데요."
"내가 강원도 쪽 날씨를 매일매일 체크하고 있어. 걱정 안 해도 된다."
"그래요. 형. 바로 제게 알려주세요."
잠시 후 수빈은 인천을 벗어나 상암동으로 가는 밴 안에서 배청수의 음악캠프를 듣고 있었다.
- I Can‘t Get No Satisfaction~
흔히 사람들이 핫둘셋으로 들린다고 말하는 '롤링스톤즈'의 'Satisfaction'이 시그널 뮤직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비엔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클래시컬 락 버전으로 연주한 시그널 뮤직이 라디오에서 잠시 들리더니, 빠밤~ 빠밤~ 빠바밤~ 소리와 함께 배청수 특유의 카랑카랑하면서도 점잖은 톤의 오프닝 멘트가 시작되었다.
"아주 예전부터 내려오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팔방미인이 밥 굶는다. 반대로 한 우물만 파라는 소리도 있습니다. 이것저것 손대지 말고 한가지 일만 열심히 하라는 소리겠죠. 하지만 이제 세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한가지 분야만 들입다 파는 게 아니라, 다양한 분야를 두루두루 공부해야만 살아남는 시대가 온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 멀티태스킹이 중요한 시대가 온 거죠."
다시 짧게 음악이 흐른 뒤 배청수가 말을 이었다.
"오늘은 이런 멀티태스킹을 몸소 실천하는 분을 한 분 모시기로 했습니다. 2부에 등장할 예정인데요. 가수, 작곡가, 음반 제작자, 배우, 영화감독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게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분이 누군지 궁금하시다고요? 그건.. 비밀입니다."
- 빰빰 빠바밤~
"오늘은 2월 1일 목요일입니다. 배청수의 음악 캠프 출발합니다."
시그널 뮤직의 볼륨이 점점 줄어들더니 사라졌다.
"제가 젊을 때만 해도 '닭'하면 처갓집을 떠올렸습니다. 처갓집에 가면 장모님이 백숙을 삶아주셨으니까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는 닭이 아니라 치킨이겠죠. 프랜차이즈도 많고 체인점도 많습니다. 오늘은 왠지 치킨이 당기는 날입니다. 첫 곡 듣겠습니다. 아이돌 그룹치고는 상당히 다양한 색깔의 노래를 들려주는 팀이죠. 지금 들려드릴 곡은 락의 색채가 아주 짙은 곡입니다. 'BBG'의 'Dispatch' 띄워 드립니다."
라디오를 듣고 있던 수빈이 어이가 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뭐가 비밀이라는 거야?"
운전을 하던 백성철이 수빈의 혼잣말을 들었는지 웃음을 지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이다. 아주 대놓고 알려주는 것 같은데. 수빈이가 요즘 대단하긴 대단한가 보다. 배청수씨가 '보이는 라디오'를 다 하다니.."
백성철의 말에 수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보이는 라디오가 왜요? 라디오 진행하시는 분들이 자주들 하시잖아요?"
"수빈이가 음악캠프에 대해서 잘 모르는구나. 배청수씨는 보이는 라디오는 안 하셔. 아주 특별한 날 그러니까 MBS에서 몇 년에 한 번씩 진행하는 패밀리 데이 이런 날에만 가끔씩 하고, 보이는 라디오는 안 하는 게 원칙인 분이야."
잠시 브레이크를 가볍게 밟으며 전방을 주시하던 백성철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어제 배청수씨가 라디오 진행하면서 오늘 보이는 라디오 한다고 예고를 하는 바람에, 음악캠프 팬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잖아. 도대체 누가 출연하길래 보이는 라디오를 진행하는 거냐면서 게시판이 발칵 뒤집혔지. 혹시 '비틀스'나 '롤링스톤즈'가 방한한 거 아니냐며, 네티즌 수사대가 내한 가수 수사한다고 한바탕 야단법석을 피울 정도였으니까 말 다했지."
백성철의 말에 수빈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비틀스에 롤링스톤즈라니.. 이거 제가 출연하기에 너무 부담되는데요."
"괜찮아. 부담 안 가져도 된다. 어젯밤에 네티즌들 사이에서 오늘 네가 출연한다는 소문이 돌았어. 사람들이 하도 궁금해하니까, 음악캠프 작가 쪽에서 슬쩍 흘린 모양이더라고. 그런데 반응이 나쁘지 않았어. 수빈이 너라면 충분히 보이는 라디오를 할만하다는 의견이 대세였으니까. 누가 뭐래도 요즘 가장 핫한 게 수빈이 너잖아."
"이것 참.."
수빈은 부담감에 입맛을 다시다가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물었다.
"오늘 출연할 때 쓸 거라고 부탁한 건 어떻게 됐나요?"
"뒷좌석에 실어 놨다. 낮에 네 집에 들러서 미리 챙겨왔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백성철의 말에 수빈이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뒷좌석에 한쪽 배가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특이한 형태의 가방이 실려있는 게 보였다. 가방을 확인한 수빈은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안주머니에 있는 USB까지 확인을 마친 후 눈을 감았다.
'그럼 방송에서 뭐라고 썰을 푸는게 좋을 지 작전을 짜야겠지..'
수빈이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작전을 짜는 동안, 밴은 상암동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시간이 흘러 6시 반경 상암동에 도착한 수빈은, 차창 밖으로 보이는 MBS 상암동 신사옥 1층에 위치한 가든 스튜디오 쪽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보이는 라디오가 진행되고 있는 오픈 스튜디오 통유리 앞쪽에,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서 발 디딜 틈도 없이 빽빽하게 선채로 구경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아주 미어터지네요."
"그러게 말이다. 보이는 라디오 역사상 이렇게 많은 팬들이 모인건 첨이지 싶다. 빨리 주차장으로 이동해야겠는데. 네가 여기 있다는 게 알려지면 자칫 사고 날 수도 있겠다."
잠시 후 수빈은 서둘러 주차장으로 이동한 밴에서 내려 MBS 사옥 안으로 들어갔다. 보이는 라디오가 진행되고 있는 부스에 도착한 수빈은 박준 피디와 배성탁, 김경미, 서혜지 작가 등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제작진들과 인사를 나눈 수빈은 무심결에 고개를 돌려 부스 안쪽을 바라보다, 깜짝 놀란 얼굴로 오른손 검지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수빈을 발견한 배청수가 수빈을 향해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떨떨한 표정의 수빈이 고개를 돌려 박준 피디에게 물었다.
"지금 1부 진행 중인 거 아닌가요? 저는 2부부터 출연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리고 아직 대본도 못 읽어봤는데.."
박준 피디가 황당해하는 수빈의 등을 힘차게 떠밀며 대답했다.
"오늘 정해진 대본 같은 건 없습니다. 그리고 배청수씨가 들어오라고 하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빨리 들어가세요."
피디에게 등 떠밀린 수빈이 오픈 스튜디오 안으로 입장하자. 통유리 밖에 서있던 팬들이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며 크게 고함을 치면서 미친 듯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된 무성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귀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입만 크게 뻥긋거리는 팬들의 모습에 수빈은 자신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터뜨리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수빈이 헤드셋을 착용하고 마이크 앞에 착석하자 배청수가 인사를 건네왔다.
"드디어 오늘 초대 손님인 강수빈 영화감독이 도착을 했습니다. 예정보다 빠르긴 한데. 뭐 어떻습니까. 빨리 만나면 만날수록 팬분들 입장에서는 더 좋으시겠죠. 강감독. 청취자분들께 인사 한번 해주시죠."
"안녕하십니까. 배청수의 음악캠프 청취자 여러분들 반갑습니다. 방금 전 배청수 선생님께서 소개해준 BBG의 리더 수빈이라고 합니다. 음악캠프에 출연하게 돼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뺍시다. 배청수씨 수빈씨로 하자고요. 수빈씨는 영화감독이라는 호칭이 아직 많이 낯선가 봐요?"
"네. 아직은 좀 그렇습니다. 그리고 BBG의 리더라는 호칭이 가장 애정이 가기도 하고요."
"그러시군요. 오늘 수빈씨에게 물어볼게 참 많습니다. 그전에 한 가지만 먼저 물어보겠습니다. 수빈씨 팬분들이 아주 특이하다는 소리를 제작진에게서 들었습니다. 우리 제작진들이 이런 경우는 첨 봤다고 제게 말을 하더군요."
"어떤 게 특이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어젯밤에 오늘 음악캠프에 수빈씨가 출연한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그 뒤로부터 하루 종일 음악캠프와 MBS 전화통이 불이 났다고 하더군요. 보통 조공이라고 그러죠? 팬분들이 보내주시는 도시락, 밥차, 커피차 등등.. 그런 걸 보내도 되냐며 허락을 구하는 전화가 마치 쓰나미처럼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고 합니다. 이런 이상한 일이 왜 발생한 건지 혹시 알고 있습니까?"
배청수의 질문에 수빈이 쑥스러운지 손을 들어 머리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그건 제가 팬분들에게 그런 걸 못하게 막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저나 저희 BBG를 아껴주시는 팬분들의 나이가 아직 어립니다. 아무래도 저희랑 나이 때가 비슷하거나 어린 분들이 많이들 좋아해 주시니까요. 그분들은 아직 사회생활을 할 나이가 안됐어요. 그래서 돈이 들어가는 조공은 제가 가급적 안 받고 있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가끔씩 받고 있다 보니, 이번과 같은 일이 발생한 것 같습니다."
수빈의 답변에 배청수가 감탄성을 터뜨렸다.
"이야. 이거 수빈씨가 얼굴만 준수한 줄 알았는데.. 마음 씀씀이도 아주 준수하시군요. 그런 이유로 안 받는다고 하니 팬분들은 실망하지 마시고, 몇 년만 더 기다리시면 될 거 같군요."
수빈이 슬쩍 웃으며 농담조로 대답했다.
"저도 해가 바뀌고 한 살 더 먹어서.. 올해부터는 제대로 받아볼까 생각 중입니다. 영화 제작하는데 돈이 많이 들어가서요. 요즘 많이 힘듭니다."
"그래요? 올해부터는 제대로 받는다고 하니까 팬분들은 전화로 문의하지 마시고, 그냥 알아서 다이렉트로 보내시면 되겠군요.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백성철의 말에 수빈이 황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
"농담입니다. 농담. 그랬다가는 제가 욕먹습니다. 뻔히 농인 걸 아시면서 절 악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시려고 하십니까."
"제가 굳이 그런 것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겠죠. 영화 이야기가 나온 김에 물어봅시다. 영화음악 때문에 한동안 말들이 많았죠? 탬버린 소리가 들리느니 안 들리느니 하면서 말이죠."
"네. 제가 했던 인터뷰 때문에 조금 말들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방송에서 그 진위(眞僞)를 가리고 싶다고, 원본 음원을 들고 와 달라고 부탁을 드렸는데.. 가지고 오셨나요? 음원이 출시가 안돼서 다시 듣고 싶어도 들을 수가 없어서 말이죠."
수빈은 품에서 USB를 꺼내며 대답했다.
"네. 제가 작업했던 음원을 직접 다운을 받아서 들고 왔습니다."
"그럼 어디 한번 들어볼까요? 영화를 보면서 들으니 저는 도통 안 들리더라고요."
수빈은 부스 안으로 들어온 박준 피디에게 USB를 넘기며 말했다.
"영화 음악 중에서 탬버린 소리가 가장 잘 들리는 부분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말을 타고 칼싸움을 하는 장면이라, 효과음으로 쇳소리가 많이 들어가 있는 부분이죠. 그래서 탬버린 소리도 다른 부분에 비해서 볼륨을 좀 많이 올려서 작업을 한 부분입니다. 지금은 효과음을 다 뺀 상태로 듣기 때문에 쉽게 알아채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한번 들어보죠."
배청수의 고갯짓에 맞춰 부스밖에 있던 박준 피디가 USB에 담겨 있는 영화 음악을 틀었다.
잠시 후, 바이올린 선율에 베이스 기타 소리가 깔린 채, 두둥 거리는 북소리가 섞여서 들려왔다. 20여 초간 음악을 들은 배청수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탬버린 소리가 어디 있다는 거죠? 제 귀에는 안 들리는데요."
"안 들리십니까? 제 귀에는 아주 잘 들리는데요. 흠. 그렇다면.."
수빈이 부스 밖을 쳐다보며 말했다.
"피디님. 음원 파일들 중에 맨 아래쪽 파일이 탬버린 소리가 녹음된 파일입니다. 그걸 볼륨을 좀 더 키워주셔서 다시 한번 틀어주시면 좋겠는데요."
잠시 후 다시 음악소리가 들렸다.
치리링. 칭. 칭. 챠~앙. 챠르르. 촹촹 하는 탬버린 특유의 소리가 한순간도 쉬지 않고 음악소리에 섞여서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수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들리시죠? 피디님. 이번에는 다른 음원 파일은 다 죽이시고, 탬버린 소리만 최대로 키워서 들려주세요."
이윽고 신들린 듯 리드미컬하게 박자를 타고 놀며, 단 1초의 틈도 없이 끊임없이 흔들어대는 명인의 아름다운 탬버린 소리가 라디오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