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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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라운지 바로 통하는 유리문 앞에 '今日休业(금일휴업)'이라고 적혀 있는 큼지막한 팻말이 걸려 있었다. 유리문 앞에 서있던 남자가 수빈을 발견하고선 유리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가라는 손짓을 하였다.
수빈은 발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푹신하고, 붉은색 문양이 화려하게 새겨져 있는 황금색 카펫이 깔려있는 복도를 30여 미터 정도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다른 손님들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모양이군."
잠시 후 라운지 바 입구에 도착하니 건장한 남자 3명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3명의 남자 중 유일하게 내공을 익히고 있는 남자가 수빈을 알아보고선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남자가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들어가시죠. 강감독님."
수빈은 안면이 있는 남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라운지 바 안으로 걸어갔다. 바 안으로 들어서니, 입구 쪽 가까운 바 안에 서있는 여성 바텐더 한 명과 멀리 창가 쪽에 앉아있는 여성 손님 한 명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수빈은 베이징 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창가 쪽으로 걸어가, 여성 손님이 앉아있는 자리에 동석하며 말을 건넸다.
"손님이 이렇게 없어서야.. 이러다 호텔 망하겠습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은색 투피스 양장을 걸친 팽연숙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하루 정도는 괜찮아요. 내가 관리하는 호텔이니까. 멀리서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번잡하게 해드려서야 되겠어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오늘 복장이 좀 특이하시네요."
"이상한가요? 제 딸이 한국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 사모님 콘셉트라고 추천을 해줘서 입고 왔는데.. 이걸 입고 가서 수빈씨에게 잘 보여서, 사인을 여러 장 받아오라고 시키더군요."
"아. 그렇군요. 어쩐지 중국 스타일치고는 상당이 특이하다고 느껴졌습니다. 아주 아름다우시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사인은 제가 이따 해드리겠습니다."
"어머. 다행이네요. 덕분에 딸에게 혼나지는 않겠어요."
그때 바에 있던 여성 바텐더가 가까이 다가왔다. 두 사람 모두 가벼운 칵테일을 주문하였다.
잠시 후 칵테일을 들며 수빈이 질문을 던졌다.
"일개 연예인에 불과한 저를 너무 환대해 주시는 것 아닙니까?"
"아니에요. 강감독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모자란 감이 있죠."
"좋게 봐주시니 다행입니다."
"그리고, 미래뿐만 아니라 당장 눈앞에 있는 현실도 중요하죠. 청톈 자체 분석으로는 이번 영화가 흥행에 성공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고 나왔으니까요."
"다행이군요."
팽연숙이 칵테일로 입술을 살짝 축인 후 말을 이었다.
"영화야 어차피 내일이면 개봉이라 더 이상 이야기해봐야 무의미할 테고.. 우리 새로운 사업 이야기를 해볼까요?"
"새로운 사업 말입니까?"
수빈은 속으로는 올 것이 왔구나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 보기에는 태연한 척 자세를 고치면서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
"어떤 사업입니까?"
"수빈씨의 영화감독으로서의 역량도 뛰어나지만, 이번 영화에서 보여주듯이 문장가 그리고 번역가로서의 능력 또한 탁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강감독의 그러한 능력을 굳이 썩힐 필요가 없지 않겠어요?"
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말이죠. 청톈에서는 얼마 전 강감독이 출연했던 한중 합작 드라마에 주목을 하게 됐어요. 중국 내 유쿠와..."
수빈은 팽연숙의 긴 설명을 다 듣고 난 다음 감탄 어린 눈빛으로 대답했다.
"대단하십니다. 그런 생각을 다 하시다니."
수빈의 반응에 그녀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칵테일을 들며 수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청톈에서 어쩜 그렇게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셨는지, 정말 놀랍군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수빈의 발언에 기분 좋게 칵테일을 기울이던 그녀의 손이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녀가 칵테일을 거칠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분기탱천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빈씨. 우리 청톈이나 팽가가 우습게 보이나요?"
수빈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대꾸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잘 안되는군요."
"오대세가끼리는 상호 신뢰가 기본이에요. 회사 대 회사의 거래도 마찬가지겠죠. 청톈은 여태껏 성심성의껏 협조를 잘 해드렸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생각해 낸 아이디어를 마치 자기 것인 양 돌려서 말하고, 나중에 뒤통수를 치시겠다? 그런 야비한 짓을 제가 용납할 거 같은가요? 지금 팽가와 척을 지실 작정이신가요?"
"흠.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입장이 곤란한데.."
수빈이 잠시 고민을 하는척하더니, 품 안에서 서류를 꺼내어 팽연숙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한국 KBC 방송국과 우리 영화사 사이에 체결한 '특수본' 판권 계약과 리메이크 계약서의 사본입니다. 전 팽연숙씨의 아이디어를 훔친 적이 없습니다. 우리 영화사 자체에서도 이미 나왔던 의견이고, 오래전부터 진행을 하고 있었던 일입니다. 리메이크 작업과 자막 작업이 끝나는 대로, 넷플릭스와 협상을 하기로 이미 회사 내부에서 이야기가 다 끝난 상태란 말입니다."
몇 초간 서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팽연숙이, 새파랗게 독기 오른 눈으로 수빈을 노려보며 물었다.
"만약 이 서류가 거짓이면요?"
수빈이 숨도 쉬지 않고 대답했다.
"제 목을 잘라 쟁반 위에 곱게 올려서 팽가에게 건네드리죠."
한참을 매섭게 노려보던 팽연숙의 눈빛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긴 한숨을 토하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 아직도 믿지는 않아요. 우연히 오늘 딱 맞춰서 서류를 들고 왔다? 말도 안 되죠. 돌아가는 상황을 봐서는 우리 쪽에서 관련 정보가 미리 새어나갔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긴 한데.. 그러기에는 이 사업 계획을 아는 사람이 너무 적어요. 그 사람들이 어디 가서 정보를 함부로 흘릴 사람들도 아니고.."
수빈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보를 흘리기야 당신이 직접 흘렸지.'
"좋아요. 이번에는 제가 진 걸로 하죠. 지금 이 서류가 진짜라면.. 그쪽에서도 미리 준비를 해왔다는 게 사실이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죠. 우리 청톈에서는 아까 말한 것처럼, 특수본 드라마를 새롭게 작업을 해서 유큐와 훌루에 공급하길 원해요. 그쪽에서 원하는 건 뭐죠?"
팽연숙의 질문에 수빈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쪽에서는 많은 걸 바라지도, 무리한 걸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정당한 대가를 받길 원할뿐이죠. 그럼 협상을 시작해 볼까요?"
시간이 흘러 협상이 다 끝나갈 무렵, 협상 결과가 비교적 맘에 드는지 얼굴이 많이 풀린 팽연숙이 수빈을 보고 물었다.
"정말로 이 일을 미리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건가요?"
"그럼요. 오대세가의 검은 남궁이고 머리는 제갈이다..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 아닙니까?"
그녀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수빈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긴 하죠. 이번 일은 강감독의 머리를 너무 얕본 저의 실책이에요.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할 테니..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요."
"무섭게 왜 또 그러십니까? 전 팽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길 바랍니다."
그녀가 가시 돋친 장미처럼 아름답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머리 쓰는 일에서 지는 걸 싫어해서 말이죠. 그럼 나머지 자잘한 것들은 밑에 직원들에게 맡기고, 우리끼리는 술이나 한잔 더 할까요?"
"좋습니다. 제가 한잔 사도록 하겠습니다."
"그것도 좋죠."
수빈이 손을 들어 바텐더를 불렀다.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을 뜬 수빈은 간단하게 샤워를 한 후 박팀장과 함께 1층으로 내려갔다. 미리 대기해 있는 밴에 올라타니, 청톈 쪽 직원이 밴 안에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간단한 통성명 후 직원이 일정을 설명했다.
"시간상 중국의 4대 직할시를 다 들릴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베이징(北京)과 충칭(重慶)에서 무대 인사를 하시고, 내일은 상하이(上海)와 홍콩(香港)에서 무대 인사를 하시게 될 겁니다. 잠시 후 베이징에 있는 '북경 영화관'을 필두로 '동방신천지 영화관'에서 무대 인사를 마무리하신 후, 바로 충칭으로 이동하시게 될 겁니다."
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충칭까지 시간은 얼마나 걸립니까?"
"비행기로 1시간 반 걸립니다. 현재 3시 비행기를 예약해 놨으니, 늦어도 5시쯤이면 충칭에 도착하실 겁니다."
"잘 알겠습니다."
잠시 후 일행은 북경영화관에 도착하여 극장 직원의 안내를 받아 대기실로 이동했다. 수빈은 대기실에서 간단하게 분장을 마친 후, 깔끔한 감청색 슈트 차림으로 무대 옆쪽으로 이동했다.
이윽고 MC의 호출에 수빈이 무대 쪽으로 등장하자, 아침 일찍부터 표를 끊고 들어온 관객들이 격하게 환영을 해주었다.
- 짝짝짝.
마이크를 잡은 수빈이 짤막하게 인사말을 하였다.
"감독으로서 그리고 배우로서 처음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열심히 만든 영화이니 아무쪼록 재밌게 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무대 인사를 하고 난 수빈은 분장실로 다시 돌아갔다. 수빈은 박팀장이 들고 온 캐리어에서 중국 전통 복장인 검은색 우슈(武術) 도복을 꺼내어 갈아입었다. 그러자 박팀장이 캐리어에서 보자기로 싼 길쭉한 막대 형태의 물건을 꺼내어 수빈에게 건네주었다.
수빈은 보자기를 풀어 반으로 나누어진 월아산(月牙鏟)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조립을 끝마치자 한쪽 끝은 삽처럼 생겼고, 반대쪽 끝은 변형된 둥근 낫 같은 월아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빈의 의견대로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색깔인 붉은색으로 자루를 칠하고, 양쪽 날을 황금색으로 도색한 월아산을 빙빙 휘둘러 보며, 수빈은 이성호 소품팀장이 해줬던 말을 떠올렸다.
"대표님. 박팀장이랑 의논 끝에, 중국에서 무대 인사를 하는 거면 굳이 조선검까지 사용할 필요는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오히려 역효과를 볼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월아산 하나만을 가지고 작업했습니다. 여기 가운데에 볼록한 스위치가 보이시죠? 여기 스위치를 누르면 양쪽 칼날 끝에서 미약한 빛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불꽃이 뿜어져 나오는 건 아니라서 말이죠."
"아. 대표님께서는 그걸 원하셨습니까? 그럼 제가 지금이라도.."
수빈은 황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뇨. 아뇨. 이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계속 설명해 주시죠."
"알겠습니다. 칼날에서 빛이 나는 원리는 발광 다이오드와 흔들면 빛이 나는..."
수빈이 손을 들어 이팀장의 말을 잘랐다.
"제가 원리까지 알 필요는 없죠. 작동법만 설명해 주시면 됩니다."
수빈이 자신의 말을 자르자 심기가 불편한 듯, 헛기침을 내뱉으며 이팀장이 말을 이었다.
"흠흠. 간단합니다. 스위치를 누르면 양쪽 날에서 빛이 나고, 월아산을 빠른 속도로 회전을 시키면 시킬수록 빛이 더 밝아집니다. 회전 에너지가 증가하면 그걸 안에 있는 소형 컨버터가..."
수빈은 다시 설명이 길어지려는 이팀장의 말을 잘랐다.
"잘 알겠습니다. 스위치를 누르면 빛이 나기 시작하고, 회전을 빨 할수록 빛이 세진다. 맞죠?"
이팀장은 본인이 원하는 만큼 설명을 충분히 못해서 마음이 안타까운지, 입맛을 쓰게 다시며 말했다.
"네. 맞습니다."
"그래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제가 잘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수빈은 상념을 중단하고 월아산을 이용해서 가볍게 몸을 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영화가 끝났는지, 관객들의 힘찬 박수 소리가 대기실까지 들려왔다. 대기실 밖에서 수빈을 불렀다. 수빈은 무대 옆으로 이동했다.
극장 스크린에 엔딩 크레디트가 빠르게 올라가고 있을 때, 극장 전체에 둥~ 둥~ 둥~ 하는 웅장한 북소리가 느린 템포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검은색 화면이던 극장 스크린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천지(天地)가 하얗게 눈으로 뒤덮인 산중에서, 주먹만 한 함박눈이 끊임없이 떨어져 내리는 영상이 스크린에 흐르기 시작했다.
수빈이 무대 옆에서 무대 중앙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핀 포인트 조명이 켜지며 수빈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무대 중앙에 우뚝 선 수빈은 월아산의 스위치를 눌렀다. 희미한 황금색 빛이 월아산 양 끝에 서렸다. 관객들이 조용히 침묵을 지킨 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수빈을 쳐다보고 있었다.
수빈은 타이밍을 맞춰 가볍게 오른발을 앞으로 뻗으며 진각을 밟았다.
- 쾅.
그 소리가 마치 신호라도 되는 듯 북소리의 템포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둥둥~ 울리는 북소리에 맞춰 수빈이 월아산을 사방팔방으로 휘돌리기 시작했다. 팔랑개비처럼 돌아가는 월아산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황금빛이 점점 더 강하게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쉭쉭'거리며 천지사방으로 돌아가는 월아산의 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뿜어져 나오는 황금색 빛이 점점 더 강해질 때, 북소리도 덩달아 빨라지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마치 달리는 말발굽 소리처럼 빠른 북소리에 맞춰, 스크린 영상에서 떨어져 내리던 눈송이들이 공중으로 미친 듯이 비산하기 시작했다.
숨 쉴 새도 없이 가파르게 절정을 향해 치달린 수빈의 시연이, 어느덧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수빈이 또다시 진각을 밟았다.
- 쾅.
수빈의 진각 소리에 맞춰 모든 소리가 뚝 끊어졌다. 월아산이 매섭게 공기를 가르는 소리도, 심장을 두드리는 것 같던 북소리도,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스크린에서 비산하던 눈송이들도 차분하게 다시 땅으로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수빈은 월아산을 든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고, 곧게 편 왼손 바닥에 가져다 대며 포권지례의 자세를 취했다. 그런 후 관객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셰셰(谢谢)."
잠시의 정적이 흐른 후, 영화관이 떠나갈 듯 엄청난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 짝짝짝짝짝짝짝.
- 하오(好). 하오(好).
- 찡차이다우슈(精彩的武術).
한쪽 편에서 카메라를 들고 찍고 있던 박팀장이, 감동받은 눈빛으로 수빈을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