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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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자신의 앞자리에 앉아서 크게 입을 벌리고 웃고 있는 오사장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통성명 때부터 자신을 강군이라고 낮춰 부르며 호탕한 척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큰 소리로 떠들고 있는 오사장을 바라보며, 수빈은 어제 박사장에게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강자에게 약하고 돈 욕심이 많은 쓰레기 같은 놈이라고 김사장이 평했다고 했지. 들었던 평판이랑 어쩜 이리 잘 일치할까. 신기할 정도로군.'
마음을 굳힌 수빈은 허이사와 박사장이 앉아있는 쪽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허이사님. 거기 앞쪽 두 번째에 있는 접시 좀 밀어주시겠습니까? 맛있어 보이네요."
수빈의 말에 박사장과 허이사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강이사. 두 번째꺼 말하는 건가? 맛이 좀 매울 건데.."
"네. 그거 맞습니다. 제가 매운 걸 좋아해서요."
미리 정해놓은 시그널을 슬쩍 흘린 뒤, 허이사에게 접시를 건네받은 수빈은 오사장에게 말을 걸었다.
"오사장님. 음식이 입에 좀 맞으십니까?"
"아주 맛있네. 강군이라고 했던가? 자네가 YK에서 이사라며?"
"네. 맞습니다. 어린 나이에 외람되게 이사직을 맡고 있습니다."
"요즘 기획사에서는 그런 게 유행인가 봐? 다른 기획사에서도 아이돌 출신 몇 명이 이사라고 하던데 말이야."
그때, 지금껏 오사장의 발언에 쿵작을 잘 맞춰주던 박사장이 거칠게 태클을 걸고 들어왔다.
"그렇게 함부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오사장님."
박사장의 말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오사장이 자신의 기분이 언짢다는 티를 팍팍 내며 말했다.
"박사장. 내가 강군에 대해서 뭘 함부로 말했다는 건가?"
박사장이 뒤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목소리에 힘을 배가하며 대답했다.
"강이사는 YK 주주들 중에서도 주식 지분을 3번째로 많이 보유하고 있는 대주주입니다. 10프로가 넘는 주식을 소유하고 있는 대주주인 동시에 등기 이사죠. 일반적인 아이돌 출신 이사들과는 격이 다릅니다."
오사장이 살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10프로씩이나.. 10프로면 시세로 얼마 정도 하나?"
박사장 대신 수빈이 담담한 어투로 답변했다.
"얼마 안 합니다. 요즘 조금 올라서 600억 정도 할 겁니다. 푼돈이죠."
생각지도 못한 거액에 오사장이 기함을 하며 중얼거렸다.
"600억? 60도 아니고.. 600억이라고?"
옆에 있던 허이사가 한 팔 거들었다.
"우리 강이사가 얼마 전 본인의 영화사를 설립하면서 영화사 본사로 쓸 빌딩도 한채 샀죠. 그것도 대출 없이 현금으로 말입니다. 무려 300억짜리 빌딩을 말이죠."
오사장이 경악에 찬 눈빛으로 입만 뻐끔뻐끔하고 있을 때 수빈이 말했다.
"오사장님. 제가 오늘 사장님을 뵙자고 한 건, 한 가지 부탁드릴게 있어서입니다."
수빈의 부탁이라는 소리에 돈 욕심이 드는지 오사장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오사장이 탐욕으로 이글거리는 눈빛을 하며 180도 바뀐 태도로 정중하게 물었다.
"강군 아니지 강이사. 강이사가 나에게 할 부탁이 있다고?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면 들어드려야지. 암. 그래야지. 어떤 부탁인가?"
"제가 오사장님께 부탁드릴 안건은 불법적인 일도 아니고 부정적인 청탁도 아닙니다. 예전부터 KBS에서 줄곧 하고 있던 일이죠."
수빈의 말에 오사장이 반문했다.
"그런 일이라면.. 굳이 날 보자고 할 필요가 있었나?"
"제가 필요한 건 시간입니다. 빠른 시간 내에 일을 처리할 필요가 있어서 이렇게 뵙자고 했습니다."
그제서야 이해를 했다는 듯 오사장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렇군. 강이사처럼 바쁜 사람은 시간이 곧 돈이지. 강이사.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말을 해보게나. 내가 어지간한 일이면 다 들어줄 테니."
"제가 출연했던 '특별 수사본부' 드라마의 판권과 리메이크 권한을 사고 싶습니다."
수빈의 말에 오사장이 얼핏 이해가 안 되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별 수사본부라면.. 작년에 방영했던 한중 합작 드라마 아닌가? 그걸 왜 사나? 이미 단물이 다 빠진 건데."
수빈은 슬쩍 오사장을 띄워주었다.
"역시 최고경영자시다 보니 정확하게 파악을 하고 계시는군요. 맞습니다. 단물이 다 빠진 드라마입니다. 한국 드라마를 팔아먹을 양대 시장이 중국과 일본인데, 중국 쪽은 이미 드라마가 방영이 되었죠. 그리고 일본은 한국과 중국 양국 간의 이야기라 절대 살 일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도 사겠다고?"
"네. 제가 열심히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다른 루트를 한번 뚫어볼까 해서요."
"좋네. 그런 좋은 일이라면 내가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네. 불법도 아니고 KBS 입장에서는 오히려 고마운 일 아닌가?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지. 그런데 말이야.."
오사장은 수빈의 눈치를 보며 은근한 목소리로 슬쩍 운을 뗐다.
"나에게 돌아오는 건 좀 있는 건가?"
마치 뇌물을 바라는듯한 오사장의 말에 수빈이 잘라 말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특별히 사장님께 돌아갈 건 없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그랬다간 사달이 나기 십상이죠."
수빈의 말에 오사장의 얼굴이 급격히 찌그러 들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때 박사장이 급히 끼어들어 오사장에게 한마디 던졌다.
"YK에서는 사장님의 연륜과 경륜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저희 회사에서는 사장님을 외부 고문으로 초빙을 해서 자문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얼마 후 임기가 끝나시는 걸로 아는데, 사정이 허락하신다면 저희 회사에 고문으로 오셔서 지도편달을 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1년 정도 말이죠. 연봉은.."
박사장이 수빈을 슬쩍 쳐다보자 수빈이 대신 말했다.
"깔끔하게 한 달에 천만원씩 해서 연봉 1억 2천 정도면 어떻겠습니까? 1년이 지나면 퇴직금으로 1억 2천을 더 드리겠습니다. 합쳐서 2억 4천 정도가 되겠군요."
수빈의 말에 오사장이 희색만면(喜色滿面) 하여 간이라도 빼줄듯한 태도로 대답했다.
"좋군. 고문이라.. 아주 좋아. 난 불만 없다네. 그럼 내가 드라마랑 관련해서 뭘 어떻게 해주면 되는 건가? 뭐든지 상관없네. 말만 하게나."
수빈이 냉정한 얼굴로 잘라 말했다.
"아무것도 안 하시면 됩니다."
잠시 후 수빈은 일행들 보다 일찍 식당을 나왔다. 수빈은 밴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며 회계부 강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가더니 강부장이 전화를 받았다.
[네. 대표님.]
"지금 어디십니까?"
[조부장과 함께 KBS 근처에서 대기 중입니다.]
"알겠습니다. 조금 전 KBS 오사장이랑 이야기가 잘 끝났습니다. 지금 바로 실무진과 접촉하셔서 제가 말한 대로 서류를 꾸며서 올리라고 하세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용돈도 넉넉하게 쥐어지시고요."
[잘 알겠습니다. 대표님. 근데..굳이 이런 식으로 복잡하게 일을 처리할 필요가 있습니까? 돈도 이중으로 나가게 돼서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만..]
"강부장. 지금 사방에서 절 노리고 있어요. 그런 사람들에게 절 공격할 빌미를 제공하면 절대 안 됩니다. 이번 일은 정상적인 루트를 통해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게 뒤탈이 없어요. 위에서 상명하달식으로 내려보냈다가는, 지금 사장의 임기가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이 나올 수도 있어요. 이럴 때일수록 돈을 아끼면 안 됩니다. 사람들에게 나랑 같이 일을 하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게 좋아요."
[알겠습니다. 빈틈없이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제가 중국으로 출장 가기 전까지 반드시 제 손에 계약서를 쥐어주셔야만 합니다."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아무리 오래 걸려도 월요일이면 다 끝날 겁니다.]
"믿고 있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수빈은 밴을 타고 YK 사옥으로 이동하였다. 홍보팀으로 올라간 수빈은 김팀장의 방에서 독대를 하고 있었다.
"여태까지의 경과를 간략하게 정리해 봤습니다."
수빈은 김팀장이 내미는 서류를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잠시 후 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김팀장을 칭찬했다.
"잘 대응하셨네요. 구질구질하게 여러 말 적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심플하게 한 문장으로 대응하는 게 좋아요. 근데.."
수빈은 약간 놀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건 좀 의외네요. 댓글 작업을 한 곳이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라니. 얼마 전 폭행 사건과 연루된 화랑 백화점 사장이 좌천되어 갔다는 일본이라면 그나마 이해를 하겠습니다만.. 이건 너무 생뚱맞은데요."
"저도 그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역만리 미국이라니. 저랑 아무런 연관도 없는 나라인데.. 박정호 실장이 정확하게 뭐라고 하던가요?"
"전산실장 말로는 미국이라는 것 말고는 더 이상 알아낼 수가 없다고 합니다. 더 자세한 걸 알려면 전문 해커를 고용하거나 아니면 미국 쪽 수사관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힘을 한번 써볼까요?"
수빈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번 일은 제가 따로 세운 계획이 있기 때문에, 지금은 이 정도 대응으로도 충분합니다. 괜히 그쪽을 조사하려다 타초경사(打草驚蛇)의 우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당분간은 또 어떤 수작을 부리는지 지켜만 봐주세요."
"잘 알겠습니다. 제가 예의주시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사님. 3번째 봉투 말입니다. 이번 주말이면 천만을 너끈히 돌파할 걸로 보입니다만.. 어떻게 처리할까요?"
"애초에 천만을 목표로 세웠던 계획이라 이제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죠. 뭐 그래도 흥행에 조금이라도 도움은 될 테니까.. 제가 중국에서 귀국하는 대로 바로 작업을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 목요일에 차질 없이 작업을 진행하겠습니다."
기합이 제대로 들어가 있는 김팀장을 보며 빙긋 웃은 수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래요. 관객이 많이 들수록 김팀장 보너스가 팍팍 올라가는 거 잘 알고 계시죠? 계속해서 수고 좀 해주세요."
덩달이 자리에서 일어난 김팀장이 깍듯하게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이사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잠시 후 주차장에 세워진 밴에 올라탄 수빈이 백성철에게 말을 건넸다.
"제가 말한 대로 스케줄이 잡혔나요?"
"그래. 수빈아. 다음 주 목요일에 출연하는 걸로 스케줄을 잡았다."
"알겠습니다. 그거 말고 다른 중요한 스케줄이 뭐 뭐 있죠?"
"다음 주 월요일에 2차 대본 리딩이 있지. 화요일에는 중국 출장이고.. 그리고 내일 결혼식이 있는데 어떡할 거냐?"
"아. 결혼식. 아무래도 참석해야겠죠."
"그럼 내가 내일 시간 맞춰서 집으로 데리러 갈까?"
"네. 그러세요. 오늘은 이만 집으로 퇴근하죠. 중국 출장 준비를 해야 되니까요."
"그래. 알았어."
이윽고 수빈을 태운 밴이 빠르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2018년 1월 27일 토요일 오전 10시 50분.
최성미는 주말 아침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언니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최성미의 언니인 최경미가 신부 화장을 받고 있는 미용실에서, 최성미는 핸드폰을 붙들고 소리를 치고 있었다.
"엄마. 아빠 보고 차 좀 빨리 미용실로 보내라고 하세요. 언니 신부 화장 다 끝나간단 말이에요. 1시 결혼식이면 늦어도 12시에는 신부 대기실에 도착해야 한다고요."
[얘는.. 아직 11시도 안됐어. 시간 충분한데 뭘 그렇게 서두르니? 네 아빠가 자기도 이쁘게 보여야 한다고 지금 샤워 중이야. 나오면 바로 보낼게.]
"무슨 소리예요? 그럴 여유가 없다고요. 토요일 낮에 서울 시내가 얼마나 막히는지 모르세요? 까딱하다간 큰일 난다고요. 딸 치우면서 이렇게 태평이시면 어떡해요?"
[알았어. 이년아. 그만 좀 닦달해라. 누가 보면 네가 딸 치우는 줄 알겠다. 최대한 빨리 보낼게.]
전화를 끊은 최성미는 핸드폰을 움켜쥐고 부르를 치를 떨며 중얼거렸다.
"안되겠어. 만사가 천하태평인 이 양반들을 믿었다간 큰일 나겠어. 빨리 콜이라도 부르던가 해야지."
그때 신부화장이 거의 끝나가는 최경미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성미야. 미안. 나 때문에 아침부터 고생이 많지?"
"무슨 소리야? 언니가 결혼하는 좋은 날인데 이 정도는 고생도 아니지."
"그래도.. 네가 이 결혼 많이 반대했었잖아. 그래서 내가.."
성미가 경미의 말을 잘랐다.
"나만 반대했나? 엄마도 반대했었잖아. 그리고 그때는 형부가 사람은 좋은데 음악 한다 그러고.. 거기에 모아논 돈도 없다고 그러니까 언니 데려가서 고생시킬까 봐 다들 반대했던 거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형부 얼마 전에 돈 많이 벌어서 강남에 아파트도 샀다며? 요즘 취직 못해서 빌빌거리는 젊은 애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그런 세상에서 직장 확실하고 자신이 번 돈으로 아파트까지 산 남자를 누가 반대하냐? 걱정 마. 언니. 나랑 엄마 둘 다 이 결혼 진심으로 찬성이니까. 언니는 시집가서 앞으로 잘 살기만 하면 되는 거야."
"고마워, 성미야."
"잠만 기다려봐. 언니. 내가 밖에 나가서 택시를 잡을 테니까, 전화하면 바로 밖으로 나와라. 알았지?"
"그래. 알았어."
최성미는 행여나 언니가 식장에 늦게 도착할까 봐, 택시를 잡으러 부랴부랴 밖으로 뛰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