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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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의 설명을 다 듣고 난 성강호가 물었다.
"그러니까 이따 대본 리딩을 할 때, 강감독이 신호를 보내면 거기에 맞춰 하이유 연기를 호평하면서 잘했다 잘했다 칭찬을 하던가 아니면 악평을 하면서 연기를 뭐 그따위로 하냐 그러면서 발라버리라는 거지?"
"네. 맞습니다. 형님."
"경찰들이 한다는 굿 캅, 뱃 캅, 뭐 그런 역할놀이를 하자는 거야?"
수빈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런 게 아닙니다. 형님이 바람잡이 역할로 앞에서 먼저 분위기를 잡아주시면, 그 뒤에 제가 나서서 목을 쳐버리는 망나니 역할을 할 생각입니다. 푸닥거리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죠. 어설프게 할 거면 차라리 안 하는 게 낫습니다."
"신호는 뭐냐?"
"제가 형님께 '천만 배우가 보시기에 하이유씨의 연기가 어떻습니까?'라고 물으면 칭찬을 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1억 관객을 돌파하신 대배우가 보시기에 하이유씨의 연기가 어떻습니까?'라고 물으면 비난을 해주세요."
"천만이면 칭찬, 1억이면 비난이라. 알았다. 힘없는 배우가 감독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별수 있나."
"또 또 그러신다. 형님.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 봐야 할거 같습니다. 이따 대본 리딩 때 다시 뵙도록 할게요."
"그려. 난 박팀장이랑 이야기할게 좀 있어서, 여기서 노가리나 까면서 쉬고 있을 테니 이따 보자."
"네. 형님."
수빈은 휴게실에서 일어나 빠르게 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회의실 안으로 들어서니 YK 홍보팀 김팀장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빈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김팀장을 말린 뒤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제가 약속 시간보다 좀 늦었네요. 입구에서 성강호 형님에게 붙잡혀서.."
"아닙니다. 이사님. 저도 도착한지 얼마 안 됐습니다."
"그래요. 무슨 일로 아침부터 급히 보자고 하셨습니까?"
"이사님이 2번 봉투에 적어주셨던 1, 2, 3단계 계획 중에서, 2단계 계획과 관련해 급히 의논 드릴게 있어서 뵙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3번 봉투에 대해서도 드려야 할 말씀이 있어서요."
"그래요? 무슨 일인지 어디 한번 들어봅시다."
"네. 이사님. 어제 방송된 인터뷰로 1단계는 무사히 잘 끝난 걸로 여겨집니다. 내일 방송될 '모닝 마당'의 목요 특강 코너까지 고려하면, 1단계는 더 이상 손댈 필요가 없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수빈도 동의한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김팀장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다음 단계인 2단계 계획을 위해서, 어제저녁 제가 섭외를 진행 했습니다만.."
"섭외가 생각보다 잘 안되던가요? 필요하다면 제가 아는 분들에게 연락을 해보겠습니다."
김팀장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이사님이 적어주셨잖습니까? 2단계. 영화의 재관람을 유도하기 위해서 1단계 인터뷰를 통해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건 좋지만, 실제로 재관람을 하고서도 탬버린 소리를 듣지 못한 대다수의 관객들이 행여 부정적인 마음으로 성토(聲討)의 장을 마련하는 것을 반드시 경계하고 미연(未然)에 방지하여야만 한다."
김팀장이 호흡을 잠시 고르며, 다시 줄줄 읊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중이 인정하는 음악 쪽으로 조예가 깊고 귀가 날카로운 유명인을 섭외하여, 그 사람도 재관람을 하였지만 탬버린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걸 강조하며, 그 사실을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뜨려야 한다. 이를 통해 부정적인 분위기를 사전에 예방하고, 실망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보다 가벼운 놀이나 흥밋거리로 만들 필요가 있다. 제가 그 글을 보자마자 머릿속으로 바로 떠오르는 연예인이 한 명 있었습니다."
수빈은 김팀장의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또 한번 놀라고 있었다.
'내가 적어준 걸 다 외워서 오다니.. 역시 만만한 세상이 아니야. 이전 세상과 비교하면 똑똑한 인재들이 천지사방에 널렸어. 결국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한 거겠지.'
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래서요? 김팀장이 바로 떠올렸다는 그 연예인이 누굽니까?"
"배청수입니다."
순간 수빈이 흠칫했다.
"배청수? 설마.. 음악캠프의 그 배청수?"
"네. 맞습니다. 이사님의 글을 보자마자 바로 그분을 떠올렸습니다. 제가 학생 때 매일매일 '배청수의 음악캠프'를 들으면서 자라서.. 그분 팬입니다. "
"이거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거물을 떠올리셨는데.. 그래서요?"
"제가 2단계를 위해 어제저녁에 섭외 전화를 드렸습니다. 사실 연락을 하면서도 될 거라는 기대를 거의 안 했었는데, 예상 밖으로 흔쾌히 승낙을 해주셨습니다. 요 근래 이사님이 작업하신 음악들이 참 좋다고 말씀하시면서요. 그 대신.."
"그 대신?"
"이번 달 중으로 본인의 라디오에 한번 나와달라고 부탁을 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이사님께 물어보고 답변을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수빈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제가 나가야죠. 당연히 나가는 게 맞습니다. 저도 그분 좋아합니다."
수빈의 승낙에 김팀장의 기분이 좋아졌는지,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2단계는 배청수님을 중심으로 작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3번 봉투 건에 대해서.."
수빈이 손을 들어 김팀장의 말을 잘랐다.
"잠시만요. 2단계를 배청수님 한 분만으로 진행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 지나치게 거물이에요. 일반인들이 편하게 다가가기가 힘들 겁니다. 대중들과 배청수씨 사이에 중간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인물이 필요해요. 좀 더 가볍고, 일반인들이 친숙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러면서도 음악적 조예가 깊은.."
말을 하던 도중 수빈은 한 명의 인물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그 문제는 제가 해결하죠. 제가 충분히 섭외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다음으로 넘어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3번 봉투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원래 봉투의 개봉 조건이 이사님도 아시다시피.."
"800만 돌파 후에 뜯어보라고 제가 말했었죠. 아직 멀었을 건데요?"
"그게.. 내일이면 돌파할 것 같습니다."
수빈은 깜짝 놀라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닐걸요? 일요일 밤에 제가 확인했을 때 680만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제 월요일 밤에 700만을 조금 넘어섰죠. 지금은 주 중이라 스코어가 팍팍 올라가지 않아요. 방학 기간도 아니고요. 800만을 찍으려면 최소한 주말은 돼야 할 겁니다."
김팀장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이사님이 잘못 알고 계시는 겁니다. 어젯밤 이사님의 인터뷰가 나간 이후로, 금일 상영될 영화의 예매 건수가 10만 건을 훌쩍 넘어섰다고 합니다. 예매를 하지 않고 보러 가는 관객 수까지 합치면, 내일이면 800만 돌파가 거의 확실시되고 있습니다."
수빈이 놀란 토끼 눈이 되어 황급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이거 사람들의 반응이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격렬한데요.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군요."
"네. 심상치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침부터 급히 이사님을 뵙자고 한 겁니다.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작업을 해야만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수빈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내가 예측한 것들이 도통 들어맞지가 않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가 파악을 못한 변수라도 있는 건가? 후.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감이 안 잡히는군.'
생각에서 깨어난 수빈이 김팀장을 보며 물었다.
"아직 봉투를 뜯어보지는 않으셨죠?"
"네. 이사님."
"그럼 그 봉투는 천만을 돌파하면 뜯는 것으로 바꾸죠. 아무래도 목표를 좀 더 상향조절하는 게 맞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관객 수가 천만을 돌파할 것 같으면, 그때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전 지금 바로 YK로 돌아가서 2단계 작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수빈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김팀장을 불렀다.
"김팀장님."
"네. 이사님."
"2번 봉투의 3단계 마지막 계획 있잖아요. 그것도 좀 더 뒤로 미루도록 합시다. 돌아가는 추이를 좀 더 지켜보면서, 적절한 타이밍을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사님."
김팀장이 떠나고 혼자 남은 회의실에서, 수빈은 핸드폰을 꺼내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삼십여 분 후, 일전에 영화 시사회를 진행했던 세미나실에서 1차 대본 회의가 열렸다.
수빈을 포함하여 성강호, 하이유, 김샛별 등이 가장 앞자리에 앉아 있었고, 영상팀장을 비롯한 각팀의 팀장들이 그 뒷자리에, 그리고 맨 뒷자리에는 영화사 직원들과 배우들과 함께 온 스태프들이 동석하고 있었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는 박상민 지원팀장이 메이킹필름용 촬영을 위해 열심히 카메라를 돌리고 있었다.
수빈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새롭게 제작될 영화의 첫 번째 대본 리딩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영화 제목이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습니다만, 일단 가제로 '나는 죽기 싫다'라고 정했습니다.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지금 일어서서 말하고 있는 저는, 이번 영화의 각본을 직접 썼고, 감독이자 제작자이면서 주연 배우이기도 한 강수빈이라고 합니다."
수빈이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자 열광적인 박수가 터져 나왔다.
- 짝짝짝짝.
박수 소리에 수빈이 방긋 웃으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말인즉슨, 이번 영화의 제작과 관련된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고, 모든 결정권도 저에게 있다는 겁니다. 촬영을 하시면서 어려운 점이 있거나 곤란한 사항들이 있으면, 하시라도 저에게 말씀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간단하게 주연 배우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수빈은 들고 있던 시나리오를 슬쩍 보는 척을 하며 말했다.
"먼저 제가 맡은 남자 주인공 '김수호'의 역할에 대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잘 나가는 작곡자이자 음반 제작자입니다. 시건방진 성격에 제 잘난 맛에 사는 인간입니다만, 불치병을 앓고 서서히 죽어가면서 조금씩 성격이 변해갑니다. 종국에는 죽음을 맞게 되죠. 그럼 다음은 김수호의 여자 친구인 '정윤아' 역입니다. 타고난 미모로 인해 어렸을 때 성추행을 겪은 경험이 있어서 대인기피증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는 걸 두려워해서 현재 콜센터에서 일을 하고 있죠. 김샛별 배우님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수빈이 손짓을 하자, 자신의 역할에 맞게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참석한 김샛별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공손히 인사를 하였다.
- 짝짝짝.
"다음은 '김수호'의 뮤즈라고 할 수 있는 '소지영' 역입니다. 타고난 아름다운 목소리로 인기 절정을 달리는 '레베카'라는 활동명의 여가수이죠. 차후 정윤아와 묘한 삼각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하이유 배우님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수빈의 말이 끝나자 화사한 차림의 하이유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였다.
- 짝짝짝.
"마지막으로 '김수호'의 아버지인 홀아비 '김정구' 역입니다. 주인공이 태어난지 얼마 안 돼서 부인을 병으로 잃고, 나중에는 혼자 힘들게 키운 주인공마저 병으로 잃게 되는 감성 연기의 절정을 보여주실 분입니다. 설명이 필요 없는 대배우 성강호님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짝짝짝짝짝짝.
성강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자, 앞전의 소개 때보다 더욱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오랫동안 박수가 멈추지 않고 계속 터져 나오자. 쑥스러운지 성강호가 손을 흔들어 박수를 제지했다.
"마지막으로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병원 의사 역할의 마동식 배우님은, 다른 촬영과 스케줄이 겹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참석을 못했습니다. 마동식 배우님께서 여러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꼭 전해달라고 하십니다. 그럼 이걸로 간략한 인사를 마치고 대본 리딩에 들어가겠습니다."
수빈은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대본 리딩이 몇 차까지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예상으로는 3차 정도면 끝날 걸로 생각됩니다. 늦어도 다음 주까지는 대본 리딩을 모두 마치고, 그다음 주에는 크랭크인에 들어갈 생각이니, 다들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미리미리 준비를 잘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럼 오늘은 주인공인 '김수호'가 자신에게 병이 있다는 걸 발견하기 전까지, 신으로 보시면 20신까지의 대본을 리딩 하겠습니다."
살짝 긴장감이 맴도는 분위기 속에서 대본 리딩이 시작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긴장이 풀리고 집중력이 높아지는지, 배우들의 불꽃튀는 연기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덩달아 주위에서 지켜보던 사람들도, 흥미진진한 얼굴로 배우들의 연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신 18에 이르러 우연히 마주친 정윤아와 소지영의 인사 장면이 진행되고 있을 때, 좌중의 후끈 달아오른 열기와 동떨어진 채로 수빈은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는 참담한 마음에 장탄식을 내뱉고 있었다.
'하아. 이대로 갔다간 영화 말아먹기에 딱 좋군. 둘 다 연기가 나쁜 편은 아니지만.. 둘 다 깊이가 없어. 하이유만 걱정을 했었는데, 쌍으로 문제로군. 쌍쌍파티 찍냐..'
갑갑한 마음에 수빈은 고개를 슬쩍 돌려 성강호를 쳐다보았다. 수빈의 눈길을 느꼈는지, 성강호가 살짝 굳은 얼굴로 수빈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이심전심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흔들었다.
마음을 굳힌 수빈은 신 18이 끝나자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두 분의 연기 잘 봤습니다.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오늘 대본 리딩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그럼 두 분의 연기를 평가해봐야 할 텐데.. 아무래도 저보다는 대배우이신 성강호 배우님의 평을 들어보는 게 좋겠죠?"
수빈은 성강호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성강호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