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156화 (156/236)

# 156

49 - 2

동도 채 트지 않은 새벽.

칼날처럼 매서운 동장군의 입김이 절정의 위력을 떨치고 있는 1월 22일 월요일 아침.

수빈은 답답한 마음에 밴의 차창을 열고, 얼음처럼 차가운 아침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그 모습을 룸미러로 쳐다보던 백성철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수빈아. 가기 싫어?"

"아뇨. 싫다기보다는 익숙하지 않은 방송이라, 좀 긴장이 된다고 해야 할까. 암튼 좀 그러네요."

"정 힘들면 지금이라도 말해. 담당 피디한테 연락해서, 일이 있어서 너 못 나간다고 말해줄 테니까. 알잖아. 형이 너 덕에 옛날부터 이런 일 많이 겪어봐서 도가 튼 사람이라는걸. 아무 문제없이 잘 처리할 수 있다."

수빈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어떻게 그럽니까. 제가 시킨 일을 열심히 수행한다고 김대리 아니 김팀장이 부랴부랴 힘들게 잡은 방송일 텐데.. 전 괜찮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래. 알았어. 어차피 어제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 못했던 방송 출연이잖아. 부담되면 언제든지 말해도 된다."

"알았어요. 형."

가볍게 미소를 띠며 대꾸하였지만, 수빈은 속으로 걱정이 태산 같았다.

'김팀장 덕분에 팔자에도 없던 '모닝 마당'에 출연하게 돼버렸네. 내가 분명히 영화 관련 프로그램으로 잡으라고 적어줬는데 쌩깠단 말이지. 그렇다고 못 나가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아..'

수빈이 맘속으로 장탄식을 내뱉을 때, 새벽 공기를 가르며 텅 빈 차도를 빠르게 질주하던 밴이 어느덧 YK 사옥에 도착하였다.

수빈은 밴에서 내려 무거운 발걸음으로 배우 1팀 전용 분장실로 걸어갔다. 분장실 문을 가볍게 노크한 후 안으로 들어서니, 여성 두 명이 부스스한 머리에 팅팅 부은 얼굴로 수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빈이 등장하자 쏟아지는 졸음에 초점 없이 흐리멍덩하던 두 여성의 눈빛이,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매의 눈처럼 광채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수빈은 말없이 뚜벅뚜벅 걸어가 두 여성의 손을 양손으로 각각 움켜잡았다.

그 순간. 마치 일생 동안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처럼, 두 여성이 번개같은 반사 신경으로 각자 남은 한 손을 쾌속하게 떨쳤다. 마치 파리지옥이 닫히듯, 순식간에 수빈의 손을 강하게 덥석 붙들은 두 여성이 동시에 비명을 질러댔다.

- 어머머머. 수빈씨. 어머어머. 이게 뭐람. 너무 좋아.

- 어머나. 이사님. 아침 댓바람부터. 역시 젊으셔.

삼 년 전 집 나간 서방이 다시 돌아온 듯 호들갑을 떠는 두 여성에게, 수빈이 머리를 조아리며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제발 부탁입니다. 변검 아니 김팀장님 그리고 코디님. 이전 BIFF 참석할 때처럼 이상한 별나라 왕자 스타일만은 제발 하지 말아주세요."

수빈의 말에 명숙이라는 이름의 코디가 걱정 마라는 듯 콧바람을 내뿜더니, 턱을 살짝 치켜들고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머. 이사님. 그때는 타깃층이 로망을 꿈꾸는 이삼십 대 젊은 여성이라서 그런 거죠. 오늘은 완전히 달라요. '모닝 마당'의 주 시청자들은 사오십 대 아줌마들이라고요. 아줌마들은 아줌마대로 또 로망이 있어요."

수빈이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아줌마들의 로망요? 그래서 오늘의 콘셉트는 뭡니까?"

"엄친아! 당연히 엄친아 콘셉트죠. 단정하고 잘생기고 똑똑해 보이는 스타일로 꾸며 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TV를 보는 아줌마들이 수빈씨가 내 아들이었으면.. 그런 마음이 절로 생기도록 만들어 드릴 테니 편하게 앉아서 기다리시면 돼요."

코디의 말에 수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해요. 그리고, 이렇게 갑자기 월요일 꼭두새벽부터 나오게 해서 미안합니다. 제가 카드를 드릴 테니 오늘 하루는 맛있는 식사를 하시면서.."

말을 하면서 품에서 카드를 꺼내기 위해, 붙잡았던 손을 빼려고 하던 수빈은 움찔했다.

'무슨 여자들 아귀힘이.. 외공이라도 익힌 건가. 소림사 십팔동인(十八銅人) 하고 거의 맞먹는 악력인데.'

잠시 후 수빈이 의자에 앉아 분장을 받고 있을 때, 홍보부 김팀장이 분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김팀장을 발견한 수빈이 가볍게 눈인사를 하자, 김팀장도 허리를 숙이며 공손히 인사를 하였다.

수빈 곁으로 가까이 다가온 김팀장이 입을 열었다.

"강이사님. 이렇게 갑자기 방송을 나가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뇨. 제가 맡긴 일을 성실히 수행하고 계시는 건데 죄송이라니요."

그때 분장실 김팀장이 뾰쪽한 목소리로 말했다.

"중요한 분장 중이니 입 벌리지 마세요."

깜짝 놀란 수빈이 흠칫거리며 입을 꾹 다물자, 김팀장이 김팀장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제가 옆에서 간단하게 설명을 해드릴 테니, 분장을 받으시면서 들으시죠.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분장이 끝나고 물어봐 주시길 바랍니다."

수빈이 알았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저녁 봉투를 개봉하고 나름 영화 관련 프로그램들을 찾아봤지만, 다들 주말 프로라 시간이 너무 늦을 거라는 판단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한, 뉴스 프로를 제외하고 가장 빨리 방송을 내보낼 수 있는 프로그램 2개를 급히 섭외했습니다. 너무 많은 방송은 오히려 역효과라고 적어 놓으셔서요."

잠시 수빈을 쳐다본 김대리가 말을 이었다.

"제일 먼저 별다른 제약 없이, 우리 쪽에게 방송 시간을 최대한 길게 내어줄 수 있는 KBC '모닝 마당' 유한수 CP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빨리 방송을 내보낼 수 있는 날짜를 물어봤습니다. 유CP의 말로는 오늘 녹화를 뜨게 되면, 목요일 특별 마당인 '목요 특강' 코너에 신인 감독의 자격으로 세워 주겠답니다. 단, 시작하기 전에 복근을 잠시 공개하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수빈이 이해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때, 대화를 듣고 있던 변검녀의 눈빛이 광채를 빛내며 번들거리는 것을 두 사람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분장을 다하신 후 KBC로 가셔서 작가들과 인터뷰를 먼저 하셔야 됩니다. 그런 후 대본이 나오길 기다렸다가, 대본이 나오면 내용을 숙지하셔서 1시부터 녹화를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쪽 말로는 늦어도 4시면 녹화가 다 끝날 거라고 합니다."

김팀장이 눈길을 주자 수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6시까지 SBC로 이동하셔서 '본격연예 한밤'에 나갈 인터뷰를 잠깐 하시면 오늘 일정이 모두 끝납니다. 원래 '본격연예 한밤'이 화요일 아침에 녹화를 해서 당일 저녁 9시에 방송이 나갑니다만, 오늘 하루에 일정을 끝내기 위해 제가 시간 조율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밤 측에서는 3분 이상 시간을 내어 줄 수 없다고 합니다. 워낙 갑자기 잡은 인터뷰고, 스캔들이나 결혼 같은 이슈가 아니라서 더 이상은 곤란하다고 합니다."

잠시 호흡을 고른 김팀장이 마저 말을 이었다.

"저 나름대로 세운 계획은 이렇습니다. 화요일 '본격연예 한밤'에서 가볍게 이번 일을 다루고, 수요일 대대적으로 기사를 뿌린 다음, 목요일 '모닝 마당'에서 특강 형식으로 자세히 이번 일을 설명하시는 걸로 말입니다. 그럼 이사님이 봉투에 적어주신, 분위기 조성이 충분히 가능할 걸로 생각합니다."

그때 분장실 김팀장이 입을 열었다.

"분장 다 끝났어요. 이제 옷을 갈아입으시면 됩니다."

수빈이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 의자에서 일어나며 홍보부 김팀장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아주 잘 하셨습니다. 제가 들어봐도 특별히 손을 보거나 더 추가해야 할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제 주변 분들이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스마트 해지시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은데요."

"무슨 말씀을.. 이게 다 이사님 옆에서 지켜보고 배운 덕분입니다."

"이야. 이제는 립 서비스까지 완벽해지셨네요. 암튼, 어젯밤부터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그럼 전 백비서랑 같이 1층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러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따라갈 테니까요. 10분이면 충분할 겁니다."

시간이 흘러 예상보다 많이 늦게, 삼십분이 다 되어 가서야 수빈이 로비에 모습을 드러냈다.

핏이 멋들어지게 떨어지는 프러시안 블루톤의 슈트를 차려입고, 핑크빛이 살짝 감도는 와이셔츠에, 옅은 회색빛 넥타이와 행커치프를 깔 맞춤한 수빈이, 마치 뱀파이어에게 피를 다 빨린 시체처럼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로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수빈의 뒤편에는 분장 도구들을 챙긴 두 여인이 쉼 없이 꺄악 거리며, 봤노라 만졌노라 찍었노라 하면서 끊임없이 수다를 나누면서 따라오고 있었다.

고개를 뒤로 살짝 돌려, 환하게 빛나는 얼굴로 즐겁게 조잘대는 두 여인을 힐끗 쳐다본 수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복근 분장이라니. TV 화면에 나가면 무조건 분장을 해야만 한다고 우겨대니 대책이 없네. 후.. 하도 많이 쓰다듬어서 피부가 좀 닳은 것 같은 기분까지 드는걸.'

잠시 후 다섯 사람은 밴을 타고 KBC로 이동했다.

KBC 여의도 별관에 도착한 수빈은 유한수 CP, 황혜정 피디 등과 인사를 나눈 후, 대기실에서 작가들과 인터뷰를 나누었다.

인터뷰를 끝낸 수빈이 대기실에서 도시락으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하고 있을 때, 오소라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수빈은 옆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대표님. 인천 공항에서 전화드려요. 지금 베이징으로 출발합니다.]

"그래요. 몸 건강히 무사히 잘 다녀오시고, 제가 말한 거 잊지 마세요. 절대 바꿀 수 없다고 결정한 세 가지 항목만 변동 없이 지켜진다면, 나머지 부분들은 오상무에게 전권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명심하세요. 청톈의 우커보 회장은 바지 회장에 불과합니다. 아무런 실권이 없어요. 최종 결정권은 어디까지나 회장의 부인인 팽연숙에게 있으니, 아무쪼록 잘 대처하시길 바랍니다. 예사 여인이 아니니 조심하시고요."

[네. 알겠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예사 여자가 아니니까요.]

"네. 믿고 있겠습니다. 모든 책임은 제가 질 테니, 절대 기죽지 마시고 협상에 임하세요."

말을 하다 수빈은 걱정이 들어 퍼뜩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렇다고 싸움닭처럼 너무 막 싸우지는 마시고요."

[어머. 제가 얼마나 유순하고 대인 관계가 원만한데요. 대표님이 잘 아시잖아요? 싸우지 않고 대화로 협상을 잘 끝내고 돌아올게요.]

"네네. 잘 다녀오시고 급한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 주세요."

전화를 끊으며 수빈이 중얼거렸다.

"퍽도 그러겠다.."

핸드폰을 옆에 내려놓으며 수빈은 속으로 뇌까렸다.

'꿩 잡는 게 매라고. 나보다 오소라가 훨씬 더 좋은 협상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거야. 하아.. 이상하게 여자랑 대화를 나누면 자꾸 말린단 말이지. 쩝.'

수빈은 쓰게 입맛을 다시며 다시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이윽고 시간이 흘러 1시가 다 되어갔다. 대기실 문을 노크하며 조연출이 문밖에서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 촬영 10분 전입니다.

김팀장과 코디가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김팀장이 분첩으로 수빈의 얼굴을 가볍게 두드리며 화장을 고치더니, 스스럼없이 수빈의 와이셔츠를 위로 끌어올렸다. 본디 선명했던 복근이, 분장까지 한 덕분에 왕자 탁본(拓本)을 뜨도 될 정도로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마치 단단한 암석에 명공(名工)이 심혈을 기울여 조각을 한 듯, 좌우 대칭이 완벽하고 8개의 첨두(尖頭)로 갈라진 외복사근까지 선명한 복근이 자태를 드러내자, 두 여인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빈은, 고소를 지으며 와이셔츠를 빠르게 밑으로 끌어내렸다.

"이 정도면 손을 더 안 봐도 충분할 거 같습니다."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며 코디가 수빈의 옷매무새를 만졌다.

잠시 후 수빈은 스튜디오 세트장 옆의 어두운 곳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윤인팔 남자 MC의 굵직한 목소리가 스튜디오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고 있었다.

"오늘 아침 '목요 특강' 코너에서는, 최근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아름다운 청년 감독 한 분을 모시고 강의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윤경 여자 MC가 낭랑한 목소리로 멘트를 이어받았다.

"지금 방청석에 계시는 여성분들과, 가정에서 TV를 보고 계시는 여성분들은 정~말 복받으신 거예요. 전 이 분이 '모닝 마당'에 나오실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정말 잘생긴 청년 아니 이제는 어엿한 한 명의 당당한 남자라고 불러드려야 맞겠죠."

다시 윤인팔의 걸걸한 목소리가 힘차게 이어졌다.

"여러분들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최근 흥행 돌풍을 일으키며 화제를 모으고 있는 '달빛 속의 호위무사'의 영화감독이자 음악 감독이시고, 한 영화사의 CEO이며, 그 유명한 YK의 현직 이사이기도 한, '강수빈' 영화감독을 모시겠습니다. 다들 힘찬 박수로 맞이해 주시길 바랍니다."

- 우와아아아.

- 짝짝짝짝짝.

비명처럼 터져 나오는 아줌마들의 함성 소리와, 끝없이 이어지는 박수 소리를 귀로 들으며, 수빈은 어둠 속에서 어깨를 쭉 펴고 등을 곧게 폈다.

그런 후, 수빈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찬란하게 빛나는 조명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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