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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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김대리의 설명을 다 듣고 난 다음 말했다.
"그러니까 제가 쓴 글을 보내드렸는데도 그렇게 쓰셨단 말인 거죠?"
[네. 우리 쪽에서 준비한 것도 필요 없고, 보내준 글도 참고만 하시겠다고 그러시더라고요. 본인이 달빛을 감동적으로 보셨다고 하시면서..]
"흠. 본인이 안 받으시겠다 그러면 어쩔 수 없는 거죠. 근데 글이 상당히 과격하던데,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겠습니까?"
[네. 법무팀 말로는 정식 기사로 나간 게 아니라 개인 트위터에 올라간 글이라서 큰 문제는 안될 거라고 합니다. 특정인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거명하지도 않았고, 욕설을 쓴 것도 아니라서 별문제 없을 거랍니다.]
"다행이군요. 지금 분위기는 어때요?"
[아직 댓글 알바들이 활동하고 있기는 한데, 많이 좋아졌습니다. 영화를 보고 왔던 사람들과 이사님 팬분들이 김동진씨의 트위터 논평을 무기로, 다들 적극적으로 대응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서요. 그리고.. 영화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김동진이라는 이름과, 씨네22 편집장이라는 자리가 절대로 녹녹하지 않습니다. 이 일을 사주한 사람도 내심 뜨끔했을 겁니다. 조만간 어느 정도 정화가 될 걸로 보입니다.]
"그렇군요. 지금 정도로도 충분하니까 일을 더 키우지는 마세요."
[알겠습니다. 이사님.]
"제가 바빠서 신경을 못썼는데, 김대리님이 대응을 재빨리 잘 하셨네요. 앞으로도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이사님.]
수빈은 전화를 끊으며 중얼거렸다.
"달빛을 감동적으로 보셨다라.. 언제 한번 정식으로 뵈었으면 좋겠군."
잠시 후 수빈은 YK에 도착하여 사장실로 올라갔다. 수빈을 발견한 박사장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어서 오게나. 강이사. 대박 난 걸 축하하네."
소파에 앉으며 수빈이 대답했다.
"대박이라니요. 800만이 넘어야 인센티브를 받기 때문에,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그래? 지금 추세라면 800만도 금방이지. 근데, 연락도 없이 어쩐 일로 온 건가?"
"영화사 리더 영상이 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한번 보려고 찾아왔습니다."
"오. 그런가? 어디 한번 보자고."
잠시 후 노트북에서 리더 영상이 플레이 되었다. 화면 중앙에 동그란 공 하나가 나타났다. 그러더니 화면 속에서 날씨가 계속 바뀌며 공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햇빛이 쨍쨍하더니, 공 표면에 서서히 세로 줄무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상을 보고 있던 박사장이 급히 물었다.
"강이사. 저거 수박 아냐?"
"네. 수박 맞습니다."
"난데 없이 수박이 왜 영화사 트레이드 마크가 된 거야?"
"선물입니다."
"선물? 그게 뭔 소리야?"
"일단 다 보시죠."
수박의 줄무늬가 선명해지며 점점 더 커졌다. 수박이 충분한 크기로 다 자라자, 화면에서 순간적으로 빛이 번쩍이더니 수박이 두 쪽으로 쩍 갈라지며 새빨간 속살이 드러났다.
잠시 후 검은색 수박씨가 공중으로 비산(飛散) 하기 시작했다. 좌우로 갈라진 수박씨가 이리저리 뭉쳐 다니더니 글자를 만들었다.
수박의 위쪽 양옆으로 '수'와 '박' 글자가 만들어졌고, 아래쪽에 '프로덕션'이라는 글자가 검은색으로 선명하게 나타났다. 그리고선 영상이 끝이 났다.
"수박 프로덕션?"
박사장의 물음에 수빈이 답했다.
"맞습니다. 수박 프로덕션. 아직 음악을 입히지를 않아서 보기에 좀 심심하시죠?"
"음악은 그렇다 치고, 회사명이 너무 촌스러워. 그리고 잘못 표기된 것 같은데. 영화사 이름이 수빈 프로덕션 아니었나?"
박사장의 질문에 수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희 영화사 직원이 말입니다. 몇 주전부터 연습 삼아 영상을 만들기 시작했답니다. 그때 저랑 박사장님이 힘을 합쳐서 영화사를 만드는 줄 알고.. 수빈의 수와 박사장님의 박을 따서 수박 프로덕션이 될 거라고 예상했다네요. 그래서 수박을 주제로 리더 영상을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박사장이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는 뭐 그래서입니까. 수빈 프로덕션에서 이름을 수박 프로덕션으로 바꾸려고요. 어차피 빈에서 수빈으로 이미 한번 바꿨는데, 수빈에서 수박으로 또 못 바꿀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동안 영화사 설립을 위해서 힘써주신 사장님을 위한 제 선물입니다. 어떻습니까? 맘에 드십니까?"
"맘에 드냐고?"
박사장이 목이 메는지 잠시 말을 잊지 못했다.
"설마.. 우십니까?"
"무슨 소리야. 울다니."
"지금 눈가가 촉촉하신데요."
"나이 먹어서 안구건조증이 심해서 그런 거야. 고맙네. 강이사. 언젠가.. 손주가 영화를 볼 수 있을 정도로 크겠지. 그때가 되면 내 무릎 위에 앉혀서 수박 프로덕션에서 제작한 영화를 같이 볼걸세. 그리고 말해줄 거야. 저기 수박의 '박'자가 할아버지를 뜻하는 거라고."
"손주 분이 있었습니까?"
"아직은 없지. 조만간 내 딸이 시집갈 거라서.. 곧 생길 거야."
"그렇습니까? 이거.. 앞으로 노력을 많이 해야겠는데요."
수빈이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말했다.
"사장님이 손주 분하고 같이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영화를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내가 부탁함세."
"영상은 두고 갈게요."
"고맙네. 정말 고마워."
"새로운 일이 있으면 연락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만 좀 우시고요."
수빈이 사장실을 나와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주차장으로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저번 시사회 때도 그러더니 의외로 울보 타입이란 말이야."
그때 수빈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를 확인한 수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 주 토요일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갑자기 왜 전화를 한 거지?'
수빈은 전화를 받았다.
"喂.(여보세요.)"
잠시 후 인천 공항에서 중국 베이징으로 가는, 6시 20분발 비행기 안에서 수빈은 생각에 잠겼다.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급히 꼭 봐야 한다고 난리를 치는 거지? 영화와 관련된 일이라고 말을 하기는 하지만.. 그다지 믿음이 가질 않는군. 후. 가서 보면 알겠지.'
수빈은 생각을 멈추고 눈을 감고 휴식에 취했다. 시간이 흘러 수빈을 태운 비행기는 8시 15분경에 베이징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수빈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다가왔다. 세 사람의 안내를 받으며 미리 대기하고 있던 차량에 올라탔다.
운전석 옆자리에 앉은 건장한 남자가 말했다.
<<<아래부터는 중국어로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강감독님. 베이징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소지하고 계신 여권을 차밖에 있는 친구에게 건네주시면 알아서 입국 절차를 취해줄 겁니다."
수빈이 품에서 여권을 꺼내 차창 밖의 남자에게 건네주자 차가 출발하였다. 차가 달린지 20분가량이 흐른 후, 수빈은 운전석 옆에 앉은 남자에게 슬쩍 물었다.
"방향이 계속해서 서북쪽인 거 보니 만리장성 쪽으로 가는 중입니까?"
"맞습니다. 지금 팔달령(八達嶺) 수관장성(水關長城) 쪽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베이징 지리를 잘 아시는군요?"
"일전에 드라마 촬영 때문에 한번 방문한 적이 있어서요. 수관장성 쪽에 뭐가 있는 겁니까?"
"청톈 소유의 별장이 있습니다. 다들 별장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수빈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후 눈을 감았다.
공항을 나와 1시간을 넘게 달린 차가 만리장성을 옆으로 끼고 산속으로 들어가더니, 다시 산길을 삼십분이 넘게 달렸다. 잠시 후 산중 깊은 곳에 한눈에 보아도 으리으리한 별장 한 채가 나타났다. 수빈은 핸드폰을 꺼내어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한국 시간으로 10시니 베이징은 지금 9시로군. 이 밤중에 타국의 사람을 급히 부른다라.. 필유곡절(必有曲折) 이겠지.'
수빈은 차에서 내려 안내를 받아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곳곳에 경비원들이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었다.
'경계 상태를 보니 팽연숙이 주관한 일이 아니로군. 일개 영화사 사장을 위한 경계라기에는 너무 과해. 보아하니 팽연숙 보다 윗선에서 날 찾은 것 같은데.. 팽가의 가주라도 등장하는 건가?'
수빈이 거실로 들어서니 팽연숙이 소파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빈을 발견한 팽연숙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강감독님. 이렇게 갑자기 오시라고 해서 죄송해요. 앉으세요."
수빈은 소파에 앉으라는 그녀의 말을 깔끔히 무시하고, 거실 한쪽 편에 위치한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고수로군. 이 세상에서 본 사람들 중에 가장 고수야. 거의 소주천 완성 직전 단계로 느껴지는데..'
수빈이 말없이 문쪽을 노려보고 있자, 상대방도 수빈의 기세를 느꼈는지 참지 못하고 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섰다. 새하얀 백발에 새하얀 수염을 기르고, 검은색 도포를 입은 노인이 침중한 얼굴로 거실로 들어서더니 수빈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수빈은 노인의 정광(精光) 어린 강렬한 눈빛을 가볍게 받아넘기며 인사를 하였다.
"반갑습니다. 한국에서 온 강수빈이라고 합니다. 현재 영화감독을 하고 있습니다."
수빈의 인사에 노인이 잠시 멈칫하더니, 곧 허탈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았다.
"반갑소이다. 팽가의 태상가주직을 맡고 있는 팽세옥(彭世玉)이라고 하오. 제갈가의 무공을 이은 젊은 영웅을 만나게 되어 더없이 영광이외다. 앉으시오."
수빈이 소파에 앉아 노인이 입을 열었다.
"설마설마 했는데.. 나보다 상수(上手)시로군. 그 나이에 정말 대단하외다. 내가 시집 간 딸의 말을 믿지를 못해서, 이렇게 직접 확인을 하러 왔소이다. 내가 세상 일에 간섭을 안 한 지가 좀 되어 나서, 언제 또 기회가 될지를 몰라 부득이하게 급히 초청을 했소. 양해 부탁드리오."
"괜찮습니다. 덕분에 바람도 쐬고 좋은걸요."
"염치없지만.. 혹시 팽가에 도움을 줄 수 있겠소? 대가는 내가 책임지고 확실히 지불하겠소이다."
수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불가능합니다. 팽가와 제갈가의 내공은 성질도 다르고, 수련법도 달라서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화입마(走火入魔)에 걸릴 위험만 높아질 뿐입니다."
"짐작은 했소만.. 안타깝구려."
"단, 태상가주께서 소주천이 완성 직전이신 거 같은데.. 만약 소주천이 완성된 후라면 제가 어느 정도 도움을 드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수빈의 대답에 노인이 눈을 번쩍이며 되물었다.
"정말이오?"
"네. 그전에 소주천부터 완성하셔야겠죠. 그런 후 다시 연락을 주시길 바랍니다."
"알겠소이다. 내가 더욱 정진하도록 하겠소. 앞으로도 계속 서로 좋은 관계로 지냈으면 좋겠소이다."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태상가주가 떠나자 팽연숙이 수빈을 보고 말했다.
"정말 대단하네요. 아버지랑 비슷한 수준으로 보인다고 보고를 드렸는데.. 더 윗줄이라니. 만년설삼(萬年雪蔘)이라도 드신 건가여요"
"그럴 리가요. 그런 영약(靈藥)이 이 세상에 남아 있겠습니까?"
"그러게 말이에요. 그럼 일 이야기를 해볼까요?"
"일요?"
"네. 설마 제가 아무 일도 없는데 강감독을 급히 보자고 했을 리가 없잖아요. 태상가주와의 만남은 보너스죠."
"그런 건가요? 어떤 일로 부르신 겁니까?"
"어머나. 이런 식으로 나오신다 이거죠? 넷플릭스에 가있는 영화사 직원들은 수빈씨가 보낸 게 아닌 건가 봐요?"
"정보가 빠르시네요. 제가 보낸 건 맞습니다만..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흐응.."
여인이 갑자기 묘한 콧소리를 내며 수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이제 보니.. 강감독은 지금 넷플릭스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혀 모르고 있군요?"
"넷플릭스 내부에서요? 영화사가 설립된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아서, 정보력이 많이 떨어집니다. 저희 직원들이 넷플릭스에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다는 것까지만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이렇게 담담하시군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팽연숙이 허리를 살짝 비틀어 다리를 꼬면서 말했다.
"그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