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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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주를 여는 월요일 아침 10시 경.
국내 영화 배급사의 4대 천왕이라고 불리는 [BJ.Ent.], [플러스N], [쇼상자], [나우]중 하나인 '쇼상자'가 입주해 있는 논현동의 한 빌딩. 그 빌딩의 최고층인 10층에 위치한 사장실.
도산대로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사장실에서, 조한무 사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붙들고 통화를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조사장이 침통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자, 옆에 서있던 장윤석 비서가 급히 물었다.
"BJ 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플러스N과 똑같아. 소극적인 태도야."
"사장님. 어차피 예상했던 일입니다. BJ랑 플러스는 그룹에서 자체적으로 충분한 숫자의 개봉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 '달빛 속의 호위무사' 열풍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겁니다. 관객이 많이 들면 수익이 오르니 당연히 좋은 거고,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계약을 종료하고 자신들이 배급하는 영화를 자신들의 극장에 걸면 그만일 테니까요."
"후. 그럴 테지."
"비록 우리가 나우랑 관계가 껄끄럽고 앙숙이긴 하지만, 지금은 '나우'랑 손을 잡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누가 그럴 몰라? 문제는 그쪽에서 이번에 배급하는 영화가 우리 쪽이랑 날짜가 거의 겹친다고. 이번 명절 대목에 '나우'에서 배급하는 영화의 개봉 날짜가 언제라고 했지?"
"우리 쪽 [고려대포두]가 2월 8일 개봉이고, 나우 쪽 [초능력자] 개봉일이 1월 31일로 잡혔습니다."
"거 보게. 우리보다 개봉일이 빠르지 않은가. 잘못하면 죽 쒀서 개 주는 수가 있어. 기껏 협력해서 '달빛'을 견제하고 나면, '초능력자'가 그 이익을 다 가져가는 수가 있다고."
조사장의 말에 장비서가 강하게 반박을 하고 나섰다.
"하지만 사장님. 지금 이대로 방치하게 되면, 2주 후 '고려대포두'를 걸 영화관 숫자가 절대적으로 줄어들 겁니다. 오늘부로 달빛을 거는 영화관 숫자가 더 늘어나서 천 개를 넘어설 걸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우리랑 나우 둘 다 개봉할 영화관이 부족해서 말라 죽습니다. 구정이 되면 마블사의 [블랙팬서]도 개봉을 할 거고, 국산 영화로는 [놀부], [실버슬럼버]까지 개봉을 할 예정인데.."
조사장이 손을 들어 장비서의 말을 막았다.
"알았네. 앉아서 말라죽느니, 일단 달빛부터 죽여놓고 생각을 해봐야겠지. 장비서가 생각해둔 방법은 있나?"
"어차피 영화의 흥행은 개봉 후 사람들의 입소문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달빛의 평판이 너무 좋습니다. 그걸 흠집 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친구가 오늘따라 왜 이래? 이 바닥에서 밥 먹고사는 사람들 중에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래서 방법이 있냐고?"
"댓글 알바를 대거 고용하고, 영화 평론가나 블로거들을 섭외해서 평판을 조작해야죠. 구관이 명관 아니겠습니까? 고전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 방법이 가장 효과가 좋습니다."
"비용은 얼마 정도 들 거 같은가?"
"아무리 적게 잡아도 1억은 들 겁니다. 나우랑 반씩 나누면 5천이면 가능할 겁니다."
잠시 고민을 하던 조사장이 입을 열었다.
"장비서가 나우에 연락해서, 1억씩 각출하자고 말을 전하게. 이왕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알겠습니다. 사장님."
수빈은 점심을 먹고 벨 스튜디오로 나가서 영화 제작 스태프들과 회의를 하고 있었다. 주말 동안 다들 콘티를 철저히 분석하고 왔는지, 서로들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으며 활발하게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한편 그때. SNS와 넷상에서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YK 홍보실에서 김대리가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며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수빈의 부탁대로 달빛 관련 뉴스들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김대리는, 넷상에서 흐르는 안티-달빛 기류를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는 중이었다.
- 저도 달빛 보고 왔어요. 액션도 멋있고 영화 내용도 감동적이었어요. 마지막에는 너무 슬퍼서 울었어요. 히잉.
ㄴ 너 같은 년들 때문에 이 나라 영화가 발전이 안되는 거야. 울긴 왜 우냐.
ㄴ 네 부모가 죽었을 때 울기는 했냐? 쓰레기 영화를 보고 쳐울긴.
ㄴ놀고 있네. B급 영화를 보고 좋단다. 수준 하고는.
ㄴ 영화 보는 눈이 한심하기 그지없네요. 공부 좀 하세요.
국내 대형 포탈에 걸린 달빛 관련 뉴스에 달린 댓글과, 그 댓글에 달린 대댓글들을 읽어보던 김대리가 중얼거렸다.
"오늘 점심때부터 부정적인 댓글들이 줄지어 올라오고 있는데.. 그것도 아주 독설로만. 이사님이 우려했던 방해 세력이 등장한 건가."
그때 김대리의 눈에 방금 전 새롭게 올라온 댓글이 보였다.
- 달빛 보고 재밌다는 개념 없는 인간들아. 니들이 얼마나 무식한지 이거나 한번 읽어봐라. 내가 친절하게 링크 걸어준다. [바로 가기]
김대리는 마우스를 움직여 '바로 가기'를 눌러보았다. 모니터 화면이 바뀌더니 [영화평론가 최봉재의 블로그]로 연결이 되었다.
'이것 봐라. 최봉재면 돈을 받고 엉터리 평론 써주기로 유명한 인간인데. 툭하면 명예훼손과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를 당하고, 심심하면 손해배상을 해준다고 해서 영화계의 ATM이라고 해서 최TM이라고까지 불리는 인간인데. 뭐 그래도 남는 게 있으니 그 짓을 하는 거겠지만..'
김대리는 빠르게 링크 걸린 글을 읽어 보았다.
* 달빛 속의 호위무사 - B급 감독의 처절한 몸부림과 초짜 감독의 질낮은 감수성.
요즘 '달빛 속의 호위무사'가 흥행몰이에 나름 성공을 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영화 평론가 중 한 사람으로서 참담한 심정을 감출 수 없어 몇 자 적어본다.
이 영화는 대중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은 B급 감독과 아이돌 출신 초짜 감독의 조악한 조합으로 제작이 되었다. 아마도 아이돌 출신 감독의 이름을 빌리고, 그 인기에 영합해서 흥행을 노려보겠다는 수작이었을 것이다. 그 증례로 아이돌 출신이라는 그 감독은 전국을 도는 무대 인사에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올 수가 없었겠지. 아이돌 출신이라 춤추고 노래부는 건 잘 하겠지만, 영화 제작에 대해서 아는 게 뭐가 있겠나. 관객들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자신이 없으니 못 나왔으리라. 벼룩도 낯짝이 있는 게지.
본격적으로 영화를 분석해 보자. 이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능력 없는 두 감독의 끝없는 불협 화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로 인한 이질감이 극심해서, 차마 두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의 수준 낮은 퀄리티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편집으로 포장을 잘 해놔서 영화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일반인들이 알아채기에는 힘들 것이다. 어쩌면 나름 재밌는 영화라고 착각까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의 날카로운 눈에는 쓰레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극명하게 갈리는 두 감독의 성향으로 인해, 중간중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부자연스러운 장면들이 부지기수로 등장하고 있는 최악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겠다.
끝으로, 이런 영화를 재밌다고 칭찬하면서 보는 일반 대중들이 안쓰러울 뿐이다. 보이스 피싱 사기에 농락당하는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참혹한 심정이다. 혹시 오해를 할까 봐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나도 얼마 전 나왔던 '디스패치'라는 제목의 노래를 좋아하고 즐겨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돌 출신인 초짜 감독에게 정중히 부탁드린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사는 법이다. 조만간 새로운 음반으로 만날 수 있길 고대한다.
글을 다 읽은 김대리가 치미는 분노에 이를 뿌드득 갈면서 내뱉었다.
"이 새끼가.. 도대체 돈을 얼마를 처먹었길래 이따위 글을 평론이라고 올린 거야."
김대리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첫 번째 봉투를 개봉할 때라는 걸 깨닫고, 책상 서랍을 열어 편지 봉투를 꺼낸 뒤 조심스러운 손길로 뜯었다.
잠시 후 김대리는 미소를 지은 채 핸드폰 전화번호부를 뒤지고 있었다.
'지체 없이 바로 대응을 하라고 했지. 초장에 때려잡지 못하면 호미로 막을걸 가래로 막게 되는 수가 있다고..'
"누가 좋으려나.. 평론이 정직하기로 유명하고 독설이 가능한 평론가가 적합하다고 하셨는데."
전화번호부를 뒤지던 김대리는 한 사람의 이름을 발견하고서 일순 멈칫 거렸다.
'김동진 영화 평론가. 이 양반은 정직하기로야 최고로 유명하지만 독설이 심해도 너무 심한데. 자기가 하도 독설을 심하게 날려서 감독들이 상처받는다고, 지금은 평론을 그만두고 '씨네22' 편집장으로 가 계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런 분에게 부탁을 해도 되려나 모르겠네. 후. 내가 부탁을 한다고 해서 쉽게 들어주는 사람도 아니고.. 강이사님이 알려준 대로 순순히 글을 받아서 써주려나?'
김대리는 길게 숨을 내쉬고, 어깨를 가볍게 털며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길로 핸드폰 화면을 터치해서 김동진 영화 평론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 수빈은 길었던 제작 회의를 끝마치기 위해 사람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내일 중으로 출연자 계약을 마무리 짓고, 모레부터 양일간 촬영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미리미리 준비를 해주시고, 특히 날이 많이 추운 관계로 장비들 관리에 유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스태프와 출연자들 방한 대책도 철저히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으로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다들 수요일에 다시 보도록 하죠. 수고하셨습니다."
- 수고하셨습니다. 대표님.
회의실을 빠져나온 수빈은 박상민을 만나기 위해 편집실로 걸어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박상민이 메이킹필름을 작업하고 있었다.
수빈을 발견한 박상민이 일어서려고 하자 손을 저어 말린 다음 물었다.
"메이킹필름을 작업 중인 거 보니 리더 영상은 다 끝났나 봐요?"
"네. 대표님. 리더 영상은 주말에 마무리했고, 오늘 아침부터는 메이킹필름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요? 그럼 잠시 볼 수 있을까요? 조금 있다 YK로 갈 건데, 가는 김에 박사장님에게도 보여줄까 해서요."
잠시 후 수빈은 웃는 낯으로 편집실을 나와서, YK로 출발하기 위해 밴이 있는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홍보실 김대리에게서 문자가 날아왔다.
- 강이사님. 보내드린 링크 내용을 급히 확인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일전에 제게 주신 봉투에 적혀 있는 대로 작업을 했습니다만, 글의 논조가 예상보다 너무 세게 나가서 제가 지금 많이 당황스럽습니다.
수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링크를 눌렀다.
'김대리가 봉투를 뜯은 걸 보니 예상했던 대로 누군가 방해를 하기 시작했나 본데.. 근데 글이 예상 밖이란 게 뭔 소리인지를 모르겠군.'
이윽고 핸드폰 화면에 [영화 평론가 김동진의 트위터]가 뜨기 시작했다. 수빈은 최근에 올라온 글을 읽기 시작했다.
- 내가 영화 평론을 그만두고, 씨네22의 편집장이 된 이유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기회에 알려주겠다. 친한 영화감독들이랑 같이 술 먹고 나면, 허구한 날 날 붙들고 상처받았다고 엉엉 울어대길래 술맛이 떨어져서 바꿨을 뿐이다. 심플한 이유다.
- 조금 전부터 SNS로 웃기는 영화 평론이 하나 돌아다니고 있다. 최근 무서운 기세로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나 자신도 재미있어서 무려 4번을 본 영화를 타깃으로 한 평론이다. 어떻게 평론을 했나 궁금한 마음에,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어서 읽어 보았다.
- 평론을 다 읽고 난 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이 글을 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자동차를 한대 산다고 가정을 해보자. 그럼 많은 것들을 고려해서 결정할 것이다. 사람마다 비중치가 다르기는 하겠지만, 보편적으로 차의 제작사, 디자인, 가성비, 연비, 안전성, A/S 등등을 고려할 것이다. 여러 조건들을 신중히 고려해서 막상 차를 사고 나니, 성능도 뛰어나고 운전하기도 편하고 가격도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본인의 결정에 아주 만족스러워하고 스스로 대견함을 느끼게 되겠지. 어쩌면 그 차를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사라고 권하기도 할 것이다.
- 그런데 말이다. 어떤 양아치 같은 놈이 당신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을 하더란 말이지. 나도 당신처럼 그 차를 샀지만, 난 그차가 맘에 안 든다고 말이야. 그럼 당신은 물어보겠지. 난 그 차가 무척 마음에 드는데, 당신은 뭐가 마음에 들지 않냐고. 그랬더니 그 양아치 왈, 다른 건 다 좋은데 애인이랑 카섹스를 하려는데 기어 손잡이 형태가 불편해서 짜증이 났다고 말을 했어. 이게 그 차를 사면 안되는 이유로 적합한 건가?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그렇다면 난 오늘부터 그 양아치를 븅신이라고 불러주겠다.
- 차 이야기가 나온 김에 혹시 이 글을 차 안에서 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즉시 차창 밖을 한번 쳐다보아라. 봤는가? 지나가는 개가 웃는 희귀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을거다. 영화가 불협 화음이고 이질감이 느껴져서 퀄리티가 낮다고? 그렇게 평론한 그 작자에게 물어보고 싶다. 한동안 평론가로 먹고살은 나도 2번을 보고 나서야 어렴풋이 느꼈고, 3번을 보고 나서야 겨우 알아차린 걸 정말 흠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러고도 난 재미있어서 또 봤는데? 이 정도면 지랄도 참 풍년이라는 생각이 든다.
- 마지막으로 평론계의 현금출납기로 불리는 그 평론가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잣 까는 소리는 니네 아버지 과수원에 가서 하라고 말이다. 만약 누군가 그 평론을 읽고 와서 당신에게 뭐라고 떠들면 이렇게 말해주길 바란다. 개짖는 소리 그만하고 꺼지라고.
트위터에 올라온 장문의 글을 다 읽고 난 수빈은, 멍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내가 써준 글은 어디로 가고 난데없이 웬 카섹스 타령이야. 내가 푸른색 차만 보면 이가 부득부득 갈리는 사람인데..'
수빈은 급히 김대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신호가 가더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사님?]
"김대리님. 강이삽니다.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후우. 그게 말이죠. 이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