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148화 (148/236)

#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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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의 물음에, 박사장은 자신의 입이 마치 토치라도 된 듯 분노의 불길을 마구마구 뿜어내기 시작했다.

"영화사 일에서 난 왜 자꾸 빼는 건가? 회의할 때도 빼고, 건물을 살 때도 빼고, 영화 판권도 산다며? 어제는 나 몰래 홍콩에 출장도 갔다 왔다며? 그럼 난 뭐야? 난 왕딴가?"

박사장의 반쯤의 짜증과 반쯤의 투정이 섞인 발언에, 수빈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몰래 가긴 뭘 몰래 갔다고 그러십니까. 어제 공항 사진까지 버젓이 찍혀서 올라갔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요 근래 제가 바빠서 같이 못 놀아드렸더니, 사장님께서 많이 심심하셨나 봅니다."

한동안 기염(氣焰)을 토하던 박사장이 어느 정도 속이 풀렸는지 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하아.. 내가 이러려고 사장을 했나 자괴감이 들 정도야. 돈 욕심에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강이사와 함께 피가 끓는 모험을 하고 싶어서 이 자리에 있는 거라고. 근데 요즘은.."

수빈은 또다시 신세한탄을 하려는 박사장 앞으로 서류뭉치를 내밀었다.

"응? 이게 뭔가?"

"MOU(양해각서)입니다. 어제 날짜로 영화사가 설립되었으니, 이제 양사 간에 정식으로 MOU를 체결해야죠. 그래야 사장님도 맘 편하게 영화사 일에 간섭도 하고, 투자도 하고, 회의에도 참석하고 그러실 거 아닙니까. 같이 제대로 한번 놀아보셔야죠. 아. 참고로 영화사에서 사장님의 공식적인 직위는, '수빈 스튜디오' 영화사의 초대 감사(監事)이십니다."

잔뜩 지푸려져 있던 박사장의 얼굴이 삼 년 가뭄에 비를 맞은 풀꽃처럼 활짝 피어났다. 빠른 손길로 서류뭉치를 집어 들며 박사장이 속사포처럼 떠들어 댔다.

"그렇지. 강이사가 어떤 사람인데.. 나 몰래 이런 걸 준비하고 있었구먼. 암. 그래야지. 영화사가 내 회사도 아닌데 직위도 없는 사람이 맘대로 간섭하고 그러면 안 되는 거지. 초대 감사라. 맘에 드는군. 내 맘에 쏙 들어. 내가 강이사를 안 믿으면 세상에 누굴 믿겠나. 어디 보자.."

수빈은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는 박사장에게 간단하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MOU는 크게 봐서 세 가지 내용으로 압축됩니다. 첫 번째, 간단한 절차의 동의만으로 양사의 장비와 인력을 서로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 두 번째, 상대방에게 우선 협상권을 가진다. 영화 제작이나 음반 제작 등 업무상 투자가 필요하다면 양사가 우선적으로 협상 대상자가 되는 거죠. 세 번째, 특별히 자금을 주고받지 않아도 정해진 절차를 거쳐서 장부상 서로 상계처리할 수 있다. 핵심 요점은 그 세 가지로 보시면 될 겁니다."

"그 외에도 항목들이 좀 많은데.. 이걸 다 읽어 봐야 되는 건가?"

수빈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사장님께서 굳이 다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실무진들이나 꼼꼼히 살펴보는 거죠. 여러 항목들이 길게 쭉 나열되어 있습니다만.. 가장 핵심은 '양사의 대표자가 협의해서 결정한다'라는 거죠."

수빈의 말에 박사장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좋아. 아주 좋아. 그럼 내가 여기 사인 란마다 사인을 하면 되는 건가?"

"아니죠. 저야 영화사의 전권을 가지고 있으니 상관없지만, YK 쪽은 박사장님이 아무리 대표이사라고 하시더라도, 이사회를 거쳐서 의결을 한 다음에 사인하셔야죠."

"그래? 잠시만 기다려보게."

박사장은 인터폰을 눌러 김비서를 호출했다. 신호가 몇 번 가더니 김비서가 응답했다.

[네. 사장님.]

"김비서. 지금 긴급 이사회를 열걸세. 회의 안건은 어제부로 새롭게 설립된 수빈 스튜디오와 MOU 체결 건이야. 참석자는 나, 강이사, 허이사고.. 그러면 이사회 요건이 충족되는 거지?"

[네. 사장님. 세 분이면 과반수 참석을 하셨기 때문에 요건이 충족되십니다.]

"그럼 허이사에게 빨리 전화해서 긴급 이사회 안건에 동의한다는 녹음을 받아놓게나. 그리고 김비서가 적당히 회의록을 작성해서 서류로 남겨 놓고.."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

수빈은 황당한 눈으로 박사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언제부터 YK 이사회가 저랑 사장님, 허이사로 과반이 충족되게 바뀐 겁니까?"

"김사장이 얼마 전 은퇴했잖은가. 그럼 당연히 이사들도 정리해야지. 그쪽 관련 이사들은 다 잘랐어."

"그래도 됩니까?"

수빈의 말에 박사장이 당당한 태도로 대답했다.

"내가 사장인데 안될게 뭐 있나? 지분 없는 이사들은 원래 파리 목숨보다 못한 법이야. 줄 잘못 서면 그냥 가는 거지. 그동안 김사장 백 믿고 거들먹거리던 이사 놈들, 내가 한방에 다 날렸어. 강이사가 정신없는 동안 내가 칼춤 좀 췄다네. 지금 강이사의 방도 원래 다른 이사가 사용하던 방이야. 앞으로 나랑 허이사, 강이사가 동의하면 모든 안건들을 100프로 다 처리할 수 있게 내가 미리 작업을 좀 해놨지."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꼬우면 자기들도 몇 백억씩 투자해서 이사회에 참석하라고 해. 그리고 능력 있고 착실하게 일 잘하는 이사들 3명은 그대로 남겨놨다고. 그럼 이제 사인만 하면 되는 건가?"

"네. 사인하시고 법무팀에 넘겨주시면 알아서 잘 처리할 겁니다."

박사장은 서류에 사인을 하며 물었다.

"요즘 정신없다고 하더니, 어제 홍콩에는 왜 간 건가? 숨겨둔 애인이라도 홍콩에 있는 건가?"

박사장의 질문에 수빈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제가 애인이 어디 있습니까? 군대도 안 갔다 온 놈이 애인은 무슨.. 일 때문에 골든 하베스트 대표를 만나고 왔습니다."

서류에 열심히 사인을 하던 박사장이 손길을 뚝 멈춘 후 수빈에게 질문을 던졌다.

"골든 하베스트? 정무문, 용쟁호투, 영웅본색, 오복성, 또 뭐가 있으려나.. 폴리스 스토리, 쾌찬차, 첨밀밀 등을 제작했던 그 골든 하베스트?"

"네. 맞습니다."

박사장은 부러질까 걱정이 될 정도로 빠르게 고개를 획 돌려,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수빈을 째려보며 말했다.

"네 맞습니다? 지금 나랑 농담하나? 내 나이 때 남자들에게 방금 말한 영화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줄 알기나 해? 골든 하베스트라니.. 세상에.. 그런 흥미진진한 일을 강이사 혼자 몰래 처리했다고? 정말 이러긴가?"

"어제까지만 해도 MOU 체결이 안되어 있었잖습니까. 그리고 아직 초창기인데 회사랑 관련이 없는 사장님이랑 자꾸 의논을 하는 모습을 보이면, 밑에 있는 직원들에게 제가 위엄이 안 섭니다."

"후.. 알았네, 앞으로 그런 재밌는 일은 제발 나에게도 알려 달라고. 그래 갔던 일은 잘 된 건가?"

"네. 결과가 나쁘지 않습니다."

"다행이로군. 그럼 앞으로 진행할 일들 중에 큰일은 뭔가?"

"다음 주에 미국 LA로 날아가서 넷플릭스랑 협상하는 겁니다."

- 쾅.

박사장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탁자를 강하게 내리치며, 상기된 얼굴로 콧김을 거세게 뿜어내기 시작했다.

"정말 이럴 거야?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잘 알지 않는가. 골든 하베스트도 모자라서 넷플릭스라니.. 이런 스릴 넘치는 일들을 그동안 나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진행을 했다고?"

수빈은 차분하게 오른손 검지를 세워 MOU 서류를 콕콕 찌르며 말했다.

"서류에 사인만 다 하고 나면 제가 만든 영화사의 초대 감사가 되시잖아요. 그럼 이제 저랑 같이 맘 편히 즐기시면 됩니다."

"일단 사인부터 다 끝내고 보자고.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 나랑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보세. 내가 절대로 그냥은 못 넘어가. 그동안 난 쏙 빼고 강이사 혼자만 재미를 보고 있었단 말이지?"

그때 갑자기 수빈의 핸드폰으로 재무회계팀 강과장으로부터의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이사님. 저 강과장입니다.]

"그래요. 좀 있음 회의 시간인데 어디서 전화하시는 건가요?"

[지금 오소라씨와 조대리와 함께 드림픽처스 사무실에 있습니다. '달빛 속의 호위무사' 해외 판권 협상 도중에 잠시 나와서 전화드리는 겁니다.]

"벌써 협상을 시작했습니까?"

[네. 최대한 빨리 끝내라고 하셔서요.]

"그렇군요. 잘 하셨습니다. 근데.. 전화를 한거 보니 일이 잘 안 풀리나 봐요?"

[우리 쪽이 신생 영화사라고 얕잡아 보는 것 같습니다. 드림픽처스가 여태껏 해외에 판권을 판 최고 금액이 8억이라서, 저희들 나름대로 10억 정도를 예상하고 왔습니다만..]

"그쪽에서 얼마를 부르던가요?"

[지금 15억을 부르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국내 개봉 후 한 달이 지나야 해외에서 개봉이 가능하다는 조건을 내걸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셋이서 고민을 하다가, 제가 잠시 회의실을 나와서 급히 연락을 드린 겁니다.]

수빈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후 대답했다.

"그럼 저쪽에서 더 이상 질질 끌지 못하게 20억을 주겠다고 하세요."

[네? 20억을요? 저쪽에서 지금 15억을 부르고 있는데요?]

"드림픽처스 사장은 돈을 밝히기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5억을 더 준다고 하면 얼씨구나 하고 달려들 거예요. 그 대신 해외 개봉은 2주 이상 못 미룬다고 하세요. 그리고 반드시 약속을 받아내셔야 합니다. 해외 판권 계약과 관련된 모든 것을 비밀 엄수하겠다고 말입니다. 어떠한 인터뷰나 기사도 낼 수 없고, 어떤 불평이나 이의 제기도 할 수 없다고 단단히 못을 박으시고, 서류로 꼭 남기세요. 어길 시 3배의 위약금을 지불하겠다는 날인을 받아야 대금을 지불하겠다고 말하세요. 아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이사님. 지금 조대리도 같이 있으니까 법적으로 완벽하게 작업을 해놓겠습니다.]

"그래요. 회의 시간에 늦어도 상관없으니까 서두르지 마시고 꼼꼼히 살펴보세요. 빠져나갈 구멍이 없도록 서류 작업을 하신 다음에 돌아오세요."

[절대로 못 빠져나가게 철저하게 작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좀 이따가 다시 보도록 하죠."

[네. 이사님.]

수빈이 전화를 끊고 삼십여 분 가량을 전의에 불타오르는 박사장과 투닥투닥 거리고 있을 때, 핸드폰으로 한 통의 문자가 날아왔다.

- 최대한 깎아서 18억 8천에 구매 완료했습니다. 서류 작업을 마치는 대로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시간이 흘러 예정된 2시를 훌쩍 지나 3시가 되어서야 회의가 열렸다. 영화사가 설립되고 해외 판권 구입까지 완료되면서, 본격적인 실무 회의가 개최되었다.

수빈과 박사장이 한발 물러서서 지켜보는 가운데, 오소라 부사장을 중심으로 법무팀 조대리, 재무회계팀 강과장, 전산실 박실장, 홍보팀 김대리 그리고 차(茶)를 가지고 구경하러 왔던 김비서까지 합류해서 다양한 아이디어와 의견을 내며 박 터지는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수빈은 한참을 묵묵히 회의를 지켜보다 손을 들어 회의를 중단시킨 후 입을 열었다.

"다들 잘 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방법으로 넷플릭스 담당자를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판단됩니다. 제가 오소라씨에게 일전에 말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병법에 있어서 가장 기본은 뭐라고요?"

"역지사지라고 하셨어요."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럼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보죠. 손자가 말한 유명한 문구가 있습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사람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 백전불태(白戰不殆)!

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들 잘 알고 계시는군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지피(知彼) 즉, 넷플릭스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충실히 그리고 철두철미하게 조사해 왔다는 건 회의를 지켜보면서 충분히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지기(知己) 즉, 우리 영화사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장점, 유리한 부분, 유니크한 위치 등등에 대해서는 아직 입장 정리가 제대로 안된 걸로 보여요. 그 점에 입각(立脚) 해서, 다시 한번 진지하게 토의를 해보시길 바랍니다."

- 알겠습니다.

수빈은 사람들이 다시 회의에 몰두하자,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구경만 하고 있는 박사장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끼워달라고 그 난리를 치시더니.. 왜 말없이 구경만 하고 계십니까?"

"지금은 구경만 해도 즐거워. 지켜보는 걸로도 충분히 재밌다네. 젊은 친구들이 눈빛이 살아서 초롱초롱 빛나고 있구먼. 다들 정열에 불타오르고 있어. 자신이 하는 일이 재밌으면 힘든 줄도 모르고, 피곤한 줄도 모르는 법이지. 그런데.."

박사장이 수빈을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강이사는 왜 한마디만 덜렁 하고 또 가만히 있는 건가?"

"명색이 영화사 대표 아닙니까. 직원들이 열심히 머리를 쥐어짜며 토의하고 있는데, 자꾸 끼어들면 대표의 품위가 떨어지죠. 제가 직접 나서서 해야 할 일이 있고, 믿고 맡겨놔야 할 일이 있는 겁니다. 잘못되거나 방향이 틀린 게 있으면 바로잡아주는 정도로 충분해요."

수빈은 회의가 길어지자 어깨가 뻐근한지 가볍게 어깨들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야 직원들 역량을 쑥쑥 키우죠. 두고두고 제대로 써먹으려면, 성장할 때까지 참고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는 법입니다."

"키워서 잡아먹겠다 이거로군."

"키잡이라니요. 무슨 그런 험한 말씀을.. 상부상조라고 해두죠."

수빈은 회의가 끝날 기미가 안 보이고 어느덧 5시가 다 되어가자, 크게 박수를 쳐서 사람들의 이목을 모은 다음 말했다.

"오늘 회의에서 나온 내용들이 하나같이 흥미롭고 기발하네요. 다들 오늘 나온 내용들을 잘 정리해서, 주말 동안 다시 한번 차분하게 검토해 보시길 바랍니다. 다음 주 목요일이면 드디어 영화가 개봉관에 걸리게 됩니다. 따라서 수요일 점심때 다 같이 모여서 최종 결정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합시다."

회의를 마치고 수빈은 조대리와 함께 벨 스튜디오로 급히 이동했다. 박감독이 모아 놓은 영화 스태프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수빈은, 한 명씩 면담을 하면서 충분한 대화와 교감을 나눈 후 차분하게 계약을 체결해 나갔다.

수빈이 모든 계약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금요일 밤. 마침내 '달빛 속의 호위무사' 영화 광고가 TV에서 전파를 타기 시작하였다.

넷플릭스와 협상에 사용할 비장의 무기를 만들기 위해, 주말 내내 작업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 화요일 밤까지 집안에서 두문불출하며 작업에 매달렸던 수빈은, 마침내 작업을 완료했다.

컴퓨터 앞에서 크게 기지개를 편 수빈은 의자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작업량이 워낙 많다 보니 아무리 나라고 해도 지치는군.. 그래도 시간 내에 맞춰 끝낼 수 있어서 다행이야."

수빈은 거실로 이동하여 소파에 앉아, 리모컨으로 TV 스위치를 켠 후 핸드폰을 꺼내어 뉴스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지금 시간이면 VIP 시사회가 끝이 났을 텐데, 반응이 괜찮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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