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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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한밤중에 길을 가다 두억시니를 만난 사람처럼 놀란 얼굴로 팽연숙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일순 아득한 옛날 생각이 들어 속으로 혀를 찼다.
'쯧. 고안심곡(高岸深谷)이라.. 세월이 흐르면 높은 언덕도 골짜기로 바뀐다고 하더니, 600년이란 시간이 참으로 길긴 길구나. 팽가의 여인이 아니라 꾀 많은 암여우 한 마리가 눈앞에 앉아 있어.'
수빈의 감상 따위는 아랑곳 없이, 눈앞에 앉은 여성은 활기찬 목소리로 협상을 마무리 지으려 들고 있었다.
"어떤가요? 이 정도 조건이면 서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여성의 말에 수빈은 장탄식을 내뱉으며 물었다.
"하아.. 천부적으로 뼈대가 굵고 체질이 강골이라 외공(外功)을 익힘에 적합하고, 태어날 때부터 힘이 장사라 머리 쓰기를 유달리 싫어해서, 모든 걸 무력(武力)으로 해결하려는 습성이 있다.. 제가 사부에게 들었던 무상(無想)의 패도(覇刀)라는 하북 팽가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겁니까?"
수빈의 말에 여성이 눈을 크게 치켜뜨며 대답했다.
"어머. 그런 식으로 처신했다가는 공산당에게 이미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겠죠. 구대문파가 그래서 국공내전(國共内戰) 때 쫄딱 망했잖아요. 한국 분이라 잘 모르고 계시는구나. 그리고.. 대대로 머리가 총명하고 지혜로워 계략을 씀에 능수(能手) 하고, 음모를 꾸밈에 능란(能爛) 하며, 타고난 천성이 차갑고 무정해 만인(萬人)이 죽어나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몰살(沒殺)의 제갈(諸葛)은 어디 가고 이렇게 엄살을 피우실까? 설마.. 이것도 계략의 일종인가요?"
한마디도 지지 않는 여성의 말에 수빈은 고개를 절레절래 저으며 말했다.
"제가 졌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수빈의 항복 선언에 여성이 방긋 웃으며 다시 한번 계약 조건을 읊었다.
"하나, 수빈 프로덕션에서 공급한 영화를 청톈이 중국과 대만에 배급함에 있어서 상영 지역, 영화관 수. 티켓 가격 등 제반 문제에 대한 모든 결정권은 청톈에게 있다. 둘, 발생하는 수익의 배분은 청톈 6, 수빈 프로덕션 4로 나눈다. 셋, 영화를 배급함에 있어서 성적이 저조하여 배급사에 손실이 발생했을 시 손실액은 전액 수빈 프로덕션에서 보전한다."
여성의 말이 끝나자 수빈은 잔뜩 얼굴을 구긴 채 대답했다.
"맞습니다. 팽가에서는 땅을 짚고 헤엄을 치시면 되겠군요. 그럼 이제 서류를 작성해서 제가 사인을 해드리면 되나요?"
"세가원끼리의 약속인데 서류 따위가 급할게 있나요? 그런 건 아랫사람들에게 시키면 될 일이죠. 그것보다 더 급한 게 있지 않나요?"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잠시 후 수빈은 양쪽 더듬이를 하늘로 치켜세우고, 새까만 눈알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이형(異形)의 물체를 매섭게 째려보고 있었다.
'급한 일이란 게 이거였나?'
"뭘 그렇게 쳐다보세요? 혹시 바닷가재를 싫어하시나요?"
"아닙니다. 좋아합니다. 식탁에 해산물이 풍부하군요."
"여기가 홍콩이니까요."
"식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그래요.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서 배가 고프셨을 건데.. 식사하시면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눠보죠."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대화를 나누던 도중 수빈이 궁금하다는 듯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팽가는 영화계를 주력으로 진출하신 겁니까?"
수빈의 질문에 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가마다 주력 종목이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팽가의 주력이 영화계와 방송 쪽이라면, 당가(唐家)는 의학계과 제약회사가 주력이죠. 황보(皇甫)는 체육계와 무술도장, 남궁(南宮)은 정치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통신사업이 주력이죠, 마지막으로 제갈은 학계와 대학 쪽과 관련이 깊다고 들었어요."
"그렇군요."
"하지만 다들 공산당을 의식해서 전면에 나서지 않고 있기 때문에 자세히는 몰라요. 우연히 만나게 되더라도, 서로 가볍게 아는 척만 하고 지나가는 정도라서요."
"그 정도로도 아주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즐기던 식사가 어느 정도 끝이나자 팽연숙이 본론을 꺼냈다.
"아까 보니 계약 조건을 그다지 맘에 들어 하시지 않는 것 같은데.. 저희 쪽에서 제의를 하나 해도 될까요?"
여성의 말에 수빈이 지레짐작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북 팽가의 내공이나 무공에 관해서는 특별히 말씀드리거나 도와드릴게 없습니다. 저도 아는 게 많지 않아서요."
"그런 걸 돈을 주고 살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럼 어떤 제의를 하시겠다는 겁니까?"
"저희 청텐에서 제작하는 영화에 조만간 한번 출연하시는 게 어떨까 해서 말씀드리는 거죠. 만약 주연으로 출연한다면.. 조건을 변경할 용의가 있어요."
여성의 말에 수빈은 빠르게 머리를 회전하여 수지타산과 파급효과 등을 꼼꼼히 따져보았다. 잠시 후 수빈이 입을 열었다.
"제가 쓴 각본으로 제가 감독을 하고 주연을 한다면 고려해 보겠습니다."
"각본에 감독까지 직접 하겠다고요?"
"그렇습니다. 이번에 배급할 영화도 제가 공동 감독으로 올라가 있지만, 사실상 제가 편집을 한 영화입니다. 조만간 단독으로 영화를 찍을 계획이기도 하고요."
"흐응. 검증되지 않은 한국인 감독이라.."
여성이 잠시 고민에 잠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일단 조건은 제가 좀 양보를 해드릴게요. 그리고 배급한 영화의 성적이 어떻게 나오는지를 지켜본 다음, 새로운 영화 제작에 대해서 다시 협상을 하죠. 그때 수빈씨가 전향적인 자세로 협상에 임하는 걸로 약속을 하고요. 어때요?"
"나쁘지 않군요. 그런 조건이라면 제가 약속을 드리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협상이 마무리된 걸 기념해서 건배를 할까요?"
- 쨍.
두 사람은 가볍게 잔을 부딪히며 건배를 하였다. 수빈은 레드 와인이 찰랑거리는 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다짐했다.
'오늘은 내가 완패했음을 인정하지. 지금은 양쪽의 전력 차가 너무 심해서 도저히 수를 낼 방법이 없군. 차후를 기약하는 수밖에.. 두고 봅시다. 팽연숙씨.'
시간이 흘러 수빈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항공기 기내 안에서, 오늘 청톈과 협상했었던 안건들을 노트북으로 간략하게 정리를 하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비교적 개방적인 성향의 홍콩과 상하이에서 우선적으로 개봉을 한 후, 사람들의 반응을 본 다음 중국 전역으로 조금씩 확산해 나가겠다고 그랬지. 괜찮은 작전이야. 상하이 인구만 해도 2,500만이고 홍콩까지 합치면 거의 3,500만이지. 수익 배분도 5:5로 고쳤으니.. 만약에 흥행에 성공만 한다면 대박을 노려볼 수도 있겠어.'
이윽고 정리를 끝마친 수빈은 피곤한 하루를 보낸 탓인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저녁 8시 10분경 인천 공항에 도착한 수빈은 핸드폰을 꺼내어 공항 밖으로 걸어나가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오소라씨?"
[네. 이사님. 오소라예요. 출장 잘 다녀오셨나요?]
"오소라씨가 염려해준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제가 보내드린 문자는 받으셨어요?]
"네. 오늘 영화사 설립을 마쳤고, 내일 건물 구입을 마무리 짓겠다는 문자 잘 받았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재무회계팀 강과장에게 내일 아침 일찍 제가 알려드리는 은행 지점으로 가셔서, 회사 법인 계좌를 만들고 저에게 알려달라고 전해주세요. 그럼 내일 오전 중으로 건물 매입 대금을 포함해서 여유 있게 400억 정도 입금을 해놓겠습니다. 그리고 두 분이 협력하셔서 최대한 빠르게 드림픽처스와 협상을 하셔서, 달빛 영화의 해외 판권 구입 건을 마무리 지었으면 합니다. 늦어도 다음 주 화요일 VIP 시사회 이전에 종결지었으면 좋겠군요."
[명심하겠습니다. 이사님.]
"넷플릭스와 협상할 준비는 잘 돼가고 있나요?"
[잘 돼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준비 중이에요.]
"그래요? 어떤 방식으로 할지 기대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오후 2시에 회의를 열 테니까 다들 그때 제방에서 뵙죠."
[네. 알겠습니다.]
수빈은 전화를 끊고 주차장에서 자신을 대기하고 있던 밴에 올라탔다. 자신이 올라타자 백성철 매니저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홍콩까지 출장 다녀오느라 힘들었지? 집에 갈 때까지라도 푹 쉬어라."
"괜찮아요. 형. 일단 전화 좀 하고요."
수빈은 핸드폰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또 걸었다. 몇 번 신호가 가더니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강이사님?]
"김대리님?"
[네. 홍보부 김대리입니다. 이사님.]
"일전에 저보고 영화사에 취업이 가능한지 알아봐 달라고 한 친구가 있었죠? 영상 전문이라고 했던.."
[네. 이사님. 친한 이모 아들 됩니다. 친척이죠. 염치없이 제가 부탁을 드렸었습니다.]
"그 친구에게 다음 주 수요일쯤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하세요. 그때 영화사 리더 필름(Leader Film)을 제작해서 들고 오라고 전해주세요."
[리더 필름요?]
"네. 영화가 시작할 때 맨 처음 나오는 영상 있지 않습니까. 파라마운트사는 별이 빙글빙글 돌고, MGM은 사자가 막 울부짖잖아요."
[아 예. 어떤건지 압니다.]
"김대리 친척분에게 '수빈 프로덕션' 영화사 로고를 한번 구상해 보고, 리더 필름까지 직접 제작을 해보라고 하세요. 시간이 모자라거나 장비가 없어서 제작이 힘들면, 콘셉트라도 정해서 면접 때 브리핑하라고 전달해 주세요. 만약 결과물이 제 마음에 들면 채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아직 채용이 결정되지도 않았는데 감사하실 필요는 없고요. 박실장에게 맡긴 일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들은 게 있나요?"
[그때 말씀하셨던 서버 구축은 거의 끝나가는 걸로 들었습니다. 하지만 홈페이지 완성은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요? 굳이 예쁘고 멋지게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기본적인 항목들만 집어넣고 최대한 빨리 작업을 마무리 지으라고 하세요. 다음 주초까지는 완성되었으면 좋겠네요."
[알겠습니다. 이사님.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수빈은 전화를 끊고 난 후, 캐리어에서 노트북을 꺼내어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매니저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차 안에서는 좀 쉬지 그러냐? 안 그래도 피곤할 텐데.."
"저도 그러고 싶은데.. 내일도 2시, 5시 연달아 회의가 잡혀 있어요. 틈날 때마다 작업을 해놓지 않으면 일정이 빡빡해서.. 형. 다음 주면 좀 여유가 생길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알았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라."
잠시 후 집에 도착한 수빈은 밤늦게까지 잠을 줄여가며 작업을 하였다.
다음 날 금요일 아침 10시경, 수빈은 집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챙겨 먹고 매니저와 함께 주거래 은행으로 이동했다. 지점장의 지극한 환대 속에 은행 업무를 끝마친 수빈은 회의를 위해 YK 사옥으로 출발했다.
YK에 도착한 수빈은 회의 전 처리할 안건이 있어서 박사장을 만나기 위해 사장실로 올라갔다. 김비서의 안내를 받아 사장실로 들어서니 박사장이 뚱한 얼굴로 수빈을 맞았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얼마 전 법적인 절차가 다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사장 자리에 취임하신 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수빈이 인사와 축하말을 건네며 박사장 맞은편 소파에 털썩 주저앉자, 박사장이 소파의 손잡이를 강하게 몇 번 내리치며 큰 소리로 말했다.
- 팡. 팡.
"강이사. 정말 이러긴가? 우리가 남이야?"
"아니 왜 또 심술이 나신 겁니까?"
"어허. 몰라서 묻나?"
수빈은 차분한 음성으로 박사장을 달래듯 되물었다.
"모르니까 묻죠. 뭐가 불만이신지 말씀을 해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