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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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근 일주일가량을 드림픽처스에서 먹고 자며 하루 종일 편집에만 매달렸다. 편집이 어느 정도 만족스럽게 마무리가 되어 가던 일요일 오후. 수빈은 매니저에게 부탁을 하여 다음 날인 월요일 오전 주요 관계자들 회의를 소집하였다.
일요일 저녁, 오래간만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수빈은 그동안 하지 못한 면도도 깨끗이 하고, 수기집결진도 다시 손을 본 다음 침실로 들어가 숙면을 취하였다.
다음날 아침 개운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수빈은 운기토납법을 행한 후 간단하게 아침을 챙겨 먹으면서 매니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매니저의 연락을 받고 1층으로 내려간 수빈은 밴에 올라탔다.
"어서 와라. 수빈아. 잘 잤냐? 아침은?"
"잘 잤고 아침도 잘 챙겨 먹었어요."
"잘 했다. 그동안 편집하느라 고생 많았어. 네가 편집실에서 꼼짝도 안 하고 있으니까 내가 너무 놀고먹는 거 같더라."
"그런 날도 있어야죠. 연말에 형도 고생 많이 하셨잖아요. 앞으로는 또 바빠질 겁니다."
"차라리 바쁜 게 나아. 넌 고생하고 있는데, 난 차 안에서 빈둥빈둥 놀고 있으니 완전 가시방석이더라."
"아무도 뭐라 안 하니까 쉴 때는 편안히 쉬면서 체력을 비축하세요. 그래야 형이 장거리 운전할 때 제가 맘 놓고 차에서 자기도 하고 쉬기도 하죠."
"그래. 알았어. 그리고 네 말대로 집에 가서 와이프랑 의논을 해봤는데.. 잡소리 하지 말고 강이사님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호통을 치더라고. 그래서 회사에는 이번 달까지만 일하기로 하고 조만간 사표를 내기로 했다."
"잘 하셨습니다. YK에서 매니저로 있는 것보다 제 수행비서로 옮기시는 게 훨씬 더 나을 거예요. 월급도 넉넉하게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저랑 같이 영화사 창업 멤버로 가셔야죠. 그래야 나중에 이사까지 진급도 하고 그러죠."
"이사라니. 그런 건 언감생심 꿈도 안 꾼다. 수빈아. 그럼 이제 존대를 하는 게.."
"거참. 형. 그 이야기는 저번에도 했었잖아요. 나도 숨 쉴 공간이 필요한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몰라도, 둘이 있을 때는 그냥 지금처럼 편하게 지냅시다. 나도 긴장 좀 풀고 살자고요."
"알았어. 와이프가 잘 보필하라고 했는데.. 크리스마스 때 내가 함부로 반말한다고 너 간 뒤에 집에서 무지하게 혼났거든."
"다음에 형 집에 갈 일이 있으면 그때 존대하시면 되죠. 형수한테는 적당히 둘러대세요."
"그래. 가는 동안이라도 좀 쉬어라."
잠시 후 YK 사옥에 도착한 수빈은 사장실로 올라갔다. 자신을 보고 반갑게 인사를 하는 김비서의 안내를 받아 사장실로 들어간 수빈은 박사장을 보고 밝게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박사장님.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수빈을 발견한 박사장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황급히 수빈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수빈을 왈칵 끌어안았다.
"고맙네. 강이사. 내가 강이사를 알게 된 건 정말 행운이야."
"갑자기 왜 또 이러십니까?"
박사장이 수빈의 등을 힘차게 몇 번 두드리더나 팔을 풀며 말했다.
"강이사가 일전에 비전의 방법으로 제조한 약수(藥水)를 건네주면서 그랬지 않은가. 당장은 효과가 없더라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조금씩 효과를 알게 될 거라고.."
"그랬죠."
"크흠. 내가 요즘 집에 들어가면 마누라가 서방님 오셨냐고 버선 발로 마중을 나온다네."
"그래요? 효과를 좀 보시나 봅니다."
"비아그라 저리 가라야. 그리고 무엇보다 몸이 가볍고 활력이 넘쳐. 나이가 들면 잠을 깊이 못 자는데 요즘은 잠도 푹 잘 자고 있다네. 자자. 서있지 말고 이리로 앉게나."
수빈이 자리에 앉자 박사장도 건너편에 자리를 잡으면서 입을 뗐다.
"강이사는 영화를 안 찍고 이것만 내다 팔아도 떼돈을 벌 거야. 내가 장담하지."
수빈은 박사장의 말에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대량 생산이 가능하면 비전이 아니죠. 지금 이상의 물량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이 약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 박사장님과 허이사님도 더 이상 공급받지 못할 겁니다."
"걱정 말게나. 둘 다 입 꾹 다물고 있을 테니까. 이걸 누구랑 나눠 먹겠나. 이 좋은 걸.."
"믿고 있겠습니다. 그럼 이제 일 이야기를 좀 할까요?"
"그러세나."
"내일 오전에 제법 많은 사람들을 초대해서 정식적으로 영화 시사회를 열 겁니다. 수정 편집이 어느 정도 다 끝났거든요. 오실 수 있으시면 김비서랑 같이 오시죠. 초대 안 했다고 또 삐지지 마시고."
"내가 삐지긴 뭘 또 삐졌나. 알겠네. 내일 참석하지."
"그리고 YK에서 사람을 몇 명 빼가야겠습니다."
"영화사로 말이지? 누구누구를 데려갈 생각인 건가?"
"일단 제 매니저 일을 보고 있는 백성철은 확정이고요. 법무팀 조대리랑 재무회계팀 강과장과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문제가 되겠습니까?"
"문제? 그럴 일 없네. 어차피 이 회사나 새롭게 세울 영화사나 다 자네 회사가 될 거 아닌가? 일단 영화사로 갔다가 나중에 통합을 하면 다시 또 만나 게 되는 거지."
"그럼 스카우트를 해가도 별문제가 없는 걸로 알겠습니다."
"그러게나. 아. 그리고 며칠 내로 법적인 절차가 다 끝날 걸세. 내가 정식으로 사장 자리에 취임하고 강이사가 이사로 등재될 거야."
"알겠습니다."
"자네 방은 어디로 줄까?"
"방요?"
"명색이 대주주에 등기 이산데 개인 집무실이 있어야지. 내 방 건너편이 어떤가?"
"사장님이랑은 좀 떨어지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어허. 떨어지긴 어딜 떨어지나. 내가 적당히 알아서 만들어 주겠네."
수빈은 사장실을 나와 회의실로 내려갔다.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재무회계팀 강과장이 똥 씹은 얼굴로 힘없이 앉아 있었고, 오소라와 법무팀 조대리 둘이서 생기발랄한 얼굴로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쯧. 커플 염장질에 강과장이 맛이 간 것 같은데..'
수빈을 발견한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하였다. 수빈도 인사를 건네며 자리에 앉으면서 물었다.
"강과장님 안색이 많이 안 좋습니다. 제가 부탁드렸던 일이 잘 안 풀리나 봐요?"
수빈의 질문에 강과장이 옆자리에 앉아있는 커플을 한번 째려본 후 입을 열었다.
"자꾸 절 괴롭히는 인간들이 있어서요. 그리고.. 일도 좀 예상을 벗어나서 힘이 안 납니다."
"어떤 게 예상을 벗어나서 강과장님이 힘이 안 나실까?"
강과장이 자세를 바로잡으며 업무 모드로 전환하였다.
"이사님이 말씀하신 건물 구입 건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랑 조대리가 건물주를 만나기 전에 조사를 제대로 하고 갔었죠. 그래서 나름 가격을 대폭 깎을 수 있었습니다."
"얼마까지 내려갔나요?"
"275억에서 25억을 깎아서 250억으로 합의를 봤습니다. 사실 좀 더 강하게 나가면 더 깎을 수도 있었는데, 괜히 그러다 일이 어그러지기라도 하면 문제가 될 거 같아서 그 정도 선에서 멈췄습니다."
"잘 하셨네요. 근데, 25억이나 깎았으면 알바비를 두둑이 받으실 건데 왜 힘이 안 날까요?"
수빈의 물음에 강과장이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희도 처음엔 대박이라고 다들 신을 내고 난리가 났었죠.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엉뚱한 곳에서 펑크가 났습니다. 오소라씨가 잡아 놓은 건물 수리 및 용도 변경에 소요될 예산이 많이 부족하더라고요. 아무래도 그쪽으로 전문가가 아니다 보니.."
"얼마나 부족하던 가요?"
"일단 가장 먼저 디지털 영사기 구입가격을 잘못 잡아놨더군요. 보통 한 대당 저렴한 게 3억 정도 하고 최신형으로 좋은 건 4억까지 나가는데, 그걸 대당 1억 정도로 잡아놓는 바람에 10억에서 15억 가량의 예산이 추가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강과장이 생각을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메인 관을 연극이나 뮤지컬, 오케스트라 공연까지도 할 수 있는 최고급 시설의 다용도 관으로 하고 싶다고 적어 놨는데, 그러려면 추가로 들어가야 할 무대 장치와 음향 장비, 조명 등등 부대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오소라씨가 원하는 수준으로 만들려면 어림잡아도 10억 가까이 들어갈 겁니다. 그것까지 다 고려하면 원래 예산에서 별로 남는 게 없더라고요."
수빈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서 힘이 안 나셨구나. 그럼 디지털 영사기 구입에 추가적으로 들어가는 비용은, 건물 수리 비용이 아니라 장비 구입비에 속하니까 이번 일에서 빼죠. 그럼 다들 힘이 나시겠죠?"
수빈의 말에 세 사람이 기뻐서 고함을 지르며 날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수빈은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스카우트 제안입니다. 제가 세울 영화사에 두 분을 스카우트하려고 하는데 다들 생각이 어떠신지 궁금하네요."
수빈의 말에 강과장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일단 제안을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조건은 이사님이 어련히 알아서 잘해주실 거라 생각해서 지금 당장 물어보지는 않겠습니다. 이직에 관련된 건 지금 바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겁니까?"
"강과장님께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드리죠. 이번 달 중으로만 답변을 주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신중하게 생각해서 결정이 내려지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수빈은 조대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조대리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저도 이번 달 말까지 생각을.."
- 뻐~억!
갑자기 탁자 아래에서 뼈가 부러지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정강이뼈라도 까였는지 조대리가 입을 쩍 하고 벌리고 입만 뻐끔뻐끔하였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조대리의 모습을 지켜보며 수빈은 속으로 혀를 찼다.
'쯔쯔. 오소라씨 지금 모습만 보고 조신하고 조용한 성격의 여자라 생각하고 접근했겠지. 그러다 큰 코 다치지. 어쩌겠어.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판 것을..'
"조대리님은 어떡하실 건가요?"
다시 묻자 조대리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영화사로 옮기겠습니다. 이사님."
"옮기시면 직급상 오소라씨 아래입니다. 앞으로 오소라씨의 명령에 잘 따라야 한다는 걸 충분히 인식하고 계시는 거죠?"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조대리님은 이번 달까지만 YK에서 일하시는 걸로 하시고 신변 정리를 해두세요."
수빈의 말에 조대리가 울며 겨자 먹는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난 수빈은 YK를 나와서 드림픽처스로 향했다. 드림픽처스에 도착해서 편집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장감독과 서감독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의자에 앉아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수빈을 발견한 두 사람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비치적비치적 거리며 걸어와 수빈을 안으려 들었다.
'핏발 선 눈에 걸음걸이까지.. 영락없는 좀비로군.'
자신을 끌어안은 두 사람을 다독인 후 수빈은 자리에 앉은 다음 물었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도대체 영화를 몇 번이나 보신 겁니까?"
서감독이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제 오후부터 난 6번, 저 인간은 9번, 10번 정도 봤을 거야. 난 그래도 잠깐 눈이라도 붙였지만 장감독은 잠 한숨 안 잤을 걸세."
"대단하십니다. 똑같은 영화를 계속 보는데 안 지겹던가요?"
장감독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는지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볼 때마다 새롭고 재밌더군. 내가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니 도저히 눈을 못 떼겠더라고."
수빈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다행이군요. 제가 봐도 영화가 잘 빠진 거 같긴 했습니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내일 오전에 정식 시사회를 열 건데 손봐야 할 곳이 있던가요?"
"잘못된 곳이 있더군."
수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잘못된 곳이 있다고요? 어디가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자네 이름이 공동 감독으로 안 올라가 있어."
"아.. 앞부분 자막은 고쳤는데 그 부분은 미처 신경을 못 썼네요. 저도 사람인지라.. 뭐 실수를 할 때도 있는 거죠. 조금 있다 바로 수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외는 없습니까?"
"없었네. 내가 보기엔 완벽해."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시사회에 참석할 사람들에게 연락은 다 하셨나요?"
"다 했네. 특히 자네가 부탁한 일전의 시사회에서 두 편을 본 것 같다고 감상평을 적은 그 친구는 꼭 참석하라고 했네."
"잘하셨습니다. 그럼 제가 수정 작업을 하고 최종 마무리 작업을 할 테니까, 두 분은 일단 주무시러 가세요. 그러다 쓰러지겠습니다."
두 사람을 편집실에서 쫓아보낸 뒤 수빈은 최종 수정 작업을 하며 편집을 최종적으로 마무리 지었다.
잠시 후 수빈은 의자에 느긋하게 등을 기대어 앉아서 자신이 편집한 영화를 감상하고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수빈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좋군. 내가 봐도 나쁘지 않아. 흥행 성적을 제법 기대해봐도 될 거 같은데."
수빈은 최종 완성본을 USB에 담아서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한 수빈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또 다른 작업을 하기 위해 컴퓨터 전원을 켰다.
'시간 날 때 미리미리 작업을 해봐야지. 이번 영화를 예행연습으로 생각하면 될 거야.'
컴퓨터가 켜지자 수빈은 정신을 집중하고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수빈은 밴을 타고 시사회가 열리는 드림픽처스로 이동하였다. 시사회장으로 들어가니, 이전보다 2배가 족히 넘는 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서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장감독이 사람들 앞으로 걸어 나와 인사말을 하였다. 장감독이 짧게 인사말을 하고 물러나자 사람들의 박수소리와 함께 조명이 하나둘 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정면에 걸려있는 커다란 스크린에 멋들어진 필치로 '달빛 속의 호위무사' 영화 제목이 한자씩 한자씩 큼지막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가 쓴 글씨지만 정말 잘 썼군.'
속으로 만족스러운 감상을 토한 수빈은, 비록 공동 감독이긴 하지만 자신의 입봉작이 마침내 관객들에게 냉정한 평가를 받는 시간이 도래하자,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키며 부지불식간 자신의 현재 심경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alea iacta est."
주사위는 던져졌다며 수빈이 중얼거리는 그때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