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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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오소라의 발표가 끝난 뒤 오소라를 밴에 태우고 YK로 함께 이동했다. 사장실로 올라간 수빈은 박사장에게 오소라를 소개하고 같이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김비서의 맑고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 강이사님이 말씀하신 두 분이 도착했습니다.
사장실 안으로 재무회계팀 강과장과 법무팀 조대리가 들어섰다. 한 차례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 지나가고 수빈이 입을 열었다.
"제가 김비서에게 두 분을 사장실로 불러 달라고 부탁했어요. 지금 여기 계신 오소라씨가 제가 세울 영화사가 입주할 건물을 구입하려고 합니다. 그 일에 대해서 두 분이 도움을 좀 주셨으면 합니다."
재무회계팀 강과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희가 어떤 걸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오소라씨가 아직 현장 실무 경험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회계 쪽으로는 강과장님이, 법적인 문제들은 조대리님이 도와주시면서 오소라씨를 지도편달해 주셨으면 합니다. 각자 하시는 일들이 바쁜 건 알지만 당분간 알바를 하나 한다 생각하시고 좀 도와주세요. 오소라씨?"
"네. 사장님."
"오소라씨가 생각하는 소요 예산이 얼마 정도라고 하셨죠?"
"현재 저쪽에서 부르는 건물 구입 비용이 275억,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수리하는데 드는 비용이 대충 15억 정도 나올 걸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어림잡아 290억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수빈이 세 사람을 둘러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290억을 원금으로 두고 오소라씨와 두 분이 협력해서 건물을 구입하고 수리까지 다 끝낸 금액을 빼겠습니다. 그런 다음 남은 차액에서 각각 5프로씩을 보너스로 드리겠습니다. 알바비라 생각하시고 성심성의껏 도와주셨으면 좋겠군요."
수빈의 말이 끝나자마자 계산이 빠른 강과장이 눈을 반짝이며 급히 물었다.
"그럼 10억을 남기면 두당 5천만원씩 보너스를 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강과장의 물음에 수빈이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1억당 5백이니까 그렇게 되겠군요. 그 정도는 드려야 알바할 맛이 나지 않겠어요? 단, 돈을 남기기 위해서 일을 허술하게 진행하면 안 되겠죠. 뭐 그럴 분들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잠시 후 강과장과 조대리가 1분 1초가 아깝다는 듯 오소라를 양쪽에서 들다시피 해서 황급히 사장실을 빠져나갔다.
둘만 남게 되자 박사장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강이사. 보너스가 너무 과한 거 아닌가? 건물주가 첨에 부르는 가격이야 당연히 매입자가 깎을걸 예상하고 부른 가격일 테지. 5프로만 깎아도 15억이야. 그럼 보너스만 해도 2억이 넘어. 지금 강이사 수중에 돈이 좀 있다고 해서, 그런 식으로 막 쓰고 다니면 금방 다 소진될걸세."
"저도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너무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그 정도는 지급해야 오소라씨가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겁니다. 잘 키워서 잘 써먹으려면 제대로 밀어줘야죠. 그리고.. 돈 많은 든든한 동업자가 제 눈앞에 있지 않습니까."
"허어. 이거 내 입을 그런 식으로 막는 건가? 알겠네. 자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 정 안되면 자네 말처럼 내가 밀어줘도 되는 거고."
박사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말이야. 오소라양이 강이사 말과는 많이 다르던데? 내가 볼 때는 아주 얌전하고 평범한 아가씨처럼 보이더라고."
박사장의 물음에 수빈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건 사장님이 오소라씨의 예전 모습을 못 보셔서 그런 겁니다."
"그런가? 내 눈에는 아주 조신한 아가씨로 보이던데. 강이사 생각에는 오소라가 예측한 일들이 정말로 일어날 거로 보는가?"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봅니다. 하지만 유비무환(有備無患) 아니겠습니까?"
"이번 일은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 봐도 수지타산(收支打算)이 안 맞아. 지금 우리랑 BJ랑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지금 한국에 널린 게 영화관일세. 서울에만 500개 가까이 된다고. 특히 멀티플렉스가 등장하면서부터 최근 몇 년간 스크린 수가 급증해서 2천 개를 훌쩍 넘었어. 오소라가 생각하는 그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아."
"저도 사장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건 수익을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에요. 위기가 닥쳤을 때 생존을 위한 비상 탈출구를 만드는 작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돈이 아깝다고 탈출구를 만들어 두지 않는다면, 정작 위험한 순간에 헤쳐 나올 방법이 없어집니다."
"이것 참.. 영화사를 시작도 하기 전에 쓸데없는 곳에 너무 많은 돈을 쓰는 것 같아서 걱정이야."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아. 그리고 내일 오전에 혹시 바쁘십니까?"
"왜 그러는 건가?"
"내일 오전에 제가 출연한 [달빛 속의 호위무사] 비밀 시사회가 있어서요. 아직 완성본이 아니라서 극소수의 사람들만 참석할 겁니다."
수빈의 말에 박사장이 기대 어린 눈빛으로 즉답했다.
"그래? 내일 오전에 특별히 잡혀있는 일은 없어. 한가하다네."
잠시 후 수빈은 자신을 매섭게 째려보는 박사장을 등 뒤에 남겨두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장실을 나섰다.
미리 잡혀 있는 행사를 소화하기 위해 밴을 타고 행사장으로 이동하는 도중 수빈이 매니저에게 말했다.
"형. 내일 10시까지 드림픽처스로 가기 전에 사람들 좀 픽업해주세요."
"픽업?"
"네. 내일 시사회에 갈 사람들 픽업을 해서 같이 가야 되니까 동선을 미리 알아보세요."
"알았어. 누구누구 데리고 가면 되는 거야?"
"제가 전화번호를 드릴 테니까 형이 직접 연락하셔서 주소를 물어보세요. 저도 그분들이 어디 사는지를 몰라요. 형이 물어보고 동선을 적절히 짜셔서 시간 맞춰 절 데리러 와 주세요."
"오케이. 오전에 시사회까지 있으면 내일도 정신없이 바쁘겠다."
"그러게요. 연말 시즌이라 행사에 시상식에.. 시상식이라도 없으면 그나마 나을 건데."
"그래도 올해는 시상식에서 상을 많이 받잖아. 그걸로 위안을 좀 삼아봐. 그리고 이제 5일만 지나면 새해다. 그럼 좀 한가해질 거야. 좀만 더 참아라."
"별수 있나요. 참아야죠."
그날 밤 수빈은 스케줄을 모두 소화하느라 자정이 넘어 집에 도착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수빈은 샤워를 한 후 곧바로 침실로 들어가 수면을 취하지 않고, 서재로 들어가 자신이 쓴 영화 대본을 꺼내 들었다.
'사장님은 그런 일이 없을 거라 예측하지만 세상 일은 모르는 거지. 오소라가 유비무환을 위해 건물을 구입하듯 나도 나름대로 준비를 해놔야겠어. 수성(守城)만 하고 있는 건 내 취향이 아니야.'
2시간 정도 대본 수정 작업을 하던 수빈은 시계를 보고선 대본을 덮었다.
'단기간에 끝날 작업이 아니지. 오늘은 여기까지만.'
다음 날 아침 수빈은 매니저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1층으로 내려갔다. 밴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벌써 두 명의 여인이 밴 안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사장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강이사님."
수빈도 밝은 얼굴로 인사를 건네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호칭은 이사로 통일하죠. 정신없네요."
수빈의 말에 오소라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이사님."
그때 밴에 타고 있던 김비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제 이사님 가시고 나서 사장님이 하루 종일 투덜거리셨어요. 이사님이 자기를 속였다면서.. 사장님 빼고 우리들끼리만 시사회 보러 간다고 얼마나 투덜거리시던지."
"나이 먹은 양반의 감상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젊고 파릇파릇한 20대 여성분들의 객관적인 평가와 감상이 필요한 거죠."
수빈의 대답에 김비서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이사님 덕분에 평일날 오전에 땡땡이도 치고 영화도 보고 너무 좋아요."
그때 오소라가 살짝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근데 이사님. 전 영화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 괜찮을까요? 친구들이랑 가끔 보러 다니기는 했지만, 제가 영화에 관심이 많아서 따로 공부를 하거나 그런 게 아니라서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보시고 재밌다, 재미없다 정도로만 평가하시면 됩니다. 영화에 관련된 전문가들은 그 자리에 차고 넘치니까 그런 건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그보다.. 어제 강과장이랑 조대리하고는 이야기를 많이 나눠보셨나요?"
수빈의 질문에 오소라가 얼굴을 펴고 생기발랄한 목소리로 어제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네. 그럼요. 두 분다 얼마나 친절하시던지. 제가 모르는 걸 하나하나 꼭꼭 집어서 자세하게 가르쳐주시더라고요. 특히 조대리님이 제가 법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옆에 딱 붙어서..."
수빈은 오소라의 이야기를 한참 동안 듣고 있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두 사람이 친절하게 가르쳐준 거야 큰 돈이 걸려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 너무 지나치게 밝은데.'
순간 수빈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그새? 하루 만에?'
수빈은 오소라에게 슬쩍 질문을 던졌다.
"조대리가 옆에 딱 붙어서 친절하게 잘 가르쳐 주셨나 보군요?"
수빈의 질문에 오소라가 오월에 피어난 장미처럼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얼마나 자상하게 가르쳐 주시던지 귀에 쏙쏙 들어오더라고요. 특히 계약이 끝난 뒤에 처리해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걸 하나씩..."
수빈은 신이 나서 열심히 떠들고 있는 오소라를 보며 속으로 탄식을 터뜨렸다.
'하루 만에 눈이 맞았군. 회사를 세우기도 전에 연애질부터 시작이라니.. 이걸 어떡한다?'
잠시 후 드림픽처스에 도착한 일행들은 안으로 들어갔다. 장감독과 남자 직원 한 명이 입구에서 일행을 반겼다.
"오서 오게나. 강감독. 이거 아름다운 분들과 같이 오셨군."
"안녕하세요. 장감독님. 아침부터 수고가 많으십니다."
"수고는 무슨.."
장감독이 입구에 서있는 직원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정대리. 여기 아름다운 숙녀분들에게 펜이랑 메모지를 드리고 시사회장으로 안내를 해주게나."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손님분들은 절 따라오시죠."
둘이 남자 수빈이 밝게 웃으며 장감독에게 물었다.
"이거 장감독님 얼굴이 환하신 거 보니 영화가 잘 빠졌나 봅니다."
"그게 다 강감독 덕분이지. 어젯밤에 작업이 끝난 다음 우리 직원들 몇 명하고 시사회를 간단히 했는데 평이 나쁘지 않았어. 다들 재밌다고 난리야. 특히 강감독이 작업한 후반부 하이라이트가 아주 마음에 든다고 하더군. 호평 일색일세. 그러니 내 얼굴이 안 좋을 리가 있겠나."
"그런가요? 저도 기대가 아주 큽니다. 더 오실 분들이 있으십니까?"
"서감독이 이교수랑 같이 온다고 했는데 아직 도착을 안 했어. 이교수가 자기 제자들이 음악 작업에 참여 했다고 꼭 오고 싶다고 졸랐다고 하더군. 곧 도착할 거야."
"대예종에 계시는 분이 오늘 시사회를 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죠?"
"서교수가 흘렸겠지. 뻔하지 않은가. 자기 제자랍시고 뭐라도 하나 더 챙겨 주려고 그러는 거지. 왜? 강감독은 이교수가 불편한가?"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시사회장에 가 있겠습니다."
잠시 후 수빈은 시사회장에 앉아서 [달빛 속의 호위무사] 시사회를 보고 있었다. 영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영화 속으로 깊이 빠져드는지, 시사회장에 참석한 특별 손님들의 탄성, 한숨, 비명들이 곳곳에서 시시때때로 터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수빈의 얼굴은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잠시 후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자 시사회에 초대된 손님들의 박수 소리가 힘차게 터져 나왔다. 사람들의 반응이 마음에 드는지 장감독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사람들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마이크를 든 장감독이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재미있게 잘 보셨습니까?"
- 네. 아주 잘 봤어요.
- 한 번에 두 편을 본 것 같아요.
- 너무너무 재밌어요.
- 돈이 안 아까울 것 같아요.
- 대박날 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들 귀찮으시겠지만 방금 보신 영화의 감상문을 적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 직원이 나눠준 메모지에 현재의 직업, 나이대를 간략히 작성해 주시고 감상평을 적어서 뒤쪽에 놓여 있는 통에 넣어주시고 가시면 됩니다. 아직 최종 편집이 끝난 게 아니라서 적어주신 내용들을 참고해서 보다 더 좋은 영화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늘 바쁜 와중에 이렇게 참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감독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이 다시 한번 박수를 쳤다. 그리고 자신들이 들고 있는 메모지에 열심히 감상평을 쓰기 시작했다.
수빈도 짧고 간략하게 감상평을 적었다.
- 엉망진창인 영화임.
잠시 후 초대 손님들은 모두 다 떠나고 핵심 인물들만 회의실에 모였다. 장감독, 서감독, 수빈, 이렇게 세 사람만 회의실에 앉아 있었고 탁자 위에는 초대 손님들의 감상평을 담은 네모난 통이 올려져 있었다.
기분이 좋은지 연신 웃고 있는 장감독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나랑 인사하면서 다들 재밌다고 난리야. 조짐이 좋아."
서감독이 덩달아 흥이 오른 얼굴로 대꾸했다.
"나도 마찬가질세. 다들 음악도 좋고 영화도 아주 맘에 든다고 하더군."
장감독이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로 수빈에게 물었다.
"강감독. 강감독은 어떻게 봤나?"
장감독의 질문에 수빈이 허리를 곧추세우며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인 영화이더군요. 눈뜨고 차마 못 봐줄 정도로 엉망진창인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 순간 회의실 분위기가 삽시간에 바닥으로 추락했다.